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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4/12
    습작 - 너를 두고 4
    외딴방
  2. 2011/04/12
    습작 - 너에게 3
    외딴방
  3. 2011/04/11
    습작 - 너를 위하여 2
    외딴방
  4. 2011/02/20
    습작 - 너와함께 1
    외딴방
  5. 2010/09/30
    창작중-남자, 그리고 1
    외딴방
  6. 2010/09/28
    창작중-우리 함께 이불을 털어요.
    외딴방
  7. 2010/09/28
    창작중-사랑, 현신하다.(2)
    외딴방
  8. 2010/09/28
    창작중-혜정의 사랑
    외딴방
  9. 2010/09/27
    창작중-열애중 2
    외딴방
  10. 2010/09/27
    창작중-열애중 1
    외딴방

습작 - 너를 두고 4

산을 보고 온 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녀와 그녀의 오랜 친우가 다투었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랬을까.

그다지 추측하기 어렵지는 않으나 상황이야 어찌됐든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듯.

 

" 내가 왜 ! "

그녀는 모질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안다는 것을 쟝은 처음 알았다. 정말로.

바닥 깊이 감정이 깔려 있는. 불만? 비난? 원망?

그런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그걸 풀어내기보다 이미 덮었다는 감이 확연한, 이미 거절과 거부로 의사화된... 결론?

" 한번 하자고. "

쟝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다시 한번 확인사살이 필요하다는 듯, 천천히 또박또박.

" 싫어. "

귀로 듣기 전에 입모양만으로도 벌써 다 들은 양 기다렸다는 듯, 바로 치고 들어오는 대답.

" ... ... "

그녀와 싸워야 할까? 쟝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는 섭섭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는 게지. 알지만.

" 오랜 만에 만나서 왜 우리가. "

" 왜 이런 얘기 밖에 할 말이 없어? "

뭔 소리냐...아침부터 점심 지나 오후 세시가 넘어가는 지금까지 계속...

" 난 둘이서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구. 따로...낮에 말고, 밤에 술 마시면서. "

그래...밤에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넌 나올 수 있다 했는데, 내가 그럴 수 없었지. 매일 매일을 내버려둔 아이들을 또 밤에까지 방치할 수 가 없어서. 쟝은 변명을 했다, 속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그녀의 표정에는 판정패를 인정한다는 듯 비애가 서려있다.

" 나도 그러고 싶지만. "

" 네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 이해하고 또 인정해. "

쟝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여기서 한마디 더 하면, 정말 끝장이다. 쟝은 재빨리 판단했다.

그녀가 마주 바라보고 있지 않으므로 쟝은 태연을 가장하고 몸을 돌렸다. 잠시 텀을 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 어디 두었지. 쇼핑백 안에 담아 두었는데. "

굳이 집까지 데리고 들어온 표면상의  이유였던 아이들의 작아진 신발과 옷가지, 놀잇감들을 챙기는,  그녀가 혼자 따라 들어온 본래의 이유였던 둘째에게 물려줄 아이용품들을 가지고 가는 일쪽으로 쟝은 주의를 전환했다.

" 여기 있다. 들고 갈 수 있겠어? "

" 무거워? "

" 무겁지는 않지만 좀 부피가. "

" 괜찮네, 뭐. "

혜정은 별로 크지도 않은 쇼핑백을 가지고 왜 그러나. 하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쟝의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얼굴과 마주치자 미끄러지듯 시선을 피했다.

안면근육이 굳어져있다는 것이 쟝,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 그럼 갈께. 오늘 즐거웠어. "

" 그래. 잘 가. "

그녀는 큰 길을 향해 걸어가며 반쯤 돌아보며 또 인사했다.

" 다음에도 이런 스케쥴로. 둘레길 다음 코스, 응? "

" 응, 그래. "

안녕. 하며 손을 들어보이는 그녀. 마주 손을 들고 인사할 수 밖에 없었다. 쟝은 이게 뭐람. 하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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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너에게 3

산은 너울지고 길은 이어진다, 구비구비.

아직 덜 여운 꽃망울이 소슬한 바람 속에서도 고개 내어민다.

흐뭇한 미소를 스리슬쩍 접어두고 혜정은 저만치 앞서가는 일행과의 거리를 가늠해본다.

음, 한 스무 발짝 정도? 땡기면 금세 어깨를 부딪끼겠으나 걸음을 재게 놓아 이 흥을 깨고 싶지 않다.  

- 네게 말 붙이고 답을 들으려니 자연 목청이 커지는 구나.

혜정은 몇 마디를 소리 높여 말하여 보고 가는 귀가 먹었는 지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 하는 귀로 대답을 알아먹지 못 하는 몇 번의 텀을 놓치고 나서는 더 말 나누기를 포기하였다.

- 제가 둘레길을 걷자 하여 이리 나섰건만...

혜정은 서운함이 가슴 안쪽으로 슬며시 자리잡고 있었으나 채 자각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위안하였다.

- 네가 곁에 없어도 이 산이 내게 말을 거는 구나.

들과 차고 마른 흙이 발바닥 아래에서 반갑다 하고 있으니.

하늘과 처연히 낮게 내려앉은 구름들이 점점 잿빛을 띠어가니.

- 내 마음을 닮았구나. 아니, 내 마음을 담았구나.

혜정은 초봄의 물색으로는 너무나 채도가 낮은 암벽들의 솟을문을 바라보며  북한산 자락을 둘레둘레 따라 걸었다.

- 저 이가 내 걸음 늦은 것을 알던가 모르던가 아예 생각조차 놓았는가.

원망의 념이 꾸물거리나 동하지는 않는다. 감정을 만드는 것은 피곤한 일이려니.

미리 걱정했던 것보다 코스는 짧았고 한 구간을 다 가지 않고 중간치기로 내려오자 하는 대로 따라보니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들이 텃밭 농사를 했던 곳이 아닌가.

" 여기서 분양을 받아 1년 농사를 지어 보게. "

익숙한 표정과 이미 어깨 디밀어 고랑이라도 패어볼 품새인 쟝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다.

금방 다시 고개 돌리고 저만치 밭 두덕과 두덕 사이에 앉혀진 작은 오막집을 살피는 쟝이 중얼거린다.

" 작년에 비해 밭을 넓혔네.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값은 안 올렸나 이거..."

팻말 꽂힌 웃자락에서 한길 가의 공터까지 텃밭의 경계를 물려놓은 것을 보면서 빈 자리가 별로 없다. 하는 쟝.

서둘러 오막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간에 손님을 세워 둔 채 장부를 뒤적이는 여주인과 몇 마디를 나누고는 돌아나온다. 한 손에 팻말 하나와 매직을 들고.

" 자리 좀 찾아 봐. 이 쪽으로 들어 와서. "

앞장 서서 텃밭의 큰 울타리를 돌아 문으로 터 놓은 곳으로 찾아들어가는 쟝의 뒤를 시원스럽게는 아니나 짜증내지도 않고 곧장 따라들어갔다, 혜정은.

- 음...내겐 힘든 일인데.

혜정은 텃밭 농사가 아니라 이 비탈지고 울퉁불퉁한 밭둑길을 걷는 것에 대해 그리 생각하며 그래도 테 안내고 어정어정 따라들어갔다. 길고 좁다란 밭두덕을 지나 굳이 언덕배기 아래까지 쑤욱 들어가는 쟝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 나는 문외한이나 저이는 베테랑이니 무슨 이유가...

" 여기 어때? "

쟝이 가리키는 곳은 언덕배기 바로 앞의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텃밭을 만든 이 곳의 지형 자체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기는 하였으나...

" 이 앞에 평상도 넓게 있으니 쉬기도 좋지 않아? "

그러고 보니 텃밭이 끝나는 언덕배기 밑으로 채 한 평의 경계를 지우지 못 한 세모꼴의 땅이 남아있었고 거기에 외부수도 하나와 함께 평상 두개가 나란히 앉혀져 있었다.

" 어, 그래. 그러네. "

혜정은 비탈진 곳이라도 햇볕이 잘 들어서 안쪽까지 들어왔냐고 묻다가 말고 금방 희색을 보였다. 보아하니 새로 텃밭을 넓히느라 주인장이 경계만 지웠을 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비죽비죽 내밀어진 밭뙈기들에 당장 가래질부터 해야할 판이나, 혜정은 손에 흙 묻힐 생각은 전혀 해 보지도 않은 채, 평상에 앉아 언덕의 그늘이 있는 동안 시원한 참외를 깍아먹을 생각을 먼저 떠올리며 반색을 하였다.

" 아니, 햇볕은 뭐 저 아래 쪽도 충분히 들어오는데. 이 밭둑길 걸어들어오기도  만만챦네. 저 한길 가까운 쪽으로 해야 할까? "

쟝의 농사인데, 제가 이리 두던 저리 두던 내가 뭔 상관이냐. 하는 맘이 들었으나 친구된 도리로 함께 고민을 해 주었다, 혜정은.

" 아, 그래? 글쎄, 일하다가 평상에 앉아 쉬기도 하고 그럼 좋을 것 같은데. "

" 음, 그렇긴 한데, 쉬는 거야 뭐 이쪽에서 일하다가 저쪽으로 모이자 해서 가 쉬면 되는 거고. 그 정도  쉬어가며 할 것도 없는데, 길에서 쉬이 들어와 얼른 풀 좀 뽑고 하다가 금방 내려가곤 할 것 같아서. "

쟝은 다시 길을 돌아 내려가 아랫쪽 밭을 살피더니 팻말을 꽂아 넣고 아이들 이름을 적어 둔다.

" 주인한테 정했다고 해야지. 또 다른 사람들이 자꾸 팻말 꽂으려 든다구 얼른 찍어두라 하더라구. "

결국 농사지을 땅을 결정하면서는 혜정에게 의견은 구하지도, 다 듣지도 않고 쟝은 또 앞장 서서 달려 나갔다.

- 그래, 저의 아이들과 함께 지을 텃밭 농사이니.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

혜정에게도 한 평 임차하여 애들 데리고 와서 텃밭 가꾸기를 하라고 재차 권하는 쟝을 바라보면서 혜정은 글쎄. 하면서 자꾸 말끝을 흐렸다.

" 자신 없어. 집에서 화초 하나도 못 가꾸는데, 언제 여기까지 애들 끌고 와서 농사를 짓겠어. 내가..."

" 내가 왔을 때 같이 물도 주고 다 할께. 이런 게 있어야 자꾸 오게 된다니까. "

쟝은 얼마 전부터 자꾸 말하고 있다.

- 이 동네로 다시 돌아 와. 지척에 있어야 오가며 들여다 볼게 아니야. 너 하나 보러 매일 택시 타고 오락가락 할 수도, 할 시간도 없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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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너를 위하여 2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말한다.

- 네가 하지 못 한다는 것을 알아.

옆얼굴을 보인 채, 괜찮아. 하고 말하는 듯 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 쟝, 네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 싱글맘이고 연계가 많은 친족들이 주변에 있고 네가 할 수 만 있다면 돌봐드리고 싶은 홀어머니들도 있지. 네가 생계지책이자 의미를 갖고 있는 낮의 직업도 있는데, 주변을 챙기고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애착할 만한 여가를 내기는 어렵고 또 가능하지도 않지.

 

" 오히려 내가 그애를 챙겨주어야 해. "

그녀가 그렇게 지칭하는 것을 보자, 이제 거의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진의 머리를 스쳐갔다.

" 근 열흘을 아이들을 챙길 시간이 없어 '방치'하고 있다고 말하기에 내가 봐줄까? 했지만... "

그녀는 자신이 그럴 필요가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한 번 말해봤다고. 역시나 지척에 사는 친지들이 있으니. 하는 대답을 들었다고.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가족들을 질투의 감정으로 표상하게 된 것은.

" 같은 동네에 살면서 자주 왕래하고 싶었지만 역시 같은 동네에 사는 친족들이 있어서. "

한때는 같은 건물의 아래위층으로 살면 누구보다 더 자주 내왕하며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 나아가 한 집에서 살고 싶어하기까지 했었지. 혜정, 너는.

진은 그녀가 마저 하지 않은 말을 혼자 들은 듯이 생각을 이어갔다.

- 네가 그런 순진한 꿈을 꿀 때에 쟝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 그애는 자신에게 손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다 잡아주느라고, 특별히 나한테만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 왜 그러겠어. 내가 그에게 무어라고. "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 그가 자신을 만나 좋았던 것이 무엇이었을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지만.

" 게다가 그애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야. 그 자신도 말했지만. 타인에게 자기를 투영하거나 혹은 의존하지 않으니까. 상대방을 인정하고 적절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선린우호적으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지. "

" 적절하다는 표현은 모호한데? "

진은 마치 상담자라도 되는 양, 내담자에게 생각을 명료화시켜보라고 주문했다.

" 예를들면, 현성은 짤렸어. "

" 뭐라고? "

" 현성이 지지부진하게 하소연만 계속하면서 제 이기심을 숨기는 것을 눈치챘을꺼야. 그애는 현성에게 자신으로서는 해 줄 말이 없다고 말했대. 그래서 현성은 더 이상 그애에게 상담하는 걸 포기했고. "

혜정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꾸밈없이. 솔직하게.

" 현성은 어째서 그 애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고 객관적인 조언을 잘 해 주는가고 내게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건 그애의 탓이 아니라 현성이 잘못된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뭐...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거지. 좀 비겁하기도 하고, 부르조아적 이데올로기에...속물적이라서. "

그녀는 하하. 하고 웃는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경멸한다는 표현을 할 때에는 늘 그렇듯이.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 적어도, 물론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애에게 있어 현성보다 내가 더 호감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지. 뭐..."

금방 다시 풀이 죽는 그녀.

" 주변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더 그런 건 아니지만. "

진은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 특별해. 특별히 더 자주 연락하고 다른 친구들을 거의 못 보고 있어도 너만을 달을 넘기지 않고 만나려고 애쓰쟎아. "

위로가 되진 않았을 것 같다.

" 달을 넘기지 않고. "

그래...하고 그녀는 지난 몇 개월 간의 줄다리기를 끝내기 위해 자신이 한 일은 그저 줄을 놓아 버린 것 뿐이었으며, 그 결과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료히 했다.

" 나는 그애의 친족들보다 더 가깝지 않아. 물적 거리로나, 감정적 유대로나, 때론 관념적 의식으로도. "

그녀는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더 구부린다는 듯이 덧붙였다.

" 그애는 맑시스트가 아니야. 어쩌면..."

- 천막에서의 나는 그애가 투쟁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틈틈이 가족들과 주변을 챙기기 위해 외출하는 것을, 정세를 분석하고 판단할 수 없어 고뇌하는 내 앞에서 다른 이야기, 어머니의 생신이라던가 누구가 어때서 무슨 일이 있어서...뭐라고 말하고 있는 그애의 얼굴을 보면서 그래서, 그래서 넌 안되겠다는 거구나. 넌 할 말이 없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애에게 그래, 그렇구나. 하고 대답은 해 주었지만 그건 다 너의 사생활이다. 왜 너는 이 투쟁의 와중에서 동지인 내게 그런 얘기를 하는 거니. 하는 속말을 했었다.

" 어쩌면 처음 그애에게 호감을 느꼈던 투쟁의 시기에서부터 나는 그애의 가족들을 질투했었는 지 모르지만. 그 때부터 항상 그애가 맑시스트가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작업을 했지만 그애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 마치, 언어를 배우는 아이들의 시기가 있는 것처럼, 이십대가 지난 사람들에겐 의식화가 안되는 것 같아. "

물론 시대의 영향도 있지.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리고 뭐 이 나이가 되어선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표정으로 그녀는 한숨을 쉬며 단언했다.

" 그애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아. "

그애가 곁을 주지 않고 자주 만나 함께 하지 않고 일상의 동행이 되지 못 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있으랴. 진에게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 그애가 애착하는 성격이 아니므로 내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말은 할 필요 없어.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 하고, 받지 못 하기 때문에 나 또한 주지 않겠다 해서 뭐가 잘못이야. 그애에게나, 남편에게나. "

사랑받는다는 느낌없이 상대를 계속 생각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건 그저 생각의 테 안에 있을 뿐, 교환을 통해 실재하는 사랑이 될 수 없으므로.

- 나는 슬프고 그리하여 불행하다. 하는 생각을 갖고는 일상이 너무 힘들다. 하는 그녀.

" 괜찮아. 그애는 바쁘고, 바쁜 와중에 내게 전화를 하고 언제쯤 만나자 하고 기약을 해 주니. 내가 그만큼의 의미로 그애에게 있으니. 남편이 그렇듯, 그애가 내 일상의 동행이 되어 늘 재미진 말만 곁에서 해 주겠다 하지 않는다 해서 버려버릴 순 없쟎아. "

- 그정도의 거리와 관계를 두고 그네들과 소통하겠다. 하는 그녀.

" 너를 사랑한다고 할꺼야. 그...는. 말로나...행동으로나. "

그녀는 한 번 치어다 보았지만, 곧 고개를 돌린다. 무심하고도 냉정한 낯빛으로.

" 나는 사랑하지 않아. 그애도, 남편도. "

- 내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 나면 하고 마는. 여유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나를 내처두고 내게 보답받기를 바랬더냐. 내가 서운타. 하고 몇 수 십번을  호소했건만 응분의 행위를 보여주지 않았는데, 내가 그걸 덮고 여전히 연인으로, 아내로 있을 줄 알았더냐. 네가 그리 자신만만하더냐. 내가 그리 얕보이더냐...

 

" 내가 다시 그애와 자는 일은 없을꺼야. "

남편에게 그랬듯, 그녀는 정서가 없으므로 몸을 함께 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쟝은 이런 그녀의 변화를 알까. 알아챘을까?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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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너와함께 1

맑게 웃고 있는 혜정을 보며 쟝은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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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남자, 그리고 1

혜정은 얼른 보기에 귀엽고 예쁜 여자애였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작고 눈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론 컸고 피곤할 수록 가는 쌍꺼풀이 겹으로 지곤 했다. 서양인처럼 높지 않지만 동양인처럼 낮지도 않은 코보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작은 입술, 세필로 그린 듯 정교한 입술이 참 예뻤다. 그 애의 대학교는 여느 대학들처럼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많았고 다른 단대보다 문과대에는 그보다 좀더 많은 여자애들이 있었지만 그 애가 택한 독어독문학과에 여자들은 압도적으로 귀한 편이었다. 그 애가 학과의 남학생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건 기우였다. 오리엔테이션과 신입생 엠티, 그리고 학기초의 강의실에서 그 애는 말수가 적었고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슴에도. 그 애의 학과에는 독어나 혹은 문학에는 더욱이나 관심이 없는 남학생들로 꽉 차 있었고 그들은 손가락에 꼽을 만할 과의 여학생들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집적대고 있었다.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가능한 안정적인 커트라인을 염두에 두고 지원해서 합격의 영광을 얻은 남학생들이 태반인데 비해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되었다. 그 녀들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는 된다 싶은 학력을 소지하게 되었고 언어와 문학에 강하다고 생각되는 여성들의 특성에 따라 졸업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예상되었다. 이제 그 녀들에게 남은 것은 좋은 신랑감을 같은 학과나 문과대 근처가 아닌, 가능한 좀 더 레벨이 높은 대학의 남학생들과의 인연을 구축하는 것을 통해 건져내는 것이 과제인 것처럼 보였다. 혜정은 소수의 여학생 동기들 중 재수를 하고 들어온 한 명과 친해질 듯 싶었다. 아마도 나이가 같아서 친근감을 가졌으리라. 아닌게 아니라 재수생의 전력을 가지고 있어선지 다소 우울하고 어딘지 과의 여학생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애가 어느 전문대학의 유아교육과를 다니다가 예의 " 그 물에서는 그 정도의 남자 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는 식으로 전과를 했다는 동기를 말하는 그 동기에게  다시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정은  한, 두번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고는 코드가 안 맞는다고 치부하기를 곧잘 했다. 그렇게 친하고 싶지 않은 동기들의 명단을 확장해갈수록 그 애는 사귈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점심식사, 그것이 또 혜정의 커다란 난관이었다. 끼리끼리 혹은 비슷한 부류의 삼삼오오 식사를 하는 학생식당에서 혼자 줄을 서는 것이 처량해보였지만,  학교 바깥으로 혼자 점심을 때울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애가 혼자 있지 않을 때는 과학생회일을 보고 있는 선배들과 얘기를 할 때, 아니면 동아실에 있을 때였다. 동아리실엔 거의 항상 누군가가 있었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갖는 동질감으로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혜정을 빼놓지 않았고 그냥 사회과학 써클보다 자체의 업무를 갖고 있는 ***였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할 일꺼리도 많았다. 다른 1학년들에 비해 더 자주 동아리실을 들르는 혜정에게 선배들은 심부름을 시켰고 운동적으로 연관된 타대학이나 사회단체를 방문하는데 자주 혜정을 데리고다녔다. 덕분에 혜정이 운동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속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그 애는 2학년 선배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들에게 지지 않는 데모참가와 연대투쟁을 비롯한 활동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써클이나 학생회를 외곽으로 하고 있던 물밑조직에서의 접근도 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애가 지하조직의 조직원이 되었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 애는 **의 소리를 청취하는 선배를 이해할 수 없어했고 계급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끝내 철회하지 않는 자신의 알피와의 논쟁에서 합리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없었다. 인식의 왜곡 혹은 몰이해를 감수하고 그 애가 선배들의 노선에 동의하는 말도, 행동도 하지 않자 87년의 후폭풍 속에서 잘 조직화되지 않는 후배들 속에서 유독 돋보였던  그애를 인입하고자 했던 선배들은 혜정을 준조직원 정도에서 대기시켜두기로 했다. 대세화되고 주류화되어있는 대학의 운동권분위기에서 골수우익이 아닌 한 과학생회의 임원들이 격려하는 학내집회를 경원시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혜정은 대부분의 87학번 선배들로부터 운동에 대한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읽어냈고 과학생회의 주도세력이고 동아리의 핵심멤버였던 선배들 중 가까웠던 몇 명에게서 조직원이 되었던 과정, 그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과 논쟁하지 않았다. 그렇게 과에는 즉 강의실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혜정은 동아리실에서도 소외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서 그 애가 왜 남자선배와 썸싱이 일어났는지,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하고 실연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혜정의 써클에서 후배들의 학습을 담당하던 알피는 남자, 여자 각각 한 명씩이었다. 무척 친해진 듯 여자알피의 자취방을 드나들던 어느날 대판 싸웠다는 얘기를 흘리더니 입을 싹 닫았다. 그리고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기타 이야기를 했다. 노래, 남 앞에서 부르는 걸 꺼렸다 뿐이지 노래를 좋아했다, 혜정은. 그리고 기타를 치며 감미롭게 노래를 부르는 선배가 써클에 있다고. 알피이고 세미나할 때 후배들의 질문에 대답도 잘 한다고. 이 승만의 ....중략..... 조직원이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고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2학기에 그 선배가 휴학을 하고 나오지 않는다며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점점 차가워지는 가을 바람 속에서 슬프고 초조한 빛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시월 어느날부터인가 입을 꼭 다물고 교정의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혜정은 눈에 띄게 야위어갔다. 너무 많이.

 

고즈넉한 옥탑방, 새로 두시가 넘어간 시각, 주위는 길고양이도 잠든 듯 조용했다. 진은 주방쪽 씽크대에서부터 출입구로 꺽어지기 전까지의 벽면의 이분의 일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느 살림집이었으면 가스대를 포함한 씽크대 옆으로 냉장고와 잡다한 주방살림을  놓느라 남는 공간이 없겠지만, 200미리의 작고 아담한 냉장고만 놓고 대신 출입구 앞까지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라탄의자와 테이블이었다.  손으로 슬쩍 밀어도 쉽게 제 자리를 바꾸는 가볍디 가벼운 이 가구들을 혜정은 좋아해서 침대 옆으로 난 반대편 창문 쪽으로 번쩍 라탄의자를 들고가 안락한 사색을 즐기기도 했다. 조금 전에는 그 라탄의자에 중상을 입은 병사처럼 걸쳐져 있던 혜정, 뭐라고 주절거렸지만  만취를 못 이겨 꼬부라지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 한 잔을 간신히 먹여 침대에 뉘일랬더니 까탈스럽게 예민한 부잣집 외동딸의 입덧처럼 욱 ! 하고 올린다. 몸을 가누지 못 하는 그 애을 부축해 욕실을 왔다갔다 하기를 서너번 하고나니 흐느적거리며 머리가 아프다고 울먹거리는 혜정, 침대에 쓰러져 시체처럼 널부러진다.  

혜정을 데리고 온 두 명의 남자들은 같은 동아리 선배라며 혜정이 1차에서 너무 들이붓더니 정신을 못 차린다고, 가까운 친구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바래다주러 왔다고 한다. 그들은 한명은 퉁퉁한 고수머리였고 다른 한명은 대조적으로 뻣뻣한 짧은 머리가 스포츠형 머리에서부터 자라고 있는 중인듯한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중년의 뻔뻔한 매춘남를 연상시키는 퉁퉁이는 재수하고 들어왔다는 그 말끝마다 " 이 형은 말이야 , " 하고 자신을 상대보다 연장자라는 위치를 부각시키며 지칭한다는 작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체질적으로 빼빼마른 길쭉한 얼굴은 조기입학한 초등학교 저학년시절부터 동급생들에 치여 자라 누나같은 여자들만 좋아할 것 같은 또 볼 때마다 모성본능을 자극한다는 그 공대생이 틀림없어보인다. 뭐, 맞을 것이다. 혜정의 동아리에 남자선배는 3명 밖에 없었고 그 중 한 명이 군대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지라. 그들이 혜정을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가겠다는 화양리의 술집 골목, 그 < 밤 10시 이후 미성년자의 출입을 금합니다 > 라는 표지판을 전신주에 매달고 있는 그 골목을 혜정은 싫어했다. 선배들이 그 거리의  5000씨씨 혹은 일만씨씨하는 한잔을  빙 둘러앉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마신다는 호프집으로 2차를 가는 것도, 그 길 안쪽의 감자탕집으로 3차를 가는 것도 혜정은 그 쯤에서 어김없이 눈에 넣을 수 밖에 없는 집창촌의 쇼윈도우를 보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문 앞에 나와있는 닳아보이는 여자들과 시선이 마주칠까봐 두려웠고, 웨딩숖의 마네킹처럼 무심한 얼굴로 가슴까지 푹 파인 붉은 드레스를 걸치고 애견가게의 전면유리안 작은 칸막이 안에서 움직이는 상품처럼 진열되어있는 소녀들을 훔쳐볼 때마다 자신이 성을 사러온 남자들과 진배없이 뻔뻔스럽게 느껴진다는 혜정은 선배들의 못 본 척 하는 그 얼굴에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물론 혜정의 선배들이 그 거리에서의 3차를 끝내고 여관을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늘 패거리의 잔당들과 함께 널부러질 곳을 찾아서였고 그럼에도 혼숙단속을 귀찮아하는 주인들의 거절에 방황하다가 후미진 여인숙에 겨우 구겨질 뿐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대가기 전 딱지떼기를 숨기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그 남자 대학생들 속에서 혜정이 이질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혜정이 이토록 야위어 그 작은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만큼 초췌해 진것이 그 군대간 선배 때문임을 진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딱지 떼러 다녀왔다는 사실을 줏어듣기라도 했을까? 진의 순진한 짐작은 그러나 대학가에서 학년초에 눈 맞아 씨씨커플의 염문을 뿌리는 남녀대학생들이 학년말에 이르기전에 이미 숱하게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평범한 예측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는 것에 당황하고 불같이 화를 내며 울부짖는 고딩시절의 촌스런 보이프렌드의 역할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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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우리 함께 이불을 털어요.

집을 얻었다.

엄마는 굳이 그럴 필요 있냐고 하셨지만, 굳이 그러겠다는 딸에게 길게 말하지 않았다.

" 생활비는 용돈 이상 더 줄 수 없다. "

" 괜찮아요. 집세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옥탑방 공과금이 얼마나 된다구, 용돈도 알바로 충당할 수 있다니까. "

레슨비로 여느 부잣집의 고액과외비 만큼은 아니라도 동생 이수의 학원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는 가정경제에 타격을 주었기에 진은 대학에서는 가능한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 네 방은 세를 줄 생각이니 집에 왔을 때 불편한 건 감수해야 한다. 대신 매달 받은 월세를 통장으로 부쳐줄테니. "

"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피아노 과외해도 되고 다른 알바꺼리도 천지라니까. "

엄마는 미간을 찌푸린다.

" 대학을 만만히 보지 마라, 더구나 요즘 같은 시국에. 나는 네가 강의실과 맥주집만 오가면서 낭만 운운하는 대학 생활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 알았어요, 열심히 할께요. 학과공부도 세상공부도 "

엄마의 불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항상, 아주 어렸을 때부터도 엄마는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 불안해 했다. 세대차이가 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는 맘도 없지 않았지만 엄마의 인생에서 사회는, 특히 한국사회는 아주 느리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68년의 격변을 한국사회를 넘어 유럽의 소식을 통해 조망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는 유럽에서 한참이나 뒤떨어져있는 한국사회를 불행하게 직시하면서도 전태일 이후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동지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자신의 인생에 관대하지 못했다.  어쩌고 저쩌고 중략...

 

 

 

 

 

 

혜정의 학교에서 진의 학교를 지나 뒤편 주택가에 얻은 옥탑방은 넓은 창을 가지고 있었다. 진은 혜정의 학교에 가까운 곳으로, 혜정의 학교와 자신의 학교 사이에 집을 얻고자 하였으나 창에서 바라보이는 대공원의 숲 때문에 복덕방에서 보여준 마지막 집으로 결정하였다. 또 옥상 위에 마련되어 있는 평상과 옥상의 출입구를 개방하지 않는 다는 조건이 맘에 들기도 했다. 반지하층을 포함하여 3층 위 옥상에 작은 창고 하나 크기의 옥탑에 집주인은 샌드위치판넬을 이어붙여 욕실과 기다란 부엌을 만들었다. 본디 창고방과 욕실과 부엌은 각각의 벽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지난 겨울, 오랫동안 혼자 살던 늙은 택시운전수의 실수로 화재가 난 후 올수리를 했다고, 방과 부엌을 하나로 트고 보일러도 도시가스로 교체했으며 천정이며 샷시도 새로 하느라 먼저 살던 사람의 보증금 말고도 돈이 많이 들었다며, 완전 새집이라고 같은 동네에서 철물점을 한다는 할아버지는 큰 소리를 쳤다.

" 이만한 집을 그 돈에 얻는 걸 아주 복 받은 걸로 생각해야 할께야. 보게, 이렇게 훤히 트여 밝고 너르고 저기 씽크대며 문짝이며 다 새것 아닌가, 뭐시냐 그 오삐스텔이나 한가질세 ! "

 그러고도 할아버지는 진이 한 말은 아니었지만, 옥탑이라구 시비하지 말라면서 그것만 아니면 훨씬 더 쳐 주는 방이라고, 그것도 머스마들 아니고 여대생이니까 양보한 거라고 한참을 더 떠든다. 아마도 복덕방 아저씨가 의뢰를 받으면서 어쨌든 옥탑이니 가격을 조정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진이 얌전하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돌아서면서 주인은, 흘낏 천정을 올려다본다. 새로 올린 천정의 석고보드를 뚫고 새 형광등이 은색 날개를 펼치고 달려있는 것이 불안해 보였나? 진도 따라서 흘낏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아, 완전 새집이라니까, 신혼살림 차려도 되는 집이여! 하면서 주인은 또 너스레를 떤다. 진은 네!  깨끗이 쓸께요. 하고 주인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수도세는 꼭 받으러오기 전에 챙겨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혜정에게 집주인 얘기를 하다가 보니 천정 속이 좀 불안하게 생각된다. 올수리를 했다지만, 욕실은 오래된 양변기에 세면대도 없고 벽도 기존의 빨간 벽돌과 새로운 샌드위치 판넬의 접합이 부자연스러워보인다. 욕실은 화재에 피해가 없었던 듯, 그럼 새로 친 천정 속은 어떠할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안 보이는 것을 두고 신경쓸 게 무언가 싶다. 혜정이 그런 눈치를 챘는가 한숨을 쉰다. " 그럼 택시 아저씨는 보증금도 못 받고 나갔다는 거네? 세 살던 집에 불 나면 살던 사람이 물어야 하는거야? 집 주인이 관리 의무 있는 거 아닌가? " " 글쎄? 화재 원인에 따라...다르지 않을까? "  불 났던 집이 어떻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자꾸 이런 화제로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진은 창문을 열었다. " 근데, 이 창문 진짜 크다. 공원 숲이 저 끝까지 보이쟎아. 시원해서 좋겠지? "

" 응, 근데 겨울엔 춥지 않을까? " " 하하하, 너 하나 춥지 않게 할 능력은 있으니까 걱정마셔. " 진은 이렇게 말하니 진짜 신혼부부가 첫 둥지를 틀며 하는 대사 같아 괜히 웃음이 더 크게 나왔다. 옥탑방의 문 밖에는 마당처럼 쓸 수 있는 옥상도 있고 반지하층이 있어 계단도 2층 반만 올라오면 되는 이 집이 맘에 들었다. 게다가 혜정은 계단 쪽의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유리로 된 반원형의 벽이 멋있다는 말도 했다. 설마 혜정이 없어 자신이 더 추위를 느끼게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진은 여기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따스한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진 끝에 " 내년에도 재계약하고 쭉 살아도 좋을 것 같지? " 하고 말했다.혜정이  " 계약을 해마다 다시 하는가 보지? " 하고 말하자 그제서야 " 그러는 것 같던데? " 하고 자신없는 대답을 하면서.

 

결국 침대는 새로 샀다.  더블로. 엄마에게 넓은데서 자고 싶다고 말하니 그래, 집의 네 방보다 훨씬 크니 그래도 되겠구나 하시며 침대는 좋은 걸로 해야 한다는 말에 대신 입학선물은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책상이며 책장, 옷장 같은 건 이삿짐 차로 옮겨오고 거실 한 쪽에 있던 오래된 윈저 의자 하나를 더 얹어왔다. 별 말이 없는 엄마, 식탁은? 하시다가 피아노 땜에 안되겠구나 하신다. 물론 충분한 공간은 안되겠지만, 진은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서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작은 티테이블 셋트를 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혜정의 취향을 존중할 예정이었으므로 아무 말도 안 했다. 혜정은 함께 가자는 말에 신나하며 동대문 시장을 누비며 커다란 창에 어울릴 만한 커다란 커튼을 골랐다. 진은 취미가 없어 잘 몰랐지만 하얀 레이스의 속커텐과 겨울에도 지장없을 만한 제법 두터운 감의 겉커텐, 커텐집게며 타슬을 만지작거리는 혜정을 보고 집 꾸미기나 홈패션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대문을 나와 을지로의 가구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에도 혜정은 즐거워했다. 예쁜 의자를 유심히 보고 사무용 책상 중에서넓고  디자인 잘 빠진 책상을 보면서 만져보고 싶어했다. 살까? 했더니 막 웃는다. " 엇다 놓을라구? 이런 건 전원주택이나 적어도 마당 넓은 단독주택은 되야 어울리는 가구들이라구. " 한다. 하지만 엄마는 신당동에 살 때도, 별거 후 이사온 집도 단독주택이지만 이리 예쁜 가구들 놓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었다. 마당도 꽤 되었는데...하고 생각하며 진은 의외로 혜정이 공주님 취향을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전혀 티도 안 내더니? 결국 혜정은 공주님 취향을 여지없이 증명하며 하얀색 라탄의자, 테이블셋트를 고른다. 네 생각은 어때? 하고 혜정은 남의 집 살림 준비하는 걸 따라온 것 뿐이라는 자세로 물어봤다. 진은 상관없다고 말하려다가 정말 멋질 것 같다라고 고쳐 말했다. 옥탑방에 두기는 분명 부담스러운 크기이고 컨셉도 안 맞을 것 같았지만, 햇살 좋은 가을날 옥상 마당에 내어 놓으면 그럴 듯 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혜정의 분위기에 전염된 것 같았다. 갈수록 낭만적이 되어가고 있는 진이었다.

 

혜정과 함께 밥을 해 먹었다. 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카레라이스였다. 그리고 라면끓이기 정도? 혜정은...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애는 오빠와 남동생 사이의 유일한 딸이었고 엄마가 전업주부도 아니었지만 보통의 여자애들보다 부엌일을 할 줄 몰랐다. 아빠가 힘에 부쳐 짜증내는 엄마에게 " 가시나 뒀다 뭐할끼고, 좀 시키라 ! " 하고 말했지만 그 때마다 엄마는 " 시집가면 다 할텐데, 지겹도록....놔 둬라, 내 좀 쉬었다 밥 차려 줄테니. " 하셨고 가끔 너무 난장판인 집안 꼴을 보며 " 손 뭉뎅이 뿔라짔나, 청소 좀 하그라 " 하는 정도셨다 한다. 그래서 청소했어? 아니, 내가 막 빗자루 들을 라고 헀는데 기분나쁘게 말을  내시니깐 성질나서 걍 던져두고  나왔지. 하는 혜정, 아주 착한 딸이다. 그래도 청소는 자주, 아침이면 내내 온 집안을 하느라 땀범벅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요리를 못 하는 건 순전히 엄마, 아빠가 경상도출신이기 때문이라며, 원래 경상도음식이 맛이 없다고 한다. 그런 말이 있나? 하고 넘어갔다.

함께 먹는 밥을 위해 우리는 시장을 봤다. 감자와 양파와 당근, 그리고 계란은 기본으로 항상 비치하는 식재료들이다. 여기에 햄을 넣거나 없으면 없는 채로 잘 해 먹는 것은 카레라이스였다. 서로 하기 싫은 날이면, 많이 해 뒀던 카레라이스를 3일 동안 계속 먹기도 했다. 혜정, 질리지도 않고 먹을 때마다 맛있단다. 밥과 김치 외에 자주 할 수 있는 반찬은 계란후라이였다. 몇 달 동안 계란후라이는 그보다 난이도 높은 계란말이로 진전되지 않았다. 술집에서 안주로 나오는 계란말이는 두텁고 잘 말아져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두어 쪽 주는 계란말이도 좀 얇고 물컹하긴 했지만 비단두루마리처럼 잘만 말아져있었다. 근데, 우리가 후라이팬에 잘 저은 계란물을 붓고 좀 있다 말을라치면 다 깨지고 부서져 얼른 두번 연속 뒤집지만  말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형상을 하곤 했다. 거기서 일보전진한 것은 순전히 혜정의 공이었다. 어느날, 계란말이하는 법을 자취하는 선배언니한테 물었다며, 정답은 바로 " 익기 전에 돌리라 " 는 것이란다. 과연, 이론만으로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지 혜정은 잘 달군 후라이팬에 잘 저은 계란물을 붓더니 끈기있게 기다린다. 제법 요리사처럼 후라이팬 손잡이를 들고 한쪽으로 기울여 펼쳐진 계란부침의 한쪽만 먼저 익는 걸 확인하더니 양 손에 숟가락과 뒤집개를 각각 들고 드럼 주자가 첫음을 잡는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 계란말기를 시작한다. 돌돌돌, 제법 3회전, 4회전까지 겹으로 만다. 와! 대단하다! 진은 정말 감탄하며 혜정의 손놀림을 보고 환호를 했다. 그 후로 우리들의 밥상에 계란후라이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작게 채썰은 당근과 양파를 넣은 계란말이처럼 영양가높고 맛좋고 보기에도 예쁜 밥반찬도 별로 없다.

하지만 혜정의 요리솜씨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식재료의 다듬기부터 시작되는 요리의 마지막 단계인 간 맞추기에 이르러 혜정은 씽크대 앞에 서서 왔다갔다 하는 것에  지쳐했고 입맛을 잃어 정작 다 차린 밥을 먹는 것에 의욕없어 했다. 그 애는 매사에 강단이 있어 술을 마셔도 마지막까지 버텼고 3학년 남자선배와 소주로 내기를 하여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체구에서 비롯되는 체력의 한계는 단기전으로 승부할 수 없는 대부분의 일에선 금방 바닥을 드러내며 항복을 하거나 미리 포기를 하곤 했다. 그 애는 한 자리에 오래 서서 하는 요리하기가 맞지 않았다. 보다 더 테이블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셋팅을 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고 보람을 느꼈다. 가능한 모든 접시와 컵과 수저받침대나 내프킨까지 동원하여 예쁘게 상차림을 하고 그 앞에 앉아 오래 식사하는 것을 좋아헀다. " 넌 식사를 눈으로 하냐? " 고 핀잔을 주었지만 이쁘지 않은 것은 먹지도 못 했다. 통째 올라온 생선을 싫어했고 가능한 시선 조차 두지 않으려 애쓰곤 했다. 그 애에게 시장통의 뼈다구찜이나 순대국 속의 간, 내장탕 따위는 너무 힘든 시험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노동자들과의 식사에서 그런 메뉴를 참아 넘기는 것이 자신이 대중성을 갖는데 실패하게 한 핸디캡이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 애를 위해 요리의 대부분을 담당했지만, 정말로 그 이외의 것에선 완벽한 써비스를 받았다. 깨끗함의 기준이 다른 혜정은 창틀에 먼지가 오래 묵는 것도 싫어했고 티비의 검정부분에 자꾸만 쌓이는 먼지를 어케 없애나 하는 것 따위를 갖고 오래 고민했다. 설겆이를 다 하고 나서도 뜨거운 물을 한번 더 끼얹기 위해 가스비 아까워하지 않으며 한 솥의 물을 끓여내기도 했다. 덕분에 집은 항상 전담청소부가 있는 부잣집도련짐의 방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있었고 기분이 내킬때면 쉽게 카페테리아의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시장 한가운데를 뚫고 유일하게 그 애가 사 들고 온 것은 한 단의 프리지어 혹은 안개꽃이었고 가끔 해바라기 한 송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팔걸이가 있는 하얀색 라탄의자는 금방 먹고 일어나는 식탁의자보다 훨씬 편안해서 우리는 자주 거기서 식사 외에 커피나 얼음쥬스를 마시며 독서를 했고 음악을 들으며 맥주와 계란말이를 앞에 놓고 늦은 밤까지 분위기를 잡곤 했다.

더블침대의 패드는 아니었지만 이불, 특히 홑겹의 여름이불 외에 다른 것들은 혜정이 혼자 들고 털고 개어놓기엔 힘에 부쳤다. 더구나 그 애는 왜 먼지를 이불 속에 돌돌 말아넣느냐며 꼭 마당까지 들고 나가 몇 번이고 털고서도 햇빛에 비치는 먼지들이 떠도는 것을 보며 직성이 안 풀려 볕 좋은 날이면 옷장안 맨 아래에 깔려있는 이불까지 안고 나와 말리곤 했다. 깨끗한 환경과 정리정돈된 상태에 대한 욕구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지만 진은, 다른 어떤 일보다 그 애가 이불을 터는 것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곤 했다. 그 애와 마주 서서 이불을 털고 그 커다랗고 다소 무겁기까지 한 이불을 널어 말리고, 그걸 걷기 위해 저녁에 귀찮은 몸을 일으키는 것에 기꺼워하면서 진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함께 이불을 터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어느 책에선가 보았다며 혜정은 그렇게 가사분업을 한다면 여자에게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는 말을 누가 하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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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사랑, 현신하다.

나는 너의 피조물이다.

네가 원하는 형상을 갖고 네가 바라는 행동을 한다.

손끝으로 숨을 불어넣듯 너의 펜 위에서 눈을 와짝 뜨고

오랜 동면에서 몸을 일으킨 스핑크스처럼

너를 먹어치울 것이다.

 

 

진은 매일, 혼자서 천미리의 우유를 마셨다.  

더 이상 크지 않아도 좋을 만한 신장, 그건 여고에서나  통하는 말이었다. 푸른 콩나물 시루의 검은 보자기를 떨쳐버릴 듯 앞다투어 크고 있는 남학생들을 버스정류장에서 목격할 때마다 진은 불쾌했다. 그,  여학생이라는 신분은 누군가의 마누라가 되기 전의 관례나 절차에 불과하다는 듯 내어놓고 쳐다보며소근대는, 시선과 화제의 주인공들인, 등 넗고 가다좋은 허여멀끔한 남학생들이 혜정의 학교에도 있을 것이었다. 매일처럼 ㄷ 자 모양의 교사 안 쪽에 조성된 정방형의 화단 사이로 난 보도 위를 걸어 상급생들은 도서관을 가거나 체육수업을 받으러 나갈 것이다. 화단을 향해 있는 교실의 창문에서 환호와 수다와 핸드 싸인을 받으며. 그 속에 숨어 눈으로 펜으로 가슴으로 찍은 오빠를 향한 강렬한 시선 속에서. 그들의 드러낸 팔뚝과 커다란 손아귀, 울렁이는 목젓을 훔쳐보며 두근거리는 풍만한 가슴의 처녀들 속에서  무엇으로 그 애을 빼내올 수 있을지를 탐구하며 진은 우유를 마셨다. 고기를 먹었고 밥을 고봉으로 퍼서 싹 비워냈다. 또래보다 작은 몸집에 성격도 까탈스러워 젓가락을 깨작거리고 있던 동생의 경멸어린 시선을 받으며.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체조를 했고 저녁이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조깅을 했다. 중학교 앞의 뚝방길을 따라 우이천의 진원지를 찾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뜀박질을 해서 도착한 인근 자치구에서 새로 조성한 체육공원의 시설들을 유감없이 활용해 주었다. 갑자기 운동매니아가 됐냐며 여자축구에라도 나갈 꺼 아니면 근육 생기기 전에 그만두라는 동생의 핀잔에 주먹으로 응수하며 사내들의 몸짓을 흉내내기도 했다.

품에 안으면 도망치고 싶어도 그 완력에 눌려 꼼짝 못 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넓은 어깨에 기대면 다른 두꺼운 가슴팍 따윈 생각도 안 나게 하고 싶었다.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도 여느 킹카와 함께 걷는 여자들에 지지 않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 애의 자랑스러운 남자가 되고 싶었다. 아니 사내들 이상으로 열락을 줄 수 있기를 바랬다. 왜 그럴 수 없겠는가? 누가 질과 클리토리스의 만족을 위해 페니스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하는가? 진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눈빛과 손짓과 입술의 움직임을 읽고 그 말하지 않고 있는 열망에  현신으로 대답할 것이며 그를 통해 종국에 그 애와 하나가 되리라고 진은 마음먹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손톱 끝에 머문다. 키틴질의 게찜을 통째 부숴먹을 것같은 격정을 안고.

흐트러진 고수머리 사이로 내비치는 인적없는 계곡 아래 암반같은 목덜미에 키스하며

완전히 잠들 줄 모르는 동공이 눈꺼풀 아래서 흔들리는 걸 안타깝게 내려다보며

산골 소녀처럼 애무할 때마다 더 굳게 다물어지는 입술을 벌려  밖으로 나온 내장을 좇아

그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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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혜정의 사랑

첫사랑을 잃고 눈 둘 곳은 없었다.

사방이 벽, 벽으로 둘러막힌 듯한 공간, 입시에 매달리는 한편 자기방치에 다름아닌 매일의 수다에 몸을 맡기고 있는 동급생들 속에서 버텨온 1년이 길고 길어서 또다시 시작되는 2학년을 망막한 맘으로 맞고 있었다.

슈토름의 호수를 읽으며 잃어버린 첫사랑을 바람 속에 실려보내고 있던 라인하르트와 같은 얼굴을 하고 혜정은 시니컬하게 웃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 웃음, 지리 선생님의 공허한 웃음에 갈가리 찢기듯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던 혜정은 주변의 아이들에게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며 웃기 시작했다. 친구가 된 그들은 크게 웃는다. 재밌다며. 지리선생님의 " 우리나라, 좋은나라 ! 자 따라해본다 ! 우리나라 좋은나라 ! " 하는 외침에 크게 웃으며 크게 따라하던 것처럼.

자신을 버리고 이과를 선택해서 가버린 전혜린과 함께 했던 친구를 원망하는 것도 잠깐, 결국 그애가 남기고 간 상처는 그 아래 깊이 패여있던 오래된 상처 때문에 더 아프게 느껴졌던게다. 혜정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볼 무엇이 있어 생을 지속해야 할까. 죽음 이후 아무런 대안도 없다는 것이 생에 대한 미련을 부여잡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 가슴으로 시간의 흐름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고통이다. 존재하지 않는 혜정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히 시간들은 곁을 지나갈 뿐이었다. 국어선생님을 만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그 분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결혼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혜정은 즐겨읽던 시집에서 윤동주의 사진을 빼냈다. 가지고 다니던 연습장에서 부룩 쉴즈의 사진 위에 덧끼워두었던 랭보의 사진도 빼냈다.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으리라. 선생님은 이제 자신이 만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여지를 없앴다. 아내와 어머니의 길을 걸어갈 그 분과 정립할 수 있는 관계는 스승과 옛제자라는 것 뿐일터이니.

혜정이 좋아했던 역사 속의 여성들, 시몬느 보봐르와 루 살로메와 코코샤넬 그리고 윤심덕을 생각할 때와 같은 이미지가 국어선생님에게 있었다. 입시만 중요했던 고교에서 단지 귀찮은 일꺼리 밖에 안되었을 걸스카우트 대장을 맡으며 나름대로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싶어했던 분이었다. 수업시간에 단편적으로 흘릴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삶에 대한 메시지를 스카우트정신을 통해 알려주고 싶어했던 분이었다. 그분과 사상을, 철학을, 문학과 인간애에 대한 신념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 분에 비해 혜정은 너무 어렸다. 이미 열여덟이었지만 입시 외에 가르쳐준 것이 없는 학교에서 학생으로 머무르고 있는 혜정은 서른세살의 국어선생님, 결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과년한 여자의 하나일 수 밖에 없었떤 그 분의 곁에서 할 수 있는 일도 가질 수 있는 위치도 없었다.

선생님의 댁은 종암동에 있었다. 고려대학교의 국문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책에서 인세가 들어오지만 몇 푼 되지는 않는다며 거실에서 남동생과의 얘기를 정리하고 혜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갓난아이가 누워있는. 표정없는 얼굴로 담담히 아기에 대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다는 얘기를 한다. " 내가 이렇게 매여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져. "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부터. 선생님은 소개를 받고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그 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혜정은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다. 갓난아기가 누워있는 선생님의 친정집에서 광주를 얘기할 수도, 난쏘공을 얘기할 수도, 노동자파업을 얘기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이미 생각하고 논쟁할 수 있는 마음의 기지를 잃고 있었다.

혜정은 돌아와서도 갈 곳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 더 나빴다.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이 청춘의 나이에 3년 머슴살이처럼 요구받고 있는 수험생활을 끝내지 않고서는 만날 수 있는 사랑이 없다. 대입까지 남은 2년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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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열애중 2

혜정이 왔다. 마중나올 필요 없다며, 비디오는 주말에나 봐야지 어떻게 보냐고 해서 진은 그냥 집에서 기다렸다. 진의 집, 혜정이 고등학교에서 가까운 자신의 집을 지나쳐 중학교에 가기 전에 위치한 진의 집에 처음 왔을 때, 아니 처음 대문 안으로 들어왔을 때 무척이나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던 걸 진은 슬며시 미소로 떠올리며 제 방 침대에 누워 잠시 쉬고 있었다. 안 가르쳐 줘도 혜정은 진의 집 주변을, 골목과 시장을 지나 비슷비슷한 지붕과 대문을 가진 단독주택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가운데서 익숙하게 찾아들어왔다. 진의 뒤를 밟기 전에 이미 동네에도 많이 와 본 듯한, 그러나 진은 짐짓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 한척 했다. 그 애의 쪽팔림을 모면하기 위해 흘리는 눈물이 무서웠다. 그 애와 이만큼 거리를 좁히는 것에도 힘들었던 6개월이었다.  도로아미타불로 만들 수는 없었다. 여름내 집에서 레즈비언과 관련된 책들을 읽다가 한낮에 훤히 드러낸 그 애의 목덜미를 보고 있는 것은 괴로웠다. 신장의 수치와 상관없이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 있는 그 애는 옆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키가 작다는 것을 얼른 알아채기 어려웠다. 8등신이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길고 가는 목은 8등신 미녀의 그것처럼 진의 눈길을 자꾸만 끌었다.

그 목덜미에 손가락을 대고 싶었다. 입술을 대고 빨아보고도 싶었다. 달콤한 맛이 느껴질까? 그 애의 가는 팔목, 작은 손아귀에 잡혀 애무를 받고 싶었다. 간지러울까? 따뜻할까? 한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어깨를 안고 눕고 싶었다. 그 애도 자신도 아무 생각 없이, 말도 하지 말고 그 피부 속에 얼굴을 묻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 무엇인가를.....어떤 종류의 그 감정과 감정을 분출시키는 그 촉감을. 진은 머리에 떠오르는 책에서 읽었던 그 여자들의 생각들, 성적 환상들, 판타지처럼 가면을 쓰고 다가온 남자와 정사를 하던 여자의 숨결과 표정에 취해갔다. 그 녀들, 그 녀들의 흔들리는 유방, 한 팔에 감길 것 같은 허리, 욱씬하고 느껴지는 저 깊은 곳에서의 달콤한 통증... 그런 류의 영상이 머릿 속을 떠도는 와중에 자꾸만 손이 허리 아래로 가려는 것을 진은 애써 저지하고 있었다. 혜정이 보고 싶었다.

 

약간 상기된 채 집안으로 들어온 혜정, 가방이며 짐들을 내려놓고 가뿐해 진 몸으로 식탁에 앉는다.  반쯤 담아준 카레에 밥을 비벼 먹는다. 그 노랗고 걸쭉한 것을 한 방울, 가슴 언저리 옷깃에 흘린다. 물티슈를 찾아 지워주려 했지만 잘 안 빠진다. 그 애의 봉긋한 가슴 위에서 움직이는 자신의 손가락, 건반 위를 흝던 그 현란한 속도감을 그 녀의 가슴 위에선 완전히 까먹은 듯 느릿하기만 하다. 혜정은 얼굴을 붉힌다. 커피를 들고 방으로 자리를 옮겨 책장을 살펴본다. 그 애가 손을 뻗어 책장 아래칸에서 제 2 의 성을 빼어든다. 놀란 듯한 그 애의 옆얼굴.

 

" 좋아해 "

진은 혜정의 무릎꿇은 옆에 나란히 앉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책을? 아니 너를.

" 키스하고 싶어. "

정면으로 그 애의 얼굴을, 그 애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은 나지막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물빛 눈동자가 크게 벌어진다. 그 애의 대답. 같은 거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 애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던 입술이 꾹 다물어져있다. 눈을 떠보니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혜정.

'" 눈 감아...눈 감아봐..."

진은 그 애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지 못 했지만 자신의 입술에 따라, 자신의 혀가 건들이는 데에 좇아 조금씩 벌어지는 그 애의 입술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그 애의 목덜미, 그 애의 봉긋한 가슴, 그리고 그 애의 가랑이에 자신의 가랑이를 매듭만드는 첫 손질처럼 겹치면서 진은 두근두근 가슴속을 흔드는 격정에 힘이 겨웠다. 자신의 허리 아래, 그 애의 다리 사이 작은 애기무덤처럼 봉긋 솟아있는 클리토리스, 클리토리스가 키스를 한다. 귀엽고 어여쁜 두 아이들이 뽀뽀를 하듯 광속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의 세포분열처럼 온몸을 휘돌아치는 혈관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머릿속이 뻑 가는 듯, 생각을 문장이나 영상으로도 만들 수 없을 만큼 어지럽게 느껴지는 현깃증, 피아노건반 위에서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손, 손가락, 이보다 더 빠른 가속도를 느껴본 적 없었던 출렁이는 허리. 아래 쪽 외음부에서 진은 강하게 치오르는 오르가즘을 느꼈다. 진에게 자위같은 건 불필요한 연습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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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열애중 1

가을이 깊어갈수록 혜정은 말 한 마디 더 하는 것이 인고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듯, 쪼그만 입술을 꼭 다물고 우울해했다. 플라타너스의 크고 마른 잎들이 차로변 인도를 끝없이 어지럽히고 뉴스에서 아직도 간간히 나오고 있는 노동자파업과 사상누각같은 기대를 부풀이고 있는 대통령선거에 관한 보도들 속에서도 스산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걷는 행인들은 내리뜬 눈을 들어올릴 줄 몰랐다. 학교는 코앞에 닥쳐온 입시 앞에서 부산한 긴장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수험생들에게 주목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그들과 교대하여 고3생활을 시작할 자신의 2학년 담임반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은 공부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하며 끝없이 스트레스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혜정은 또 다른 종류의 심리적 외상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애의 뿌리깊은 열등감 혹은 트라우마는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왔다는 이미 오래 전, 그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었고 그리고 이제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과거의 사실에서 연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덧대어 성적에 대한 과중한 압박감, 동급생들보다 훨씬, 모든 면에서 뛰어나거나 특출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한데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87년,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흐름에 함께 하지 못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에 사로잡혀 갈수록 심각한 우울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 애의 고등학교는 총학생회장 직선제를 쟁취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주도한다고 알려졌던 3학년들에 대해, 혜정은 자신이 정상적으로 여덟살에 학교를 입학했으면 그들과 같이 뭔가를 하고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 아닌 미련을 못 버렸다. 자기가 연루되지 못 한 그 어떤 곳에서 있었을 회합과 토론과 인쇄물을 만드는 긴장과 자긍심, 그리고 분명히 연관되어있으리라고 추측되는 국어선생님과 잘 만나지 못 하고 있는 상황까지도 혜정은 나이에 맞게 학교를 다니지 못 한데서 비롯된 불운이라고 생각하며 우울해했다.  가을, 바람이 계속 불어대고 산책을 하노라면 갈데없이 눈물이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어하던 혜정, 그 애를 보는 것은 그리 예민하지 않았던 진의 감수성을 쉴새없이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 애가 좋아했던 노래, 선구자와 보리밭을 흥얼거리는 것을 보고 그 음정, 박자와 상관없이 한정없이 처연해지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따라서 감상에 젖어들었고 그 애가 눈물 어린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빼앗긴 들에도 봄을 오는가를 읊조리는 것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터질 듯, 어깨가 들썩일 듯하여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리로 나가야할 것 같았다. 대선의 패배와 운동의 일단계가 제한적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을 예감하는 듯, 그래서 그와 같은 역사적 시기를 행동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쉬워할 것을 예언하는 듯 혜정은 그 87년의 가을이 가는 것이 싫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을이 지나는 것에 심장이 터질 듯한 애틋함으로 불안해 했던 것은 진도 마찬가지였다.

 

" 렛슨시간 더 늘린다고 안 했어? "

혜정은 평일인데 이번 주에 벌써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온 진에게 근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 응, 그러니까 내일은 안 가는 날이라니까.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을래? 공부할 꺼 들고 와도 좋고. "

" 그래? 그럴까....야자 안 한다고 해서 공부할 데도 마땅챦긴 해. 근데 걍 놀다만 올 것 같은데..."

" 뭐 어때, 너 맨날 자기 전에도 공부한다며? 글구 담달부턴 독서실 끊을꺼라고 했쟎아. 좀 쉬엄쉬엄 해도 되지 않아? "

" 응, 알았어. 집에 안 들르고 바로 갈께. 저녁밥 먹여줄꺼지? "

" 그럼, 최근에 배운 카레라이스의 정수를 보여주지 ! 하하하 "

진은 냉장고에 감자와 양파와 당근이 있는 지를 확인했다. 고기보다 햄을 넣는 게 낫겠지. 육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 혜정은 그 졸깃함, 고소함, 육즙에서 나오는 단내같은 것에 취하는 것 같아 싫다고 했다. 그다지 음식의 맛에 민감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커다란 상에 올려진 한 접시의 고기반찬에 경쟁적으로 젓가락을 들이대는 것이 너무 민망스럽다고도 했다. 혜정은 지나치리만큼 경쟁구도에 놓이는 것을 기피하고 그래서 항상 뒷줄이나 열외에 서 있기를 자처하곤 했다. 그래도 햄을 좀 먹어줘야지...하고 생각하며 진은 슈퍼에 가서 햄 하나, 맥주 두 병, 그리고 오징어땅콩 과자를 샀다. 비디오가게에 들러 영화도 하나 빌릴까 하다가 그건 혜정이 오면 함께 가서 고르는 게 나을 듯 싶었다. 그 애의 영화 취향을 진은 잘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도 은근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 애가 감명깊게 본 영화가 인도로 가는 길이라고 해서 얼마 전에 빌려봤지만, 뭐가 재밌다는 건지...편하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 후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애가 무얼 고르든 진은 가치있는 시간이 될 것은 분명하리라고 생각하는 진이었다.

엄마가 공부방의 책임자로 있게 된 후, 저녁식사는 진이 혼자 먹는 일이 많아졌다. 동생에게 밥을 안 차려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수는 굳이 엄마의 공부방으로 가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거기서 공부하다가 엄마와 같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친구들과 붙어 어딘가로 싸돌아다니지 않는 한 늘 그랬다. 왜? 밥 먹고 설겆이하는게싫어서? 그렇든 어떻든 진은 동생에 대해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혜정과는 반대로, 나이보다 일찍 학교에 입한한 이수는 남자애들의 세계에서 또 다른 종류의 곤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이 참견하기엔 너무 먼 세계였다. 그의, 남자애들의 그 조숙한 척하는 몸짓들이 보기 싫은 것도 한가지 이유이긴 했지만.

카레라이스 봉지 뒤에 써 있는 조리법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읽어보고 냉장고 문쪽으로 넣어두었다. 할 때 마다 읽어보지만 정말 단순한 조리법이었다. 이걸 왜 혜정의 국어선생님은 실패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을 팔팔 끓여서 썰은 감자랑 당근이랑 양파랑을 확 들이부었다가 화악 끓어넘쳐 낭패했다는 그 여자의 요리실패담을 혜정에게 전해들으면서 그 여자는 자신이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돌봐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넌즈시 알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설마 혜정이 국어선생님 집에까지 찾아가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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