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란 무엇이고 허구란 어디까지일까?
평생을 걸쳐 인간이란 얼마나 위험한 정의에 기대어 행동하게 되는걸까?
생각보다 얄팍한 경계는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하다.
예를 들어 김세진의 [닉네임]엔 사진 아래 그녀/그들과 어쩌면 상관없을지도 모를 단어들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그녀/그들을 규정지우는 딱지가 붙이게 된다.
안규철의 [상자속으로 사라진 사람].
너무나도 당당하게 적어놓은 사용매뉴얼. 누군가의 진실되어보이는 글은 해본 적 없던 상상도, 없던 믿음도 생겨나게 한다.
김홍석의 [This is Coyote].
어찌보면 코믹하기까지한 인형. 그러나 그것을 연기하는, 그 안에 인형의 탈을 뒤집어 쓴 사람의 사연은 겉모습만큼 유쾌하진 않다. 오히려 진짜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이야기는 살벌하기 이를 때 없다.
같은 김홍석의 [The Talk] 역시 허구로 치장되었지만 꽤나 현실적일 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도 사실은 아니겠지만 언제 강제출국당할 지 모를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어려워서 분장한 대타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제는 꽤 알려진 탤런트 안내상이 외국인 역할을 맡고 있지 않다면 진짜 외국인 인줄 알았을 거라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
정혜경의 작품들에는 슬슬 꿈보다 현실의 무게가 커지는 30대가 되면서 와닿은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통해 떠올린 김광석을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도 떠올려준다.
작가는 김광석을 위해 스테인레스 재질의 [세계일주]와 기타로 만든 오토바이 [Touch Me]를 만들고,
그들을 기억하는 다양한 30대의 인터뷰를 영상에 담기도 했다.
그리고 김광석을 [Touch Me]에 태우고 여행을 보내는 [CHAOS]를 만들었는데, 뭐랄까 정겨운 느낌.
박재영의 [Dr.john's LAB]과 [CERTIFICATION MODELS]는 예전 황우석 줄기 세포, 신정아 학위 위조 등과 같이 매체를 통해 쉽게 믿어지고 우리의 의식을 왜곡시켰던 사건들과 비슷한 새로운 조작을 만들어낸다. 상대방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변형시키는 '보카이센'. 이를 믿게 하기 위한 실험실과 각종 증명서들은 어디선가 본 듯하여 헛웃음을 짓게 한다.
아래는 모두 박윤영의 [Downtown Eastside]라는 작품의 일부인데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찍고 싶은 이미지만 골라서... 그냥 내 소장용.ㅋㅋ
* 사진출처 - 서울 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현실과 허구의 경계 읽기]에서 직접 촬영
나의 '서커스'에 대한 인상은 정지화면이다.
누군가 몸을 꺾든, 코끼리의 발을 올리게 하든, 어떠한 묘기를 보여주는 과정 후반에는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잠시간의 정지 장면이 연출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 순간적 적막에 긴장감을 느끼며 '서커스'의 전부 내지는 백미인양 여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커스는 환상적이고 화려한 무대와 사람들이 펼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진에 담아내기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로나 비트너(Rhona Bitner)가 담은 서커스의 모습은 내가 받은 느낌을 그대로 옮겨준 것 같은 정적인 미의 극치다.
검은 바탕에서 오로지 서커스를 펼치는 주인공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사진들은 상당히 동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고요와 테잎 늘어진 동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서커스에선 동물들의 역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라 문(Sarah Moon)의 [앵무새]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붉은 바탕과 검은 링에 너무나 그림같은 앵무새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발타자르 부르카르트(Balthasar Burkhard)의 [사자]는 125*197cm의 거대한 화면에 멍하니 입 벌린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인 나머지,
서커스단에 갇힌 속박감, 자유가 박탈된 자의 비존재감,
서커스 자체가 갖는 우울한 느낌 등을 한꺼번에 표현해주는 것 같다.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가 찍은 크리스텐 멕메나미(Kristen Mac Menamy)의 사진들은 이미 과장된 서커스에 대한 이미지를 한번 더 과장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인물과 공이라는 사물의 배치는 과도한 소형화나 대형화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3차원적 공간감을 무너뜨린다.
올리비에 르뷔파(Olivier Rebufa)의 [조종]은 줄을 잡고 있는 사람과 줄에 매달린 인형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이 주는 인상은 오히려 줄과 무관하게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인형이고, 인간이야말로 위태로운 줄에 매달려 상황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식화된 관계들이 변화 또는 역전되고, 흡사 액자 구조의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위대한 서커스]라는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속으로 생각한 감상 포인트는 '화려함, 역동성, 고독감'정도가 아니었나 싶었다.
확실히 부합하는 작품이 없지 않다.
아련한 과거에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고, 피에로의 고독과 카리스마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히 화려함이나 역동성보다는 정적인 아름다움,
고독감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조나 이중삼중으로 가려진 풍자 등으로 읽히는 것들이 많다.
정(靜)에 숨은 동(動)보다 더욱 광대한 열정과 고요함이 만들어가는 느리고 작은 변화.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 해멍님의 [전시회 다녀왔다] 와
민중언론 참세상의 [참세상 기자들이 추천하는 명절 보내기 비법!] 에 관련된 글.
이 가을, 일민미술관에서 세 작가에게 '미술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봤다.
그중 한명인 전영찬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림의 진화를 시도중.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인 'Inside Out'은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이상해'서 라든가 '당신이 독특해'서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답한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하나하나가 때론 비범하거나 때론 비참한 반전들을 준비하고는,
그 이질감에 대해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면서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속삭인다.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기
예를 들면 이런 건데,
[Falling]이란 작품은 침통한 감정으로 빌딩 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두팔을 들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화면이 상하 역전되면서 자살자 이외의 모든 이들을 -화면에선 아래가 된- '하늘'로 떨어뜨린다. 그 모습을 본 자살자는 자신을 자살로 몰아넣은 사회인들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하늘로 떨어졌던 사람들이 -화면 위가 된- 바닥으로 다시 올라오면서 두팔로 걷기 시작한다.
아래인 땅에서 두발로 걷던 모든 이들은 이제 위가 땅이 된 곳에서 두 팔로 걷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는 자 없이 또다시 일상의 쳇바퀴는 돌기 시작한다.
[Identity Crisis]에서는 바나나로 원숭이를 약올리면서 폭력을 일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약을 올리려고 아이스크림으로 꼬시는 원숭이가 나온다.
그리고 아이가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못이겨 원숭이를 따라 들어간 동물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모든 동물들을 연기하는 인간의 세계였다.
사실 여기까지면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나 설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여기서 또한번, '원숭이들이 아이를 징벌하려는 순간 밝혀지는 아이의 진실'이라는 반전을 준비한다.
[Identity Crisis]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는 고양이와 쥐가 조금만 움직여도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질 쪽배 안에서 감격의 포옹을 통해 배의 전복을 막을 중도(中道)를 찾아간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고양이의 먹이사냥은 약자와 강자 사이의 중도란 결코 평등한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과연 고양이와 쥐가 가장 행복했던 그날의 그 순간은 언제였을지, 남은 고양이는 내내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Show]라는 작품에서는 몰래카메라로 촬영된 장면을 보는 아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그 엄마를 지켜보는 아빠, 그리고 그 아빠를 도청하고 있는 정부기관, 그들을 내려다보는 외계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화면에 잡힌다. 이를 통해 관음증에 사로잡힌 건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라는 사실이 조망된다.
5천만 또는 전세계인 모두 '나는 극히 정상'이라고 외치고 속으로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시대,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덕분에 우린 겉으로는 원숭이를 약올리던 아이가 쓰고 있던 가면을 쓰거나, 서로의 관음증을 숨기기 급급하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예외없이 누구나 소외되고 갑갑함을 느낀다.
구조에 어긋나는 것들에 자꾸 '이상하다'는 딱지를 붙이면서, 딱지가 많아질수록 격리, 거세시켜버리는 것은 세상이고 사회일 뿐이다.
격리와 거세의 두려움으로 사람을 호령하는 세상에 우리의 딱지를!
* 그림 출처 : 일민미술관(http://www.ilmin.org)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9세기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할 때까지,
아니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한 이후에도,
유클리드가 정리해놓은 기하학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이론적 발현체였고,
수학이라는 학문을 공리계의 핵심으로 배치시켜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그러했던 만큼
알고보면 인간 사고의 결정체라든가 직관에 의거했다기보다 오히려 경험치의 발현이었고, 그 경험이 결코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이란
세계관의 붕괴, 대재앙 그 자체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적이고 변화와 흐름 자체에 집중하는 동양의 철학에 비해
정적이고 고정된 물체 자체에 집중하는 서양의 철학의 모든 특성을 부여받은 듯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깨어버리고 싶은 실체없는 거대한 '틀'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 [유클리드의 산책]은 르네 마그리트의 1955년 작품명이기도 하는데,
당시 마그리드는 유클리드의 평행선법칙을 원근법으로 가볍게 어겨주는 예술가적 표현으로, 규정된 상황과 세상의 체계에 대한 논리의 돌파을 보여주었다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기라도 하려는 듯 경계나 한계를 넘어서기나 hybrid, 기존 논리로 구분된 영역간의 관계나 교류에 대해 모색해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손정은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은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 제목이라고 한다.
작가는 시집의 시구를 하얀 종이들에 분절하여 적어놓았는데, 관객이 무작위로 종이 하나를 뽑아든 순간 이미 그 시들은 더이상 시인의 그것이 아닌 관객만의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된다.
마치 진보블로그의 모든 글을 탐독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특정 블로거의 특정 포스트를 접하면서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 개인은 해당 포스트를 접했을 때나 블로그글 모두를 읽었을 때와는 분명 다른 개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전시회 설명글에도 있었지만 저 종이 하나하나가 마치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를 나타내는 듯 하다. 종이 하나를 집었을 때 머리 속을 퍼져나갈 오만가지 생각들이 마치 클릭하면 링크 따라 만날 수 있는 마구 펼쳐질 세상을 의미하기라도 하듯이.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 9]는 한국의 버려진 현수막을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지의 현지인들에게 자율적으로 활용하도록 건네고, 일정 기간 경과 후 쓰임새를 관찰한 것이다.
결과물은 사진에 담겨져 있으나 아래의 붉은 천은 작가가 입수한 모양이다. 꽤나 훌륭한 차양으로 변신한 모습 속에서 형태, 문양 등의 문화적 hybrid 를 체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기와지붕 위에 이슬람문자 프린트가 있다면 보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이중근의 [super nature]는 위에서 바라보면 벌집 모양일 것 같은 공간 내부에 밀림의 사진과 산수화를 오버랩시킨 작품이다. 2미터가 넘을 것 같은 병풍들에 둘러쳐져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보는 지점은 한 곳인데도 여러가지 풍경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박소연의 [Story Telling and Listening Series]는 특정 공간과 소품의 세팅과 주제(story)를 동참하는 관객들에게 부여하여 참여자들끼리 말하기와 듣기를 통한 정서 교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비춘 모습은 [어머니와 딸의 장소]라는 주제를 주고 '움'으로 끝나는 한글단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단어에 맞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다소 작위적, 또는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세팅과 행동규칙들이 때론 생각의 정돈과 집중을 유도하여 감정의 풍요를 유도할 수 있다.
김현숙의 [플라모델]시리즈들의 조각들은 매난국죽같은 전통적 코드를 현대의 기성품 생산문화(ㅋㅋ)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진짜 조립해보고 싶다.
조덕현의 [in/finite 1Channel Projection]은 풍경을 찍은 영상과 거울을 통해 -사실은 한정되어 있으나- 무한한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 원래 작품을 만들 때 고고학적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잘 섞는다는 작가가 택한 풍경도 가야금의 명인으로 알려진 우륵이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신화의 장소이기도 한 거창군의 한 마을을 담고 있다.
윤영석의 [표본실A]는 복제양 둘리 성공에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가 인간복제에 대한 공포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 계산된 수치들과 칩 모양의 돌기들이 생명에 대한 인간의 통제 욕구를 반영하는 듯 하다.
좀 약올리는 것 같지만, 이 전시... 9월 30일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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