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12

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08
    자신을 도우려면
    목동
  2. 2006/12/07
    전쟁과 평화
    목동
  3. 2006/12/01
    주인의식과 노예근성
    목동

자신을 도우려면

이세상천지에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자신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있을 것이다.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현주소일 것이다.

고마웠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자신에 대해 흐믓하게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나를 아끼고, 나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누군가가
나의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어린아이가 집에서 나가 골목에 있는 동네의 아이들사이에 있을때에,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며, 즐겁게 놀수 있으며,
좋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혼자 덩그러니 자신만 있고,
누구도 자신과 함께 놀아주지 않으면 심심하며,
동네를 빙빙돌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할 것이다.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어딘가로 길을 걷고 있을때에,
많은 군중들이 분주히 자신의 일들을 보기위해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자신혼자만이 덩그러히 서있으면,
갈데없고,만날사람도 없으며, 시간을 보낼만한 일들도 없다면,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러울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없고,
서로가 스쳐 지나가는 자신들일때에,
사람들은 더 외로움을 타는 가 보다.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다가,
보아도 보아도 계속되는 정보의 홍수에
사람들이 자신의 정을 붙일때가 없으며,
다만 문자와 이메지와 사운드의 교류속에서
사람들사이에 연결되는 따스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을 때에,
사이버의 고독이라 할까 생각이 든다.

자신을 도울 지원자를 찾지 못하고,
그저 자신혼자 외로이 인생을 살아가느라 아둥바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하늘을 향해,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며,
자신에 대해 도움은 커녕, 고독과 불안을 느낄때에,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우울증에 빠진다.

자신의 외로운 처지와 아무에게도 도움받지못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 대해 걱정과 불안과 절망이 밀려들때에,
사람은 자신을 있게 한 부모나,
고향이나, 혹은 자신의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노출된 자신의 나약한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과 함께 머리를 맛대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놀아주고, 즐겨주는 무엇이 없다면,
더 서글픈 자신의 삶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인 신이 보고 안타까워 하는 것은
인생이 고아와 같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운 것이다.

그런데, 신은 그런 인간을 향해 도움을 주며,
나약한 존재인 인생들을 붙들어주려는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생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니,
살다가 지쳐 자신의 삶을 한하며,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내가 눈을 산을 바라보는데, 나를 도움이 어디서 오는고 생각해보니,
나를 도울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는 하늘과 땅을 지은 신이었으니,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신을 발견했을때에,
기쁨이 넘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점의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을 도울 신앞에,
자신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는 말을 되새기며,
도움과 지원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인생이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인생의 삶의 도전들(나약,실망,실패, 배신당함,사건 사고,
자신의 스캔들로 인한 설자리를 잃음, 목표미달에서 오는 좌절,
불안에서 오는 절망,알수 없는 고난,
매섭고 몰아친 고통, 엄연한 현실로 다가올 죽음 등)을 끝내 극복하고 승리하며 나갈 것은
신이 자신의 도움이며 자신을 지키는 자로 자신의 옆에 있기에, 그렇다.
인생이여, 도움을 얻으소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전쟁과 평화

역사의 시간속에 여러가지 동기로 전쟁이 일어난다.
침략의 동기로 혹은 나라사이의 갈등이 동기로 아니면,
혹은 악한세력의 폐해를 막기위한 선한동기로 일어난다.
악을 제압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선한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쟁은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적인 현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구약은 마치 하나님이 전쟁의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며,
실제, 하나님은 인간사회이 악을 심판하고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셨다.

인간사회에 나타난 전쟁은 인간사회의 타락의 하나의 현상으로
여러가지 동기로 인간사회에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투쟁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인간사회의 악한 횡포로서 일어나기 도하며,
양육강식의 논리로 일어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삶의 필요악으로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에 힘의 균형이 깨어지며,
질서가 무너지고, 약자가 고통을 당하며,
평화가 무너지면 정당방위의 전쟁은 일어난다.
악이 힘이 있으면 그 악이 약자를 괴롭히며,
그 약자를 희생물로,이땅에 많은 악이 만연하며,
악인의 힘이 강해져 세상전체의 평화를 깨고, 뒤엎기 때문에,
선한세력의 선한동기는 약자를 보호하며,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정당방위의 전쟁은 그 동기에 있어서, 요구총족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전쟁의 목적수행에 있어서
정당한 요구충족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악에 대한 선의 징계로서 나타나야 하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의 악을 제압하고,
악의 세력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며,
선한 세력이 통치하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선한세력의 편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폭력사용은 사용하는 자의 동기나 방법이나,
목적에 따라 바르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폭력사용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최소한의 사용이 되어야 하며,
인간사회에 비폭력사용을 따르는 정신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구축에 더 힘을 쓰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갈등이나 투쟁이 일어날때에,
우선적으로 비폭력을 따르며, 비폭력의 방법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의 더 큰 폭력의 폐해가 일어나는 경우는
선한세력측에서 정당한 폭력사용을 통해,
인간사회의 악의 영향을 제압하며, 평화의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전쟁은 폭력사용의 전형적인 실례이며,
폭력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평화는 상대적인 평화주의와 절대적인 평화주의가 있는데,
상대적인 것은 악의 실재와 공존 할수 밖에 없는 제한된 선의 평화이며,
그 평화가운데에는 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며,
선과 악의 세력이 충돌하게 된다.
상대적인 평화의 개념은 악을 제압하기 위한 제한적인 폭력사용이 허용되어진다.
절대적인 평화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악을 다 몰아내어,
선한 세계를 이룬 상태일 것이다.

절대평화주의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의 표현이나
그의 사역의 표본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것 같아,
이세상에서의 악을 이기기 위한 선한 의도로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이땅에 평화의 상징인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보이셨다.
평화는 선한세력이 힘이 있을 때에,
인간사회에 악의 상징인 폭력이나,
불합리한 모순핍박을 물리치고,
사람을 존중하는 선한 사회을 이루어낼수 있다.
사실 절대평화주의는 악이 이지상에서 다 사라지기전에는 이룰수 없으며,
악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지상에 선과 악의 불균형이 깨어져,
선한 세력의 통치하에서, 평화가 이루어 질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주님의 가르치심은
그가 이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오셨으며,
오히려 그가 세우시려는 하나님나라는 전투적인 정신속에서,
하나님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면서,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선을 이루는 상징으로
비폭력이나, 사랑을 내세우셨다.
그렇지만, 그의 가르침안에 있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정신인 전투적이며,
영적인 전쟁이며, 악에 대한 선의 투쟁으로 이해되어진다.

주님이 이 땅에 검을 쓰는 자는 망하리라 하셨는데,
이말씀은 검을 가진자가 악을 행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 쓰일때에,
주님이 검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셨으며,
이말씀의 배후에는 악한 세력에 대한
선과 악의 전쟁으로서의 징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며,
어두움의 세력가운데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또한 어두움의 세계에 대한 빛의 세계의 도전이며, 영적인 전쟁이다.

크리스챤은 절대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전쟁에 대해서도, 선한세력의 정당방위의 전쟁을 부인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 비폭력적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입장에서,
악을 이길 선을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주인의식과 노예근성

노예근성이라는 말은 누구나 듣기 좋아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인간다운 것을 따라 살지 못하는경우를 말하는것이다.
사람은 자유인이며, 자기주장을 하며,
자신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속에는 옛날부터 노예의지로 사는 것을 습관화하여,
자기책임이나,혹은 자기 자존감을 생각하지않고,
피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태도이다.

그러면 이태도가 어떻게 인간속에 있게되었나?
이 노예근성의 태도는 갖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들을 생각할수 있겠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의 지도이나, 혹은 권위있는 사람의 강요적인 일방적인 훈육이나,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적인 영향이나,
혹은 다양성이나 개인 자신의 개성을 무시하려는 전체 사회적인 분위기나
혹은 민족적으로 과거에 받은 식민지적인 사고태도에(책임을 가지고 있는자(정부, 사회단체, 가정의 부모)나 힘을 가진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이나, 주변환경에 대한 거부나, 혹은 무책임으로 대하는 태도) 의한 등 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그런 노예근성의 자세의 원뿌리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인한 결과로 인하여,
인간본성이 참담한 상태가 된 것이 근본적인 것인데,
인류의 시조인 두 사람이(아담:남자의 대표,하와:여자의대표) 신에게 잘못을하고 난후에,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인간 본성안에는 그 자유의지가 변하여,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때에, 노예의지 내지는 노예근성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옛날, 조선시대에, 어느 한 가정에 자녀들과 종들이 살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
그가정안에 노예와 자녀는 서로 신분이나 위치와 권위나,태도에 있어서 너무나 다를 것이다.
자녀는 자기 집안에 부모의 재산에 대해서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활용하며,
자기의 권한이나, 능력을 발휘하며, 그것을 발휘하면 할수록
그집의 부모에게서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며,
나중에는 부모의 재산이나 권한을 자신이 소유하며, 관리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노예는 주인이 주는 허락 한도내에서
자신이 빌어먹는 상태로 살며, 늘 종의 의식으로 살다보니,
모든 일에 자신이 자율적으로 할수가 없으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며,
종의 신분이라는 제한되고 구속된 자리에서
자유인으로 그 집안에서 자신의 삶을 즐길수가 없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지구라는 집에 관리인으로 혹은 책임있는 자녀로
주인의 뜻을 잘 받들어 살아가도록 하였는데,
인간들의 대적자이며, 유혹자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이 원래가진 자유의지의 남용된 죄로 인하여,
자기의 땅에(인생의 삶) 대한 자녀(신의 소생)의 영광된 신분이나 권한을 많이 박탈당한채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의지로 살아가게 된다.
노예의지의 사람이나 그의 삶의 철학은
무슨일에나 자신은 책임지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빌어 붙어사는 것처럼,
자신을 노예화하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인에 의한 태도나 보는 관점에 따라,
자신을 생각(판단)하고, 살아가는 경우라든지,
혹은 자신의 고유한 인간의 권리와 인간성의 권한을 포기한채로,
그저 자신이 알수 없는 인생의 미스테리와
인생의 무지와 무능의 한계내에서, 자신의 삶을 한하면서 살고,
인생들의 무거운 짐들을 스스로 혼자 감당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지는 대부분의 짐은 인간의 잘못으로 왔다:
절망, 좌절, 분노, 병고, 저주받은 인생, 실패에 따른 고통, 알수 없는 고난, 죽음 )

옛날에 어느 집에 종의 아들과 주인의 아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종의 아들은 우쭐되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잘난척하는데,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는 주인의 자손(소생)이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종의 신분이기때문에, 종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는 또한 주인의 하녀의 소생이라, 자신의 신분의 위치는
주인의 아들(소생)이면서,
자신의 권한이나, 신분에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처지이다.

그렇지만, 주인의 자유부인의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정실부인이라,
그는 아버지의 앞에서, 주인의 아들로 당당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신분이나 권한을 항상 활용하며,
주인의 집에서 늘 자신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신은 인간을 만들어서 이세상에서,
그들을 신의 소생으로 세우고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중에 자신을 신의 자녀로 여기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속에서, 눈치를 보며,
종의 의식으로 사는 인생들이 있다.

늘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 땅의 주인에 대해 늘 불만이다.
주인이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잘살게 하였는데,
그는 자신안에 있는 그노예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인생을 자신있게 혹은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인생으로서 자신의 신분확인이나 신분위치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분명한 자신이 주인이며, 주인의 자녀라는 자기의식을 가지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들 누구나,
자신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사에 자신있게 살지못하고, 노예의지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주인의 자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자신있게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신은 신의 소생인 인간들이 이땅에서 종의 자녀가 아니라,
이 땅의 주인의 자녀로 자신있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비록 힘든일이 있더라도,
태도만은 신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그리고 자신있게 자신의 인생의 운명이나, 여건들을 맞이하고 살아가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