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12

소명된 삶이란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아래에 그분을 흠모하며, 경배하는 일꾼들의 삶들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하심이 임하며, 실현되어간다.
그분을 섬기는 이들의 삶의 의무와 가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목표에 의해 높아지며,
자신들의 인생을 고귀하게 높여 고명한 인생을 살아가게 한다.

하나님나라의 신비는 하나님의 임재의 수수께끼, 하나님나라의 능력과 목적,
그리고 그 나라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의무와 가치를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위에 초월된 존재이지만,
모든 만물가운데에, 내재하며, 인간들속에 신의 보좌를 펴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옛적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과 40년동안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으로 임재하였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품고 살아가는 것은 여러가지 세상적인 것에 대해,
즉 돈, 명예, 능력, 성공, 여가, 육체적인 멋, 영향력등에 대해,
새로운 대안의 길을 제시하고, 세상적인 가치들을 판단하고,
사람들을 옳은 길로 들어올수 있도록 회개로 인도하는 역활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자신이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는 자각은
세상의 거짓된 자만과 경멸되는 것으로부터,자신에게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하나님나라를 품고 사는 것은
세상적인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자신들만의 아름다운 대안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 이들에게 있어,

돈은 무엇인가? 돈은 모든 인생들의 필요에 응답하며,
인생들의 요구에 부응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모든 인생의 삶의 전반에 놀라운 세력으로 다가온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세력앞에 굴복하여,
돈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알고 사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를 품고 사는 이들은 돈은
창조자의 그늘아래에 있는 인생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돈을 관리하는 지혜를 통해 돈을 조정하며 지배하며 살아간다.

명예는 어떤가를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명예는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게 하고,
때로는 부를 얻게 하며, 권력을 누리게 하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다.
세상의 유명인들은 그 명예앞에 굴복하며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이 명예는 인생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쉴새없이 불어대는 바람을 잡는 것같은 속성이 있다.
오늘은 아무개에게 내일은 또 다른이에게 계속돌고 돌듯이 사람을 유혹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명예의 일시적인 효력을 알고 있기에 거기에 연연하는 것보다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명예를 추구하는 생을 살아간다.
신으로부터 오는 인간을 향한 명예는 영원히 지속되는 가치가 있으며,
생명을 바쳐서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이 추구하고 사용하는 능력을 생각해보면,
인간의 타락이후에 잃어버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스스로의 인간적인 힘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여러 사술과 마인드 콘트럴과 뉴에이지에 몰입하게 하며,
인간능력의 극대화를 추구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죄를 범한 인생들에게 정해져있어,
그 능력은 인간을 영적인 어두운 세력에 노출시켜 자신을 신으로부터 버림받는 길로 인도한다.
그러나 신이 제한한 인간의 능력은
인간이 신의 품으로 돌아와 그에게 순종하며, 따르는 가운데,
신의 영(성령)의 활동과 인도로 인하여 인간은 죄를 해결하며,
자신속에 있는 죄로 인한 결과였던 자신속에 있는 불안이나, 불만, 무능, 그리고 무지등을 해소하며, 더나아가, 신의 약속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인생의 성공에는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의하면,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 업적이나, 물질적인 판단에 의한 소유나, 소득을 추구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사람들의 성공개념은 그나라의 가치기준을 따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정립과 지속적인 교제에 의한 자기성장이나 성숙에 두며,
그 안에서오는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기쁨이며,
자신의 삶의 가치창출(봉사, 헌신, 섬김, 희생을 통한 열매들)로 인한 자기 실현이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처세로서의 만족된 태도이며,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안에서 통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삶이다.
즉 자신안에서의 자족, 주변인들에게 주는 평안의 영향력,
그리고 자신의 삶의 전 영역안에서 이루는 조화된 자기완성이다.

오늘날의 여가된 생활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여, 비디오게임이나,
엔터테이트먼트(육체적인 충동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영화, 음악, 예술활동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 몰입하며, 자신을 망각하고,
기계화된 대상을 통한 놀이(에 빠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자신의 여가된 시간을 통해,
자기완성에 도움이 되는 여가보내기를(영적인 여행, 묵상의 산책,
자연과의 내면의 대화) 통하여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에 집중한다.

육체적인 멋으로 말하자면, 세상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외형적인 꾸미기에 집중하여
전체적인 육체의 조화를 무시하여,
비조화대칭의 기형적인 성형과 모조된 자신의 외모만들기에 투자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비록 경과된 시간에 의한 육체적인 소모나 낡아가는 외모에
오히려 내면의 미를 가꾸는 일로 인하여,
늙어도 멋있게 늙어가는 젊어도 천박하지 않는
당대의 자신의 인생의 육체적인 자연의 멋을 드러내어,
자신이 소유한 육체를 잘 보존하여,
내면에 담겨있는 질(영적성숙, 인격성장, 자기이해의 발달)로 인한 외모의 그릇으로서의
건강한 자신의 반향을 통한 육체의 미를 나타낸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으로 말하자면,
세상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보이는 것이나, 일시적인 것들에 좌우되는 경향이 많이 있다.
당대에 끝이나는 결과에 매달리며,
미래나 영원세계에 대한 기대를 무시하고,
현재에 안주하여, 현재의 자신의 삶의 반경을 생각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예를 들면, 자신만을 위해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여 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수명이 끝나는 것으로 자신의 영향력은 가치를 잃어버림) 추구한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향력을 중시하며,
일시적으로 사라지질 않는 영원의 가치에 투자하여,
사람들에게 영생의 삶의 가치를 전달하여,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통치안에 머물러 살도록 인도하게 하며 함께,
그나라의 시민의 동반자로(자신만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소유나 물질을 나눔으로써, 다른사람들에게 잘 살수 있도록 영향력을 주며,
그것의 가치는 영원한 가운데에서 신의 보답이 이루어 진다)세상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뿐아니라,
자신의 미래나 영원의 세계에 까지 영향력을 이루어 낸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 어린아이의 심정으로서,
모든 삶의 영역안에서 새로운 시작, 새로운회개, 새로운 응답,
그리고 새로운 열림등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지속적으로 자기자신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는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듣는 이들(세상사람들이나, 구도자들이나,
혹은 불안과 실망을 안고 살면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며,
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 나라의 미션(사명)에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세계에 초대하여,
그의 사역에참여하도록 하며,
자신들의 직업이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구현이 실현되도록,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며,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에 베풀며 살아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도하는 인생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신과의 대화이다.
쌍방간의 소통에 근거한 신과 인생의 만남이다.
기도는 신이 인간을 향해 찾아오는 매개체이며,
신의 자기계시를 알리는 인간의 응답의 표식이다.
신은 인간의 기도를 통해 일을 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일과 필요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에게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다.

기도는 능력의 통로이다.
기도를 통해 자신을 창조한 신의 숨결을 느낄수 있으며,
신의 전능한 힘의 세력안에 몰입하게 된다.
기도는 사람의 영혼을 고양시켜, 신의 세계를 맛보게 하며,
신의 창조와 섭리의 능력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기도를 일분하면 자신이 100시간을 투자하는 일보다 더 효력있게,
그리고 능력으로 일을 할수 있다.
사람이 기도하므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할수 있다.
기도는 자신의 능력을 (120%-자신이 도달할수 있는 퍼센트까지) 발휘하게 하며,

지성에 있어 자신의 지혜가 빛나게 되며, 바르게 생각을 하며,
내면의 혼란이나 충동으로 부터 보호를 받아,
총명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표현할수 있다.
학자나 지식을 가진 이들이 기도로 하게 되면
자신의 연구에 놀라운 신의 도움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사업가나, 창의적인 일을 하는 이들이 기도를 하고 일을 시작하면,
자신의 생각에 가능성이 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며,
그 아이디어를 추진할 힘을 공급받아, 그일을 훌륭하게 처리하며,
생각이, 계획을 이루며, 그 계획이 과정을 순탄하게 거치게 하며,
일의 질서있는 순서의 진행을 통해, 자신이 계획한대로 일을 추진하게 된다.

학문을 연마하는 자(학생들)나, 기술을 익히는 자나,
기예를(악기, 그림, 도예, 재능발휘를 통한 창작이나, 작품생산을 이루려는 일들) 닦는 자들이
기도로 시작하며 기도로 과정을 거치게 되면
자신의 순조로운 발군의 실력발휘가 기도를 통해
마무리하는 단계를 통해 기대이상의 효과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기도는 종교생활의 단계를 익혀가는 평생의 작업이며,
접촉하는 신을 이해와 경험하는 장기간의 과정이다.

신앙의 세계에 종교적행위에 있어서
가장 알기어렵고 오랜시간을 들여야 깨닫고 경험할수 있는 과정은
기도를 통해 신을 만나는 과정이다.
진리를 이해하고, 종교적인 체계(이성적학습이나, 이해를 통한 경험습득,
혹은 훈련을 통한 숙련을 이루는 과정을 통한
평안한 종교및 신앙생활에 들어갈수 있다)에 익숙해지는 것은 얼마간의 마음을 결단하고,
숙련되어가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이룰수 있다.
그중에 가장 오랜기간이 걸리며,
고도의 이해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어가는 기도하는 과정은
긴 시간의 투자와 이해와 경험되어지는 오랜과정이 필요하다.

기도하는 세계는 신을 알아가며 동시에 사람(자신)을 알아가며 경험하는 세계이다.
기도를 통해 사람이 신을 이해하고 신의 세계에 접촉하며,
신의 본성과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며,
자신을 향한 신의 의지(뜻)와 섭리(사람의 삶안에서 일을 하는 신의 역사)를 알아가며,
이해해가며, 맞추어 가며, 인도되어,
자신이 도달할 자기인생의 목표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기도없이 사는 인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능력과 지혜와 삶을 유능하게 살아가는 수단을 잃고 사는 것과 같다.
기도없이 사는 자체가 사람을 있게 하고 살게하며
도달하게 하는 신의 의도나 목적을 무시하는 버림받은 삶으로 전락되어 사는 것이다.

기도는 만인이 필요한 인간됨의 자기표현이며, 자기성찰이며,
기도하기는 자기 인생목적의 성취나 성숙에 있어
근본적인 역활을 가능하게 하는 고도의 모델학습이다.

기도의 무용성을 주장하고 사는 것은
자신이 신앞에서 가장 오만하게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
(인간이 신과의 대화적인 존재로 창조되어,
신과 대면하여 대화할수 있는 능력의 상태에서 떨어져,
신과의 단절과 그로 인한 불안과 무의미와 불충분함의 삶)의 모순과 혼란을 안고
살아도 아무런 대책없이 사는 것과 같다.
기도의 세계를 모른다는 것은 신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사람이
신이 만들어 놓은 이세계의 비밀을 무시하고 사는 것과 같다.
방향없이 혹은 도움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인생의 암초나,
곳곳에 놓여있는 삶을 훼방하는 요소들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 이다.

자신이 기도를 하는 경우에,
사람이 신앞에 있어보는 순간은 자신의 인생의 보내는 어떤 시간의 가치보다 중요한 순간이며,
시간효용극대화의 진행이다.

기도는 여러가지 자신의 삶에 있어, 인생(자신)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며,
무가치하다고 느끼며 사는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하며,
자신이 당하는 불안과 고뇌와 고통과 고난을 통과하게 하여,
신이 사람자신을 위해 이룬 그리고 이루어 가는 지복(행복, 기쁨, 보람, 성취, 만족, 자신의 충만함)의 상태를 맛보며 살게한다.
이런 좋은 것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최초의 가정이야기

창세기 1:26-28
하나님의 창조의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음,
하나님과 관계의 독특성을 의미,
창조하시고, 말씀하시고, 축복하시며, 다스리게, 정복하게 하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인간의 창조의 의미는 남녀의 지음이다.
창2:15-25
하나님께서 남자를 택하사, 에덴동산에 살게 하심,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자유로이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의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죽으리라.
하나님께서 남자의 홀로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심,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뼈와 살의 관계를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창3:1-7
뱀이 간교하여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더냐?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먹어도 죽지아니하리라,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리라,
여자가 먹음직한 좋은 것으로 여겨, 눈을 즐겁게하여,
자신을 지혜롭게 할 나무로 생각하였다.
그녀는 그열매를 취하여 먹고, 자신의 남편에게도 주어 그 남편도 먹으니,
둘이 자신들의 몸이 벗은 몸인줄알아, 무화과나누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

(최초의 가정이야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을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자신의 존재임을 알게하는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와서, 신의 생김새를 닮아,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통치아래에서, 사람으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자신의 삶의 목적이다.
인생들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인생의 관리자로 살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의 세계에 까지 돌보는 책임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만남이나, 가정이룸은 창조사역중의 중요한 사역으로 사람은 결혼을 통해,
자신이 속한 한 가정을 이루며, 그 가정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따라,
이세상에 대해, 정복하고 다스리는 통치의 역활등을 맡게 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온 창조의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는 신을 향해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며, 신과의 교류안에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가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 관계가 시작할때에,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여자를 통해 자신의 몸의 한부분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여인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한다.
여인들은 자신의 남편을 통해 자신의 삶의 울타리를 세우고,
자신의 안전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겨,
그곳에 안주하며, 만족히 살려는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품는 사람을 찾게 된다.

가정은 신비스러운 기관이다.
그것은 전혀 성이 다른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한지붕밑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서로가 질적으로나, 성적으로 아주 다른 사이인데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남편은 여자의 남자편에 있는 여자를 지키는 자이며,
여자는 남자의 안에 있는 남자의 허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안사람으로 존립한다.

그러므로 서로 안과 밖이 함께 어우려져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결혼생활이 신비로울수 밖에 없다.
남들이 볼수 없고, 알수 없는 둘만의 은밀한 세계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자신들이 한몸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한 몸을 이루어 가는 명제는
평생을 한 지붕아래에 있는 가정에서 이루어 가는 삶이다.

작금의 가정은 너무 쉽게 이가정의 신비로운 면들을 깨뜨리려 하는 현상들이 있지만,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는 남녀의 가정, 결혼 생활은
서로를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묘한 생활의 연장의 선상에 놓여 있다.
결혼생활을 통해 사람은 다른데서 배울수 없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인생의 깊은 만남과 지속되어가는 인간관계형성과
그로인한 자신의 성품이나, 자질의 개발이 이루어 지게 된다.

물론 부정적인 면으로 부족한 남편과 부족한 아내가
서로의 부족과 허물때문에 서로가 성격이 부딪치고,
상처를 입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자신들은 서로를 통해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은 최초의 이세상에 신으로부터 오는 축복의 기관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정을 통해 인생의 분복을 누린다.
인간의 복의 기관인 최초의 가정의 출발은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 주어진 남녀 자신들의 사명의 명령안에서
신랑과 신부가 함께 한 공동체의 운명을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정을 이룬 사람들에게 생육하라 하셨다.
자녀를 생산하는 복을 주시며, 자녀의 출생을 통해
다음세대에 내려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라는 것이다.
땅에 있는 만물에 대해 관리자로 임명받은 인간들은
가정이나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들을 넓혀 가는 것이다.
직장을 통해, 인간관계를 통해, 사회생활안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확장해 가라는 것이다.

땅을 정복하라함은 가정을통해,
외로움과 미움과 두려움이 있는 세상의 어두움을 정복하여,
사람들을 품어주는 좋은 인간관계형성과 사랑과 자신감의 사람들이
가정안에서 많이 나와
이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세상의 비참한 부분들을 향해, 소망과 빛남과 밝음과 맑음으로 나가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절망을 소망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격의 어두움을 빛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품의 흐릿함을 밝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흐림을 맑음으로 바꾸어가는 역활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혼생활, 가정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검은 머리가 흰머리(파뿌리)가 될 때까지,
생활에서 오는 고민과 고생과, 그리고 고통스런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변함없이 남자는 밖에서, 여자는 안에서 가정의 테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뜻밖의 일로 격정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불신과 상처을 입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재정관계로, 혹은 자녀문제로, 아니면, 자녀교육문제로,
사소한 습관의 차이로, 혹은 몰이해나,
잘못된 의사소통의 문제로 여러가지 일들이 부부사이에 가정안에서 일어난다.

행복한 가정에 불의의 불청객인 뱀이 나타나 여인을 유혹한다.
그 가정에 신이 명령으로 내린 제한에 도전하는, 유혹받지 말았어야,
뱀의 유혹을 받아, 뱀이 충동하는대로,
그 열매를 바라보니, 보기도 아름답게 보이고,
자신을 지혜롭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먹지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를 보고,
여인은 그것을 따 먹고 그녀의 남편까지 그 열매를 먹어버렸다.
인간의 죄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명령을 어기고, 인간의 제한을 넘어섰을때에,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부조화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자신들이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습은 사람이 자신안에서 자신에 대한 불안을 보며,
바로 가까운 부부사이에서 서로의 소외와 비난를 경험하며,
가정이 딛고 삶의 터전이 황량하게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며,
평생 삶을 사는 과정이 땀과 고뇌가 섞인 생활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감수해야한다).

지난 날에 그들은 신의 통치하에서 순종하며 살때에는,
그 부부 자신들의 가정생활이 행복하며, 즐거운 나날이었으나,
그 행복한 가정에 먹구름이 덮히게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행복한 가정에 여러가지 불미한 일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부부사이의 순정을 깨는 결혼밖의 간음이나,
혹은 부부간의 부정한 행실로 인한 갈등과
그것의 결과인 별거, 그리고 이혼으로 발전하는 경우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인간의 죄와 연결이 되어있다.
남편의 부정이나 혹은 간음, 부인의 간음이나 혹은 부정
이런 것은 부부간의 정상적인 관계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가정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작금에 메스콤을 타는 유행어중에,
혼외정사, 혹은 프리섹스 혹은 스와핑부부게임이니,
하는 비정상적인 위험한 부부간의 관계모임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타락한 사회의 도덕불감증에서 오는
아주 더러운 사람들의 악한 행태들이 주변에 있다.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소중한 선물이며,
사람들이 결혼과 정상적인 가정생활중에서 누릴수 있는
가장 깊은 단계의 인간의 접촉이며,
인간이 즐길수 있는 신비한 것이다(섹스를 통해 남녀는 서로가
자신들의 영혼들의 통합이 이루어 짐:soul tie,
그러므로 섹스를 할때에 정상적인 관계에서 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행위는 몸만을 섞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악행이란 것, 죄악이란 것은 신이 내린
좋은 도구나, 선물들을 악용이나 남용하여,
인간의 타락한 욕구나,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로 나타낸다.

인간이 짓는 죄중에 가장 더럽고, 자신에게 심각한죄중에 하나가,
자신의 몸으로 짓은 성적인 죄들인 것이다.
이죄는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 짓는 죄로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부정한 성적인 접촉이나, 관계에서오는 동성애로 인한
비정상적인 인간성의 변질과 그로인한 모순된 삶,
성도착적인 행태들, 매독이나 성병, 그리고 에이즈등은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인 섹스의 법칙을 어기는 데서 오는
자신의 몸에 받는 신의 엄중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섹스에 대한 이해와
거기에 대한 자신의 건전한 철학위에 세울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한 가정이나 건겅한 가정을
이룰수 있는 요인이 몇가지 더 되는 것은
혼전정조(남녀동일함)에 대한 자기순결을 지키는 것과
결혼후에는 혼외정사에 대한 유혹을 받는
(마치 이브가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금단의 열매를 바라보고 따먹는 것처럼,
혼외정사의 유혹을 받기가 쉽다) 것을 이기는 것들이다.

최초의 가정이야기는 인류시조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혹은 남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우리들 자신들의 이야기이며,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그리고 가정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정에 대한 교훈, 인간성에 대한 교훈등을 배울 수 있다.
더 나아가 상한 가정, 병든가정,
그리고 깨어져 가는 가정등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길은
가정을 세운 신에게로 나아가 그의 지혜와 조언을 구하며,
그의 치유와 회복의 힘을 바라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련한 신부이야기

미련한 신부이야기(마태복음 25:1-13)

그때 하늘나라는 마치 저마다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이다.
열 처녀중에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지혜)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졌으나,
기름이 없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에 기름을 채워 두었다.
그러나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자, 신랑이 온다. 맞으러 나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녀들은 다 일어나 저마다 등을 손질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는데 너희기름을 좀주겠니? 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기름을 나눠 주면 우리도 모자라고 너희도 모자랄거야.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지 그러니?’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사이에 신랑이 왔다.
그래서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신랑은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기다림이란 누구에게나 힘든과정이며, 인내가 필요하다.
좋은 일을 앞두고 있을때에는 더욱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다리는 그기간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것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차이는 기다리는 약속시간이 다가와서,
일을 만나보고, 직책에 올라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된다.
왜 내가 이때를(일을 할때에, 기회를 얻을 때에, 직책에 오를때에)
준비하지 못했나를 후회하게 될것이다.

신랑신부가 서로 약혼을 하고 난후에
결혼하는 날까지 서로 자신의 몸을 지키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약혼을 한 신분이라면 약혼한 사람답게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지키며,
장차 주어질 결혼에 대한 설계와 더불어 미래를 대비하는 준비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훨씬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시작할수 있다.

밤에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시간이 가까올수록
그들에게는 힘든 시간이며, 지칠수 있는 기간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저녁시간에 오면 참 좋을텐데,
모두가 지쳐 잠이 오는 그시각에 신랑이 온다는 소식은 인간에게,
때를 기다리는 것과 준비없이 갑자기 일을 당하면,
더 힘든 경험을 겪는 것처럼,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들중에 기다림에서 오는 일들이 많이 있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지,
우연히 오는 기회도 있지만,
대개는 준비하고 대기하는 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 주변에 가끔 버스지나가고 난뒤에 버스스톱을 외치며,
손을 흔드는 경험과 같은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천국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 비유하였을까?
천국은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준비해야 들어가는 곳인가?
천국은 준비된 자, 혹은 기다리는 자가 갈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저 인생을 마음대로 살다가 갈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히 천국을 구하고 거기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신부로 비유하여,
신랑을 맞이할 처지의 신부로 둔 것이다.
신부는 결혼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이 신랑에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듯,
신부인 사람은 하나님에게 대한 자신의 준비와
기다리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다.

천국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심정
(결혼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은 자신의 삶의 운명 전체를 내어던지는 마음과 같다.)
으로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다.

필자가 결혼을 하려 할때에, 신랑은 되어 보았지만 신부는 되어 보지 못하는데,
집사람은 결혼할때에, 결혼의 긴장함이나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감정이 북받치고,
부모님에게 눈물을 보일만큼 심각하고 지대한 것이었다.

신랑의 입장이 었던 필자는 남자들이 겪는 결혼에 임하는 경우는
군대에 가는 것이나,입사시험을 치르는 것이나,
비슷한 자신의 일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덤덤하였다.

결혼은 남자에게는 여러 일들중의 중대한 일을 치루지만,
결혼은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달린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여자들에게 남의 집(가문, 미국인들은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는것이다.
한가문에 있는 여인이 다른 가문으로 호적을 파서,
새로운 가문의 사람으로 들어가는 결혼은 여자(신부)에게 있어서는
과거에 자신이 살았던 집과는 전혀 다른 가문에 새로운 인생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은 여자에게 중대하고도 소중하며, 진지한 경험이다.

결혼식장에 신랑이 준비하는 것은 간단한 예식복을 입지만,
신부는 신부화장에서부터 신부의 결혼식 옷(드레스)을 입는
상당한 시간이 요하는 준비를 해야한다.
그렇게 신부에게는 결혼식날에 많은 준비와 자신의 몸을 가꾸어야 하듯,
여기서 본문이 주는 교훈은 인생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
그 분안에서 살려는 이들은
신랑(하나님의 아들로 비유하였음)을 맞이할 마음 준비와
다가올 신랑과의 만남을 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여행을 하거나, 출장을 가려할때에, 준비물을 챙긴다.
어느 사람은 일찍 감치 준비하는 경우,
충분히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습성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닥쳐서 준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는 시간까지 준비하려는 게으름이나 지체함이나,
혹은 미리 해놓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시간이 다 되어가는 상태에 준비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늘 약속시간에 늦게 도착하기 마련이다.

코리안 타임이란 것을 겪는 사람들은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에 맞추어 늦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을 약속한 시점에 두고 준비하는 경우,
예를들어 내일 등산을 갖자는 약속이 시작하는 때부터 준비하는 경우와
약속시간을 맞추어 준비하는 경우일 것이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준비하는사람은 허둥지둥 시간에 닥쳐 준비할수 밖에 없고,
등산을 가서는 가져와야 할 것을 잊어버리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을 약속하게 되는 시간으로부터
맞추어 준비해가는 사람은 약속시간까지 있는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고
가기에 미비됨이 없이 준비를 잘하여 좋은 등산을 할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일을 잘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태도이며, 기술이며,습성이다.
미래의 일을 내다볼 줄아는 태도이다.
여기에 나오는 슬기(지혜)로운 다섯신부는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였다.
지헤로운 신부들은 등불이 밝을때에는 괜찮으나,
불을 밝힐 기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대비하여, 그들을 신랑은 맞이할수 있었다.

두신부들의 차이는 준비하는 것, 지혜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자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며, 기회가 오기를 대기하고 있다가 기회를 낚아 채는 것이다.

미련한(어리석은)처녀들은 앞에 것만을 보려는 태도,
현재 자신의 손에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신부들은 자신의 등불이 지금 밝혀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여,
정작 신랑이 올 시각에 자신의 등불을 밝힐 기름이 다 떨어지고서야
기름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어지만,
후회스럽게도 신랑과 결혼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이것은 늦은 막하게 하고 싶은 것다하고나서 나중에 하나님을믿어보게다는 사람이다.
인생의 시간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생에 있어,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힘이며, 열정이다.
인생을 활동적으로 일을 하려면 자신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건강이 뒷받침이 되고, 무슨일을 하려고 할때에,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재능이나, 기술이나, 학식이나,
자신의 일을 이룰 여러 요소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할수 있을 힘이 있을때에 못하고
쓸데없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게 되면, 늙어서 후회할 일 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본문이 주는 크리스챤의 믿음의 예를 든다면,
기름이 자신의 믿음생활을 유지하는 데 왜 필요한가?
하나님을 알고, 배워가고, 경험해 가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신앙인의 경력이나 직분이나, 혹은 과거의 경험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모시고 살아가는데에는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분으로
늘 그분은 신앙인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마치 미래를 사는 것과 같아, 앞을 알수 없는 삶을 살아가듯,
자신의 앞길을 밝혀줄,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해야 살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고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부단히 그분에게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지혜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과 신앙생활을 유지할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여기 나오는 미련한(어리석은) 신부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돈을 갖고 있는 자가 돈을 쓸줄 모르는 것과 같고,
예를 들어, 어느 갑부가 재산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면서, 남을 도와쥐는 커녕,
자신이 쓸수 있는 것도 못쓰고,그는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던 이가 남에게 주는 자신의 그 값진 것을 몹쓸 것으로 오용할때에,
그 아름다움은 천박하며, 타락하여 냄새나게 하는 것과 같고,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 자신의 그주먹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는 데 잘못활용하는 경우라든지,
혹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학식으로 남의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교만의 밑천으로 삼는 것이나,
인기 있던 정치인이 좋은 시절에 국민들에게 바르게 봉사하지 못하다,
인기가 사그라 져, 후회할 날이 있는 경우일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여성신학적인 표현양식과 메시지

크리스챤의 메시지는 시대에 맞는 자신의 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시대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시대를 판단하고,
시대를 인도하며, 시대를 구원하는 역활을 한다.
메시지는 영원성과 구원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사회를 바르게 선도하는 역활을 한다.

크리스챤 메시지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여성적인 신학표현과
여성적인 신학화모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런 요구는 인간사회(예: 교회안에 있는 많은 여성들)의 한축인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며, 인간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대한
신학의 포괄적인 자기표현이다.

신학의 여성적인 표현은 인간구원의 전인적이며,
신학의 자기표현의 다양성과 효과성을 제공한다.
신학의 개념표시는 그 당시의 문화적이며, 사고적인 바탕에 의해 나온 말로서,
당시의 인간들의 사고개념이나 신이해를 나타낸다.

가부장적인 신학적표현에 대해
남성우위의 사회에서 겪고 당하는 남용으로 인한 상처에 대해
여성적신학 표현은 인간치유회복을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여,
인간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해할수 있는
인간존엄의 신학적 이해의 기반을 마련할수 있다.

신학의 여성언어의 표현은 인간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역활과
여성들의 특징을 대변하는 신학적 표현으로
인간사회에 특히 기독교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수 있는 신학적 자기표현이며,
신학의 자기 역활에 대한 재발견이다.

통합적인 하나님의 인간사회의 개입역사에 대해,
여성적인 신학표현은 여성의 특성인 생명, 보호, 치유, 회복, 양육의
기능을 발휘하는 기독교의 메시지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의 여성표현은 또 남성위주의 신학적인 표현과는
다른 면으로서의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과 활동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이며,
유기적인 하나님 통치(하나님은 양성을 초월하신 존재)의 신학적인 표현의 행동양식이다.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사회에 몸담고 있는 계층이나, 개인의 신분간에 필요한 요구나
상황적인 이해에 대해 바른 개념이나 생각들을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접근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신학적인 해석을 내릴수 있도록 하는 융통성이 있는 신학적인 개념들을 제공해야 할것이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의 언어사용은 다양한 사회적인 현상들과 요구들을 이해하며,
복잡한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구조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지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가 교회안에 머물러 있는 제도화된 언어가 아니고,
유기적인 언어로 인간사회에 다양한 구조안에서
(작금의 일반사회는 교회안의 사회보다 훨씬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
기독교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는 언어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섬김의 개념이나 종의 정신은
일반적인 사회적인 사회개념의 종의 개념과는 다르다.
신분계급이 낮은 사회나, 혹은 여성사회에 그리고 아이들사회에 통용되는 종의 개념이
기독교정신에 의한 봉사개념의 변형으로 인하여
기독교사회나 공동체안에서 섬김의 역할로서 종의 정신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어두운 사회적인 현상이라 할수 있는 빈부격차, 계층간갈등,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인 갈등이나 분열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대안을 제시할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리스도화된 종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의 사용을 통해,
공동체사회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종의 정신을 실천할수 있을 것이다.
종적인 사회, 가부장적인 사회의 사고시스템에 대해
공평과 정의의 사회가 실현되어지도록,
기독교의 여성적인 역활인 치유와 회복들을 알려야 하며,
섬김을 나타내는 가치있는 개념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일반사회적인 개념의 종은 계급사회나, 종적인 사회의 권위나,
권세에 굴복하거나, 굴종하는 약자의 위치의 상표로 인시되지만,
교회안에서는 더 강한자, 혹은 힘있는 자가 교회의 공동체안에서 섬기는 자로 거듭나,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신을 실천하여,
일반사회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이나 상처가 생기게 하는 종의 일반사회적인 개념에
대한 섬김이의 대안적인 제시나,
실현된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용어의 남성적사용만을 고집하지 않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상처와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하나님의 상처를 감싸주며,
치유하며 보호해주는 성품이 표현되어지는 것이
훨씬 상처받은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인격에대한 여러가지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활동의 충분함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신학적인 필요한 표현양식의 다양화가 요구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적인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을 여성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는
신학적인 가치있는 표현활동이며, 가부장적인 신학표현의 한계를 넘어가는 효과가 있다
(하나님의 어머님의 역활은 훨씬 인간구원에 있어 필요한 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역에 여성적인 면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사회안에 가치있는 여성적인 역활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 하는데 기여한다.

여성신학적인 언어는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경험의 표현이며,
가부장적인 체계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의 상황하에서 나온 삶의 언어들이다.
고로 지금세대에 필요한 신학적인 시도로서,
전통적이며 강압적인 관계에 대한 변형을 통해
남성위주의 주류문화의 지배에 대한 평등을 추구하는 신학적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여성들에 대한 종(섬김)의 개념의 해방은
여성들에게만 더이상의 봉사의 의무를 지우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들의 제자도의 언어는 남성위주의 가부장적인 제자도의 배타적인 것과
왜곡된 면들을 깨뜨리는 가능성을 제공하며
가부장적인 교회안에 인간평등을 심는 것과
그 종적인 인간관계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갈등의 현장을 치유하는데 기여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교회의 현재와 종말에 대한 사회적역활

크리스챤 공동체는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살며,
동시에 또한 이사회의 소속된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있어 이세상에 대해 저세상을 알리며,
일시적인 것에 대해, 궁극적인 것을 알리는 역활을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와 세상의 종말에 대해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표현하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도덕적 차원을 위한 윤리적인 잣대역활을 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교회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윤리상을 갖도록
그리고 크리스챤들이 모델역활을 할수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사회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그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를 분석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본성안에 있는 원죄의 자범죄와 사회적인 범죄에 대해
교회는 사회에 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죄의 일시성에 대해, 구원의 영원성을 알려주는 역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죄는 인간을 악으로 몰아가며, 인간의 죄의 폐해가 인간사회를 어둡게 만들지만,
그 죄의 어둠의 영향력안에 있는 사회를 향해,
인간의 악과 죄에 대한 폐해에 대해 심판과 정의의 역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죄과 악으로 인한 폐해등,
차별, 고통, 분쟁, 질병등에 대한 치유적인 역활도 보조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악에 대해서 악이라고 말하지 않는 죄를 범할수 있다.
그러므로, 다수의 잘못이나, 사회적인 오류에 대해 교회는 바른 말을 해야 하며,
인간의 죄라도 사회적인 범죄로 취급되지 않는 것에 대해,
즉 일곱가지 죄악(교만, 시기, 분노, 게으름, 탐욕, 방종, 음란)들에 대해
언급하는 역활도 무시할수 없는 교회의 역활이다.
사회적인 법정에서 다루지 않는 실정법이 아닌
인간의 심성이나 본성에 대한 왜곡에 대해 잘못들을 지적하여 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일반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 있어서나,
혹은 편향된 사회적인현상에 대해,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이나,
다른 국가를 침입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서도
바른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부분적인 사회적인 현상인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사용에 대해서,
교회는 인간양심에 경종을 울리는 제 목소리를 내야할 것이다.
교회의 목소리는 근본적인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존하여,
사회적인 이슈나, 관심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며,
그것의 윤리적인 잘못을 지적하며,
그리고 동시에 교회는 그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촉구하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는 빛의 역활을 하며,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역활도 해야 할 것이다.
종의 자세로 섬기며, 화해를 행하며,
사회를 변혁시킬만한 소망을 주는 역활도 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사회적인 치유적인 과정과 화해에 대한 종교적예식은
진리를 찾고, 갈등을 해결하는 근원지로서 대화와 논쟁을 통해
교회는 자신의 역활을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의 소명은 자신의 정체감을 재발견하여,
세상에서 구별된 독립된 개체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사회갱신의 타당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변두리로서 세상에 대해 자신의 사명을 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 대한 위임의 책임 의식과
세상에 대해 구별된 의식으로 세상을 향한 미션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대행기관으로서,혹은 하나님나라의 실현의 공동체로서,
인간사회안에 믿음,소망, 사랑의 실현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인 양심의 기능으로서, 사회의 모든 할동이나 행위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사회적인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려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것이다.
교회는 또한 정상적인 윤리적인 믿음공동체로서,
윤리에 대한 소명을 갖고서,
교회는 사회에 대해 높은 도덕률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또한 사회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에 협조하여,
공공의 유익을 위한 사회의 목적론적인 성취를 바라보면서,
교회 자신의 사회적 협력행위를 강화하며,
시간의 역사적 의식과 현대적인 관련성에 대해 기독교의 역활를 강조하며,
기독교의 세속사회와의 교류와 영향력행사를 통해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상호성을 증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
그들이 살고 있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대안공동체로 사회에서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이나 이슈에 대한
해결의 대안이나 정책적 제안으로 교회가 속한 사회에 건전한 이상향을 제시한다.

교회는 일반사회에 대해서 국외자의 공동체로
사회문제에 조정하는 역활을 통해,
사회적인 사건들에 대한 비상식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에게
문제해결의 구체적인 기대를 가져오는 약속된 근거를 제공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인간사회의 종말에 대한 교회의 격종을 울리는 역활을 한다.
종말에 대한 바른 지식과 예언의 노하우를 알고 있는 크리스챤들은 세상에 대해,
세계의 종말에 대한 경고를 통해,
인간세상의 제한과 종착에 대하여 세상이 준비할수 있도록 권면하며,
모든 인간활동에 대해, 종말의 시급성을 알리고,
그 할동들이 신의 다가올 심판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세계의 종말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을 하늘의 메시지에 연결될수 있도록
가교의 역활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종말의 준비하는 공동체로,
신의 약속이 실현이 되기를 기대하며,
현재와 종말사이를 이을 중간지대에 놓여있는 구심체로,
일시와 영원을 연결하는 역활이 요청된다.
일시는 그것이 사라짐을 통해, 허무함과 무익함을 알게 하고,
일상성에 오는 한계성을 극복할 대안의 메신저로
교회는 피안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함므로써 세상에 대해 구원의 공동체로서 다리를 놓으며,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이 하늘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문으로서의 역활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현재와 종말사이에 놓여있는 영원한 기관으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도구와 기관으로 제 역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현재와 종말사이를 오가며,
세상의 일시성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그 심판의 다가옴을 무시하고 살아가는데에 대해, 심판의 시급성을 알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준비를 강조한다.

교회는 역사적인 공동체로 사회를 변화시킬 자신만의 거룩한 이야기와
영향력을 주는 대안을 가지고 있어,
현재의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가며, 그 시대에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여,
종말을 준비하는 사회가 될수 있도록,
부패하고 어두워 진 사회를 맑게 하며
건강하게 하는 예언자적인 역활을 통해 사회를 갱신하며,
발전시키는 역활도 필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두가지 신학적사고

종교적인 행위는
즉 개인의 신앙적 행위나 종교적 의례를 통한 신과의 접촉을 통한
즉각적인 개인이해나 경험에 입각한 신학과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사려깊게 연구하는 신학은

신학하는 방법이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다.
개인의 즉흥적인 이해신학과 그것을 재이해하는 신학의 차이는 신학방법의 차이이며,
신학방법의 지향하는 목적의 차이일수 있다.
신학적 방법과 목적에 따라 신학적인 접근법은 달라질수 있다.

인간세상에 신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표현하는 방법으로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에 따라,
자신의 믿음에 영감을 주고 자신의 신이해에 즉흥적이지만,
순간성에 따른 순발적인 믿음의 활달성이 따라올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적인 이해와 표현방식은 신의 포괄적인 통치와 그의 성품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은 자칫 신을 알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추구에
치우친 이해와 편견에 빠질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나 신학의 단체적인 연구나 접근을 통해
신이해나 경험을 추인받으며,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신은 초월자이면서, 세계에 편만한 존재로
인간사회에 모든 분야에 관여하며, 신의 존재와 섭리에 있어서,
신과 인생사이에 놓여있는 모든현상에 대해 신학적해석을 추구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세계에 통치하는 신의 성품이나 역활등을 이해하며,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을 따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흥적인 신학방법은 개인의 인간속에 이해되고 경험되어진 내재적이며,
인격교류적인 신경험을 표현하는 신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경험을 표현하는 개인신학의 추구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목표를 통해 신학의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로서 신학적인 표현을 추구한다.

사변적인 신학방법은 즉흥적인 경험가운데에 얻은 정보들을 분류하고, 판단하여,
그 정보들을 체계화하여 그 신학적인 체계안에서

신이해를 종합적으로 세워 갈수 있을 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그런 즉흥적인 신이해나 경험을
신중한 사고적인 이해를 통해 체계적인 신학관을 세워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이해는
경험적인 신학사고와 사변적 신학사고에 따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종합적이해를 가질수 있다.
기도를 할때에나, 설교를 들을때에,

받은 평신도들의 신학형성에 주로 영향을 주는 신학방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접촉하는 신경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이루는데 주된역활을 하게 된다.

섭리는 종합적인 신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신의 성품이나, 신의 통치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여 신의 움직이는 활동이나,
삼위일체 신의 삼위의 성부, 성자, 성령의 각자의
활동이나 역활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요청이 된다.

사변적인 신학은 사람의 신역사의 경험이나 신역사의 이해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신학적인 관점을 갖게하는 것이다.
섭리는 신의 통치의 신정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의문이 제시되고 있으며,
악한 세력의 선한 인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유대인학살들에 대한 이해등도,
신이 과연 살아계시는 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며,
편견이나 일변도적인 주관적인 신이해에 머물게 하는데.
사변적인 신학사고는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게 한다.

즉흥적인 신학관점은 우리들에게 신학적인 영감이나,
실생활에 우리에게 자신의 신이해나 경험에 도움을 주어,
자신의 신의 역사나 섭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사변적인 신학관점은 우리에게 진지한 신학추구를 통해 체계적인 신이해를 갖게하며,
신학의 종합적인 관점을 통해 신학의 자신의 신앙수립에 도움을 갖게 한다.

통합된 신학적인 개념은 신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나 이해일 뿐 아니라,
신에 대한 대응적이며, 대화적이며, 그리고 공동체적인 신학 사고과정를 통해 형성이 된다.
그 신학적인 사고의 모델은 건강하고 논쟁과 창조적인 긴장이 있는 감상을 허락하는 대화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해를 구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신학은
신학자로서 크리스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는 것과 그 메시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혹은 계획적이든, 계획적이 아니든,
매일의 셀수없는 접촉에 의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해 믿음을 배운다.
교회에서 전파되고 교회교인들의 매일의 삶에 의해 이해되는 믿음을
추구하는신학이 즉흥적신학방법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터득하는 주관적인 신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인 가정과 사회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로 자기결정을하게 된다.
크리스챤들은 믿음의 세계가 현실생활과 다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합당하게 교류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이해한다.

주관적인신학은 예배에서 다른 사람들과 문제제기 함이 없이
자기만의 신앙(신학)적인 말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편안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형성한다.
사변적인 신학은 주관적인 신학의 확신하는 것들을
다시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사변적인 사고는 제이의 신학적 사고과정으로
자신의 절대적인(자신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함)

주관적 믿음에 대해 다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사고관점을 다시 객관적인 사고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변적 사고는 짐짓 하는 사고이지만,
그것은 해석의 대안적인 것으로 가능한 일치적인 것과
분명하게 확인된 믿음의 이미를 구성하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신학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나,
신학이 깊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요받는 혹은 감동되는 신학적인 시도가 아니다.
사변적인 신학적 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의 불분명할때에 시행된다.
진지하든 아니든, 주관적인신학은 실수나 혹은 잘못 알려진 내용들로 그 신학의 위기나, 논쟁을 통한 사변적인 신학사고를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다.

믿음안에서의 자극(신학적인 인식)은 사려깊은 신학적사고를 요청한다.
그 자극(인식)은 의식화이다.
그 자극은 신앙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깊은 단계의 감정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믿음의 깊이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인식되어지는 과정으로 그 자극은 흐릿한 믿음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역활을 한다.
의식화된 믿음의 자극(인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한다.

주관적인 신학관점과 사변적인 신학관점의 구분은 역사(시간)를 통해 검증되며,
새롭게 하는 신학적인 확신들에 위한 힘든 첨예화된 신학검증의 가치를 통해 나누어 진다.

목회자에게 주는 도전은 믿음의 이미를 연구하는 것인데,
신학적인 사변적 사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연결되게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목회자의 설교는 첫번째 신학사고인 주관적인 신학에서 나오지만,
그러나 두번째 신학사고인 사변적인 사고의 보다 힘든 과정을 통과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변적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을 검증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아버지와 세상의 아빠의 이메지의 차별화에 대한 믿음의 충분한 이해를 제공한다.

크리스챤들이 믿음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믿음의 확신을 갖게하는 것의
의미하는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한다.

어떤 크리스챤의 믿음의 이슈도 신학자의 연구에 참여하게 한다.
즉 믿음에 대한 어느 것도 신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안에 건전한 성장을 하도록 하는 소명을 이루는데는
자신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주관적이고 기초적인 이해를 고치고,
깊게하며,확장하는 신학적인 사고 시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신의 소망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루고저 하는 소망을 평소에 가지고 있다.
그 소망에 집중된 생각이 자신에게 계속적인 동기부여를 할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평소에 생활에서 나타나도록 힘쓰게 되면,
그 바라는 소원들이 이루어 질수 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생을 살아가는 처세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무런 소망없이 사는 것보다 훨씬 발전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소망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소원들을 적어보고,
그것을 이룰 과정과 단계들을 살펴보며,
자신의 현재의 생활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잡아줄 것이다.
소망에는 구체적인 생각이나 계획이 뒷받침이 없는 막연한 소원이 있으며,
자신의 생각에 이룰수 있다는 가능한 소원이 있는가 하면,
혹은 자신의 생각에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자기생각 넘어의 소원이 있을 것이다.

소망은 언제 필요한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분명한 이정표가 보이지 않을 때에,
그때에는 장래에 대한 구체적인 소망을 생각해보며,
그 생각들을 노트에 적어보며,
그것을 실현가능한 자신의 바라는 목록들로 세워보면
현재의 자신의 캄캄한 앞날에 대한 길이 보여질 것이다.

위에서 언급해듯이 소망이 주는 유익은
먼저, 자신이 해야할 일이나, 마땅히 가야 할길에 대한 이정표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준다.
소망을 세울때에,
자신의 소망에 대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목적(인생의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줄 기본적인 카테고리등: 교사가 되는 길, 변호사가 되는 방향등)이나 시기이나,
주어진 환경에서 이룰 구체적인 목표(단계별로 세울 일시적인 성취에 대한 목록들:
어떤 교사가 될 것인지, 지역이나, 환경이나, 대상에 맞는 교사상,
어떤 계통의 변호사가 되는 단계별 성취목록 혹은 직급에 대한 목표)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갈수 있을 것이다.

소망의 활용면에 있어서,
자신이 세운 소망을, 자신의 생각의 창고나,
기억의 보고에 골동품으로 남겨놓지 않고,
늘 자신의 생각에서 끄집어 내어,
자신의 현재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과거를 살아온 삶의 족적을 살펴보는 교훈의 잣대로 삼으며,
미래를 살아갈 앞날에 대한 기대감의 방향타로 활용할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는 모습이 인생의 삶의 특성이며,
혹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며,
그리고 자신이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기술이다.

지금 당신의 소망은 무엇이며,
평소에 가지고 있는 바라는 바대로 무엇을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당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삶에 대한 기대감이
무엇인지를 끄집어 내어 보고,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진단하며,
수정하여 새로운 앞날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이나 소망을 안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인생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
인생에게 있어, 바라는 믿음(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이 아닌 실상:실제적인 것들, 이다)은
자신의 삶에서 이룰 힘이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언어들

희망, 새로움, 창조, 밝음, 명랑함, 따스함, 낙관적, 초월함, 돌파력등 인생을 살아갈때에,
이 단어들을 생각해만 해도 우리의 마음이 푸듯하다.
짧은 인생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은데,
우리가 겪는 일들이 늘 부정적이고, 절망적이며,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을 통해 가치나 의미를 얻기는 커녕,
고귀한 삶의 자락에 넝마처럼 주렁주렁달려 있는 쓰레기같은 것들을
자신의 삶을 통해 남게 된다면, 우리의 사는 현실을 슬프게 한다.

그렇지만 새날을 맞이하고, 새희망에 부풀고, 새일들을 기다리며,
새사람을 맞이하려는 새마음안에 자신의 삶에 대한 소중한 것들,
사랑, 기쁨, 베풀어나눔,봉사, 감격등을 새기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우리 몸에서 산소를 받아들여,
그공기속에 있는 신선함과 생명의 기운으로 우리의 몸을 지탱하며,
우리속에서 나온 찌꺼리를 몸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생존한다.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받아야
우리의 마음이 생존할수 있다.
희망, 사랑, 믿음의 단어들이 내안에 매돌며, 내안에 남아있어,
나를 힘있게 살게 하는 힘이 되도록, 좋은 양식을 찾아
내마음을 살찌우며 나갈때에,
비록 현실은 힘들고,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다가올지라도,
그안에서 자신의 마음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통해
자신속에 부딪쳐오는 현실의 아픔이나, 실망들을
기쁨이나, 낙관으로 바꾸어 가는 인생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어느 단어가 많이 들어오는 지,
나의 브레인에 무슨 단어들이 많이 입력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자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생각하여,
보는 책, 듣는 음악, 나누는 대화, 청중으로 혹은 시청으로,
혹은 구경으로, 혹은 감상으로
자신의 두뇌로 들어오는 무수한 단어와 그 단어들을 들어오는 정보들이
과연 자신을 이롭게 하며,
자신의 삶을 유익하게 하며, 자신의 하는 일에 도움이되며,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안에 맴돌고 있는 단어가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 그것을 올바르고 건강한 단어들로 바꾸는 작업을 의도적으로 할필요가 있다.
부정, 불신, 투쟁, 미움, 증오,좌절, 배신,무례함, 불손함, 불경건함, 악의, 악행등
이런 단어들의 공격적인 침투의 영향에서 벗어나기위해,
우리안에 자신이 붙잡아야 할 단어들을 매일 생산하기위해,
좋은 생각, 건전한 정신, 따스한 마음, 고마운 마음,
창조적인 태도, 건설적인 자세, 옳은 의도,
선한 생각들에 영향을 주는 유익한 정보들을 모으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이제껏 살아온 날들가운데에 많이 생각나는 단어들이 무엇이며,
가족간에 겪는 일들중에서 생각나는 단어들이 무엇이며,
대인관계에서 떠오르는 단어들이 무엇인지?
자신의 인생사전에 등록된 단어들이 어떤 단어들인지를 살펴보고,
사전수정작업을 다시해보면 어떨지...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이며,
언어의 유희에 좌우되는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신은 언어를 창조하며, 인간속에 언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신의 언어는 세상을 만들어 내었고,
인간의 언어는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낸다.
고로 언어는 인생자신에게 있어,
자신의 표현이며, 자기창조와 자기생산의 기폭제이다.

언어가 나를 살리고 나를 죽이기도 한다.
생명의 언어, 소망의 언어, 기쁨의 언어 지속되는 자신의 앞날이기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기의 생각이 자신의 자아상에 영향을 준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대에서 세수를 할때마다,
자신을 향하여, 너는 할수 있다. 괞찮은 사람이다.
너는 지금 사랑받고 있다. 누구를 사랑할수 있다.
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안에 있는 자아(자기이메지)를 향해,
격려 하는 가운데에 자신의 자아상을 건강한 자신으로 날마다 세워가면,
평소에생활하면서 갖게되는 자신에 대해
소극적인생각이 들고, 그 생각안에 부정적인 자신의 이메지를 갖고 있는 습성에서
자기를 긍정적으로 변하기를 기대할수 있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향해 아침마다
이렇게 하는 생활습성을 갖게 되면
자신의 가진 고정된 자아상에 대해 상당한 발전된 자아상으로 나갈수 있을 것이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던질것은
제한된 생각, 편협된 생각, 길들어진 생각, 부정적인 생각에 자신의 자아상이 만들어져,
그 자아상에 맞는 습관이나, 일처리나, 생활태도나,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상의 생각을 활용하여 자신에 대해 꿈을 꾸며,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향하여,
그것의 바라봄의 기대를 갖고, 성취에 대한 강한의욕을 가지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들때에,
그리고 특히 주변의 일로 인하여,
자신에 대해 너는 왜이러냐? 그리고 너는 왜 그모양이냐? 라고 생각이 들때에,
그렇데 자신에 대한 좋은 이상(긍정적인 자아상,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아상: 그러면 남들도 자신안에비쳐진 자신을 보고 내가 갖고 있는 자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됨)을 생각할수 있겠다.

그런 좋은 자아상에 대한 계속적인 자기추구(자아상을 높이는 시도)를 하여야 하는 것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계속, 일을 하거나,
사건을 겪든지, 환경에 자신이 들어가든지,
혹은 사람을 만나거나, 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자아상이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메시지에 의해 세뇌되어
자신이 과거로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따라,
자신의 자아가 그 주어진 여건들 속에서 만들어 가는 삶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기관리하는 일에 있어서, 계획관리, 시간관리, 시간관리, 일처리습관관리,
그리고 생각관리가 있을 것인데,
그 많은 생각 관리중에, 자신에 대한 자아상(이메지)관리가
자신의 삶에 가장 영향력을 미칠것이다.

자신을 레크레이션(재창조)을 하기 위해,
엔터테이먼트를 활용하는 데 있어, 취미나 오락활동을 할때에
자신이 생활하면서 겪었던 긴장(스트레스)을 푸는 것(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디프레스:불안이나 우울증현상으로 자신의 정신건강에 역작용을 함)과
자신에 대한 이메지(자아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일 경우에
자신의 모습관리나 생활태도에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그 취미나 활동중에 자신의 자아상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활동(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경우에
자신의 몸상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하는 가벼운 걷기를 할수 있는 높지 않은 산에 산보나 산행을 하는 경우)을 하는 것일 것이다.

가령 음악을 듣는다는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취미나 오락을 통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에 보탬이 되는 활동을 할때에,
그 레크레이션의 시간이나, 취미활동을 통해 자신을 발전시킬수 있을 것이다.
가령 빡빡한 생활환경의 단조로운 패턴에서 오는 자기자아상에 정체적인 현상을 지속하다보면,
그 권태로운 생활패턴에 변화를 주는 재미있는 여행을(겨울에 기차를 타고, 겨울 바다를 가서 기분을 전환하는 것이나, 무더운 여름에 경치좋은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경우, 봄에는 가까운 교외의 시골 들녁에 가서 식물이나 초원의 푸르름을 보면서 만물이 생동하는 현상을 즐기다든지, 가을에는 숲속이나 깊은 산속에 가서 저물어 가는 단풍이나, 산의 색깔이 변화해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활을 음미하는 일등)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자신의 자아상(이메지)관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통해서 일것이다. 그 생각의 출처나 영향의 범위를 통해 4가지 정도의 생각패턴을 생각해 볼수 있다.

첫번째는 육체적인 본능이나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고, 혹은 자녀를 멀리 떠나 보낸 어머니가 느끼는 모성애적인 생각이 있으며,
두번째는 자신의 두뇌의 이성기능에서 나오는 정신이나,
사고에 영향을 주는 생각(흔히 우리가 말하는 생각)이라 할수 있는 생각(이생각에서 주로 우리의 자아상에 계속적인 영향을 주기쉽다)이며,
세번째는 영적인세계에서 오는 생각등일 것이다.
기를 모으는 일과 도를 닦는 것, 영적인 현상을 통해 마음의 집중력을 기르는 것(이런 생각들은 방향성이나 도덕성에 있어 인간의 상대적인 한계나, 인간적인 제한에 머문다)등,

그리고 네번째는 인간의 생각속에 가장 고귀하며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과 나누는 생각이다.
이생각은 인간의 운명을 바꿀만한 권세와 능력이 있다.
가령 자신이 신을 믿고 신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기도하면,
신은 자신의 생각으로 혹은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그 범주안에서 세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인간이 그 신의 영향력아래에 있는 신의 세계에 들어가는길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바꿀수 있으며,
자신의 자아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자신이 신의소생이며, 신의 자녀라는 의식은 세상에 그 어떤 생각이나 의식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한 생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