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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6-28
하나님의 창조의 특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음,
하나님과 관계의 독특성을 의미,
창조하시고, 말씀하시고, 축복하시며, 다스리게, 정복하게 하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인간의 창조의 의미는 남녀의 지음이다.
창2:15-25
하나님께서 남자를 택하사, 에덴동산에 살게 하심,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자유로이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의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죽으리라.
하나님께서 남자의 홀로사는 것이 좋지 않으니,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심,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뼈와 살의 관계를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창3:1-7
뱀이 간교하여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더냐?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먹어도 죽지아니하리라,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리라,
여자가 먹음직한 좋은 것으로 여겨, 눈을 즐겁게하여,
자신을 지혜롭게 할 나무로 생각하였다.
그녀는 그열매를 취하여 먹고, 자신의 남편에게도 주어 그 남편도 먹으니,
둘이 자신들의 몸이 벗은 몸인줄알아, 무화과나누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
(최초의 가정이야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을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자신의 존재임을 알게하는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와서, 신의 생김새를 닮아,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통치아래에서, 사람으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자신의 삶의 목적이다.
인생들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인생의 관리자로 살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의 세계에 까지 돌보는 책임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의 만남이나, 가정이룸은 창조사역중의 중요한 사역으로 사람은 결혼을 통해,
자신이 속한 한 가정을 이루며, 그 가정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따라,
이세상에 대해, 정복하고 다스리는 통치의 역활등을 맡게 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온 창조의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는 신을 향해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며, 신과의 교류안에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가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 관계가 시작할때에,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여자를 통해 자신의 몸의 한부분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여인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한다.
여인들은 자신의 남편을 통해 자신의 삶의 울타리를 세우고,
자신의 안전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겨,
그곳에 안주하며, 만족히 살려는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품는 사람을 찾게 된다.
가정은 신비스러운 기관이다.
그것은 전혀 성이 다른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한지붕밑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서로가 질적으로나, 성적으로 아주 다른 사이인데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남편은 여자의 남자편에 있는 여자를 지키는 자이며,
여자는 남자의 안에 있는 남자의 허전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안사람으로 존립한다.
그러므로 서로 안과 밖이 함께 어우려져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결혼생활이 신비로울수 밖에 없다.
남들이 볼수 없고, 알수 없는 둘만의 은밀한 세계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자신들이 한몸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한 몸을 이루어 가는 명제는
평생을 한 지붕아래에 있는 가정에서 이루어 가는 삶이다.
작금의 가정은 너무 쉽게 이가정의 신비로운 면들을 깨뜨리려 하는 현상들이 있지만,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는 남녀의 가정, 결혼 생활은
서로를 서로에게 맞추어 가는 묘한 생활의 연장의 선상에 놓여 있다.
결혼생활을 통해 사람은 다른데서 배울수 없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인생의 깊은 만남과 지속되어가는 인간관계형성과
그로인한 자신의 성품이나, 자질의 개발이 이루어 지게 된다.
물론 부정적인 면으로 부족한 남편과 부족한 아내가
서로의 부족과 허물때문에 서로가 성격이 부딪치고,
상처를 입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자신들은 서로를 통해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
가정은 최초의 이세상에 신으로부터 오는 축복의 기관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정을 통해 인생의 분복을 누린다.
인간의 복의 기관인 최초의 가정의 출발은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 주어진 남녀 자신들의 사명의 명령안에서
신랑과 신부가 함께 한 공동체의 운명을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정을 이룬 사람들에게 생육하라 하셨다.
자녀를 생산하는 복을 주시며, 자녀의 출생을 통해
다음세대에 내려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라는 것이다.
땅에 있는 만물에 대해 관리자로 임명받은 인간들은
가정이나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들을 넓혀 가는 것이다.
직장을 통해, 인간관계를 통해, 사회생활안에 자신의 삶의 터전을 확장해 가라는 것이다.
땅을 정복하라함은 가정을통해,
외로움과 미움과 두려움이 있는 세상의 어두움을 정복하여,
사람들을 품어주는 좋은 인간관계형성과 사랑과 자신감의 사람들이
가정안에서 많이 나와
이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세상의 비참한 부분들을 향해, 소망과 빛남과 밝음과 맑음으로 나가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절망을 소망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격의 어두움을 빛으로,
주변 사람들의 성품의 흐릿함을 밝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흐림을 맑음으로 바꾸어가는 역활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결혼생활, 가정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검은 머리가 흰머리(파뿌리)가 될 때까지,
생활에서 오는 고민과 고생과, 그리고 고통스런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변함없이 남자는 밖에서, 여자는 안에서 가정의 테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뜻밖의 일로 격정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불신과 상처을 입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재정관계로, 혹은 자녀문제로, 아니면, 자녀교육문제로,
사소한 습관의 차이로, 혹은 몰이해나,
잘못된 의사소통의 문제로 여러가지 일들이 부부사이에 가정안에서 일어난다.
행복한 가정에 불의의 불청객인 뱀이 나타나 여인을 유혹한다.
그 가정에 신이 명령으로 내린 제한에 도전하는, 유혹받지 말았어야,
뱀의 유혹을 받아, 뱀이 충동하는대로,
그 열매를 바라보니, 보기도 아름답게 보이고,
자신을 지혜롭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먹지 말아야 할 금단의 열매를 보고,
여인은 그것을 따 먹고 그녀의 남편까지 그 열매를 먹어버렸다.
인간의 죄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명령을 어기고, 인간의 제한을 넘어섰을때에,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부조화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자신들이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습은 사람이 자신안에서 자신에 대한 불안을 보며,
바로 가까운 부부사이에서 서로의 소외와 비난를 경험하며,
가정이 딛고 삶의 터전이 황량하게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며,
평생 삶을 사는 과정이 땀과 고뇌가 섞인 생활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감수해야한다).
지난 날에 그들은 신의 통치하에서 순종하며 살때에는,
그 부부 자신들의 가정생활이 행복하며, 즐거운 나날이었으나,
그 행복한 가정에 먹구름이 덮히게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행복한 가정에 여러가지 불미한 일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부부사이의 순정을 깨는 결혼밖의 간음이나,
혹은 부부간의 부정한 행실로 인한 갈등과
그것의 결과인 별거, 그리고 이혼으로 발전하는 경우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인간의 죄와 연결이 되어있다.
남편의 부정이나 혹은 간음, 부인의 간음이나 혹은 부정
이런 것은 부부간의 정상적인 관계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가정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작금에 메스콤을 타는 유행어중에,
혼외정사, 혹은 프리섹스 혹은 스와핑부부게임이니,
하는 비정상적인 위험한 부부간의 관계모임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타락한 사회의 도덕불감증에서 오는
아주 더러운 사람들의 악한 행태들이 주변에 있다.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소중한 선물이며,
사람들이 결혼과 정상적인 가정생활중에서 누릴수 있는
가장 깊은 단계의 인간의 접촉이며,
인간이 즐길수 있는 신비한 것이다(섹스를 통해 남녀는 서로가
자신들의 영혼들의 통합이 이루어 짐:soul tie,
그러므로 섹스를 할때에 정상적인 관계에서 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행위는 몸만을 섞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악행이란 것, 죄악이란 것은 신이 내린
좋은 도구나, 선물들을 악용이나 남용하여,
인간의 타락한 욕구나,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로 나타낸다.
인간이 짓는 죄중에 가장 더럽고, 자신에게 심각한죄중에 하나가,
자신의 몸으로 짓은 성적인 죄들인 것이다.
이죄는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 짓는 죄로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부정한 성적인 접촉이나, 관계에서오는 동성애로 인한
비정상적인 인간성의 변질과 그로인한 모순된 삶,
성도착적인 행태들, 매독이나 성병, 그리고 에이즈등은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인 섹스의 법칙을 어기는 데서 오는
자신의 몸에 받는 신의 엄중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섹스에 대한 이해와
거기에 대한 자신의 건전한 철학위에 세울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한 가정이나 건겅한 가정을
이룰수 있는 요인이 몇가지 더 되는 것은
혼전정조(남녀동일함)에 대한 자기순결을 지키는 것과
결혼후에는 혼외정사에 대한 유혹을 받는
(마치 이브가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금단의 열매를 바라보고 따먹는 것처럼,
혼외정사의 유혹을 받기가 쉽다) 것을 이기는 것들이다.
최초의 가정이야기는 인류시조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혹은 남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우리들 자신들의 이야기이며,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할 그리고 가정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정에 대한 교훈, 인간성에 대한 교훈등을 배울 수 있다.
더 나아가 상한 가정, 병든가정,
그리고 깨어져 가는 가정등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길은
가정을 세운 신에게로 나아가 그의 지혜와 조언을 구하며,
그의 치유와 회복의 힘을 바라볼 것이다.
미련한 신부이야기(마태복음 25:1-13)
그때 하늘나라는 마치 저마다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을 것이다.
열 처녀중에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지혜)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졌으나,
기름이 없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에 기름을 채워 두었다.
그러나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자, 신랑이 온다. 맞으러 나오너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녀들은 다 일어나 저마다 등을 손질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는데 너희기름을 좀주겠니? 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기름을 나눠 주면 우리도 모자라고 너희도 모자랄거야.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지 그러니?’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사이에 신랑이 왔다.
그래서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후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신랑은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기다림이란 누구에게나 힘든과정이며, 인내가 필요하다.
좋은 일을 앞두고 있을때에는 더욱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다리는 그기간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것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차이는 기다리는 약속시간이 다가와서,
일을 만나보고, 직책에 올라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된다.
왜 내가 이때를(일을 할때에, 기회를 얻을 때에, 직책에 오를때에)
준비하지 못했나를 후회하게 될것이다.
신랑신부가 서로 약혼을 하고 난후에
결혼하는 날까지 서로 자신의 몸을 지키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약혼을 한 신분이라면 약혼한 사람답게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지키며,
장차 주어질 결혼에 대한 설계와 더불어 미래를 대비하는 준비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훨씬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시작할수 있다.
밤에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시간이 가까올수록
그들에게는 힘든 시간이며, 지칠수 있는 기간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저녁시간에 오면 참 좋을텐데,
모두가 지쳐 잠이 오는 그시각에 신랑이 온다는 소식은 인간에게,
때를 기다리는 것과 준비없이 갑자기 일을 당하면,
더 힘든 경험을 겪는 것처럼,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들중에 기다림에서 오는 일들이 많이 있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지,
우연히 오는 기회도 있지만,
대개는 준비하고 대기하는 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 주변에 가끔 버스지나가고 난뒤에 버스스톱을 외치며,
손을 흔드는 경험과 같은 일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천국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 비유하였을까?
천국은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준비해야 들어가는 곳인가?
천국은 준비된 자, 혹은 기다리는 자가 갈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저 인생을 마음대로 살다가 갈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히 천국을 구하고 거기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신부로 비유하여,
신랑을 맞이할 처지의 신부로 둔 것이다.
신부는 결혼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이 신랑에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듯,
신부인 사람은 하나님에게 대한 자신의 준비와
기다리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다.
천국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심정
(결혼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은 자신의 삶의 운명 전체를 내어던지는 마음과 같다.)
으로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다.
필자가 결혼을 하려 할때에, 신랑은 되어 보았지만 신부는 되어 보지 못하는데,
집사람은 결혼할때에, 결혼의 긴장함이나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감정이 북받치고,
부모님에게 눈물을 보일만큼 심각하고 지대한 것이었다.
신랑의 입장이 었던 필자는 남자들이 겪는 결혼에 임하는 경우는
군대에 가는 것이나,입사시험을 치르는 것이나,
비슷한 자신의 일생에 또 하나의 새로운 관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덤덤하였다.
결혼은 남자에게는 여러 일들중의 중대한 일을 치루지만,
결혼은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달린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여자들에게 남의 집(가문, 미국인들은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는것이다.
한가문에 있는 여인이 다른 가문으로 호적을 파서,
새로운 가문의 사람으로 들어가는 결혼은 여자(신부)에게 있어서는
과거에 자신이 살았던 집과는 전혀 다른 가문에 새로운 인생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결혼은 여자에게 중대하고도 소중하며, 진지한 경험이다.
결혼식장에 신랑이 준비하는 것은 간단한 예식복을 입지만,
신부는 신부화장에서부터 신부의 결혼식 옷(드레스)을 입는
상당한 시간이 요하는 준비를 해야한다.
그렇게 신부에게는 결혼식날에 많은 준비와 자신의 몸을 가꾸어야 하듯,
여기서 본문이 주는 교훈은 인생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
그 분안에서 살려는 이들은
신랑(하나님의 아들로 비유하였음)을 맞이할 마음 준비와
다가올 신랑과의 만남을 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여행을 하거나, 출장을 가려할때에, 준비물을 챙긴다.
어느 사람은 일찍 감치 준비하는 경우,
충분히 시간을 두고, 준비하는 습성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닥쳐서 준비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는 시간까지 준비하려는 게으름이나 지체함이나,
혹은 미리 해놓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시간이 다 되어가는 상태에 준비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늘 약속시간에 늦게 도착하기 마련이다.
코리안 타임이란 것을 겪는 사람들은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에 맞추어 늦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준비시간을 약속시간을 약속한 시점에 두고 준비하는 경우,
예를들어 내일 등산을 갖자는 약속이 시작하는 때부터 준비하는 경우와
약속시간을 맞추어 준비하는 경우일 것이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준비하는사람은 허둥지둥 시간에 닥쳐 준비할수 밖에 없고,
등산을 가서는 가져와야 할 것을 잊어버리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을 약속하게 되는 시간으로부터
맞추어 준비해가는 사람은 약속시간까지 있는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고
가기에 미비됨이 없이 준비를 잘하여 좋은 등산을 할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일을 잘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태도이며, 기술이며,습성이다.
미래의 일을 내다볼 줄아는 태도이다.
여기에 나오는 슬기(지혜)로운 다섯신부는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였다.
지헤로운 신부들은 등불이 밝을때에는 괜찮으나,
불을 밝힐 기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대비하여, 그들을 신랑은 맞이할수 있었다.
두신부들의 차이는 준비하는 것, 지혜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자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며, 기회가 오기를 대기하고 있다가 기회를 낚아 채는 것이다.
미련한(어리석은)처녀들은 앞에 것만을 보려는 태도,
현재 자신의 손에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신부들은 자신의 등불이 지금 밝혀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여,
정작 신랑이 올 시각에 자신의 등불을 밝힐 기름이 다 떨어지고서야
기름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어지만,
후회스럽게도 신랑과 결혼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이것은 늦은 막하게 하고 싶은 것다하고나서 나중에 하나님을믿어보게다는 사람이다.
인생의 시간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기름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생에 있어,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힘이며, 열정이다.
인생을 활동적으로 일을 하려면 자신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건강이 뒷받침이 되고, 무슨일을 하려고 할때에,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재능이나, 기술이나, 학식이나,
자신의 일을 이룰 여러 요소들이 필요하다.
자신이 할수 있을 힘이 있을때에 못하고
쓸데없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게 되면, 늙어서 후회할 일 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본문이 주는 크리스챤의 믿음의 예를 든다면,
기름이 자신의 믿음생활을 유지하는 데 왜 필요한가?
하나님을 알고, 배워가고, 경험해 가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신앙인의 경력이나 직분이나, 혹은 과거의 경험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모시고 살아가는데에는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분으로
늘 그분은 신앙인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마치 미래를 사는 것과 같아, 앞을 알수 없는 삶을 살아가듯,
자신의 앞길을 밝혀줄,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해야 살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고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부단히 그분에게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지혜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과 신앙생활을 유지할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여기 나오는 미련한(어리석은) 신부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돈을 갖고 있는 자가 돈을 쓸줄 모르는 것과 같고,
예를 들어, 어느 갑부가 재산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면서, 남을 도와쥐는 커녕,
자신이 쓸수 있는 것도 못쓰고,그는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던 이가 남에게 주는 자신의 그 값진 것을 몹쓸 것으로 오용할때에,
그 아름다움은 천박하며, 타락하여 냄새나게 하는 것과 같고,
권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 자신의 그주먹으로
다른 사람을 때리는 데 잘못활용하는 경우라든지,
혹은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학식으로 남의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교만의 밑천으로 삼는 것이나,
인기 있던 정치인이 좋은 시절에 국민들에게 바르게 봉사하지 못하다,
인기가 사그라 져, 후회할 날이 있는 경우일 것이다.
크리스챤의 메시지는 시대에 맞는 자신의 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시대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시대를 판단하고,
시대를 인도하며, 시대를 구원하는 역활을 한다.
메시지는 영원성과 구원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사회를 바르게 선도하는 역활을 한다.
크리스챤 메시지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여성적인 신학표현과
여성적인 신학화모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런 요구는 인간사회(예: 교회안에 있는 많은 여성들)의 한축인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며, 인간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대한
신학의 포괄적인 자기표현이다.
신학의 여성적인 표현은 인간구원의 전인적이며,
신학의 자기표현의 다양성과 효과성을 제공한다.
신학의 개념표시는 그 당시의 문화적이며, 사고적인 바탕에 의해 나온 말로서,
당시의 인간들의 사고개념이나 신이해를 나타낸다.
가부장적인 신학적표현에 대해
남성우위의 사회에서 겪고 당하는 남용으로 인한 상처에 대해
여성적신학 표현은 인간치유회복을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여,
인간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해할수 있는
인간존엄의 신학적 이해의 기반을 마련할수 있다.
신학의 여성언어의 표현은 인간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역활과
여성들의 특징을 대변하는 신학적 표현으로
인간사회에 특히 기독교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수 있는 신학적 자기표현이며,
신학의 자기 역활에 대한 재발견이다.
통합적인 하나님의 인간사회의 개입역사에 대해,
여성적인 신학표현은 여성의 특성인 생명, 보호, 치유, 회복, 양육의
기능을 발휘하는 기독교의 메시지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의 여성표현은 또 남성위주의 신학적인 표현과는
다른 면으로서의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과 활동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이며,
유기적인 하나님 통치(하나님은 양성을 초월하신 존재)의 신학적인 표현의 행동양식이다.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사회에 몸담고 있는 계층이나, 개인의 신분간에 필요한 요구나
상황적인 이해에 대해 바른 개념이나 생각들을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접근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른 신학적인 해석을 내릴수 있도록 하는 융통성이 있는 신학적인 개념들을 제공해야 할것이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의 언어사용은 다양한 사회적인 현상들과 요구들을 이해하며,
복잡한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구조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지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가 교회안에 머물러 있는 제도화된 언어가 아니고,
유기적인 언어로 인간사회에 다양한 구조안에서
(작금의 일반사회는 교회안의 사회보다 훨씬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
기독교메시지를 전달할수 있는 언어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섬김의 개념이나 종의 정신은
일반적인 사회적인 사회개념의 종의 개념과는 다르다.
신분계급이 낮은 사회나, 혹은 여성사회에 그리고 아이들사회에 통용되는 종의 개념이
기독교정신에 의한 봉사개념의 변형으로 인하여
기독교사회나 공동체안에서 섬김의 역할로서 종의 정신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어두운 사회적인 현상이라 할수 있는 빈부격차, 계층간갈등,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인 갈등이나 분열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대안을 제시할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리스도화된 종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의 사용을 통해,
공동체사회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종의 정신을 실천할수 있을 것이다.
종적인 사회, 가부장적인 사회의 사고시스템에 대해
공평과 정의의 사회가 실현되어지도록,
기독교의 여성적인 역활인 치유와 회복들을 알려야 하며,
섬김을 나타내는 가치있는 개념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일반사회적인 개념의 종은 계급사회나, 종적인 사회의 권위나,
권세에 굴복하거나, 굴종하는 약자의 위치의 상표로 인시되지만,
교회안에서는 더 강한자, 혹은 힘있는 자가 교회의 공동체안에서 섬기는 자로 거듭나,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정신을 실천하여,
일반사회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이나 상처가 생기게 하는 종의 일반사회적인 개념에
대한 섬김이의 대안적인 제시나,
실현된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용어의 남성적사용만을 고집하지 않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상처와 고통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하나님의 상처를 감싸주며,
치유하며 보호해주는 성품이 표현되어지는 것이
훨씬 상처받은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인격에대한 여러가지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활동의 충분함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신학적인 필요한 표현양식의 다양화가 요구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적인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을 여성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는
신학적인 가치있는 표현활동이며, 가부장적인 신학표현의 한계를 넘어가는 효과가 있다
(하나님의 어머님의 역활은 훨씬 인간구원에 있어 필요한 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역에 여성적인 면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사회안에 가치있는 여성적인 역활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 하는데 기여한다.
여성신학적인 언어는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경험의 표현이며,
가부장적인 체계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의 상황하에서 나온 삶의 언어들이다.
고로 지금세대에 필요한 신학적인 시도로서,
전통적이며 강압적인 관계에 대한 변형을 통해
남성위주의 주류문화의 지배에 대한 평등을 추구하는 신학적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여성들에 대한 종(섬김)의 개념의 해방은
여성들에게만 더이상의 봉사의 의무를 지우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들의 제자도의 언어는 남성위주의 가부장적인 제자도의 배타적인 것과
왜곡된 면들을 깨뜨리는 가능성을 제공하며
가부장적인 교회안에 인간평등을 심는 것과
그 종적인 인간관계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갈등의 현장을 치유하는데 기여 할 것이다.
종교적인 행위는
즉 개인의 신앙적 행위나 종교적 의례를 통한 신과의 접촉을 통한
즉각적인 개인이해나 경험에 입각한 신학과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사려깊게 연구하는 신학은
신학하는 방법이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다.
개인의 즉흥적인 이해신학과 그것을 재이해하는 신학의 차이는 신학방법의 차이이며,
신학방법의 지향하는 목적의 차이일수 있다.
신학적 방법과 목적에 따라 신학적인 접근법은 달라질수 있다.
인간세상에 신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표현하는 방법으로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에 따라,
자신의 믿음에 영감을 주고 자신의 신이해에 즉흥적이지만,
순간성에 따른 순발적인 믿음의 활달성이 따라올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적인 이해와 표현방식은 신의 포괄적인 통치와 그의 성품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단편적인 신이해나 경험은 자칫 신을 알고 경험하는 신학적인 추구에
치우친 이해와 편견에 빠질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나 신학의 단체적인 연구나 접근을 통해
신이해나 경험을 추인받으며,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신은 초월자이면서, 세계에 편만한 존재로
인간사회에 모든 분야에 관여하며, 신의 존재와 섭리에 있어서,
신과 인생사이에 놓여있는 모든현상에 대해 신학적해석을 추구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인간세계에 통치하는 신의 성품이나 역활등을 이해하며,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신학적인 관점을 따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흥적인 신학방법은 개인의 인간속에 이해되고 경험되어진 내재적이며,
인격교류적인 신경험을 표현하는 신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는 신경험을 표현하는 개인신학의 추구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목표를 통해 신학의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로서 신학적인 표현을 추구한다.
사변적인 신학방법은 즉흥적인 경험가운데에 얻은 정보들을 분류하고, 판단하여,
그 정보들을 체계화하여 그 신학적인 체계안에서
신이해를 종합적으로 세워 갈수 있을 것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그런 즉흥적인 신이해나 경험을
신중한 사고적인 이해를 통해 체계적인 신학관을 세워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이해는
경험적인 신학사고와 사변적 신학사고에 따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종합적이해를 가질수 있다.
기도를 할때에나, 설교를 들을때에,
받은 평신도들의 신학형성에 주로 영향을 주는 신학방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접촉하는 신경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이루는데 주된역활을 하게 된다.
섭리는 종합적인 신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신의 성품이나, 신의 통치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여 신의 움직이는 활동이나,
삼위일체 신의 삼위의 성부, 성자, 성령의 각자의
활동이나 역활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요청이 된다.
사변적인 신학은 사람의 신역사의 경험이나 신역사의 이해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신학적인 관점을 갖게하는 것이다.
섭리는 신의 통치의 신정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의문이 제시되고 있으며,
악한 세력의 선한 인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유대인학살들에 대한 이해등도,
신이 과연 살아계시는 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며,
편견이나 일변도적인 주관적인 신이해에 머물게 하는데.
사변적인 신학사고는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게 한다.
즉흥적인 신학관점은 우리들에게 신학적인 영감이나,
실생활에 우리에게 자신의 신이해나 경험에 도움을 주어,
자신의 신의 역사나 섭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사변적인 신학관점은 우리에게 진지한 신학추구를 통해 체계적인 신이해를 갖게하며,
신학의 종합적인 관점을 통해 신학의 자신의 신앙수립에 도움을 갖게 한다.
통합된 신학적인 개념은 신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나 이해일 뿐 아니라,
신에 대한 대응적이며, 대화적이며, 그리고 공동체적인 신학 사고과정를 통해 형성이 된다.
그 신학적인 사고의 모델은 건강하고 논쟁과 창조적인 긴장이 있는 감상을 허락하는 대화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해를 구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신학은
신학자로서 크리스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는 것과 그 메시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혹은 계획적이든, 계획적이 아니든,
매일의 셀수없는 접촉에 의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을 통해 믿음을 배운다.
교회에서 전파되고 교회교인들의 매일의 삶에 의해 이해되는 믿음을
추구하는신학이 즉흥적신학방법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터득하는 주관적인 신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인 가정과 사회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로 자기결정을하게 된다.
크리스챤들은 믿음의 세계가 현실생활과 다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합당하게 교류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이해한다.
주관적인신학은 예배에서 다른 사람들과 문제제기 함이 없이
자기만의 신앙(신학)적인 말을 갖고 있지만,
자신에게 편안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형성한다.
사변적인 신학은 주관적인 신학의 확신하는 것들을
다시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사변적인 사고는 제이의 신학적 사고과정으로
자신의 절대적인(자신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함)
주관적 믿음에 대해 다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사고관점을 다시 객관적인 사고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변적 사고는 짐짓 하는 사고이지만,
그것은 해석의 대안적인 것으로 가능한 일치적인 것과
분명하게 확인된 믿음의 이미를 구성하는 시도이다.
사변적인 신학은 신학적으로 옳다는 것에 대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나,
신학이 깊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요받는 혹은 감동되는 신학적인 시도가 아니다.
사변적인 신학적 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의 불분명할때에 시행된다.
진지하든 아니든, 주관적인신학은 실수나 혹은 잘못 알려진 내용들로 그 신학의 위기나, 논쟁을 통한 사변적인 신학사고를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낸다.
믿음안에서의 자극(신학적인 인식)은 사려깊은 신학적사고를 요청한다.
그 자극(인식)은 의식화이다.
그 자극은 신앙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깊은 단계의 감정적인 요소들을 다룬다.
믿음의 깊이에서 감추어져 있는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인식되어지는 과정으로 그 자극은 흐릿한 믿음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는 역활을 한다.
의식화된 믿음의 자극(인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길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한다.
주관적인 신학관점과 사변적인 신학관점의 구분은 역사(시간)를 통해 검증되며,
새롭게 하는 신학적인 확신들에 위한 힘든 첨예화된 신학검증의 가치를 통해 나누어 진다.
목회자에게 주는 도전은 믿음의 이미를 연구하는 것인데,
신학적인 사변적 사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연결되게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목회자의 설교는 첫번째 신학사고인 주관적인 신학에서 나오지만,
그러나 두번째 신학사고인 사변적인 사고의 보다 힘든 과정을 통과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변적사고는 주관적인 신학을 검증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아버지와 세상의 아빠의 이메지의 차별화에 대한 믿음의 충분한 이해를 제공한다.
크리스챤들이 믿음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믿음의 확신을 갖게하는 것의
의미하는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한다.
어떤 크리스챤의 믿음의 이슈도 신학자의 연구에 참여하게 한다.
즉 믿음에 대한 어느 것도 신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안에 건전한 성장을 하도록 하는 소명을 이루는데는
자신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믿음의 주관적이고 기초적인 이해를 고치고,
깊게하며,확장하는 신학적인 사고 시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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