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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1/28
    간디의 일곱가지 사회악에 대해서
    목동
  2. 2006/11/28
    역전의 인생
    목동
  3. 2006/11/27
    인생의 입과 신의 이름
    목동
  4. 2006/11/27
    인생은 신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이다
    목동
  5. 2006/11/26
    감정치료에 대해(1)
    목동
  6. 2006/11/26
    영성발달의 심리학(1)
    목동
  7. 2006/11/24
    개인적 감사
    목동
  8. 2006/11/24
    신의 마음
    목동
  9. 2006/11/22
    시인의 마음과 신의 자비
    목동
  10. 2006/11/21
    사람(자신)을 치유하려면
    목동

간디의 일곱가지 사회악에 대해서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가장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살았던 인물중에 간디를 꼽을수 있겠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믿음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사적이든 혹은 공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인 활동이나 생활철학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몸에 배어
자기희생과 자기헌신을 통해
인도나라와 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여, 인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활을 하였다.

그가 주장한 사회적인 악을 일곱분야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Politics without principle
원리나 원칙이 없는 정치를 두고 사회악이라 하였다.
정치는 권력과 힘을 통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와 국민을 인도하는 역활을 한다.
그래서 정치지도자가 누가되는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나, 방향이 달라질수 있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 지도자의 역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철학이 뚜렷한 것과 자기신념이나,
통치이념에 대한 분명한 원리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지도자를 따르는 국민들이 우왕좌왕하며,
사회가 혼돈에 빠질수 있으며,
무질서를 통해 국가나 사회가 발전하지 않고 퇴보하게 된다.

그러나 뚜렷한 원리와 공정한 원칙에서 출발하는 정치행위는
사회를 투명하게 하고,
또한 바른정치권력의 공정한 시행을 통해,
사회의 각분야에 좋은질서와 조화된 발전을 가져오게 한다.
인간의 정치행위와 권력은
인간사회의 전반에 걸쳐 좋은 영향을 인간사회의 모든 조직이나 활동에
건전한 생활철학이나, 모든 인간관계와 관리행위에 좋은 영향을 준다.

Wealth without work
불로소득이나 부당한 소득도 불의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일하지 않는 부도 사회에 필요악이다.
사회에 대해 공헌하지 않으며, 부를 쌓아두고,
자신만을 위하는 일도 사회적으로 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부의 편중이 심화되면,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인 불균형이나 사회적인 계층의 갈등을 일으키고,
경제사회의 구조적인 악순환을 일으켜,
즉 부의 편중이나, 집중으로 인한 전반적인 사회의 여러계층에 대해 분배가 약화되어,
사람이 사는 여러가지 환경이나 여건들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나, 부를 쌓는 것은 부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부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부응하며,
균형있게 자신과 타인을 함께 위하는 것으로 활용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부의 경제적인 혜택은 신앞에 사는 인간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삶의 요구와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기여하도록
부의 분배가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회구성원이 더불어,
공존공영하는사회의 구조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일조 할것이다.

Commerce without morality
도덕이 없는 상업행위도 또한 사회의 적이다.
자유 경제의 원리하에서 자본중심의 사회의 관심이 오로지 이윤을 극대화하고,
비지니스의 자본집중화와 이윤우선정책을 추구하기만하고,
기업의 사회의 전반적인 책임을 소홀히하는
그런 기업의 사회적인 활동은 비양심적인 처사가 되어,
사회의 발전에 저해가 될뿐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무시하게 된다.
예를들면, 사람들이 주로 먹는 공공의 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만드는 기업이 일정수준의 위생기준이나,
영양요소에 저해되는 요소를 사용하여 음식을 만드는 일등이며,
또한 기업의 독점행위도 지나치게 되면,
다른 기업의 공존과 공영에 위협이 되어,
사회구성원간의 서로의 생존문제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상업행위의 이윤추구의 목표는 일차적인 목표라면,
인간사회의 질서존중과 인륜의 가치를 존중히하는 상업행위는
단지 상업자신의 일차적인 이윤극대화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확대를 통한 이차적인 경제활동의 공정한 기여를 통해,
그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인간사회의 공동유익과 발전에 기여하게 되어,
인간사회의 문명의 혜택아래 살게 하여,
인간의 삶의 행복과 윤택한 생활환경조성에 기여하게 된다.

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간의 쾌락추구만의 오락행위나,
문화와 예술활동의 비양심적인 행위는 인간의 성품을 건전하게 인도하지 않고,
인간성을 타락시키는 어두움의 쾌락의 도구로 인간을 전락시킨다.
인간에게 전전한 오락이 필요하고,
인간의 취미나 문화예술활동을 통한 자기표현이나, 자기발전에 기여할수 있다.
인간의 재창조(레크레이션)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인간사회의 엔터테이트멘트의 활용이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도리어 인간의 양심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인간의 고귀한 성품을 타락시켜,
범죄와 악행을 일삼는 인간군상들로 양산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래서 구조적인 개인인간의 악과 사회악을 낳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락은 인간의 건전한사회활동이나
예술과 문화의 건강한 발전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건전한 오락이나 문화와 예술활동은
인간의 다양한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들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며,
그런 옳은 문화예술적인 표현양식의 발산을 통해
인간성의 성장이나 성숙으로 발전시키게 되어,
사회의 모든 관계나 조직속에,
풍부한 인간성이 넘치는 인간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일조하게 된다.

Education without character
사람의 인성교육을 무시하고, 단지 기능교육이나,
기술교육에 매달리는 것은 인간의 사람됨을 만들어가는 교육의 목적을 도외시하여,
비인간성의 인간들만 양성하여,
건강한 사회의 바로미터인 홍익(옳은) 인간개발에 실패하여,
인간이 사는 사회가, 밝아지지 않으며,
서로 믿고 신뢰하는 좋은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데 실패하기 쉬어진다.

반면에 교육이 향하는 목표가 인간속에 있는 좋은 덕성과 인성의 함양을 통해 이루어 진다면,
양심과 도덕성의일정한 수준을 갖춘 인간을 만들어 내는 교육을 할수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양산은 사회를 밝게하며,
사람다운 사람이 살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다음세대에 건강한 사회적인 유산과 좋은 문화를 후대에도 물려줄수 있을 것이다.

Science without humanity
인간됨을 존중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의 자유와 존엄을 중시하지 않는 과학의 추구또한 사회악을 일으키기 쉽다.
과학은 세상에 널려져 있는 감추어 있는 신의 신비와 지혜를 탐구하는 것으로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는 쪽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생명의 생존과 번영의 목적을 무시하는 과학의 추구는 인간생명을 위협하고,
인간사회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비인간적인 인간이 사는 삶의 환경이나, 사회적여건만을 조성하게 되기쉽다.
그리고 더나아가, 그런 과학의 추구가
단지 인간을 파괴하는 문명의 이기를 발견내지 발명하게 되면,
그것이 인간이 사는 사회에 위협이 되며,
그 문명이기는 인간이 사는 사회를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을 부추기며,
인간이 사는 사회의 평화를 위협한다.

반면에 생명존중의 목표아래 과학의 추구는
인간세계의 감추어진 지혜의 보고와 자산이 드러나,
사람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공헌을 하며,
인간 사회의 문명과 문화을 발전시키는
근본적인 사회의 과학발전적인 구조를 만들어가는 역활을 하게 된다.

And worship without sacrifice
희생이 없는 종교행위나 활동은 인간으로하여금,
자신이 신앞에 갖추어야 할 겸손한 태도와 책임있는 자세를 갖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런 종교적인 접근은 당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민하고 고통당하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며,
모든 인간사회의 모든 문화나, 문명활동의 방향성에 좋은 공헌을 하지 못하며,
인간역사의 의미나 발전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교는 그 사회에서 도태되며,
당대의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희생이나, 자기변혁을 통한 종교적인 추구나 활동은
당대사람들의 당하는인간적 고통과 고민스런 문제에 대해 의미와 가치의해답을 줄수 있으며,
더나아가 종교의 영향력있는 힘으로 바람직한 인간성 발전과
당대사람들의 개인의 인간구원에 중요한 영향을 주며,
당대의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사회책임성을 통해
종교자신의 희망적 역활을 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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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인생

여러사람들중에, 인생반전의 삶이나,
역전의 용사로 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긴 기간을 기다림속에 자신을 연마하며,
하루하루에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땀흘린 열심과
수고의 달콤한 열매를 맺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이다.
또한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경우라든지,
안되다고 하는 일이지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여, 자기목표에 도달하는 경우일것이다.

옛날에, 어느 집에 한 남자가 두여인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한 여인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다.
그녀는 제때에 남편에게 필요한 자녀들을 낳고,
자녀들을 통해 남편의 관심과 애정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 가정에 있는 다른 한 여인도 그 남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삼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란 미운오리새끼 마냥,
자신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아픔속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 가정의 지붕밑에, 한남자와 두여자의 삶이란,
긴장과 질투의 시샘안에서 바람잘날없는 경쟁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자녀를 셋이나 둔 그 여인은 남부럽지않게,
집안에서 큰소리치면서 살며, 자녀없어 살아가는 그 불쌍한 여인을 무시하고,
구박하고,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아이들을 내세워 자신을 으시대며,
그녀는 불임의 그여인을 빈정대며, 불쌍한 그여인을 괴롭혔다.
그 가운데에 살고 있는 처량한 여인의 삶속에,
단지 남편의 사랑만이 유일한 낙이며, 희망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마음은 늘 이여인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그여인에게 쏟으면서, 그녀를 위로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행복하지 못하다.

자녀를 갖지 못하는 여인의 한은 아무나 이해할수 없듯이, 그녀는
마음대로 아이를 가질수 없는 자신의 몸을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
단지 자신의 운명이라 알고,
한 집안의 원수인 그 못된 여인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날 이 여인은 결심을 한다.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극복할 길을 찾아,
신을 만날수 있는 거룩한 장소인 성소에 나아가,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심과 더불어 그동안 쌓여있던,
한많은 여인의 울분을 쏟아내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신에게 자신에게도, 아이를 달라고 미친듯이 구하였다.
거기에 있던 멍청한 사제가 그것을 보고,
여인에게 술취하지 않았냐고 다구친다.
그 여인은 답답한 가슴을 안고,
자신의 심정을 미친듯이 신의 가슴에 자신의 응어리를 던지며,
그 선한 신에게 자신의 절실한 소원을 아뢰고 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렇게 인생자신이 지극한 정성으로 무엇을 구하면, 신은 거기에 응하는 분이다.

신은 그녀에게 귀한 옥동자를 선물로 그녀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그녀의 상처투성의 과거의 울분의 덩어리가
이제는 오히려 그 가슴깊이에서 나오는 신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뀌어,
자신의 감사를 신에게 표현하지 않고는 보응할 길이 없어,
그녀는 그렇게 소중하게 구하여 얻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아들을
선뜻 신에게 평생을 신의 사역자로 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젖떼기가 무섭게 그아들을 신의 전에 갖다 바쳤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한많은 인생을 반전하는 멋진 홈런을 날리면서,
그녀는 이후에, 세아들들과 두딸들을 낳는 복을 신으로부터 받아,
다복한 인생을 살아갔다.
인생반전의 전형적인 예이며,
고진감래의 기다림속에, 행복한 유종의 미의 복을 받은 칭송받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여인으로 바뀌어 살게되었다.

야구게임에 한 팀이 계속해서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중에
마지막 공격찬스를 맞은 지는 팀이 투아웃에 이제는 이길 가망이 없는 상태에 있을때에,
그 팀의 마지막 타자가 등반하여,
역전의 홈런을 치는 장면을 보고,
관중들은 감격스런 희열을 맛보며, 야구의 묘미를 만끽한다.
인생에도 역전의 홈런을 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종종 우리주변에 일어나곤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인생이란 끝까지 경주하듯
마지막순간까지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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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입과 신의 이름

시편113:1-2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말은 인생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와야 할 말이다. 
인생은 언어사용의 존재이다.  무슨 말을 사용하는 가에 따라,
그사람의 인생과 삶을 이야기할수 있다. 

인간이 신을 말하며, 그분을 찬양하며,
그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하는 것은
신이 인간을 언어적 존재로 세우시고,
그 언어를 통해 인간과 대화하기를 원하셨다. 

 

원래 인간의 언어적 구조인 구음이 하나였다. 
바벨탑까지 쌓아 놓은 인간의 교만과 자위권남용으로 인하여,
신은 인간의 언어를 헤쳐놓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는 하나로 통하며,
다양한 인종의 언어라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공통의 구조적인 언어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간의 언어적 시스템이
신과의 대화를 통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어질수 있다.

 

신은 인생을 지으시고 기뻐하셨다. 
그는 인생들이 신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원래 신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알려진 신은
그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성품이나 본질을 계시한다. 

신의 가장 신다운 이름은 스스로 있는자,즉 자존자이다. 
신이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 
누구의 필요나, 동기가 아니라, 신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모든 만물의 존재나 모든 인간존재의 원인은 바로 신에게 있다. 
인간의 존재의 근원이 신에게서 오므로,
신의 이름은 인간의 존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신의 이름이 그의 성품과 본질을 보여주므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살펴볼수 있다. 
신의 이름이 다양함은 인간의 현실과 경험세계에 대해,
어느 상황이나, 형편에라도 인간을 대면할수 있으며,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로 신이 존재할수 있다는 말이다. 

 

신의 이름은 기묘자라, 그가 행하시는 일은 인간이 다 이해할수 없고,
다만, 추측하고, 상상할 뿐이나,
신의 역사는 확실한 현실이며, 신의 오묘한 세계이다. 
인간이 풀수 없는 수수께끼나, 해결할수 없는 문제는 신의 손안에서 해결된다. 

 

신의 이름은 모사라, 아무리 인간이 지혜를 발휘하고,
재간을 부리고, 전략을 세울지라도,
신의 지혜나 전략에는 미치지 못하며,
진정 지혜를 구하고, 모략을 구하며, 지략을 구하려면,
신의 지혜의 세계을 이해해야하며,
신의 지혜의 힘을 빌어야 할 것이다.

 

신의 이름은 상담가이다. 
그는 영원한 카운셀러이다. 
그가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풀어주는 선생이며,
난제를 극복할 조언을 줄수 있는 조언자이다.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나, 자신에 대한 깊은 무의식의 세계나,
무궁무진한 두뇌의 세계안에도,
신의 손길이 미쳐있고,
인간이 개발하지 못한 곳에 신의 지혜가 널려있다. 
이지혜 또한 그를 상담가로 모신 인생이 발견할 것이다.

 

신의 이름은 전능자라,
그는 천지를 만들고, 온 만물을 유지하며,
관리하는 전능한 능력과 권세를 갖고 있다. 
모든 힘이나, 권세는 그에게서 나온다. 
그가 할수 있는 하나님으로 인간을 일하게 하시며,
인간에게 모든 힘을 공급한다. 
호흡하는 자마다 그신의 호흡케 하는 힘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신의 기운이 임하여, 인생이 호흡하며, 힘을 얻고 삶을 살아간다. 
그 신이 존재하기에
인생은 존재하고 활동한다.  그리고 그 분을 찬양한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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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신과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이다

 

신을 두려워 하며,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는 자에게는 인생의 복이 있다.
복의 근본은 만물을 있게 한 신에게 있으며,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이시다.
그는 신을 모시고 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신의 자신에게 내려준 분복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신이 원하는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다.
신이 명한 바를 크게 기뻐하며,
그신의 명령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렇듯이 그 의인은 신을 두려워 하며,
신이 정한 인생의 이치를 무시하지 않고, 하늘을 거역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의인의 삶을 통해 그자손들에게도 복이 된다.
좋은 부모가 좋은 인생을 사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들, 정신적인것, 물질적인 것, 생활적인 것 등을 자녀들이 받는다.
그 자녀들은 부모들이 쌓아놓은 귀한 것들을 더 발전시켜,
세상에 더 강한자, 혹은 영향을 주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

악인의 자손들보다 의인의 자손들이 더 잘되어 가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혹은 개인의 족보사를 통해, 알수 있다
(미국의 두가문의 이야기: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문의 자손들중 많은 학자, 정치가, 문벌이 좋은 자손들이 나왔으나, 당시에 도둑질을 하던 자의 자손의 가문에는 강도, 살인, 도둑, 사회적인 부랑아등이 여러세대를 두고 나왔다)

환영받는가운데, 온가족이 기다리는 축복속에 태어난 아이는 행복할 것이다.
좋은 환경가운데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에게 복이다.
부모들이 좋은 교육을 해주고, 자기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속에서 살게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신을 잘돌보지 않고, 게으르다든지,
마음을 못되게 먹고 살게되면,
자신의 인생이 악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며,
결국에는 망신당하는인생으로 바꾸어 질수 있다.

바다밑 흙속에 묻혀있는 조개속에 진주같이
힘들고 어려운 생활현실에서 굴하지 않고,
부지런히 자신을 갈고 닦아, 자수성가하거나,
오히려 인생반전의 산 증거로 어려운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활짝 펼친 사람들의 삶들도 있으며,
그들 가운데에 인생의 굴곡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의연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같은 인생의 동료로서 그들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민심이 천심이다 라는 말처럼,
선거때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투표를 할 후보들을 생각한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나온다. 그것처럼
인심도 천심이다. 사람이 옳게 마음먹고 살면 옳은 일이 생기고,
악한 마음을 먹고 살면 악하고, 안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인생들 자신이 마음을 먹은대로 자신들의 생각이나 비전을 가꾸고 일구어 갈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삶을 만들것이다.
결국에는 자신이 만들어 온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인생의 주인에게 보상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운명의 행운이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행운을 기대하며, 토정비결을 보며, 그날의 운수를 쳐다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향하여, 잘되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인간의 삶은 신과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이 인생들에게 일정한 분복을 주면,
그것은 마치 재능이나 재물을 맡는 자처럼 자기관리를 잘하여,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그것을 통해 더 많이 남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까지 도움을 주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복이며, 자신의 행복이다.

인생은 울면서 왔다가 생활하면서,
울게 되는 현실에, 찌들려 지내다, 한번 얼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인생을 활짝 펴보지 못하며 지내다,
생활의 제한이나, 염려에 울다가 지쳐,
한없는 인생의 한을 남기고, 애처로운 가족들의 통곡속에서 생을 마감하다면,
참으로 슬픈인생이다.

그렇지만 인생은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절호의 기회로 알고,
신의 명하는 바를 이루며,
어두움가운데에서 빛이 비쳐지는 역경속에서
오히려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들의 삶은 자신에게 축복이 되며,
자손에게 유익이 되며,
또한 그사람들의 삶은 명예로와 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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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치료에 대해(1)

단기적이며 역동적 정신치료요법는 감정의 두려움을 다루는 데 촛점이 있다.
짧은 시간안에 감정치료에 촛점을 맞추어,
효과적으로 통합된 방법으로 환자를 다루며,
환자의 지속된 감정문제의 성격과 중요한 증상을 다루는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인 치료는
장기치료를 행하는 일반적인 정신분석치료를 의미하지 않고,
환자의 정서갈등이나 변화기피를 하는 현상에 대해
긍정적인 정서변화와 행동변화 촛점을 목표로 하는
자발적이며, 협력적인 치료방법이다.

병적인 감정의 요법은 역동적 정신치료적 갈등의 개념으로부터
증상을 이해하는 언어이론과 행동주의 치료로
환자들의 병적인 감정과 증상들을 재해석을 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환자들의 병적인 감정들은 대부분 슬픔이나, 분노, 폐쇄,
그리고 자신에 대한 억압된 감정들을 통해 노출된다.
그리고 이 병적인 감정들을 다루는 것이 감정요법의 주된 과제이다.

병적인 감정과 염려조절의 요법은 환자들에게
너무 자주 직면하는 병적인 감정을 치료하는 데 촛점이 맞추어 있다.
병적인 감정의 치료적인 암시는
병적인 두려움을 다루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조직적인 감정조절로 치료하는 것이다.

정서를 경험하게 하는 목적의 치료는
환자의 신경증적인 현상을 나타나는 갈등된 감정을 노출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감정표현요법은 적응적인 표현으로
환자가 대인 관계안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원함이나, 필요성에
잘 적응시키는 치료적인 훈련이다.

이 감정치료법안에 있는 재구성요법에는
자기방어기제에 대한 재구성요법과 정서의 재구성요법,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적인 자아재구성요법으로 나눈다.

재구성요법은 환자의 관점, 경험,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해하는 방법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자기방어를 유동적이게 하고,
억압된 정서를 자유하게 하며,
지나친 염려를 가진 환자자신이 적응할수 있는 레벨로 감소시키며,
그래서 자기자신에 대한 이메지나 타인과의 접촉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역동적인 정신치료의 전반적인 목표는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병적인 감정들을 감정둔화의 방법으로
정신적인 갈등등을 해소하며,
환자의 지나친 자기방어를 포기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갈등있는 감정을
자신들의 적응적인 정서로 바꾸어 주는데 있다.

건강한 인간관계접촉은 자율성과 상호독립성을 가진 인간관계를 의미하며,
건강한 상호의존성을 용인하는 상호 친밀함과 참된 인간관 계를 추구한다.

자신과 건강한 접촉을 갖고 있는 사람은 타인과의 접촉도 원만하게 할수 있다.
그 감정치료의 과정안에서 환자가 겪었던 자신이나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변이된 일그러진 현상들이
치료사와 환자자신의 건강한 접촉관계를 통해 치유되어 가기를 꾀한다.

-Treating Affect Phobia 라는 책에서-

일반일들도 자신의 왜곡된 감정문제나, 주변사람들의 정서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원함으로 글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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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발달의 심리학(1)

영성개발의 심리에 대한 책으로,
영성과 심리학을 접목하여,
영적구도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인성개발의 지침으로
영적원리에 대한 심리적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영성생활이란 하나님의 내면의 부르심에 대해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든 활동이나,
자기개발의 추구이다. 사람은 신비한 경험으로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유한한 인생이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접촉을 통한 교류에 의해 영적생활을 인도 받는 것이다.
크리스챤의 영적생활에는 하나님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삶을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육화된 말씀을 통한 깨달음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인간의 영성개발은 인간발달에 있어,
영적인 가치들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즉 되어가는 존재에 대한 자기발달이해인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롭게 된 자신이 과거의 잘못으로 벗어나며,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영적인 단계를 밟아 가는 것이다.

성장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정화되어짐과, 조명되어짐과,
그리고 일치되어 가는 과정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매일의 자기성장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성개발은 인간 발달의 단계에서
생겨나는 중요한 사건이나, 경향들을 통해, 형성되어진다.
어린시절에는 신뢰하는 것을 배우고, 자율성과 주도적인 능력을 개발하는 특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실패하게 될때에,
다음단계에 가서, 감정적인 불안정이나, 혹은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 다음단계에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발전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실패하면, 대인관계에서 부끄러움을 자주 느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쉽게 의심이 생긴다.
그래서 나중에 무가치한 것들이나, 두려움 같은 것을 자주 느낀다.
영성개발에도, 이런 경향들에 영향을 받아,
영적인 성장에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신적인 자기 파괴적인 인격소질을 통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어린시절에 건강한 어린아이로 자라난 경우는
창의성이나, 개인의 인격성이 발달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다음세대에 대한 책임의식과 관용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영적인 성장도 성숙한 인격형성과 함께 지속적인 건강한 자기발달을 가져온다.

아이들이 경쟁하는 상태에 빠지거나,
자신의 소질이나, 필요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상태에
(자신의 개성에 대한 확신감을 갖게하지 못하는 경우) 놓여지며,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지나친 스포츠나 아카데믹한 성취에 자기가 내몰리게 될때에 치우친 자기발달에 빠지게 된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나중에 그들의 영적인 추구의 생활에도, 조화롭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치우친 영성의 특성을 갖기 쉽다 (이성의 역활이 약화된 신비주의중심, 희생과복종등 의지적이지 않은 기복주의중심, 전혀 의지와 감성에 영향을 주지못하는 이성중심적인 신앙관등이다.
반면에 건전한 영성은 지,정,의지적인 조화를 가진 성서적인 신앙관)

복잡한 문화와 사회구조적인 시스템에서,
청소년들은 전반적으로 건강한 영적인 발달을 이루는 것은
어린 시절에서 성년으로 자라는 과정에 중요하다.
청소년시기에 도달해야 하는 인간의 특질은 사회안에서
자신의 독립심이나, 자기를 스스로 돕는 능력이나,
자기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제대로 인격이 발달되지 않으면,
그들은 방향감각상실, 오락에 빠지는 자기태만,
삶의 권태나, 자기증오나 죄책감, 그리고 자기파기적인 경향에 빠지기 쉽다.
에릭슨은 청소년의 중대한 갈등은 자기정체성과 자기역활혼돈이라고 한다.

이 청소년시기에 처음과 끝이 모두 영동적인 영적이고
종교적인 발달을 이룰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시기는 종교적인 전환이나, 거듭남이나, 자기변화를 통해 개종을 이루기 쉽다. 앞으로의 장년의 영성의 기반을 이루는 기간이다.

반면에, 이시기는 종교적으로 건전하게 발달하지 않으면
(이것은 어느 특정한 종교적인 이해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종교성으로서의 일반적인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임) ,
영적인 무관심에 빠지기도 하며, 비도덕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더나아가 비양심적인 악한 행위에 빠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그런 경우에 종교적인 무관심이나, 반 종교적인 사상에 심취하기도 한다.

청소년시기에, 처음부터 천천히 진행되어가면서 도달하는 마지막단계까지 발전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친밀함이다.
이것은 앞으로 성년인생의 안정된 서로 상부상조하는 인간관계로 발전하여,
그 친밀함을 통해 보다 강화된 사회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친밀함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소외적인 성품이 되어,
모든 인간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며,
이성을 사귀는것이나, 결혼하는 연령도 늦어지게 된다.

성적인 친밀감은 모든 장년의 생활에 중요한 부분으로 영향을 미친다.
낭만적인 사랑에 치나친 추구는 자칫, 성적인 사랑의 만족을 구하는 경향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그럴때에는 정신적인 사랑을 구하며,
성적인 것만 추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이성간에 서로 정서에 호소하는 친밀함을 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비정서적인 성적인 추구에 빠져,
비정상적인 성적관계(난잡한 성행위, 동성애, 음란적인 성적인 추구나 방종)를 추구하게 된다.

친밀함은 젊은 성년들에게 중요한 품성이며, 관심의 대상이다.
이 친밀함은 영적인 발달에도 영향을 준다.
다른 사람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것은 독자적인 개성있는 인격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보다 깊고, 넓은 인간관계를 가질수 있는데,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신을 진지하게 추구하며,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밀도있게 성장하며,
폭넓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게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영성개발의 영적인 깊은 단계에 까지 이르게 한다.

Groeschel, Bebedict J. "Spiritual Passages: the Psychology of Spiritual Developmen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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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감사

해마다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때마다,
경험하는 것은 마땅히 갈때도 없지만,하루를 그냥 집에서 지내기가 일수 였다.
그렇지만, 추수감사절의 명절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기억난다.

처음 미국에 온 해에는 당시 이웃에있는한인교회의 어느 집사집에 초청을 받아,
처음 감사절 가족식탁에 초청을받아,
함께 칠면조고기와 호박파이등을 먹으며, 감사절을 경험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어느 미국인교회에서 유학생들을 초청한자리에 가서
함께 예배를드리며, 저녁을 함께 하며,
서로 나라마다 자기들의 장기나 특성들을 소개하며, 감사절을 보냈다.

감사절의 추억은 나에게 먼 이국생활에 따뜻함과 배려의 분위기를 통해,
자신의 유학생활에 활력을 주거나,
사람들사이에 나누는 정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 조상들도 추석이나,설날등 명절에 함께 친척이나,
이웃들과 정겨운 정을 나누듯
이곳사람들은 추수감사절에 그런 인간의 정을 나눈다.

해를 거듭할수록 미국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추수감사절은 이곳 사람들의 생활속에 뿌리내린 전통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와서 자주 들은 말은 서로가 감사한다.고맙다 하는 말들을 자주 인사를 주고받는다.
관공서에서 일을 처리하거나,
마켙에 물건을사도,서로 고맙다는 말을 주고 받는다.

나도 잘 안되는 영어하기에서 그래도 제일 많이 했던 말은 고맙다라는 말이었다.
나도 이곳에 여러해 지내다보니 감사하는 습성이 몸에 배이게 되었다.

사람이살면서,자신의 환경이나, 여러가지 인생의 현장에서,
자신에게 혜택을 받은 경우등을 경험한다.
미국생활에서 잊지 못하는 감사할 일이 생각나,몇자 적어본다.
한번은 갑자기 병원신세를 졌는데,
거기에 있는 전달훈집사라는 한인 의사가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진통이 너무 심해 참을수 없어, 밤에 병원에 가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그 의사집에 전화를 하여,
그 집에 밤늦게 찾아가, 그의 진단과 진료를 받았다.
너무나 고마운 한인이었다.
그후에도 그는 나의 병원생활을 수시로 체크해주며, 돌보아주었고,
당시나는 학생 보험을가지고 있었는데,
보험회사와 그의사의 도움으로 한푼도 내지 않고,
일주일간 병원생활과 수술비가 3만불 이상이나왔지만,
치료를 잘받았다. 고마운 동포의사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켄터키까지 일주일 정도 걸리는
대륙횡단하는 자동차여행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중고자동차를 두대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밴이고, 하나는 소나타 중고차였다.

캘리포니아 주를 벗어나는 지역에는 고갯길이 많이 있었다.
힘없는 중고차 밴이 뒤에 짐을(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친척이
김치랑,반찬이랑 마련해주어 그것을 뒷차에
잔뜩실어 뒷차를 견인하기가 힘들 정도로 실려 있었다) 실은 소나타차를 끌고
높은언덕길을올라가는데, 트랜스미션오일이 분출하여,
차가 잘움직이지 못하여,겨우 이웃 마을에 도착하였다.
주변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를 찾아갔는데,
그날은 토요일오후라,정비소가 반난절만 일하여,월요일까지기다려야 만한다고 한다.
또한 차의 수리비가 트랜스미션을 갈아야 하는데, 1,500달러(1,500만원)가 든다고 한다.
갈길은 아직 멀기만 하고(여행거리 1,300마일; 약1,600 킬로미터의 1/5정도 온지점에서
차가 문제가 발생),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여서, 막막했다.

마침, 우리가 두차를 연결하려면 유월이라는 이사전문업체에서
뒷자동차를 앞바퀴만 올려,견인하는 차를 빌려서,
그 지역에 있는 지점을 찾아가 그문제를 문의했는데,
거기에 있던 마음씨가 착한 종업원이 우리차를 살피더니,
이것은 트랜스미션오일만(15달러어치) 채우면,
차가 목적지가 갈수 있다고 한다.
그때,그종업원이 말대로 차는 무사히 올수 있었다.
지금생각해도 그에게 너무 고마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모든 감사할 일이 배후에는
신의 기이한도움의 손길과 신의 응답의 역사가 있었다.

신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는 한번은 한국에서 동료들과 함께 바닷가 해변에,
하루 여름 수련을 가서 수영을 하다가,
해변의 바다의 소용돌이가 이는 지역에 빠져,
아무리 수영을 하여,빠져 나오려고 했지만,나올수 없었다.
내 힘이나 실력으로는 그곳을 빠져 나올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물에 빠져 죽는구나,생각이 들면서,
내가 믿는 신에게 절대절명의 순간에,
제발 살려 달라고 짧은순간에 긴급한기도를 드렸는데,
그때 갑자기 큰 파도가 내 등뒤에 부딪히면서,
그 부딛치는 힘에 의해, 그 소용돌이를 빠져나올수 있었다.
그 일로 신이 과연 살아계시는 구나,
그리고 신은 반드시 신의 자녀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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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마음

세상을 창조한 신은 홀로 천지를 만들고, 주재하지만,
그는 한 공동체로 신의 본성이나, 신의 역활을 감당하고 있다.
창조주 신은 그안에서 서로 관계(독특한 관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를 성립하고 있는 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섭리를 통해,
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함께 신의 역활을 감당한다.
이점을 인간이 이해할수 없지만, 신의 관계는 마치 인간의 가족관계처럼,
그안에서 서로 역활을 분담하며(아버지는 세상을 있게 하였고, 세상을 돌보는 역활을,
아들은 세상에 있는 인생들을 아버지와 연결하는 중보하는 역활을,
영은 아들에게로 나오는 인생들을 인도하는 역활을),
세상에 있는 인생들을 신 자신과의 관계나 교제안에 들어오는 길을 제시하였다.

신은 세상을 향한 그의 통치와 돌봄을 그의 아들과 그 영을 통해, 함께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임하여서,
몸소 인간의 삶을 체험하였다.
그신은 인간이 되어, 인간이 겪는 모든 삶의 고난과 고초를 겪으며,
가장 처절한 고통의 인간체험을 통해,
그는 인간의 죄를 감당하며,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신의 인간에 대한 신의 형벌과 고통을 다 담당하였다.
그리고, 인간에게 신에게로 다가올수 있는 용서와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여,
인간세계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죄, 절망, 두려움, 상처, 질고, 죽음등)를 해결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아들인 신은 그의 근본이 신이지만,
그는 신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간 인생들을 위해,
그는 자신의 영광된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이 겪는 모든 인생의 삶의 과정들을 경험하므로,
그는 그 인생들에게 신의 뜻을 보여주어,
인생들로 하여금 신을 알게 하여, 그들을 신에게로 인도한다.
아들은 인간에게 신의 본성과 모습을 알려 주었으며,
신의 마음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었다.

여느 인간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취한 그의 마음은 깊은 겸손한 태도와
인간을 신에게로 인도하고저 하는 열정의 마음이었다.
신의 아들은 인생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였다.
그 마음은 신을 이해하는 마음이며,
신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며,
인생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다.
인간의 타락과 그로 인한 모든 인간의 문제의 근본적인 상태는
바로 인간의 그 타락하고 교만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신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권한을 통해,
오히려 인간의 마음이 신과 동등해지고저 하는 불순한 마음의 동기로 발전되어,
신 앞에 교만한 의도로 인하여,
인간속에 있는 신의 통치와 관할하에 있는 자신의 겸손한 상태를 벗어나,
그 인간들은 신과의 관계의 단절과 그로 인한 신과의 교제의 영광의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인간이 신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인하여, 인간이 신의 법을 어기고,
그 베푸신 혜택을 배반하여, 인간속에 죄가 들어오게 되어,
그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인간 자신속에 있는 소우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고저 하려고 할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신과의 관계안에서 누리는 그 영광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만물의 그 어떤 것보다 그 상태가 부패해있고, 어두워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심히 자신의 마음이, 거짓과 허무에 노출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나,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그릇된 의식은 모든 일에 있어, 신의 뜻을 저버리고 살게 되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마치 아직 개간되지 않은채,
온갖잡초와 엉겅퀴가 나있는 황무지와 버린 땅과 같이 되어 있다.
그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고 새롭게 하는 길은 오직 신의 마음을 통해,
신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제안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사랑과 용서를 알려주는 신의 마음이 필요하다.
신의 마음을 통해, 인간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자신의 마음안에 새로운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그리고 그 자아상은 잃어버린 신의 형상을 회복케 하는 신의 성품를 가지게 한다.

다시말하면, 신의 마음을 받아들인 인간의 자기이해는 자기모순이나, 자기혼돈이아니라,
자신안에 조화된 성품과 자기개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을 갖게한다.
그리고 인간은 신의 마음을 통해, 신을 이해하게 되고, 신과 일치하는 마음이 되어,
신과의 관계회복과 교제의 지속적인 실행을 통해,
인간자신안에 잃어버린 신의 형상이 이루어 진다.

그 신의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신과 단절되어 떨어져 나가버린 고아와 같은 버림받고 절망된 자신의 상태와
그 상태로 인한 자신의 상처들을 치유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신의 소생이라는 것과 신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신으로부터 인류의 조상들 자신이 얻으려고 했던,
인간안에 있는 신의 영광에 참여할수 있는 혜택을 받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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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과 신의 자비

 

시편 109편 1-4

오 하나님, 내 마음을 정하였나이다. 나의 영광과 함께 당신을 기뻐하며, 노래하기로,

여기 시편의 시인은 자신이 고백하는
신에 대한 믿음과 그분을 높이고저하는 일편담심의 마음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이렇듯이 신앞에서 인간이 소중한 것은
그가 바로 인간이 신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신에 대한 변함이 없는 생각과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은 변함이 없다. 그가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지며,
그가 생각하신 바는 실현되어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며, 태도이다.
때로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가지 관점을 갖지 않고,
너무 자주 인간의 생각과 태도가 바뀐다는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나, 자신에 대한 생각에서도, 변화무쌍한 마음이다.

그런데 여기 시인은 그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신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다해 그분을 섬기고, 찬양하는 태도로 일관하리라,
자신의 마음가짐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영화스러움이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신을 향한 정성과 열정을 쏟아,
그분을 섬기고, 그분의 성호를 높이리라고
신에 대해 자신의 감사의 고백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어떠한 경우에서든 변치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한가지 관점,
즉 신에 대한 자신의 변치않는 충정과 열정의 생각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마음 먹은 것이 너무 자주 바뀌어 지는 경험을 한다.
좋은 의도로 뜻을 세우고, 그것을 평생실천의 동기부여로 세우고 나갈때에,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뜻에 대해,
딴지를 걸면, 쉽게 그것을 포기하기 쉬어진다.
그리고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이 자신의 옳은 뜻을 관철하지 못하게 할때에,
쉽게 좌절에 빠지거나,
복잡한 생각에 의해 혼란된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신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 중에 신을 모시고 섬기고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으나,
그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의 믿음이나, 생활태도를 점검할수 있게 된다.
내가 믿고 추진하는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고,
기다림의 태도가 필요할때에, 자신에게 다짐할 필요가 있다.
신을 믿고 따르다 실망할때에 좌절하지 말고,
그분을 계속따르는 것은 그가 신실한 분이며,
그의 자비는 하늘보다 높기에, 그분의 생각을 측량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은 때로는 신을 섬기는 사람자신의 믿음과 태도를 테스트를 하기를 원하기도 하고,
어느 상황에서도 신자신에 대한 변치않는 일관된 태도의 사람의 마음을 기뻐한다.
사람이 지속적으로 신을 따라감은 그의 자비로움이
사람의 생각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한 요소가 있어,
그의 무한한 자비는 인간을 인도하기에 충만한 그의 마음을 담고있다.

신의자비는 하늘들보다 드높다.
신의 자비는 온우주에 편만하며, 충만함이 넘침을 보여주고 있다.
신의 자비는 우주의 구석구석을 두루 비쳐주며,
온우주에 모든 곳에 미치고 있으며,
그의 사랑의 손길은 우주의 조화와 질서가운데에, 뼏쳐있다.
그가 그의 손길로 우주를 붙들고 있으므로,
우주는 안전하게 항해하며, 우주안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삶을 살수 있다.
신의 자비가 한순간이라도 미치지 않는다면,
이세계는 순식간에 혼돈과 무질서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신의 자비가 멈추는 때가 있음을 신의 말씀이 계시하고 있다.
그때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신의 심판이 행해지는 때이다.
그때는 천체도, 온 세계도, 혼란속에 머물것이다.
신의 자비는 잠시 우주에서 심판으로 대처될 것이다.
그것은 잠깐이지만,그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그의 진리는 하늘 구름에 닿는다.
이것은 신에 대한 진실의 말씀이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신에게 도달케하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지는 변할수 있음을 그분의 말씀(성경)에서 알려주고 있듯이,
온 우주가 변하는 순간에도,
그분의 하신 말씀은 변함이 없이 그분의 계획과 생각을 이룰것이며,
그분의 뜻이 결국 영원히 세워 질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하늘 구름에 닿음은
그분의 뜻이 그분의 말씀안에서 다 이루어짐을 암시하고 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인간이 사는 이세상안에도 결국 온전히 이루어 질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신의 말씀을 의존하는 근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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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자신)을 치유하려면

사람이병들었을때에, 병의 원인을 알고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이 어디가 아픈지,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는 것이 필요하다.
친척중의 한 아이가 중병에 걸렸을때에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는데, 한달이상 걸린다.
사실, 의학의 가장중요한 단계는
그 병이 정확히 무슨병인지를 알아내는 진단하는 과정이다.
예방도 필요하고 치료도 필요하지만,
병의 징후가 있을때가 정확히 병을 알아맞추는 의사가 실력있는 의사이며,
그 의사를 신뢰할수 있을 것이다.

의료사고도 오진으로 인한것이 거의 대부분이다라고 할수 있다.
정확히 보지 못한 병에 대해 다른 병에 대한 처방으로 고치려고 하지만,
병명을 잘못알고 있으면,
그 병을 정확히 고칠수 없는 것이다.
그렇듯 인간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며,
자신의 문제의 해결를 찾지 못해,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문제진단이나, 해결은
인간을 만든 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생이 처음부터 이세상에 살때부터
인간사회가 그인간의 문제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나고, 갈등과 싸움의 연속적인 역사를 겪어왔으며,
아직도 사실 인간자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 문제를 안고 세상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에게 있어, 문제가 발생했을때에,
그 문제를 정확히 보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며,
해결책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단계이다.
더우기 자신에게서 그문제의 출발이 있고, 원인이 있다면,
자신을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하겠다.
그래서, 인간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는 것이 자신을 고치는 데 중요한 단계이며,
과정이다.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기가 쉽지 않다.
대개 자기자신을 정확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몇가지있는데,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가지고 있는 자기 편견이 있고,
그리고 과거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로 인한 자기아집이 있으며,
잘못된 조언이나, 지도를 통해 갖고 있는 그릇된 자기이해가 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정확하게 자신을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내 얼굴에 점심때 먹은 밥풀이 묻어있다고 가정했을때에,
남들은 밥풀이 묻은 자신의 얼굴을 언제든 잘 볼수 있다.
그런데 정작 나자신은 거울을 가지고 가서,
그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아야
자신의 얼굴에 묻은 밥풀을 보고, 그것을 떼어낼수 있다.
자신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때에나,
어느 문제든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달라질수 있는데,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경우는
문제를 판단하는 자신이 문제에 휩쌓여 있을 경우에는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보지 못하므로 객관적인 판단을 따르게 된다.
우리가 어느 문제가 있을때에,
남의 조언을 듣는다든지,
그리고 전문인으로부터 상담을 받으므로 훨씬 자신의 문제를 빨리 해결할수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병들었을때에,
병의 원인을 잘 알게되는 것을 통해,
그병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수 있겠다.
마음의 병이 먼저인지, 아니면 육체의 병으로 인하여 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이 악해지거나,
상처가 있어서 그것이 몸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됐는지,
혹은 자신이 받은 영적인 혼란속에 있어서,
자신의 몸이 병들어 있거나,
삶이 뒤죽박죽이 되어있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병적인 원인을 분변하고 판단하기위해서
사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의 몸은 유기적인 존재이다.
이말은 모든 인간의 몸은 몸안에 있는 각지체나,
장기의 각기능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 생명체안에 있는 유기적인 조직안에 있는 본성이나, 지체나,
혹은 기능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은 영혼과 마음과 몸의 서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이다.
몸의 상태가 마음에 영향을 주는데,
몸이 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으면
마음도 약해지기 쉬워, 무슨일에든지 자신감을 가지고 대하기가 쉽지 않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이 몸의 이치라고 할수 있겠다.
그렇지만, 반면에, 몸이 약하고 지체가 부자유해도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도 있다.
(예를들어 강영우박사같은 경우일것이다.
시력의 장애를 갖고 있지만 한국인으로 가장 높은 직급의 미국의 공무원이 되었다)

마음의 상태가 몸의 컨디션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운동경기를 하는 선수가,
기술적으로는 잘 준비를 하였는데,
시합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하지 못해 경기를 질수도 있으며,
실력이 모자라도 시합때에 정신적인 무장으로 실력이상 발휘하므로 시합에 이기기도 한다.
또한 이런 경우도 어느 나이든 여자분이 있는데, 이분을 늘 신경통으로 고생을 한다.
아무리 약을 써도 신경통이 낫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정신적인 상담인으로부터 상담을 받다가,
과거에 자신과 원수관계를 맺었던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 증오하고, 용서치 않는 마음의 상태가
그 여인에게 그렇게 몸에 질병으로 영향을 주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생각의 집이다.
자신안에 품은 생각에 의해 마음이 영향을 받고,
그 마음이 몸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더나아가, 사람의 몸이 무엇에 영향을 받으면
사람의 깊은 영혼까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를들면, 마약을 복용하는 경우는
사람의 정신세계뿐 아니라 영적인세계에 까지 영향을 주어,
자신의 판단력이 흐려져,
악한 영적인 존재의 영향에 의해 쉽게 자신를 파괴하는 쪽으로 몰고간다.

더 깊은 단계에서의 사람의유기적인 관계안에서
사람의 몸과 마음은 영혼의 그릇들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영혼이 담는 대로 만들어진 그릇에 불과하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인간의 영혼속에 무엇을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그의 몸이나, 생각의 집인 마음이 어떻게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사람의 인생자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나, 도덕률의 가르침은
사람의 영혼에 담아지는 영적인 말이며,
마음에 영향을 주는 생각이며,
인생을 만들어내는 이념이다.
사람의 영혼이 무슨 가르침을 받든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나 사람이 인생의 삶을 살아 나가는 방향에 영향을 준다.

인간사회에 보내준 신의 말은
사람을 치유하는 것으로 사람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의 근본적인 병을 치료한다.
그 병은 인간속에 있는 악의 씨이며,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죄성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인간현실의 병적인 상태이다.
거기에 대해. 신이 인간에게 제시한 말은
사람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해주는 처방전이며,
사람의 모든 병을 치료하는 기본적인 약(많은 약의 발명의 배후에는 성경의 아이디어를 이용하였다)을 제공하며, 사람의 병적인 상태를 원상회복케 하는 치료제이다.
고로 그것이 사람의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하며, 회복케 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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