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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19
    "실업"이라는 단어를 나의 인생사전에서 없애려면
    목동
  2. 2006/11/19
    믿음예찬
    목동

"실업"이라는 단어를 나의 인생사전에서 없애려면

우리사회에 실업인구의 증가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지 오래되었다.
국민적인 인구의 자산의 비율이 다른 어떤 국가적인 재산보다
높은 비율의 국가들중에 하나인 대한민국에게 있어,
인구의 자산은 유일한 국가적인 자산의 소망이며, 가치이다.

그렇지만 좁은 땅어리에 계속해서 번져가는
인구의 증가는 우리가 사는 좁은 땅어리를 더욱 좁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이제는 더욱 치열해지는 경쟁하는 사회에서
실업인구의 증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반면에 아이러니칼 한 우리가 바라고 싶지않은 현상이 또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것은 우리사회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출산율의 감퇴로 인하여,
유효 노동력인구의 확보의 문제가 얼마안있으면, 대두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세대의 우리사회는 넘쳐나는 취업휴업의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사회구석구석이 좌절과 한숨의 소리가 베어나온다.
노동력인구의 취업휴업인구의 증가는
국가적인 손실이며, 가정적인 손실이며, 또한 실업하는 자신에게 있어서의 개인적인 손실이다.

넘쳐나는 실업의 증가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전체사회적인 노동력배치를 보면,
한쪽에서 특히 3D 직종에서는 노동력 인구가 없어,
외국인 노동인구의 증가가 되는 반면에,
평범한 한국인의 그들의 원하는 직종에,
노동하는 기회가 경쟁으로 인하여, 적어지고 있다.

실업의 문제가 국가나 정부나 사회단체나 기업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는
너무 사회가 복잡해졌으며,
특히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어느 국가나 사회에서도,
실업인구와 무숙자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더나아가 사회보장제도가 잘된 나라 일수록 무취업인구가 증가한다.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기본적인 것들을 정부가 제공하다보니,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손에서 놓고 있기에 쉬워지며,
자기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사회에 경쟁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좋은 도전을 주는 자극제가 될수 있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자기 발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너무 사회보장제도에 의존하다보면,
오히려 자신을 도태시키는 역작용의 역활을 하기도 한다.

실업하는 사람에게 있어 정해진 취업이나 직업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자신안에 있는 실업이라는 의식이 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실업이란 자기가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고 살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하는데,
봉급을 받고 안받는 사람이 취업휴업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휴업을 하는 본인자신이 아무 할 일도 없다고 느끼는 것이 더 실업적인 문제라고 할수 있다.

인생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업하는 그/그녀는 지금 잠시 휴식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시기는 자신을 재창조할수 있는 좋은 기회인것이다.
그 기간이 길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보다나은 자신의 미래의 장기적인 준비로 생각하고,
더 친밀하게 그 휴업의 시간들을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자신이 준비하는 것 만큼,
인생의 시간이나 기회는 자신에게 반드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세상은 신이 인간이 살 인간세계와 사회를 모든 만물을 만들때에,
인간의 노동이나 도움의 필요없이
전적인 신의 전능한 손길로 온우주가 완성이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신이 인간에게 에덴의 낙원이라는 세계에서 인생을 즐기면서,
만물의 관리자로 살도록 하였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일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고,
휴식이나, 안식가운데에 일을 취미정도로 즐겼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의 명령을 어기고 관리인으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월권을하여,
이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벌로,주어진 것이 땀을 흘리며,
땅을 가꾸고, 노동을 해야 먹고 살수 있도록 되어졌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준 그 노동도 축복으로 주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 일이란,
자신의 숙명과 같은 자신이 일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자기 생존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인생이 생각하는 취업이라는 것은 평생직업인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도 인생 취업하는 직업을 놓고 살수는 없다.
만일 인생직업을 놓은 경우는 단지 자신의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때 일것이다.
사람의 몸이 계속해서 변화해가며, 생존하듯,
인간의 삶은 계속적인 일을 통해, 자신이 생존하게 된다.
그러면 인생직업에서 해야 할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의 명제가 있다.
이것은 신이 모든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신성한 자기사명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존과 자신의 미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자신을 몰두해야 한다.
이것은 보통생각하는 직업이라는 세계를 떠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직업인으로서
자신의 변화와 성장에 자신의 일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의 직업적인 일이 그 인생직업의 일들을 도울수 있다.

만일 지금이 자신을 실업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시간이라면,
그기회야말로 인생직업에서해야 할일들을 부지런히 찾아 해야 할 것이다.
보통 평범한 직장을 갖고 자신의 인생직업에 대한 일을 충실히 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그 일들은 자신이 실업이라고 생각하는 기간이 자신에게 더욱 좋은 기간이되며,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 기간에 자기자신을 열심히 연마하고,
자기 발전이나 성장에 시간을 투자하면,
오히려, 긴인생의 노정에 전체적인 관점을 갖고 볼때에,
그 실업하는 기간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시간이며,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어 일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느끼고 사는것만큼
정신적으로 고되고, 힘든 일이 없다.
인생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고 느끼는 감정은 가장 비참한 감정중에하나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자란다.
아이들에게 열심히 자라는 것이 그들의 일이며,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할일을 하여야 할것이다.

실업의 문제는 사실의 문제라기 보다,
의식적인 문제가 더 문제가 된다고 할수 있겠다.
취업휴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에서 실업이라는 단어를 아예 생각하지 않고
오리려 그 시간에,
자신의 전체인생의 직업에서 해야할일들을 생각하고
그일에 충실하여 가다가보면,
자신에게도 직업취업이라는 기회가 다가올 것이다.

인생에 있어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따라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인생살기가 편한다.
아무일도 안하고 지내는 것은 너무 힘든 인생의 경험이다.
그런 경우는 실업이라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식속에는 실업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 기인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 집사람이 말하는 것은 돈문제가 인생의 문제들중에 가장 작은 문제라는 것을 명심하기를…이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사람이 있고 돈이 있다라는 말을 항상 명심하기를…).

그러므로 그렇게 아무일도 안하고 산다고 결심을 해도,
인생직업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있어 꼭 해야 할일들을 누구나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업의 문제중에 하나가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은퇴
(조기은퇴라는말은 직장인들을 더 주눅들게 하는 말이지만)를 통해
자신을 실업으로여기는 경우이다.
은퇴를 통해, 오히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일들을 찾아 새로운 삶의 기회로 생각하고,
전통적인 직업의식에서 떠나,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일들을 찾아,
자신의 삶의 시간들을 투자해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어느 직장에 머물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휴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피곤하고 지쳐도 직장에 다녀야 한다.
그리고 자기 성장이나 발전을 위해 재창조
(레크레이션: 휴식하면서 자기 발전을 위한 자기충전을 위해 창조적인 사역을 하는 것)
할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흔히 두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할수 있다.
우리의 보이는 환경안에서 사는 현실의 세계가 있고,
또하나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세계가 있다.
환경의 현실세계보다 인터넷의 가상세계가
사람들에게 훨씬 더 인생의 삶의 기회와 경험들의 폭을 확장해 나가며,
인생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다.
공간을 초월하여 가상세계에서 우리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수 있으며,
더 많은 정보와 경험의 기회들을 얻고 있으며,
그리고 더나아가 직업의 세계를 무한대로 활짝 제공하고 있다.

누구나 인터넷에서 자신의 아이디어와 자신의 아이디나,
혹은 자신의 인터넷활동을 통해
언제든지 자신의 비지니스를 열수가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환경세계의 직업의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

앞으로 가상세계의 현실이 환경세계의 현실보다,
훨씬 우리의 삶의 부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직업의 보다 넓은 영역으로나 보다 확장된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가정에 머물면서 해야 할일들이 점점 더 많아 질것이다.
몸으로 환경의 현실세게에서 움직이는 활동보다,
인터넷으로 가상세계에서 활동하는 삶의 시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인터넷의 가상세계의 무한대의 직업기회은
모든 자기자신을 실업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기존 전통적인 직업관이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취업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터넷인구의 전체인구의 비율로 볼때,
가장 높은 비율의 나라들 중에 하나이다.
이 인터넷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는 모두에게 일이라는 기회를 열어준다.

가상세계(인터넷: 사이버의 세계)에 계속해서
수많은 직종의 직업이나 자영업이나,
기회를 좇아 새로운 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얼마전에 뉴욕타임즈의 기사에 인터넷 비지니스의
인노베이션의 서비스를 제공을 하는 것으로 몇사람들이 수만달러의 돈을 번다고 한다.
자신들의 아이디어와 창의력으로
그들은 가상세계의 직업세계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사람들중의 몇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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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예찬

인간사회는 쌍방간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 믿고 혹은 서로 믿어 주는 약속의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신용사회라는 말도 특히 경제적 생활에 대해
각 사람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정능력이나 관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크레디 이라는 제도를 통해, 거래나 재정 관계에서 믿음으로
서로 거래 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크레디카드를 발행하여 제시하는 회사가
수여자에게 돈을 감당할 재정능력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를 신뢰하고,
카드를 내주며 그것을 사용하게 한다.
만일 크레디카드 사용자가 지불능력이 없는경우에 파산이 되는데,
미국에서는 자신이 감당할수 없는 재정관계나 부채가 발생시에는
파산신고를 하여 자신을 파산자로 설정하여,
자신이 재정을 감당할수 없는 자로 판정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의 재정능력에 대한 믿음의 상실일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믿음은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버스나 택시를 탈때에도 운전을 하는 기사들의 실력을 믿고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처럼,
모든 일상에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에 생활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남자들이 이발소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이발사에게 자신의 얼굴을 맡기고
수염을 베는 면도를 하게 하는 것도 일종의 신뢰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자들인 경우에는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가 산부인과를 의사를 신뢰하고
자신의 몸과 아이의 생명을 그 의사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사는곳마다 필요한 인간의 가져야 할 성품이며,자질이다.
청춘남녀간의 연애를 하고, 혹은 더나아가 서로 뜻이 맞아,
평생의 반려자로 맞이하는 결혼에도 서로에게 믿음과 깊은 신뢰심이 요구된다.
그들의 연애나 결혼관계에 있어 서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서로 상대방의 인격을 맞대어,동등한 관계에서 성립되어있으면,
그 관계는 더 돈독하며, 건강한 남녀간의 관계라고 할수 있겠다.

정부와 국민사이에도 서로 보이지않는 믿음의 관계가 성립된다.
정부는 국민을 믿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며,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그들의 리더쉽을 따를때에,
좋은 국가의 상태를 유지하며, 발전하게 된다.
어느 단체의 리더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서로간의 신뢰의 관계가 필요하다.
리더가 사람들에게 할수 있는 중요한 것중에 하나가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믿을수 있는 사람으로 각인되도록
그들에게 신뢰심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의 관계가 가정을 든든하게 세우며,
자녀의 건강한 성장을 통해, 가정의 발전을 이루어 가게 된다.
자녀가 조금 잘못했을때에, 자녀들의 인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불신의 말을 통해,
부모와 자녀들의 신뢰의 관계가 손상을 입게 된다.
자녀또한 자신들의 부모들을 향해, 끝까지 그 부모들의 사랑과 돌봄을 신뢰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그 가정은 서로 신뢰하는 가정이 되어,
자녀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험한 세파의 여러가지 어려운 일을 겪어도
능히 그 어려움들을 헤쳐나갈 힘을 가정으로 부터 공급받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믿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신뢰심을 갖고 있으면,
그는 무엇이든지, 자신에 대한 자질과 능력을 믿고 있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경우는 자신있게 아무것도 할수 없을 것이다.
어릴때부터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들의 인격을 믿어주는 습성을 통해,
자녀들이 자신에 대해 믿고 신뢰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의 이메지(자아상)를 가져서,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수 있을 것이다.

믿고 사는 사람과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모든일에 있어 믿음은 인간의 삶을 바쳐주는
근본적인 토대의 사람의 가져야 할 성격이며, 특성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에게 사기를 당했다든가,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고,
혹은 자신의 신뢰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경우에,
모든 것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럴경우에는 정말 자신이 믿을수 있는 사람과의 지속적인 관계나 가르침을 통해,
그런 불신하거나 혹은 모든 일에 의심하는 생태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태도로 살경우에 현실생활에서 소극적이기 쉬워지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발전하기 쉬어지며,
자신의 미래의 전진적이고, 진취적인 삶에 장애가 된다.

물론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을 무조건 신뢰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살필줄 아는 사려깊은 분별력이 모든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귀어 보는 기간이나 겪어보고 나서 그 사람의 어떠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믿어주며 서로 신뢰하는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더 발전시켜주는 삶의 환경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신뢰하는 사이가 되려면
자신부터 믿어주는 사람,
그리고 남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믿음의 태도는 원래 어디서부터 왔는냐 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이땅을 살권한을 부여하는 가운데에,
그들은 신과 신뢰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신의 돌봄의 테두리안에서 서로 신뢰하며,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의 상태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최초의 사람들이 얼마의 기간을 사는 동안,
삶을 살면서, 신의 의도를 위반하고, 신이 명하는 바를 거역하게 되어,
신과 인간의 믿음과 신뢰의 관계가 깨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이 사는 삶의 환경은 믿음이 깨어진 상태에서 살게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태어날부터 이 믿음과 신뢰의 관계를 계속유지하면서 살기란 쉽지않고,
이 믿음이 무너지면서, 인간안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고,
사람들이 사회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갈등과 투쟁과 전쟁이 야기되어, 사람들이 사는 곳이 험악하게 되었다.

그런 인생들에게 신은 찾아와서,
그들에게 잃어버린 믿음의 힘를 주며,
그들과의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찾아 가는 것에서부터,
신과의 만남을 통하는 것이나,
그리고 더 나아가 신과의 모든 교제안에 살아가는 데에,
사람들이 가져야 할 제일 필요한 것은 이 믿음이다.
사람들이 신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것도
지식을 추구하는 이성의 능력으로는 신을 알수 없으며,
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모호하게 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더듬어,
자신이 더듬는 대로 인식하는 정도밖에는 안된다.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자아의 눈을 떠야, 신의 본질을 알게되듯이,
신을 추구하는 것은 이성의 도구로 한계가 있으며,
믿음의 단계에 이르러야 신과의 관계설정을 통해,
신과의 신뢰의 교제의 경험을 통해 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경험하는 것은
단지 단순히 이성의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신뢰의 관계의 형성과 교제를 통해,
진정한 앎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는 것도 지식의 단계를 넘어서,
확신하는 단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연구한 이론이나 발견이나 발명이 효력있는 사물이 되는 이치일 것이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그 믿음은 필수적이며,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일을 추진하고자 하는데에,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밑거름이 바로 자신이 가져야 할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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