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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10
    영혼추구의가치
    목동
  2. 2006/11/10
    용서와 화해의 사역을 위한 제언
    목동
  3. 2006/11/10
    이런 인생도 있구나
    목동

영혼추구의가치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할 수있는 생각은
그 영혼이 신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본성안에 있는 육성은 자신의 몸이 감지하는 오감에 따라,
나타난 감각의 충동에 의해 살려고 한다. 그
리고 사람의 이성은 생각을 좇아서, 지식을 추구하고, 철학을 이야기하고,
시를 노래하며, 책을 읽거나, 사상들을 추구한다. 그
래서 육성과 이성은 둘다, 세상의 나타난 법칙을 따라 살기를 희망하지만,
사람안에 있는 자신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찾아,
신의 존재를 찾아보고, 자신의 영혼이 신에게서 나왔기에,
자신의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원상복귀에로의 순례의 길을 가려고 한다.

우리의 육성은 순간의 감각의 즐거움을 맛볼려고 하여,
음식을 탐하고 즐긴다든지, 본성안에 있는 감각적 느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맛집을 찾아 전국을 순례하며, 맛을 즐기는 미식가들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속에 있는 성적인 경향은 남성은 계속해서,
여성의 미나 매력에게로 끌리고,
여성은 남성의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동경을 하게 된다.
특히 남성에게는 여성의 육체의 미에 쉽게 빨려들어,
그것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남성의 취미나, 관심을 사로잡는다.
여성은 사랑을 사랑하지만, 남성은 여성의 성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이성은 지식을 찾아 끊임없이,
정보를 캐려고 하며,지식에 대한 욕구를 발산하여,
밤늦도록 책을 읽는다는지, 혹은 밤새토록 인터넷의 정보의 바다를 헤매며,
새로운 것을 찾아, 이성의 지식욕구추구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나서는 뜻이 통하고 말이 서로 통하는 지인들과 함께 모여,
즐겁게 여러가지 이야기와 대화를 나누는 정신적인 활동을 즐긴다.
혹은 지식의 양이나, 정보의 습득훈련을 통해 타인보다,
지적인 재산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동기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영성은 어떤가?
그분야는 사람에게 가장 소홀히 하기도 쉽고,
그것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없이도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도 않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추구함이 없이 살아도
별로 자신의 삶에는 상관없는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사람안에 있는 영혼에 대한 갈망이나,
영적세계의 추구에 대한 시도를
우리의 육성이나 이성의 지나친 그것만을 추구하는경향들이 길을 막고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도
영성을 개발하는데 제한을 받기도 한다.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가?
사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의 전체의 몸인가 아니면,
사람안에 있는 모든 기능을 조정하며, 정신적인 활동을 하는 두뇌인가?
아니면 뇌사상태가 되어도, 사람의 생명이 붙어 숨쉬게 하는 심장의 고동소리인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신의 영혼에 감추어 있다.
모태에서 신으로 부터 받은 영혼이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숨을 쉬게 되고, 생명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며,
세상의 삶을 끝날때에도, 그 호흡이 멈추면서, 사람의 영혼이 떠나면서,
그 사람의 생명이 이세상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명의 원천지인 그의 영혼은
다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어디로 가든지 간에 가게된다.

바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한번쯤은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인식해보는 것도 후회스럽지 않고
자신의 인생의 삶 속에서, 아주 유익한 추구이며, 자신의 생명을 돌보는 고상한 시도이다.
자신을 향하여 “내 영혼아, 너는 너를 생기게 한 너의 존재의 근원을 향하여, 가고 싶지 않은가”라고 물으면 자신의 영혼은 그 존재를 찾아가는 순례의 길을 나서게 되며,
결국에는 그 영혼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인 신을 찾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은 사람의 영혼(생명의 원천)을 두고 어떤 혜택을 베풀어,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얻도록 하였을까?
사람에게는 원래 그 자신의 영혼의 생명이 신과의 교류안에 살아갈수 있도록 하였으나,
인간의 반역으로 인한 죄를 범하므로,
그 자신의 영혼의 눈이 감기어 자신의 생명의 진정한 실체나 상태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신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사회에 신의 존재와 같은 똑같은 신과 인간의 똑같은 두성향을 가진 존재를 보내어
그로하여금, 인간의 문제를(죄와 그 결과인 것들) 해결하여,
신을 만날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신은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설정해 놓았다.
사람이 육체의 욕구에만 따라 가다보면 한없는육체의 탐욕의 도구로 전락되어,
결국에는 육체안에 있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거기에 머물러, 육체가 이루어진 자신의 몸이 결국 사라질 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의생명이 흙안에 담겨있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사람이 흙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영혼을 발견하여,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수 있도록 하여,
결코 육체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의 갈길에 대해 두려움없이 맞이 할수가 있을 것이다.

외모지상주의, 지식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인생들이,
육체의 매력에만 이끌려 살기보다는
진정한 자신 속에 있는 매력을가질수 있도록,
자신의 영혼(자신의 생명의 원천)을 위해 관심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그 자신이 더욱 보배스러운 영혼을 담은 육체의 아름다움 가운데 살게 될 것이며,
또한 지식과 정보의 홍수속에서 끊임없이 지식추구하는 방황에서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신의 세계를 안정되게 정리할 수 있는
영혼의 진리를 추구하는 그 자신에게
이성의 역활도 더욱 자신의 삶을 빛내게 할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영적인 세계의 영향이 건전한 정신세계를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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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의 사역을 위한 제언

인간사회안에서 발생한 갈등이나 분쟁의 와중에서, 상호 간의 일어나는 화해의 시도가
왜 개인적 차원에서 와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힘들게 여김을 받는가?

이 화해하는 시도는 인간사회에 갈등이 있으며,
분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것을 해결하기위해,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에는 서로 용서하고,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하는 자신의 희생이나, 봉사가 요구되기에 그렇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는 어느 한 쪽에 있는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앞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살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의 기본권이 무시될때에, 늘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 사회에 정의가 실현이 되지 않고,
서로 차별화에 의해 갈등이 일어나며, 거기에 분쟁과 폭력이 발생하여,
그에 따르는 상처와 고통스런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는 때에는 언제나, 상처를 입은 측과 상처를 주는 측이 있기 마련이다.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성공회주교 투투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민족사회에서 겪는 전형적인 인간차별화로 인하여,
그 사회에 겪은 계층간과 인종간의 분열의 현상이 일어나고,
그 분열과 갈등의 현장에 가해자측과 피해자측사이에 깊은 갈등의 골이 깊어 있었고,
그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는 과정에 많은 노력과 서로의 용서와 화해의 과정들이 필요하였다.
그 용서와 화해의 현장의 중심에 종교가 역활을 하였고,
함께 고통받는 자의 편에서 투투는 진실과 화해의 위원회를 중심으로
그 사회의 근본적인 갈등을 해소하게 되었다.

그 갈등이나 분쟁을 화해하는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그 화해하는 과정에 반드시 가해자측에 대한 피해자들의 복수를 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그 가해자들을 용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용서하는 과정에 드러난 차별화나 폭력에 대한 피해자측의 자신들의 아픔들을 감당하고,
그 불합리한 일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관용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 용서에는 자신들이 받은 상처나 고통에 대한 자기이해의 희생들이 요구되며,
그들의 아픔이나 상처에 대한 자기설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기설득의 과정에서, 피해자들 자신들의 접근하는 관점에는
복수하려는 마음을 극복하려는 강한 사랑과 용서의 의지가 필요하다.

피해자측의 개인적인 복수하려는 의지의 해소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들 자신들의 복수하려는 심리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
그 심리적인 상태를 해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조건적인 용서의 극복에도
그들의 용서를 하려는 조건적인 전제를 포기해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불평이나 불만의 해소를 하려는 관점으로,
그들의 탓으로 비난하려는 의지의 포기에는 피해자들의 자비를 실천하려는 강한의지와
정책적인 전략들이 필요하다.
마음에의 결심을 행동으로옮기려는 결단에 따르는
구체적인 용서의 행동의 실현이 따라야 할것이다.

용서에는 개인적인 사랑의 힘이 요구된다.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에 대한 사랑을 하려는 의지가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화해는 하나님의 자기노력이나, 자기희생이 따르는 사랑의 결과에서 시작하게 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취적인 측면이나,
사랑을 희생하여, 독생자를 인간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희생의 제물로 설정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는 하나님만이 겪은 희생적인 고통이 따랐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희생적인 고통가운데에 인간에 대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한편에서의 사람들의 용서에는 사회적인 조화나,
건전한 상호간의 관계회복을 이루는 데 일조한다. 사회적인 평화에 대한 노력이나,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회적인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지속적인 도덕성회복의 켐페인이나,
평화건설위원회를 상주시켜 그위원회의 활동들을 통해
지속적인 인권,평화운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화해하는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활동이나, 운동을 이루어야 하기에
그런 화해를 일으키는 과정에는 힘들고 어려운 점들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가해자측이며 권력이나 힘을 가진자들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이 자신의 기득권을 제한하고,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인 시스템이나,
도덕적인 사회적인 규약이나, 인간의 평등확립이나,
인간의 기본권리등을 보장하는 사회를 달성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불평등이나, 인간차별화로 인하여 일어난 갈등의 간격이나 증폭을 줄이려면,
갈등의 원인을 해소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갈등이 일어날때에, 쌍방에 대한 화해가 필요한 협력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화해의 과정에서 가해자측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뉘우치는 회개와
재발방지를 위한 사회적인 공정관리의 장치의 정착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더나아가 가해자들은
피해자측의 고통스런 삶의 현장을 회복해주려는노력이 필요하다.

가해자측과 피해자측모두는 불공정한 차별화로 인한
남용된 권력이나 폭력사용에 따르는 사회적인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 불합리한 현실을 다시 재해석하여 함께,
진정한 정의의 사회가 실현될수 있도록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는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도덕성의 문제해결로는 인간의 악이 폭력으로 표출되어,
피해자측인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게 되는
그런 죄를범하는 인간의 양심의 기능의 회복과 상하게 되어 있는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어느 인간의 인종이나 낮은 사회적 계급들의 사람들을 차별화된 사회적인 의식이나,
차별화의 악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는 구조적인
악한 사회적인 시스템을 대안적인 사회적인 시스템을 세워 대체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규약에 대한 상호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회적인 보장과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장치의 회복을 시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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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도 있구나

우리 주변에 내 팔자가 왜 이럴까 하고 자주 생각하는 경우나
그런 태도로 일관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안되도 그렇게 안될수가 있을까 하고
자신의 삶을 두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넘어져도 이마팍이 깨지고, 뒤로 넘어져도 뒤통수가 터지고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런 힘들고 고통스런 세상에 내가 왜이렇지 하고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는 경험을 하는 경우도 있을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을 사는 노정의 길에서, 메몰찬 모래바람이 세차게 일어나고,
나무나 자신의 목을 축여줄 만한 오아시스가 하나도 없는 사막지역을 걸어가는 것처럼 버려지고,
찌긴 나의 인생의 발걸음이여,
하늘을쳐다보아도 쏟아날 구멍이 없어,
꽉 막힌듯한 생활의 현장에 자신의 몸을가눌길도 없어,
근심걱정에 한껏 찌들려, 살이 다 오르라 질 정도가 되어,
뼈가죽만 남은 자신의 몸뚱아리만 달랑있는 처지란, 상상하기 조차 싫은 경우일 것이다.

먼 옛날에 중동아시아에 어떤 의인(옳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던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자기관리(영성관리, 인성관리, 인간관계관리, 자녀관리,건강관리, 재정관리등)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범사에 빈틈이 없었고, 늘 남에게 유익을 끼치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봉사의 생활에도 충실하다보니,
당시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사람이 하루아침에 망해도 그렇게 망할수 있을 까 할정도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가지 재난을 한꺼번에 당하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그 사람이 집에 있었고,
그의 아들들과 딸들이 그사람의 큰 아들집에 함께모여 먹고 마시는 잔치하고 있었다.
그가 집에서 있는데, 밭에서 일하고 있었던 한 하인의 보고를 전한다.
그의 말인즉, 여러하인들이 넓은 밭에서 일을 하고,
그 옆에 황소가 밭을 갈고, 나귀들이 한가로이 먹을 것을 먹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 온 도적떼들이 들이닥쳐,
하인들을 거의 다 죽이고, 재산들을 빼앗아가 버리고, 자신만이 간신히 도망쳐 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있는데, 또 다른 하인이 달려와 보고를 한다.
맑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들과 그 옆에 있던 하인들을 모두 불태워 죽게 되어,
자신만이 혼자 간신히 살아와 알려주는것이라고 한다.
이 보고를 들으면서, 그의 마음이 답답함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다른 소식이 들이 닥친다.

또 다른 하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 다른 불길한 소식을 알려준다.
큰 떼의 세무리의 갈대아인들이 나타나서, 낙타들을 약탈하고, 하인들을 죽여,
자신만 또 간신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럽고 불길한 소식을
바로 자녀들이 함께 모인 현장에서 달려온 하인이 전하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을 버티고 있는 네기둥들이 뿌리채 뽑히면서,
거기에 모여 잔지하던 자녀들이 모두가 다 하루 아침에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만 겨우 목숨을 건져 이렇게 달려와 전하는 것이란다.
웬 하늘에 청천벽력같은 재난이 그에게 불어닥쳐는가고 깊은 탄식가운데에,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내리는듯한 슬픔과 고통속에서 자신의 옷을 찟으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렇게 몇 날을 그 고통속에 있는 그에게 이제는 자신의 몸에 악창이 일어나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눌지를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거의 탈진 상태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부인마저 그에게 당신이 믿고 섬기는 그 신을 향해 항의하지 않냐고,
그렇게 자신의 신실함만 지키면 되겠냐고 그에게 충동질한다.
자신을위로해주기는 커녕 옆에 있던 부인마저,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그런데도 그는 하늘에 계신 신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평하지않고,
다만 자신의 처지만 한탄하고 있으니,
가히 그는 누구도 당하기 쉽지않은
그런 인생의 극심한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 굉장한 인내를 갖고 맞이하며,
그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결국에는그는 이 모든 재난을 감당하고,
나중에는 의젓이 사는 그에게 또 신으로부터 놀라운 복을 받아,
갑절의 축복속에 자녀들을 새롭게 갖고,
인생후반에 더 나은 인생을 통해, 탁월한 인생의 고난과
삶의 질고를 이기고 살았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인생들이
본받을 만한 삶의 철학을 터득한 사람이라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알수 없는 일들을 당하고,
힘든 상황하에서도 위의 사람처럼 흩트러진 자신의 삶을 추리고
인생을 맞대고 살기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도 신을 저주하다든가, 입술로 범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에, 인생에 대해 저주하며,
신에 대해 모독하는 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지 모를것이다.

위의 그 의인이 당한 일련의 고통스런 재난들은 인생들이 그 원인을 알수 없지만,
신의 책은 인생들에게, 인생의 삶의 배후에 있는 악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명히하고 있다.
그 악한존재는 그 의인의 의로운 삶을 보고 질투하여,
신앞에서 그 악한존재가 그의인의 의지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런 일련의 시련들을 잔인하게 행하여,그 인생을 괴롭혔다.
그 악한 존재가 하는 일이란 지금도, 인생들을 실컷 이용해 이 땅에 악을 자행하며,
인생들의 삶들을 파괴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하는 일들을 밥먹듯하고 있으니.
불쌍한 인생들은 알수 없는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나,
악한 존재의 활동에 대한 이해와 경각심을 갖고,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도, 결코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거나,
하늘을 향해 모독하는 말들을 삼가고, 주어진 자신의 삶을 힘들지만, 감내하다보면,
신은 반드시 그런 인생들을 돌보며,
그에게 목마르고 갈증나는 그의 목을 축일만한 물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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