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예수의 발견
- 목동
- 2009
-
- 두 세계 사이에서
- 목동
- 2009
-
- 가능성의 세계를 넘어 믿음...
- 목동
- 2009
-
-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
- 목동
- 2009
-
- 홀로 설수 없는 인생
- 목동
- 2009
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베드로 전서 1: 22-2: 3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을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크리스천의 생활은 날마다 새로 와 지며, 거룩해가며, 정결함을 유지하는 삶이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가는 삶이며, 주님을 닮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구원받음을 유지하는 삶이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삶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였던 주님의 말씀이 있다.
진리를 순종함은 인생의 참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마음의 부패를 가져왔다. 인간의 영혼은 마음의 부패와 연결되어 있어, 밝아야 할 인간의 양심이나, 영혼의 상태는 어둠에 휩싸여 있다. 거기에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와서 밝혀야, 어둠이 걷히고, 마비되고 찌들인 양심의 기능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생령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과 교류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진리의 말씀은 어두운 인간의 영혼을 밝혀, 영혼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며, 말씀 속에 계신 주님의 정화시키는 능력에 접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므로, 자신 안에 순결함으로 회복하게 한다. 어둠에 처해 있을 때에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지 못하며, 왜곡되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보지 못한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비쳐주면, 자신의 거짓됨과 부패함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뉘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둠에 숨어 있는 죄의 그림자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인간 영혼의 재창조에 가까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나는 것이며,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인 새 생명의 출생을 의미한다. 그 생명을 탄생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세상에 있는 썩어지는 모든 것(육체에 속한 것)과는 다른 본질의 것으로 그 말씀은 원래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지만, 다시금, 그 말씀은 영혼의 재창조의 능력으로 죽었던 인간의 영적 생명(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생명)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성과 현존성을 드러낸다.
그 인간에게 전달 되어진 기록된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인 영원한 말씀(영생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원을 두고 있는 말씀으로 그분의 영원한 존재성과 더불어 그 말씀은 살아있다.
모든 인생이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없어지게 된다. 이지상에 한 일들은 인간의 기억에 남지만, 그러나 다 사라지는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세운 업적이나 공로나, 일들은 결국 마지막에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들이 얻은 영광도 세상의 사라짐과 더불어 없어진다. 그러니 아침에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는 꽃이라도 저녁에 시들어지는 때에는 힘을 잃고, 생기를 잃어, 아름다움의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그렇듯이 인생의 날들은 젊은 때에 활기찬 것들이 노년에 시들해지면서, 결국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의 몸이 흙으로 돌아가듯, 인간이 세운 모든 일들이 다 사라진다. 거기에 안주하려다가는 실망을 하며, 또 거기에 자신(미래와 생명 등)을 거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오직 세상을 창조한 창조의 말씀은 세상의 존재의 유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세상을 있게 한 창조의 근원으로 그것의 존재의 근원은 영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 가운데에 존재했던 말씀은 생명 존재의 근원으로 그 말씀은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거의 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낡아지나, 인간이 기대하며, 바라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에 의해 세세토록 존재하며, 이 지상의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에 상존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남아있어, 인간의 가야 할 영원한 본향에 머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 말씀 안에 지금 세상의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나, 미래에 숙제로 남아있는 일들이 풀어질 날이 다가오는 때에, 그 말씀의 미리 알려주신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 그 곳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때가 되어 나타나며 현실로 다가 올 것이다. 그 것에 대한 정보가 인간에게 전하여 진 아름다운 소식으로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것이다.
베드로 전서 1:13-21
13.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크리스천의 삶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거룩함에 이르는 삶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성품을 받은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아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죄 있는 인간의 상태에서는 저절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성품으로는 하나님에게 나갈 수가 없으며 그분 앞에 사는 그리스도 인의 삶을 살아갈 수도 없다. 고로 그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의 자세는 행동의 양식을 가져온다. 마음의 정결함과 선함과 옳은 뜻을 따르려는 자세는 자신의 심령 안에서 마음의 상태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할 때에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여, 저절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알아도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도 없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 인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의 변화와 깨어남의 전제가 필요하다.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마음이 깃들듯이 정신을 차린 상태로 살아야 자신의 마음이 정결하며, 옳은 일을 위해 의를 좇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진리의 빛이 없는 고로, 인간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 무지함에서 방황하며,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의 빛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그 상태의 혼돈함과 비참함을 보게 하여, 마음의 잡초가 난 상태에서 그것을 뽑아버리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이 마음의 갱생과 정신적 인과 영적인 자세의 변화가 따르게 된다.
그리스도 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받은 자로 건강한 영적인 삶을 영위하여 갈 때에 주님의 가져오실 더 큰 은혜와 영광의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세상 나라의 정지와 그의 나라의 정착이 시작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에는 새로운 차원의 안긴 유형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날을 준비하여 사는 자에게만 그 때의 삶의 새로운 차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다고 생각해본다면, 한 사람은 순리대로 사는 자와 두 번째의 사람은 하늘에 대해 역천하는 자로 살아간다. 순리대로 사는 자는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를 대하는 순종하는 자식처럼 자신을 여기며 살아간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 품 안에서 그분과의 정상적인 관계와 지속적인 교제 안에서 그분의 관심과 돌봄의 대상으로 살아야 할 존재였으나, 인간의 독립적인 자세로 그분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기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는 자세로 살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로 낙인을 받아, 수치심과 정죄 의식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과 그에 따르는 죄의 결과는 인간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 버려, 자신의 그 욕구에 따라 살아서, 결국 그로 인하여 죽음의 선언을 받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죄 받음과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로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과 그의 뜻에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인생을 본받아 살도록 부르셨다. 과거에는 부패하며, 방탕하게 살았어도 지금은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초청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생활은 그의 거룩하심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뜻하며, 그 거룩함의 생활은 마음도 몸도 정신도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이 거룩함으로 살아감이란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하며, 살아가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인생을 병들게 하는 부패와 타락의 길에서 벗어나, 죄의 문제를 극복하여, 영적으로든지 정신적으로든지 육체적으로든지 모든 면에서 건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뽑혀 불러냄을 받았으며, 그분의 택하심을 좇아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살게 되었다. 그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를 닮아 가기를 힘쓰는 것이며, 그의 성품은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얻어지며, 그분과의 교제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은총과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신선함과 자기의 도달해야 할 온전함을 향해 지속적으로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분의 의도를 따라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과 구별된 초월성을 갖고 계신다.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셔서 돌보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창조하신 세계 안에 인간의 범죄함으로 부패와 더러움으로 오염된 사람들의 세계를 새롭게 하는 의도로 다가오신다. 고로 택한 사람들이 그분에게 가까이 가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분의 제시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는 거룩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타락하여 마음이 부패한 세계에 살고 있다. 고로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부패한 성향으로 인하여, 그분의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는 거룩의 발걸음을 살아가려면 의지의 결단에 의한 마음의 변화와 지속적인 갱신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내면의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들을 전체로 파악하며, 분별하신다. 사람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외모나 행위보다는 내면이나 동기의 선함과 악함을 보시고, 늘 그들의 외모보다는 진정한 내면의 변화의 유도를 권고하신다.
사람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그들을 택한 자녀로 세우신다. 고로 택함 받은 사람들은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친 백성이며, 시민권 자로 이 땅에서 살아갈 시에 잠시 머물러 살아가는 나그네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나그네는 자기가 가야 할 분명한 목적지를 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길을 향해 계속 가는 사람들은 길에서 결코 한가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안일한 자세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며, 세상에 눈을 팔지 말고, 자신이 받은 하늘의 소명을 이루어가는 진지함과 근신하는 자세로 세상에서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들은 혈통이나 조상의 영향 아래에서 머물러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 받는 저주의 혈통 아래에서 질식하며, 그리고 결국 죄의 대가로 멸망에 이를 상태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각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각각 개인의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각 개인이 인간의 원죄와 유전 죄와 그리고 자신이 짓는 자범 죄에서 주 예수님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속의 보혈로 죄의 대가와 형벌로부터 해방을 받아, 그 주님의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인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주님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그 험악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영혼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 주 예수님은 옛적 구약 시대에 인간의 허물과 죄에 대한 제물로 희생되었던 양의 희생 제물처럼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죄수로 처형을 당하며,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의 형벌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당하셨다. 그가 흘리신 피는 생명의 강이 되어 누구든지 그의 보혈을 마시고 그의 피로 죄의 씻음을 받으면, 죄의 저주와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되어 구원받는다.
날마다 그분의 흘리신 보혈을 생각하며, 그 보혈의 능력과 효력을 따라서, 부패한 자신의 마음이 정결케 되며, 어두운 심령이 생명의 빛을 보게 된다. 고로 그의 보혈은 죽은 심령들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있다. 아무리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라도 그의 보혈에 씻음을 받으면 그 무거운 짐에서 벗고, 영혼의 자유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날마다 늘 그분을 바라보며 찾으며, 그분이 소생시키시는 영혼의 축복 안에 기쁨과 만족을 주는 삶의 묘미를 맛보고 살아간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 전에 영원 가운데에 함께 계셨던 말씀으로 이 세상에 생명의 말씀으로 알려지셨다.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와서 듣는 그의 메시지는 생명의 말씀이 되어 죽음 아래에 있는 생명들을 살리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되찾아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의 정해진 시간의 선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길이만큼 살아간다. 이런 시간의 현상은 종말적이며, 제한적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이 종말의 현 시점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시간에 대해서는 마지막 시간을 산다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세상에 올 때에는 차례대로 부모들을 통해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오직 하나님이 아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가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특히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단 한 분 뿐이신 예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그 아들을 비참하게 인간의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게 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매정하게 그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시고,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다. 저주의 형벌과 지옥의 고통과 같은 죽음의 현실을 당하신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모든 구원받는 사람들의 살리시는 생명이 되셨고, 절망과 고통 가운데에 처해있는 모든 인생들의 희망이 되셨다.
크리스천은 희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라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희망을 안고 산다. 그들의 삶은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따라 살며,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따라 사는 삶이다. 이런 희망의 근거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뢰심에 있다. 그들의 신뢰심은 결국 그들의 죽어가는 영혼과 자신들의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신뢰심은 세상이 감당을 못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미지의 세계인 영원을 잇대게 하는 생명선으로 연결된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그들은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공명 출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성공하는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승리의 비결의 삶이다.
요한 일서 4:7-12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수 있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1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제물로 삼아 주셨습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창조 하사,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세워놓은 이세상을 돌보셨다. 그리고 아름다운 동산을 세우시고 그 가운데에 사람을 창조하사 살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며, 사랑하셨다.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태어났으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셨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목마름에서 오는 인간 희구의 감정의 원형이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단어는 사회적인 인간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서로 채워져야 할 사람들 속에 있는 원초적인 요구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은 혈육들이 나누는 사랑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향하는 사랑이나, 혹은 동기간에 혹은 형제 남매간에 서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 돌보며, 나누는 인간의 정에서 나오는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의 돌봄을 통해 사람은 생존하며, 태어나서 무덤에 갈 될 때까지 인간의 끈끈한 정에 얹혀서 살아간다.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로 사람은 유아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남녀간에 차이를 넘어, 원래 한 몸에서 나와,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갈구하며, 애증하며, 한 통속에서 나온 연결된 관계의 존재들이다. 사람들이 자아에 대해 자아 인식을 하면서 자기와 성적으로 다른 존재인 상대방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하늘이 정해준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남녀는 마치 자석끼리 서로 힘을 당기듯이 가까이 하며 살아간다.
모든 인류가 사람이라는 한 종족에서 나왔기 때문에, 각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사람에게는 서로 하나님이 정해준 인간의 기본적인 요소(욕구 충족, 희망 사항이나 삶에 대한 의식) 들을 다 갖고 있다. 말을 하거나, 생각하고 느끼고, 서로 공통적인 인류애의 나눔을 갖고 살아간다.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에 의해 함께 생존하며,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지구촌의 이웃으로 같은 공동의 운명체 안에서 살아간다. 자연의 환경이나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람들은 함께 비슷한 삶의 조건들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인류애에 대한 보편적인 동포 사랑이나, 주변 나라들을 도우며,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 인류 보편적인 사랑으로 국제 결혼도 하며, 혼혈로 된 자손들도 낳으며, 다른 나라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자신들의 자녀처럼 돌보는 이들도 있는 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으로 알려진 인류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류의 원래의 부모로서, 그는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돌봄의 교제인 그의 법을 넘어가 그 말씀의 원칙들을 위반하여 범죄하여, 버림받았을 때에 그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는 계획을 세우셨다. 그는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에 있는 멸망 당할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의 희생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을 조건 없이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분은 아니며, 그가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심을 통해 그분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려주시고 있다. 그는 그의 말씀 가운데에서 자신을 사랑이시라고 하셨다. 그는 그의 사랑을 따라 사람을 대하시며, 사람들에게 사랑의 관심으로 늘 살펴주신다. 오직 그의 사랑을 받은 자는 그가 사람을 위한 그의 사랑과 돌보심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상대적인 존재인 사람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닮은 존재로 그의 사랑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되며, 그분의 의도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초 위에 세워진 곳이다. 인간의 저지른 죄로 인하여 부조화와 불합리가 판을 치는 것 같으나, 가까운 행성 중에 하나인 달에 갔었던 우주인들이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사랑이신 하나님의 조화의 솜씨를 볼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들은 그들의 보았던 시야를 통해 지구가 둥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을 느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지구는 지금 사람들이 사느라고 갖다 버리는 온갖 쓰레기와 같은 것으로 뒤덮여 가고, 살기 좋은 지구 환경이 사람들이 개발하면서 내 품는 이산화탄소의 가스 배출의 팽창으로 점점 지구는 더워져 급기야는 인류 모두가 지구 온난화의 위험이나 재앙을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에 와있다.
그러나 지구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지어진 곳이며, 지금의 문제는 지구의 주인께서 언제 가는 해결하실 것이다. 지구의 종말로 가던지 아니면, 그분이 이미 마련하신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정보는 사람들에게 그가 사람들을 지은 창조주이며, 자녀를 돌보는 아버지이며, 인생들이 자신의 문제에 휩싸여 혼란스러워 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인류 구원을 바라보며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기대하며, 절망스런 자신의 삶에서 사랑이신 그분을 통해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상태를 버려두지 않으며,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생들을 살리기 위해 세상에 그분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 세상에 오신 그 독생자는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나타내셔서,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 것을 보여주셨다. 그의 희생과 죽으심을 통해 인류 원과 인간 개조를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해결의 길을 보며, 그분 안에서 인간 자신을 미워하는 불합리한 상태에서 범죄한 자신을 용납하여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 할 수 있다.
인간 상에 횡횡 하는 미움이나 저주나 증오의 현상은 사람들이 저지른 죄의 영향과 그로 인한 악의 세력의 확대로 인한 고통스런 결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신음하며, 자신의 신세나 운명을 한탄하며, 불안해하는 자신을 달래려 갖은 방법을 동원하지만, 인간의 본성 안에 숨어있는 악의 씨앗인 죄의 경향성은 오직 사람들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사람들 속에 있는 그 어두움을 몰아내신다. 불안과 절망에 버려진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잊어버린 위치를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다시 찾게 되며, 자신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그분의 사랑의 배려 속에서 잃어버린 사람의 영광된 모습을 회복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인 사람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나누는 사랑의 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천의 발전소에서 나오는 구원의 무한한 힘과 생명의 에너지의 공급은 망가지고 버려진 사람들을 다시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가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신비한 세계의 하나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죄로 인한 불안과 저주스런 고통의 현장에서 늘 돌이 킬 수 있는 위안과 자신의 삶에서 언제든지 소망을 얻는 능력을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 그리고 그 사랑의 지식과 정보를 받은 사람들은 그분에게로 돌아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사는 자의 기쁨과 인간적인 만족감을 누리며,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형제인 이웃을 향해,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사랑 실천의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으며, 그 사랑의 경험 안에서 자신이 편안해하는 것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맛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비록 과거에는 정죄하며, 불만해하는 적대감이나 수치심이나 정죄 의식 속에서 해방을 받아, 사랑의 하나님이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바라보시는 그 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보며 자신을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용납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운명의 공동체의 지체인 이웃이나 형제들을 향해 그분의 사랑의 축복과 은혜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무리들의 아름다움의 실체는 바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을 서로 실천하며, 나누는 기쁨 중에 그 사랑의 을 경험하는 상태에 그저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분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실체를 그분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신앙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 사역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에 그들의 사랑 실천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허물을 용납하고,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정죄의 어리석은 판단과 사람들 사이를 이간케 하는 고질병적인 시기와 질투의 질곡에서 해방 받는 치유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이제 사람들을 서로 이해하게 하며, 자라게 하며, 성숙하게 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여, 자기 완성의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그의 사랑은 한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과 인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자족감과 신실성을 도모하여, 끊임없는 그분의 기대치에 이르고 저 하는 자원의 노력의 의지로 충만한 상태로 계속하여 그분에게 나가기를 힘쓰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자기 개선과 자기 성숙을 통해 이루어가는 자기 완성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걷게 된다.
참포도나무의 비유
요한 15:1-6
1.“나는 참 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모두 잘라내시고 열매맺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려고 깨끗이 손질하신다.
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어 준 말로 이미 깨끗해졌으니
4.내 안에서 살아라. 나도 너희 안에서 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서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살고 내가 그 사람안에 살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누구든지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주워다가 불에 던져 태운다.
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비유를 통해 인격적인 관계안에서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신앙과 삶의 현주소가 어디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살아있는 분으로 지금도 신자들속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다.
신앙인의 능력있는 삶의 비결은 예수님과 성도개인과의 관계에 의해 달려 있다. 그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 신앙인들은 그의 생명을 받아서 그의 생명의 영향력에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생명은 영적인 생명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의 삶을 보장받으며, 그 생명의 연결을 통해 신앙인안에 그와의 연결을 통해 생명이 유지가 된다. 고로 그 생명유지는 근본적으로 그와의 관계와 그에 따르는 교제의 실질적인 지속적인 연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분과의지속적인 연결은 그로부터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을 공급받으며, 그분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가져온다. 신앙인들은 신앙생활하면서도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따로 사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음을 본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인가? 아니면 자신 혼자 애쓰고 영성생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밭에 심어지신 포도나무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일구어 놓으신 밭에 심겨진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열심있는 농부로서 창조시부터 그는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영광된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 저주받은 땅에서 불안과 고통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을 다시 그의 아들의 나라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세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땅에 세워진 인류희망의 나무처럼 이세상에 심겨졌다. 그의 포도나무의 비유는 자신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범위아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 누구나 그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나라에 속할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축복을 상속받는다. 구원받은 중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통치의 세계로 들어온 이들은 그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관계의 생명을 지속할수 있다. 이 관계의 지속은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의 교제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 만일 지속적인 관계유지에 실패한다면 그들이 맺은 관계설정이 무효화될수 있는 것은 그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교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잎이 열리고 그 가지에서 열매를 맺게 되려면 지속적인 관계의 유지와 그와의 활발한 교제만이 그에게 붙어있는 가지로서 생명유지에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자신의 역할을 할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가지로서 끊임없는 생명유지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열매맺을 가능성을 안고 있으면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가지를 전지하며, 보다 열매가 잘 영글수 있도록 다듬는 일을 하신다. 더러운 것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잘 정리된 깨끗함을 유지하여 건건한 가지로 생존하게 하여, 열매를 맺을 때에 탐스러운 열매를 열리도록 배려하신다. 그 다듬는 일이나, 배려하는 일은 두가지를 겸하는 것인데, 훈련이나 단련을 시키며, 그리고 격려하는 일을 통해 가지가 가지로서 강건할수 있도록 만들어가신다.
믿는 사람들이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의 약속안에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는 정화의 내용이 있으며, 그 말씀을 믿음으로 자신의 죽은 영혼을 살게 되며, 자신을 더럽히는 죄의 흔적들을 씻어낸다. 그 말씀을 통해 더러운 인간의 타락한 부분들을 드러내어, 그 정죄된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힘이 그의 말씀에 있다. 그는 이땅에 생명의 말씀으로 오셔서, 그가 말씀을 통해 전해준 약속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피흘림으로 인생들의 죄를 씻어내는 정화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분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몸을 희생하므로 죄를 해결할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자신들이 거듭나 변화받은 것은 그의 씻기시는 능력의 약속을 담고 있는 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인간의 죄가 씻어지며,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인생들으 그분안에서 죄의 정죄받음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심령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로 살게된다.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거기에 붙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를 인정하고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생명의 주인으로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그는 그를 영접한 인생들안에 오셔서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주하여 그의 나라가 그들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나라의 통치속에서 그는 인생의 주인으로 자신을 믿고 받아들인 그들의 생활속에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분이 자신을 믿은 사람들에게 가져오신 세계는 죽음과 불안과 절망에서 생명과 평안과 그리고 희망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을 따라 살면 그안에서 진정한 인간됨의 길을 발견하며, 인간의 자기한계를 극복하는 비결을 터득한다. 그안에서 하나님의 인간개선과 개종을 이루어 내며, 인간의 자애중심(자기가 자신에 대해 하나님이 되려는 의식속에서 갈등과 불안을 경험한다)의 제한되고 모순된 삶에서 하나님중심의 의인(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의 인도와 보호가운데에서 주님의 인정받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진정한 평안을 경험한다)의 삶을 살아간다.
그분안에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받는다. 그분안에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한 활력과 용기와 희망을 얻으며 무슨 일에나 충실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분을 떠나서는 외로운 고독자처럼 자유인처럼 사는 것 같으나, 그의 삶은 늘 죄의 속박아래에 주어진 억압된 인간성의 한계와 불안가운데에서 살아가게 된다.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는 것이 아닐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일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조차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여, 자신안에 있는 육욕이나 죄의 영향력안에 있는 탐욕적인 추구에 몰입하기 쉬어지며, 결국 허망하고 혼란스런 생활을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주님밖에 있는 인생들은 그들이 당하는 인생의 처절한 상황은 인간시조의 원죄와 그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부조화된 불안과 두려움의 마음에서 내면의 평안을 얻지 못하며, 결국에는 자신안에 있는 인간절망의 상태에서 탄식하며, 곤핍한 심령의 상태에서 메마른 생애로 마감하며, 결국에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향하여 나갈수 밖에 없다. 그의 종말은 심판으로 인한 파멸의 길에 놓이며, 후회와 회한의 삶을 살아온 자처럼 사라져 없어질 무의미한 생으로 마감할 것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그분을 믿고 영접한 신앙인들은 지속적인 그분과의 생명의 관계형성과 계속되는 공급되는 그분안에서 오는 삶의 에너지에 충전을 받으며, 그분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는 일들이 옳은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분안에서 자신의 영적생활을 유지하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공기와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여, 자신의 삶이 보람차며, 좋고 귀한 열매맺는 생으로 이어질수 있도록 그분에게 늘 붙어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