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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용서와 건강한 자아
사람이 자아에 대해 건강하게 되려면
자신안에 있는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내면 생활에서 자신에 대한 용서는
자신이 죄로부터 갖게 되는 죄책감과
자신의 본성안에 있는 수치심을 극복하는 근거가 된다.
먼저, 자신안에 있는 죄책감은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범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며,
수치심은 자신의 자아 전체의 경향으로 타인에 의해 보는 관점이 수치심으로 작용한다.
용서하는 자신에 대해서 이두가지를 행해야 한다.
우리 자신(자아본성)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수치심과 죄책감을 아울러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병적인 수치심은 자신에게 독소로 작용한다.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여, 무엇에 대해서든지 자신을 멸시하려 든다.
우리의 자아안에 있는 수치심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자아상을 훼손하며 더 깊은 병적인 상태의 센티멘탈리즘에 빠지게 하여,
쓸데없는 정신적인 부담감을 안고 살게 한다.
우리의 수치심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몸의 상태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무화과나뭇잎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우려 했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수치심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을 죽여 피를 흘리고 난후에
그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므로 인간의 수치심을 가리우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성의 상태가
죄로 인하여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을 바라볼 때에 누구나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를 해결하는 것으로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회복케하는 은혜로
죄를 해결하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창조된인간으로 선언하시고 수치심을 극복할수 있도록 하셨다.
죄책감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정죄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죄를 지은 인간이 그죄의 여파로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의 유혹을 걸어 죄를 짓도록 유도한 사단은
사람속에서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할수 만 있으면 우리를 죄에 계속매여 있도록
죄를 해결할수 있는 죄의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미 고백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복음(용서와 구원의 메시지)안에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므로써
그들을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케 하고 소원케 했던 죄의 문제는
하나님편에서 해결의 길을 열어주셨다.
사람들은 그 해결의 차원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의 은혜안에서 얻게되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편에서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따라,
인간에게 있는 죄의 영향력인 수치심과 죄책감을 극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용서받은 사람의 의인의 행동보다는
그들의 상태를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사람들의 상태와
그들의 전부를 용납해 주시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단절시키며,
서로를 원수시 하는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을 벗어나도록 인도하시므로,
그들을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으면
자신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부담감에서 벗어나며,
비로소 자신안에 있는 자아는 건강한 상태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그런 자아의 상태의 모습은 자기표현이나 자아실현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며,
자신의 내면의 삶을 안정하게 해준다.
왜 나는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가야 만 하는가?
인간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 시종일관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누구든지 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는 것과
자기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기가 꼭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그리고 나서 자기 성취감을 갖고서 살아야 바람직한 삶을 사람답게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이런 욕구가 기본적인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려는 욕구나 태도보다
더 필요한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삶의 요구이며 자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왜 나는 거부당하며 살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이 들도록 한 요인들을 살아오면서, 부정적이고, 힘든 일들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때는 그런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왜 사회는 나에게 외면하는가?
항변하며, 사회악을 조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왜 주변사람들은 나를 무시하는가? 라고 좌절하며,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자기자신에 대한 생각에 대해, 자신은 버려진 존재로가 아니라,
받아들여진 존재로, 자신을 인정받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인정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때,
우리는 나는 받아들여진 존재라 여기는 옳은 인생철학을 가져야 하는데,
그 철학의 근저에는 신과의 관계로서의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신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큼 우리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릴때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은
누구나 신에 대한 개념을 갖고서 살게 되며,
그 신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어떠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간다.
먼저, 자신의 생각하는 신개념은 모든 인생에 대한 자세와 철학의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이고 바람직하게, 신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모든 사건이나 일에 대해,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태도로 대하게 되며,
설사 고통스럽고, 힘든일들과 같은 외부적인 어려운 일들을 당해도,
그것들을 극복할 힘이 있으며,
결국에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반전시키는 전화위복이나,
그런 도전에 대한 자신의 긍적적인 자기 응전으로 새로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이나,
그런 종류의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관계이며, 신뢰하는 경우에 당하는 자기 거부나 자기 상실은
자신에게 많은 좌절과 불안으로 내면적인 고통을 겪게 하며,
그런 현상들은 자신이 조정할수 없는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발전하고,
일생을 통해 자신의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해 자신을 인정하는 존재로 여기고,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의식을 갖아야 할 것이다.
그러러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받아들여진 존재로 여기는 건강한 자아상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런 건전한 자아개념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있게 한
신에 대한 자세나 태도가 결정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신안에서 만 자기만족이나, 자아완성(구원)을 이룰수 있는 인간은
신을 떠나서는 자신을 바로 세울수 없다고 감히 단언하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의 근저가 바로 신 앞에 있을때에,
자신을 신의 혜택안에서, 용납된 자신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제이다. 누구나 사람이 태어나면서
신과의 단절가운데에 있는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그 신을 알지도, 찾지도, 그리고 발견하지도 못하므로,
신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 신을 알려주면, 그신에게 찾아가, 그를 알고,
그와 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가지고 있는 딜레마 중에 가장 큰 것이라 할수 있다.
스스로 그것을 이룰수 없으니,
다만 신만이 자신을 알려주는 신자신 혹은 신의 대리자를 통해 그 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
역사속에서, 극한 거부나 유기를 통해 인간의 당할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한 한 인생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그에게 찾아가, 상의하고,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알고 있다고 우리가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만일, 신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 그것을 몸소 경험으로 그런 일들을 겪었다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경험을
그 신에게 다가가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그분의 상담과 조언을 구할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좌절을 겪는 인생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때에,
나는 세상에 대해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버려진 존재로 여기는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세상을 붙드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한,
인생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신이 결코 인간을 버려지도록 놔두지 않고,
무엇인가를 인간을 위해서 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신에게 당연히 도움을 구할수 있겠다
용서하지 않는 태도를 치료하기
내면치유와 용서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쓴뿌리와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에는 용서라는 큰 주제가 놓여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으로 회복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에 있다고 하겠다.
먼저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이나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하는 용서를 통해
자신의 내적인 측면에 대한 깊은 차원의 치유를 하여
자신에게 있는 쓴뿌리와 같은 부정적인 사고 시스템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사고시스템이나 감정조절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내면치유의 장애요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앙갚음이나
혹은 섭섭함이나 혹은 괘씸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들은 더 나아가 분노를 촉발하고,
자신도 원치않는 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용서하지 않은 마음을 계속유지하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큰 부담감을 가지고 살게 된다.
고로 자신안에서 마음의 평안과 사고하는 태도에 있어, 자유를 얻지 못한다.
용서하지 않는 상처들 그리고 상한 감정들은 자신속에 더 뿌리를 내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에 의한 원수 갚은 태도로
짓는 죄를 범하게 하며,
앙금된 마음에 고착이 되어,
그 상한 감정들이 자신속에 중한 부담감과
마음의 평안을 해치는 상시적인 불안을 가중케 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 죄의 성향들은 자신의 마음에 펴져있는 영적인 배설물이나
쓴 뿌리역활을 하는 자신의 고착된 부정적인 사고나 병든 성향의 흐름을 지배한다.
고로 그런 불안이나 내면의 병든 성향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전환하도록 자신의 상태를 살펴볼줄알아야한다.
용서는 인간관계를 푸는 열쇠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주요한 이슈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는 복음의 핵심으로
죄인인 우리들이 구원받는 근거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다.
용서에 대한 메시지는 성경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마태5:22-24에서 형제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는 것도 죄이며,
주님앞에 나가기 전에 형제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서로가 풀어야 할 인간관계의 악화나,
증오된 상태라면, 상처를 준 사람이나
상처을 입은 사람 모두가
서로 화해를 갖는 것이 그들의 신앙행위에 어떤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모델기도에 용서가 큰 주제이다.
마가복음11:25-26에 기도할때에,
어떤 사람에게 서로 마음상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용서하는 그사람도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한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 태도를 고치는 것은 먼저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죄를 고백하며( 마태복음 5:23, 요한일서 1:9)
그 마음의 약함이나 악함을 자인하며,
그안에서 벗어나기를 힘쓴다.
그러러면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배울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용서의 모델과 근거가 된다.
그는 자신을 저주하며 모함하며, 사형을 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도움을 의지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와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이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넘어가는 길은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축복을 비는 마음과
그 사람을 용서할수 있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는 자신이 받은 상처나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이 영향을 받은 마음의 상처를 발산하는 자기 나름의 감정표현방식도
상처난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길과
상한 감정을 다루는 것이나,
병든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내적치유의 과정들이 필요한 것이다.
크리스챤의 영적인 치유와 심리적인 치유를 접목한 독특한 형태의 치유로,
크리스챤이 가지기 쉬운 영적인 함정이나,
정신적인 슬럼프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적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내적치유는 영적인 치유에 중점을 두는 경향과
심리적인 치유에 주안을 두는 경우와
크리스챤의 자기 아이텐티티의 회복을 통해,
자아치유를 하는 경향으로 나뉜다.
영적인 치유에는 성령의 전적인 의존에 의한 인간영성의 치유로,
영적인 영향(악한 영이나,
왜곡된 인간 자신의 영적인 혼란 상태)으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하는데 있다.
심리적인 치유는 감정치유나,
기억치유를 통한 인간성안에 있는 억압된 모순이나 불합리를 제거하여
정신적인 건강을 얻는 것을 목표하는 치유이다.
자아치유는 참자아와 거짓자아사에서 갈등하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회복의 치유를 통해,
자신의 왜곡된 자아가 거듭나며,
새로와 진 자아상으로 태어나,
영적인 건강과 성장차원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데 목표를 둔다.
현대 목회상담과 박스터의 목회상담의 비교
현대의 목회상담은 심리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박스터는 당시 퓨리탄의 인간의 영성이해의 근거에서
목회상담으로 접근하고 있다.
당시 퓨리탄들은 사람들의 심령변화와 영혼의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하며,
그들은 사람들의 진정한 개종이나 거듭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설교는 대개 깊이있는 말씀의 증거나
사람들의 영혼을 접촉하는 영적인 가르침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 배경에서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체계적인 지속적인 교리문답공부와 설교를 뒤받침하는
폭넓은 영성강의로 당시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의 심령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렇지만 박스터의 인간영혼의 문제에의 접근을 하는
또 다른 그의 심리학적인 이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간이해와
목회상담의 심리적인 측면들을 다루었다.
그의 인간이해는 심리적인 접근에서
현대의 상담의 원조라 할수 있는 심리적인 묘사나,
슬픔이나 걱정에 대한 진단적인 개념은 사람을 영적으로만 보지 않고
심리적인 문제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죄로 기인되어졌으며,
그죄의 영향력은 사단의 세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복잡한 상태로 발전시켜,
정신적인 문제에 빠지게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고로 목회상담은 인간의 죄와 영적인 영향력의 문제에서
해결될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을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역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개종이나
신앙의 유뮤가 관건이며,
신앙의 성장과 영혼의 건강은 서로 연결된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드러난 정신적인 (심리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의 원인을 통해 생겼다고 이해하므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신앙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신앙의 성장과
개종과 영적인 성장이 자신들의 영혼의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퓨리탄의 인간이해에 대한 이원론적인 접근법은
사람들을 통합적으로 보는 현대의 상담과는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다.
그접근범은 인간을 단순히 영과 몸을 분리하여 보는
성과 속에 지나친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신앙의 이분법적인 행태를 가져오는 약점도 있다.
다른 일반 현대의 일반 심리상담과는 달리,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성경적인 영혼사역의 기반으로
성령의 조명과 말씀을 통한 치료와 심리의 문제를
신앙적인 문제의 해결을 통해 사역하려는 성경적인 목회상담의 특징을 갖고 있다.
박스터의 상담신학의 상담목회의 적용
박스터의 상담신학과 사역은 현대의 목회상담에 적용하는데,
경험적이며, 영성의 기본이해를 통해
목회상담학적인 입장에서 인간해결과 영적인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의 영성적인 목회 상담은 상담자의 영성강화와
목회의 영성적인 부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의 영성이해와 인간이해는 목회상담으로 하여금,
영적인부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여,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기독교의 건전한 영혼돌봄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박스터는 건전한 신학자이며, 영혼사역에 눈을 뜨고 있는 목회자이며,
심리학적인 문제를 보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탁얼한 목회상담자이다.
그의 영성학은 자신의 영성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영성의 개발을 통해
그의 영성목회의 뿌리가 되었다.
그의 목회학은 퓨리탄의 목회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인 적인 목양의 돌보을 실천하게 하는 영혼사역의 도전을 주고 있다.
현대의 심리학의 지나친 심리적인 문제로만 여겨
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심리적으로만 다루는 현대심리학이나
목회상담자들의 영적인 치료에만 의존하는 문제점을 보완 하며,
그것들의 한계를 배우게 하고,
상호보완을 통해 그것들을 극복하게 하는 영혼치료의
목회자의 목회상담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박스터의 영혼의 치료
묵상을 통한 영성사역
묵상으로 가장 완벽한 대상 즉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또한 말씀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통해 오는 영혼의 치료와
그로인한 영혼의 휴식을 갖게하므로써
사람들의 영혼의 모든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건강한 상태의 모습으로 우고
엄숙하게 하는 목적을 행하게 한다.
사람들의 감성들을 북돋우기위해 이성의 이해를 사용하며,
두뇌의 기능의 효율적인 도움을 의지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영혼에 대한 강한 영향력의 불을 질러
그 마음에 성령의 빛이 비추어 지도록 한다.
묵상을 제대로 하면 감성의 이해가 발전하며,
이성과 마음을 연결하는 영성에 좋은 영향을 준다.
상상력을 통한 묵상은 이성과 감성의 연결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강화시켜준다.
은혜의 사역
회개는 사람들의 만족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과거의 죄를 짓는 우상의 상태에서 돌아서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는 데로 회복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온전하게 하나님에게 맞추어지는 사람들이 된다.
사람의 구속과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인 속성의 충분한 나타냄이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분석에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이유있는 행하심이다.
영혼들의 알림(자신의 영혼에 구원의 진리를 습득하여 구원에 이름)과
재알림(계속하여 구원얻은 심령이 말씀 교육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는 방법)은
필요한 과정이다.
구원얻은 영혼들에게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재교육하는 과정은 필요한 것임을 의미한다.
진실한 영적인 재생산을 경험한 인격은
보다 깊이 있게 죄의 생각이나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게 한다.
영혼의 돌봄과 성장
자신들의 영혼들에게 철저하게 사역하는 구원의 은혜의 사역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충분한 하나님의 목양사역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들을 치료하며,
회복하며, 돌보며, 성장시키는 사역을 하신다.
목회적인 감독의 궁극적인 도달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
즉 목회자들의 영적인 돌봄과 목양을 통해 회중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며,
그들의 인생을 개발시키고, 보다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게 한다.
목회적인 돌봄은 모든 회중에게 있으며,
연합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영혼들을 돌보아야 한다.
즉 목회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영적으로 돌보기와
개인상담을 통해 개인의 영혼들을 돌보는 일들을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목양의 두 수레바퀴와 같이
목회자의 교회의 목회를 움직여 가는 두가지의 영혼의 돌봄이다.
박스터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언급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신뢰와 영혼의 휴식 문제를 그리스도에게 약속된 것을 통해
실질적인 신뢰라고 이야기 한다.
새로운 생명의 역동성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믿음안에서
확립이 되며 표현되어진다고 여기고 있다.
믿음을 통한 영혼의 문제를 접근하며,
영성을 이루는 근거를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 두며,
그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박스터는 말씀치료에 대해 설교로 찌르기를 통한 종합적인 강의와
기도의 모임을 통해 회중들의 거룩하게 교화하는 일에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을 해부하며,
그리고 성경이해의 종합적인 강의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며,
그들의 영혼들을 강화시키는 기도모임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
박스터는 주장한다. 회중들은 자신들의 들음에 통해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 일과 근본적인 진리들즉 죄, 자비, 구속, 개종의 성격과
방법등에 대한 자기들의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회중들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자기이해와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수용을 통한 경험신앙으로 발전되도록
목양은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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