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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14
    용서(3)
    목동
  2. 2007/05/30
    자기상실에서 벗어나려면
    목동
  3. 2007/05/23
    용서(2)
    목동
  4. 2007/05/23
    내적치유의 필요성
    목동
  5. 2007/05/22
    내적치유
    목동
  6. 2007/05/06
    용서에 대해(1)
    목동
  7. 2007/04/27
    우울증(4)
    목동
  8. 2007/04/25
    박스터의 목양신학(5)
    목동
  9. 2007/04/23
    박스터의 목양신학(4)
    목동
  10. 2007/04/22
    박스터의 목양신학(3)
    목동

용서(3)

하나님의 용서와 건강한 자아

사람이 자아에 대해 건강하게 되려면
자신안에 있는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내면 생활에서 자신에 대한 용서는
자신이 죄로부터 갖게 되는 죄책감과
자신의 본성안에 있는 수치심을 극복하는 근거가 된다.

먼저, 자신안에 있는 죄책감은 용서를 구하는 구체적인 범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며,
수치심은 자신의 자아 전체의 경향으로 타인에 의해 보는 관점이 수치심으로 작용한다.
용서하는 자신에 대해서 이두가지를 행해야 한다.
우리 자신(자아본성)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수치심과 죄책감을 아울러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병적인 수치심은 자신에게 독소로 작용한다.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여, 무엇에 대해서든지 자신을 멸시하려 든다.
우리의 자아안에 있는 수치심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자아상을 훼손하며 더 깊은 병적인 상태의 센티멘탈리즘에 빠지게 하여,
쓸데없는 정신적인 부담감을 안고 살게 한다.

우리의 수치심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몸의 상태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무화과나뭇잎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우려 했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수치심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을 죽여 피를 흘리고 난후에
그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므로 인간의 수치심을 가리우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성의 상태가
죄로 인하여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자신을 바라볼 때에 누구나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를 해결하는 것으로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회복케하는 은혜로
죄를 해결하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창조된인간으로 선언하시고 수치심을 극복할수 있도록 하셨다.

죄책감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정죄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죄를 지은 인간이 그죄의 여파로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의 유혹을 걸어 죄를 짓도록 유도한 사단은
사람속에서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할수 만 있으면 우리를 죄에 계속매여 있도록
죄를 해결할수 있는 죄의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미 고백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계속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복음(용서와 구원의 메시지)안에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므로써
그들을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케 하고 소원케 했던 죄의 문제는
하나님편에서 해결의 길을 열어주셨다.
사람들은 그 해결의 차원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의 은혜안에서 얻게되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편에서 하나님에게 어떻게
그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따라,
인간에게 있는 죄의 영향력인 수치심과 죄책감을 극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용서받은 사람의 의인의 행동보다는
그들의 상태를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사람들의 상태와
그들의 전부를 용납해 주시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단절시키며,
서로를 원수시 하는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을 벗어나도록 인도하시므로,
그들을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으면
자신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과 그로 인한 정신적인 부담감에서 벗어나며,
비로소 자신안에 있는 자아는 건강한 상태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그런 자아의 상태의 모습은 자기표현이나 자아실현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여,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며,
자신의 내면의 삶을 안정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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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상실에서 벗어나려면

왜 나는 버림받은 존재로 살아가야 만 하는가?
인간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 시종일관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누구든지 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기가 어디에 소속되는 것과
자기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기가 꼭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그리고 나서 자기 성취감을 갖고서 살아야 바람직한 삶을 사람답게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이런 욕구가 기본적인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려는 욕구나 태도보다
더 필요한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삶의 요구이며 자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왜 나는 거부당하며 살아야 하는가 라고
생각이 들도록 한 요인들을 살아오면서, 부정적이고, 힘든 일들을 겪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때는 그런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왜 사회는 나에게 외면하는가?
항변하며, 사회악을 조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왜 주변사람들은 나를 무시하는가? 라고 좌절하며, 고통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자기자신에 대한 생각에 대해, 자신은 버려진 존재로가 아니라,
받아들여진 존재로, 자신을 인정받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인정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볼때,
우리는 나는 받아들여진 존재라 여기는 옳은 인생철학을 가져야 하는데,
그 철학의 근저에는 신과의 관계로서의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신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큼 우리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릴때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은
누구나 신에 대한 개념을 갖고서 살게 되며,
그 신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어떠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간다.
먼저, 자신의 생각하는 신개념은 모든 인생에 대한 자세와 철학의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이고 바람직하게, 신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모든 사건이나 일에 대해,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태도로 대하게 되며,
설사 고통스럽고, 힘든일들과 같은 외부적인 어려운 일들을 당해도,
그것들을 극복할 힘이 있으며,
결국에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오히려 반전시키는 전화위복이나,
그런 도전에 대한 자신의 긍적적인 자기 응전으로 새로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이나,
그런 종류의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관계이며, 신뢰하는 경우에 당하는 자기 거부나 자기 상실은
자신에게 많은 좌절과 불안으로 내면적인 고통을 겪게 하며,
그런 현상들은 자신이 조정할수 없는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발전하고,
일생을 통해 자신의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해 자신을 인정하는 존재로 여기고,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의식을 갖아야 할 것이다.
그러러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 받아들여진 존재로 여기는 건강한 자아상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런 건전한 자아개념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있게 한
신에 대한 자세나 태도가 결정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신안에서 만 자기만족이나, 자아완성(구원)을 이룰수 있는 인간은
신을 떠나서는 자신을 바로 세울수 없다고 감히 단언하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의 근저가 바로 신 앞에 있을때에,
자신을 신의 혜택안에서, 용납된 자신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제이다. 누구나 사람이 태어나면서
신과의 단절가운데에 있는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그 신을 알지도, 찾지도, 그리고 발견하지도 못하므로,
신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 신을 알려주면, 그신에게 찾아가, 그를 알고,
그와 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가지고 있는 딜레마 중에 가장 큰 것이라 할수 있다.
스스로 그것을 이룰수 없으니,
다만 신만이 자신을 알려주는 신자신 혹은 신의 대리자를 통해 그 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

역사속에서, 극한 거부나 유기를 통해 인간의 당할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한 한 인생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가 그에게 찾아가, 상의하고,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알고 있다고 우리가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만일, 신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 그것을 몸소 경험으로 그런 일들을 겪었다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처지의 경험을
그 신에게 다가가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그분의 상담과 조언을 구할 것이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좌절을 겪는 인생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때에,
나는 세상에 대해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버려진 존재로 여기는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세상을 붙드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한,
인생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신이 결코 인간을 버려지도록 놔두지 않고,
무엇인가를 인간을 위해서 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신에게 당연히 도움을 구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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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2)

용서하지 않는 태도를 치료하기

내면치유와 용서는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쓴뿌리와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에는 용서라는 큰 주제가 놓여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으로 회복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에 있다고 하겠다.

먼저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이나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주도하는 용서를 통해
자신의 내적인 측면에 대한 깊은 차원의 치유를 하여
자신에게 있는 쓴뿌리와 같은 부정적인 사고 시스템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사고시스템이나 감정조절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내면치유의 장애요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앙갚음이나
혹은 섭섭함이나 혹은 괘씸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들은 더 나아가 분노를 촉발하고,
자신도 원치않는 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용서하지 않은 마음을 계속유지하면,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큰 부담감을 가지고 살게 된다.
고로 자신안에서 마음의 평안과 사고하는 태도에 있어, 자유를 얻지 못한다.
용서하지 않는 상처들 그리고 상한 감정들은 자신속에 더 뿌리를 내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에 의한 원수 갚은 태도로
짓는 죄를 범하게 하며,
앙금된 마음에 고착이 되어,
그 상한 감정들이 자신속에 중한 부담감과
마음의 평안을 해치는 상시적인 불안을 가중케 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 죄의 성향들은 자신의 마음에 펴져있는 영적인 배설물이나
쓴 뿌리역활을 하는 자신의 고착된 부정적인 사고나 병든 성향의 흐름을 지배한다.
고로 그런 불안이나 내면의 병든 성향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전환하도록 자신의 상태를 살펴볼줄알아야한다.

용서는 인간관계를 푸는 열쇠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주요한 이슈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는 복음의 핵심으로
죄인인 우리들이 구원받는 근거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다.

용서에 대한 메시지는 성경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마태5:22-24에서 형제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는 것도 죄이며,
주님앞에 나가기 전에 형제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서로가 풀어야 할 인간관계의 악화나,
증오된 상태라면, 상처를 준 사람이나
상처을 입은 사람 모두가
서로 화해를 갖는 것이 그들의 신앙행위에 어떤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모델기도에 용서가 큰 주제이다.
마가복음11:25-26에 기도할때에,
어떤 사람에게 서로 마음상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용서하는 그사람도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한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 태도를 고치는 것은 먼저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죄를 고백하며( 마태복음 5:23, 요한일서 1:9)
그 마음의 약함이나 악함을 자인하며,
그안에서 벗어나기를 힘쓴다.
그러러면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배울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모든 용서의 모델과 근거가 된다.
그는 자신을 저주하며 모함하며, 사형을 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신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도움을 의지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와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이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를 넘어가는 길은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축복을 비는 마음과
그 사람을 용서할수 있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는 자신이 받은 상처나 용서치 않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이 영향을 받은 마음의 상처를 발산하는 자기 나름의 감정표현방식도
상처난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두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길과
상한 감정을 다루는 것이나,
병든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내적치유의 과정들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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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의 필요성

내적치유사역은 변화와 성숙을 위한 기도와 상담사역이다.
내적치유는 마음에 상처받은 것이나, 과거의 기억치유를 의미할뿐 아니라,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안에 있는 풍성한 생명을 경험토록 돕는 사역이다.

내적치유사역에 있어서, 그 사역의 지향하는 목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성장할수 있도록 치유하고 돕는데 있다.
에베소서4:19에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더나아가 내적치유는 신앙인의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돌보는 것인데,
그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과 상처입은 감정들,
그리고 왜곡된 관점들을 새롭게 고치는 사역이다.

즉 믿는자들안에 있는 믿지않는 요소들에게 치유사역을 통해
복음이 효과적으로 신자들속에 선포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에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직 변화되지 못한 많은 요소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내적치유사역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딜레마나
여러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시간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의 전생애의 모든 분야에
구원의 효력이 나타나도록 도와주는 기도와 상담사역이다.

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행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 요인들중에 자신의 속에 있는 깊은 어두운 내면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생각시스템이나,
무의식적인 영향등에 의해,
자신의 병든 이미지에나 생각의 굴절 현상으로 인하여,
자신의 영적성장이나, 영적인 표현양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우리자신안에 형성되어온 부정적인 사고시스템이나,
왜곡되어 있는 자아정체감이
자신안에 있는 과거의 상처와 좋지 않은 기억가운데에
자신의 무의식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속에 있는
쓴뿌리와 같은 요소들이 있어 자신의 신앙형성이나 발전에 장애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흔한죄를 갖고 있는 것은
남에 대한 쓴 뿌리 판단과 쓴 뿌리 기대로서
과거에 비슷한 경험에서 얻은 정보에 따라
현재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자신의 대인관계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난날에 쉽게 어떤 일이나 사건에서 상대방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서 자신안에다 대고 하는 내적맹세는
끈질기게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죽어도 무엇을 안한다든지,
혹은 자신을 무엇에다 맹세로 자신을 제한하게 한다.
그런 내적맹세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나 자기성취에 여러가지 장애를 준다.

역기능부모에서 얻은 상처들과 부정적인 경험들도
자신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에 방해를 준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 대한 부적합한 아버지역활로 받은 영향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태도나
비뚤어진 아버지상으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그릇된 개념으로 발전하기 쉽다.

이러한 여러요소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장 기본적으로 먼저는 자신의 많은 영역이나 분야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진정한 영혼의 평안이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사람들처럼 여전히 근심과 불안으로 인하여
그들은 쉬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때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이 돌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
또한 신앙인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그 좋은 영적인 유산이나
신앙이 주는 넉넉한 은총를 통해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심지어 작은 즐거움조차 누릴줄모른다.

신앙안에서 자신도 평안이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신앙의 율법으로 남을 조종하며,
주변인들에게 바리새인(이들은 예수님 당시에 철저한 종교의식이나
종교행위를 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서
남을 정죄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 의 역활을 하기가 쉬어진다.

내적치유는 이러한 요소들을 다루어
그런 문제들을 해결되도록 힘쓰며,
기도와 상담사역을 통해 성령(하나님의 영)의 치유사역에 동참하여,
사람들을 고치고 새롭게 하고 그리고 성장하도록 돕는다.

John & Mark Sandford의 A Comprehensive Guide to Deliverance and Inner Healing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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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크리스챤의 영적인 치유와 심리적인 치유를 접목한 독특한 형태의 치유로,
크리스챤이 가지기 쉬운 영적인 함정이나,
정신적인 슬럼프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적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내적치유는 영적인 치유에 중점을 두는 경향과
심리적인 치유에 주안을 두는 경우와
크리스챤의 자기 아이텐티티의 회복을 통해,
자아치유를 하는 경향으로 나뉜다.

영적인 치유에는 성령의 전적인 의존에 의한 인간영성의 치유로,
영적인 영향(악한 영이나,
왜곡된 인간 자신의 영적인 혼란 상태)으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하는데 있다.

심리적인 치유는 감정치유나,
기억치유를 통한 인간성안에 있는 억압된 모순이나 불합리를 제거하여
정신적인 건강을 얻는 것을 목표하는 치유이다.

자아치유는 참자아와 거짓자아사에서 갈등하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회복의 치유를 통해,
자신의 왜곡된 자아가 거듭나며,
새로와 진 자아상으로 태어나,
영적인 건강과 성장차원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데 목표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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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해(1)

용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사람은 어릴때 태어나면서 많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인간관계안에서 자신을 키우며, 성장한다.
자신을 형성하는 부분에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대인관이나,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가누지 못하며
자아에 눈을 뜨지 않을때에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보다 무의식세계의 심층에 남아,
자신도 모르게 자아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 형성되어지는 자기가 이해하는 인간관계에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가해자라기 보다는 피해자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변인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자신의 자아의 형성에 뿐 아니라,
현재의 자기표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왜곡되고 상처난 인간관계의 기억들에 대해
피해자로서 자신은 가해자들에 대해 일정한 자기대응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상처에 잡힌 자신은 그 가해자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과 사람과의 용서의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사회적인 환경에서 발생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용서하는 것은
잘못된 인간관계의 상태에서 화해와는 것과는 다르지만,
대체로 용서가 안되면 상처난 인간관계의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용서에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화해주도적인 입장에서 필수적이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나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에는
반드시 인간관계의 화해가 필수적이지 않다.
이말은 타인에 대해 화해가 이루어질때,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는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정상화할수 있다는 의미이다
( 이말을 현실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자신과 원수관계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용서가 안되지만,
부득이 현실적이고 필연적인 인간관계에서 용서를 접어두고,
그와의 화해를 하게 된다).

자신의 인간관계의 처세에 대해 생각해보면,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인간관계의 기억은
현재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인간관계의 처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고로 현실의 인간관계를 잘 하려면,
과거에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자아가 잡고 있는 그무엇
(holding the negative propensity like anger, rage, etc)을 풀어내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쓰이는 용서의 의미를 가진 “샤락”이라는 단어는
“현재를 방해하는 것, 과거의 것들을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잡고 있으면,
자신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되며,
자신의 정신적인 활동이나 혹은 현재의 대인관계의 처세나 성향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예도 있다.
어느 나이가 중년이 미국인 주부가 어깨통증과 신경통으로 여러 해를 고생하였다.
그것을 고치려고 약을 먹는다든지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았지만,
뚜렷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 증세는 점점 더 나빠지게 되어, 고생을 하였다.
그녀는 그문제로 고민을 하게 하다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문 상담인을 찾아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중에
그 여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깊은 굴곡의 상처난 흔적이 떠올라,
그것을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원수같은 사람에 대한 극단의 미움의 감정이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내어 다루는 중에
그 문제에서 자신이 놓여 나게 되자.
그 통증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자
문제가 해결된 경우이다. 필자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성경신약에는 용서라는 말로 쓰이는 헬라어 “아피에미”라는 말은
“보내는 것,혹은 면제하다.감면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자신안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그것을 내어 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스라엘나라에는 7년이 안식년이나 49년이 지나 50년 째되는 희년마다
그 나라에서 서로 빚을 진 사람들을 빚을 탕감, 면제해주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7년마다 혹은 50년마다 상처난 사회적인 상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런 면제의 은혜를 통해 인간관계를 새롭게하는 일들을 하여
사회를 새롭게하고 민족의 삶을 유쾌하게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보통 부모가 자녀들에게 여러가지 규율을 세워 놓고,
그 규율이나 법칙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혹은 훈련하거나 때로는 매를 대거나 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들이 만족을 하는 그리고 부모에 대해
좋은 부모관을 갖고 있는 자녀들은 자녀들에게 관용하는 부모일 것이다.

때로는 부모된 필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높은 수준이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규칙의 위반이나, 잘못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쉽게 분노하거나 벌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부모의 정해놓은 규율을 어길 때에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용서를 기대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항시 부모들이 자신들에게
관용하는 부모가 되어주기를 좋아한다.

이런 용서하는 마음이나 관용하는 태도는
부모가 자녀의 입장만 되어 보면 어렵지 않게 자녀들에게
그런 태도로 대할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나, 쉽게 오르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녀들을 대하는 기본철학에 있어서는
그런 넓은 마음에서 나오는 교육의 정신을 가지면 될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부모의 자녀교육의 귀중한 지침이 될수 있다.

원래 인간사회나 대인관계에서 서로 용서해주는 습성은
인간을 지으시고, 정해진 테두리안에서 살도록 되어있는
인간의 현실을 스스로 박차고 나가,
허물을 범하며,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용서를 하였고,
그 용서를 통해 관계회복을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받고 있으며,
앞으로 그 용서를 받을 사람들인 사는 사회나
그들의 인간관계에서의 서로 주고받는 용서의 문제는
언제나 빨리 풀면 좋을 성 싶은
아주 중요한 풀어야 할 인간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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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4)

우울증의 원인들(1)
우울증에는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나타난다.
어떤 경우는 단순한 원인이 강화되어 일어나기도하고
어떤 경우는 복합적인 원인들이 서로 어울러져 나타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수 있다.
첫째는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
또 하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
우울증은 자주 육체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나곤 한다.
수면부족이나, 부족한 운동이나 마약의 부작용이나,
육체적질병이나 혹은 부적합한 다이어트등은 우울증을 일으킬수 있다.

대개 많은 경우에 여자들은 매월 월경증후군으로 우울을 경험하기도하며,
아이출산이후에 오는 산후증후군으로 우울을 겪기도 한다.
다른 육체적인 원인들은 두뇌의 종양이나,
두뇌신경세포의 역기능이나, 몸의 엉끌어진 분비샘등은
보다 복잡한 우울의 증상을 일으킨다.

어떤 우울증은 가계에서 혹은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생겨한다.
이런 우울의 요인에 대한 연구들은 결론을 내기가 쉽지않으며,
어떤 연구들은 정반대의 이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항우울증의 약물로 변형된 우울의 현상도 있다.

아치발드 하트는 엘리야의 우울에 대해 우상선지자들과의 영적인 싸움의 대결로
극한 격정의감정대립을 겪은 엘리야는
후 아드레날린(격한 감정을 겪을 때 나오는 호르몬)증후군의 우울증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에 높은 아드레날린의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데는
긴급한 사태의 일들, 여러사람앞에서 연설하는 경우,
정해진 시간에 가져야 하는 긴박한 모임등을 할때이다.

아드레날린의 호르몬이 소모되다가, 폭풍이 지나고 난후, 고요를 겪는 것처럼,
감정의 흐름이 정지된 현상의 경험들을 겪고난후에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온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휴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관심적인 일들에 소모된 우리의 에너지가
회복의 기간동안 을 거치면서,원기를 회복한다.
우리의 몸이 에너지를 쓰고 관심을 갖는 일에 몰입하는 기간이 길면,
회복하는 기간도 길어야 한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아드레날린의 시스템의 기능이 덜 활력적이어서,
높은 아드레날린의 경험을 하고난후에, 우울을 겪기가 쉬운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몸에 원기를 회복할때까지휴식을 취하며 잠을 잤었다.
하나님도 높은 아드레날린의 경험을 한 엘리야를 쉬도록 하셨다.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우울증이 생겨난다.
보통 인구의 4-10%정도는 정신건강의 문제가 있다.
특히 젊은 이들사이에서 빠르게 우울증현상들이 나타난다.
대학생들의 25%가 우울증으로 고생하며,
그중에 우울증으로 인하여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미국의 경우).
이런 현상들이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심리적인 문제에서,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에서,
그리고 다른 육체적인 영향들이 우울을 일으키는 기초가 된다.

게린 콜린스의 크리스챤카운셀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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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5)

현대 목회상담과 박스터의 목회상담의 비교

현대의 목회상담은 심리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박스터는 당시 퓨리탄의 인간의 영성이해의 근거에서
목회상담으로 접근하고 있다.

당시 퓨리탄들은 사람들의 심령변화와 영혼의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하며,
그들은 사람들의 진정한 개종이나 거듭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설교는 대개 깊이있는 말씀의 증거나
사람들의 영혼을 접촉하는 영적인 가르침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 배경에서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체계적인 지속적인 교리문답공부와 설교를 뒤받침하는
폭넓은 영성강의로 당시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의 심령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렇지만 박스터의 인간영혼의 문제에의 접근을 하는
또 다른 그의 심리학적인 이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간이해와
목회상담의 심리적인 측면들을 다루었다.

그의 인간이해는 심리적인 접근에서
현대의 상담의 원조라 할수 있는 심리적인 묘사나,
슬픔이나 걱정에 대한 진단적인 개념은 사람을 영적으로만 보지 않고
심리적인 문제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죄로 기인되어졌으며,
그죄의 영향력은 사단의 세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복잡한 상태로 발전시켜,
정신적인 문제에 빠지게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고로 목회상담은 인간의 죄와 영적인 영향력의 문제에서
해결될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을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역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개종이나
신앙의 유뮤가 관건이며,
신앙의 성장과 영혼의 건강은 서로 연결된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드러난 정신적인 (심리적인) 문제를
영적인 문제의 원인을 통해 생겼다고 이해하므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신앙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신앙의 성장과
개종과 영적인 성장이 자신들의 영혼의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퓨리탄의 인간이해에 대한 이원론적인 접근법은
사람들을 통합적으로 보는 현대의 상담과는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다.
그접근범은 인간을 단순히 영과 몸을 분리하여 보는
성과 속에 지나친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신앙의 이분법적인 행태를 가져오는 약점도 있다.

다른 일반 현대의 일반 심리상담과는 달리,
박스터의 목회상담은 성경적인 영혼사역의 기반으로
성령의 조명과 말씀을 통한 치료와 심리의 문제를
신앙적인 문제의 해결을 통해 사역하려는 성경적인 목회상담의 특징을 갖고 있다.

박스터의 상담신학의 상담목회의 적용
박스터의 상담신학과 사역은 현대의 목회상담에 적용하는데,
경험적이며, 영성의 기본이해를 통해
목회상담학적인 입장에서 인간해결과 영적인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의 영성적인 목회 상담은 상담자의 영성강화와
목회의 영성적인 부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의 영성이해와 인간이해는 목회상담으로 하여금,
영적인부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여,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기독교의 건전한 영혼돌봄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박스터는 건전한 신학자이며, 영혼사역에 눈을 뜨고 있는 목회자이며,
심리학적인 문제를 보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탁얼한 목회상담자이다.
그의 영성학은 자신의 영성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영성의 개발을 통해
그의 영성목회의 뿌리가 되었다.

그의 목회학은 퓨리탄의 목회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인 적인 목양의 돌보을 실천하게 하는 영혼사역의 도전을 주고 있다.

현대의 심리학의 지나친 심리적인 문제로만 여겨
사람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심리적으로만 다루는 현대심리학이나
목회상담자들의 영적인 치료에만 의존하는 문제점을 보완 하며,
그것들의 한계를 배우게 하고,
상호보완을 통해 그것들을 극복하게 하는 영혼치료의
목회자의 목회상담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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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4)

박스터의 영혼의 치료

묵상을 통한 영성사역
묵상으로 가장 완벽한 대상 즉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또한 말씀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통해 오는 영혼의 치료와
그로인한 영혼의 휴식을 갖게하므로써
사람들의 영혼의 모든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영혼을 건강한 상태의 모습으로 우고
엄숙하게 하는 목적을 행하게 한다.

사람들의 감성들을 북돋우기위해 이성의 이해를 사용하며,
두뇌의 기능의 효율적인 도움을 의지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영혼에 대한 강한 영향력의 불을 질러
그 마음에 성령의 빛이 비추어 지도록 한다.

묵상을 제대로 하면 감성의 이해가 발전하며,
이성과 마음을 연결하는 영성에 좋은 영향을 준다.
상상력을 통한 묵상은 이성과 감성의 연결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강화시켜준다.

은혜의 사역
회개는 사람들의 만족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과거의 죄를 짓는 우상의 상태에서 돌아서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는 데로 회복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온전하게 하나님에게 맞추어지는 사람들이 된다.

사람의 구속과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적인 속성의 충분한 나타냄이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분석에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이유있는 행하심이다.

영혼들의 알림(자신의 영혼에 구원의 진리를 습득하여 구원에 이름)과
재알림(계속하여 구원얻은 심령이 말씀 교육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는 방법)은
필요한 과정이다.
구원얻은 영혼들에게 기본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재교육하는 과정은 필요한 것임을 의미한다.
진실한 영적인 재생산을 경험한 인격은
보다 깊이 있게 죄의 생각이나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게 한다.

영혼의 돌봄과 성장
자신들의 영혼들에게 철저하게 사역하는 구원의 은혜의 사역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충분한 하나님의 목양사역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들을 치료하며,
회복하며, 돌보며, 성장시키는 사역을 하신다.

목회적인 감독의 궁극적인 도달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
즉 목회자들의 영적인 돌봄과 목양을 통해 회중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며,
그들의 인생을 개발시키고, 보다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게 한다.

목회적인 돌봄은 모든 회중에게 있으며,
연합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영혼들을 돌보아야 한다.
즉 목회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영적으로 돌보기와
개인상담을 통해 개인의 영혼들을 돌보는 일들을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목양의 두 수레바퀴와 같이
목회자의 교회의 목회를 움직여 가는 두가지의 영혼의 돌봄이다.

박스터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언급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신뢰와 영혼의 휴식 문제를 그리스도에게 약속된 것을 통해
실질적인 신뢰라고 이야기 한다.
새로운 생명의 역동성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믿음안에서
확립이 되며 표현되어진다고 여기고 있다.
믿음을 통한 영혼의 문제를 접근하며,
영성을 이루는 근거를 하나님을 믿는 신뢰에 두며,
그에 대한 신뢰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박스터는 말씀치료에 대해 설교로 찌르기를 통한 종합적인 강의와
기도의 모임을 통해 회중들의 거룩하게 교화하는 일에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을 해부하며,
그리고 성경이해의 종합적인 강의나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며,
그들의 영혼들을 강화시키는 기도모임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

박스터는 주장한다. 회중들은 자신들의 들음에 통해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 일과 근본적인 진리들즉 죄, 자비, 구속, 개종의 성격과
방법등에 대한 자기들의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회중들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 자기이해와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수용을 통한 경험신앙으로 발전되도록
목양은 그들의 영혼들을 돌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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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의 목양신학(3)

박스터의 상담의 진단과 치료방법

그의 상담진단해석은 심령의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접근과 인간의 영성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와같이 박스터는 전문가들은 이성적이고
심리적인 치료에만 만족하지말아야 할 것은
왜냐하면, 좋은 설교나 위로의 메시지를 통해,
사람들의 병적인 상태에서 혹은 상한 심령들이
자신들의 정신적인 병적인 상태를 치료하는데,
다른 육체의 질병처럼 영적인 변화가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질병이 영적인 문제라고 여긴다면,
거기에는 사단의 공격이나, 혹은 고백하지 죄,
그리고 하나님의 주신 일시적인 영적인 유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단에 의해 미혹(사단은 사람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거짓것을 믿게 하거나, 기만전술로 다가온다)에 걸리면,
나중에 그의 소유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마음의 걱정과 불안은 사람의 살아가는 정해진 습관(대개 어릴때의 부모의 부정적인 사고습관:
죽고 싶다. 혹은 어떻게 해, 걱정이야등)에 의해 이루어 진다.
두려움이나, 걱정의 말등은 마음의 지속적인 기질을 좌절케 한다.
걱정이 많으면 마음의 병이나, 약함그리고 몸의 질병을 일으키며,
어떤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가 된다.

인간의 걱정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사람을 죄있는 상태에서만 그렇다고 여기지 말고,
생활에서 얻은 영향들로 인해,
그런 사고습관은 좋든 나쁜든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마음의 걱정은 어떤 크고 자은 고질적인 죄의 죄책감을 일으킨다.
걱정에 휩싸인 인간의 양심은 다만 지각하는 것에 머물고
그런 상태를 벗어나지 않을때에
어떤 외부의 변화의 도전에 대해 반응을 잘하지 못해
(복음을 듣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씨뿌리는 비유중에
세상의 염려에 대한 언급을 한 가시떨기가 있는 마음의 밭)
자신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며,
죄를 사랑하고 아직도 두려움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이다.

박스터의 마음과 영혼의 병에 대한 이해
굳어진 마음의 재앙은 죄로 인하여 우리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하며
혹은 우리의 죄책의 영혼은
위대하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위험하고, 불행하게 한다.
굳어진 마음은 멜랑코니(일종의 우울증)와
불신자의 불행을 가져오며,
부드럽고 순전한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여,그리스도의 새로운 성품을 닮게 한다.
멜랑코니의 병은 사람의 몸안에 있는 마음에 자연적(심리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며,
어느 것은 예외일수 있지만, 그것을 다룰수 있고 고칠수 있다고 말한다.

개종(마음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마음의 진정한 신앙고백을 통한 자기변화)
의 사역하에서 영혼들을 일깨움을 받으며,
그들이 슬픔에 결코 빠지지 않으며,
마음의 굳어짐의 위험에 놓이지도 않으며, 지나친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비록 죄의 영향이 있지만, 두려움이나 슬픔에 대한 위험도 없으며,
크나큰 실수라 할수 있는 불안한 불만을 토로하는 일도 없다.

슬픔(이 슬픔은 일반적인 의미의 슬픔보다는 병적인 슬픔의 상태)
이 지나치면, 상처를 입기쉽고, 마음이 극도로 나약해져,
몸의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해를 끼치게 된다.

슬픔과 마음의 걱정은 건강한 이성의 활동을 억압한다.
그리고 마음의 판단을 왜곡시켜 사람을 타락되게 하고 ,
신뢰할 만한 하지 못하게 하며,
결국 들끓는 분노에 마음의 더 큰 걱정에 싸이게 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마치 자신의 일에 대해
과장된 열정을 가진 것으로 나타내게 한다.

과도한 슬픔에 빠지게 하는 사람의 생각들이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생각들은 사람을 죄스럽고,
걱정적인 상태(병적인 불안감)로 만들어 버리며,
믿음을 방해하고 삼킬정도로 엄습한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슬픔은
믿음을 방해하여 복음의 은혜와 약속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고로 필요한 평안을 통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슬퍼하는 상태를 거부하고
슬픔, 분노를 누그러뜨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

세가지 질병들이 지나친 슬픔을 일으킨다.
이세가지는 자연적인 힘으로 참을수 없는 격렬한 고통과
본성적인 나역함, 무기력하게 하는 요인과,
그리고 두뇌의 생각의 능력과 상상력이 무너져 기능마비로 인하여,
멜랑코니의 상태의 병이 되어버린다.

이런 경우는 고치기가 쉽지않다.
지나친 걱정과 병적인 슬픔의 본성적인 기질은
사람을 항상 수치심과, 불안감과 두려움에 빠져,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나 슬픔을 지속하게 한다,
그런 상태가 결국에는 자신을 미쳐버린 상태와 멜라코리의 상태로 발전시켜,
결국 그 병적인 상태가 자신의 본성적인 기질화하여,
그 마음의 병은 그 사람에게 자신에게 생활의 재난을 키운다.

쉽게 안달하며 조급해하는 습관은 정신적인 질병에 원인이 되기 쉽다.
세상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것을 이기기 위해
보다 자신을 신앙으로 절제하는 일에 부지런하도록 하여야 한다.
죄가 얼마나 지대한영향을 주는지를 연구하며,
자신안에 있는 인생의 지혜와 의지를 키우고,
하나님의 섭리대해에 거스리는 불만족스런 상태에서
올바른 자신의 의지와 바람(기대)들을 세우며,
우리가 하나님의 역활을 하는 대신에
우리의 의지를 내세우는 것(자신을 절대시하는 태도)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병적인 슬픔이나 죄를 짓는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당황하게 하며(혼란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
이런 상탠은 병적으로 바꾸어 지기가 쉽다),
종교에 대해 혹은 영혼의 상태에 대해 무관심하며,
과거에 지은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것이나,
자신의 신실함(신앙을 가진)이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일등은
자신을 망치는 재난을 가져올 만한 상태가 되어
자신에게 비난을 받을 만한 요인이 된다.

만족과 지복의 극치로서
하나님, 그리스도, 하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 대해 만족함이 없다면,
더 그것을 연구하며 그 진리에 대해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가지면 자기확신에 이를 것이다.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축복의 구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자신들의 인생의 의미에 대한 확신과 가치 추구임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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