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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0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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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2/03
    [장준하] 우리들의 올바른 자화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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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11/25
    부끄러운 역사 -> 박정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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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11/21
    안양시장 신중대를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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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11/20
    '아파트' 문화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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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11/20
    종교의 자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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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11/20
    사랑의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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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1/20
    내 안의 파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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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11/20
    삼성의 신입사원연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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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11/20
    &quot;다함께&quot; 소개와 &quot;아펙과 제국주의&quot;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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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우리들의 올바른 자화상

[나의 추천 글]

 

장준하 선생은 우리들의 올바른 자화상입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우리나라 우익 민족주의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열악한 박정희 시대에...
아무도 얘기하지 못하던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은 우리민족의 절대선'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장준하 선생의 성격은 짐작할 만합니다!!! 그런 뜨거운 가슴 때문에 그는 우리민족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이를 풀고자 그 압제의 서슬퍼런 칼날앞에서도 주저없이 '통일'을 외쳐 '분단체제'를 해체하고자 했습니다!!!

누구든 통일을 외치면 '빨갱이'가 되고...
소리없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속에서도 분단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그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보기전까지는 매판독재정권들이 주장해 온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아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통일은 우리민족의 절대선'임을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본신학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일군에 들어갔다가...
중국 서주에서 탈출하여, 제비도 날아 넘지 못한다는 험하기로 유명한 파촉령 설원을 넘으며 6천리를 걸어 중경임정에 도착하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집니다!!! 이를 통해 그의 불굴의 의지와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임정에 도착한 그는 임정의 분열상에 다음과 같이 치를 떱니다!!!

>>>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일군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선생님들은 왜놈들한테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

(인용출처: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장준하 선생의 격정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는 이렇듯 불의를 보면, 절대로 참지 못하고, 자신이 느낀대로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전형적인 열혈지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얘기됩니다!!!
하나는 "사상계"의 출판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운동의 제기'입니다. 그가 벌인 통일운동은 반박정희 운동의 핵심이었고, 이는 박정희 정권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엊그제 조사에서...
해방 뒤 60년 동안 가장 큰 영향을 준 출판물이 바로 "사상계'라는 조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상계"는 최초에 이교승이란 국회의원과 부산 미국공보원의 지원아래 창간되어 주로 친미적인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이때 주로 들어있던 내용들은 미국의 자유주의와 반공주의 기조가 깔린 책들의 번역물을 많이 실었고, 50년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구문화'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려는 주 흐름과 편승하여 학생들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해방 직후엔, 친미극우반공주의자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역시 초기에는 "사상계"의 내용 역시 그런 기조가 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목도하면서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함석헌 선생과의 결합은 그런 그에게 더욱 큰 생각의 탈바꿈을 불러왔습니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의 진보세력들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그 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특히 조봉암 선생의 국보법에 의한 사형은 분단의 상황을 민초들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민족의 염원을 남한에서 긴 시간 동안 없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장준하 선생은...
1958년 여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란 이승만의 북진통일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함석헌 선생의 글에 고무되어 같은호 권두언에 "거족적 반성이 촉구된다"라는 글로 자신의 깨어난 의식을 만천하에 천명합니다!!!

>>> 우리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셋이다... 남한은 북한을 쏘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여, 있은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노름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

(사상계 1958년 8월호, 함석헌 선생의 글)

>>>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한낱 주인을 바꾸어 섬기는 것이요, 형태를 달리한 노예생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하는 방향은 일인이 가르쳐준 바요, 조직된 제도 첨단적인 미국류의 모방이요, 운영방식은 이족을 통치함에 사용한 일제의 방식이니 우리의 문화를 어디서 찾겠는가. 이러고도 해방된 민족이라고 하겠는가? <<<

(사상계 1958년 8월초, 권두언)

이때 직전인 1957년엔...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최남선과 이광수를 위한 특별모임을 "사상계"가 주도하기도 하여 함석헌 선생의 비판을 받기도 할 정도였으니, 바로 다음 해에 나온 위의 글은 엄청난 의식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월혁명은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되찾고...
분단된 민족의 통합을 위한 첫걸음을 다시금 내딛게 해준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4월혁명 공간은 우리사회가 해방 뒤, 어둠속에 숨죽였던 이성을 드디어 다시 빛속에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장준하 선생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진정한 민족주의자의 길임을 깨닫고 그간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 매몰되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1960년 6월호 "사상계"에서 "혁명상미성공"(손문이 서거할 때 유언으로 남긴 글의 제목)이란 제목으로, 반혁명세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 (해방 3년후 친일파들은) 확고부동한 기성기반을 재형성하는데 성공하여 오히려 이를 건드리는 자가 해를 받게 되어버렸다. 혁명과 그 수습의 주객의 전도로 말미암은 미온적인 정책은 끝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버렸고, 의당히 받았어야 할 그들의 응징은 고사하고 일약 건국공로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으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인사들은 백안시 당하고 그래도 조국독립을 위하여 남북만주나 중국대륙에서 일생을 바친 혁명선배들의 유가족들은 가두에서 문전걸식을 하게 되는 등 의는 떠나가고 불의만이 성장하여 충천하는 세력으로 이 땅을 뒤덮게 됐다.

누가 다시 애국을 하리오!!!
누가 다시 의에 살리오!!!
누가 자기의 몸을 민족의 흥망을 거는 재단에 불사르리오...!!!

이 사태를 혁명적으로 해결치 못하고 넘어간다면 불원간 앞날에 더욱 처참한 비극이 우리 눈앞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모든 여건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당연히 4월혁명으로 불러야 하며, 이에 따라 모든 수습책이 혁명적 기틀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

하지만 이런 의식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4월 혁명과 함께 중립화 통일방안이 모색되어지면서...
이에 대해 극우반공 지배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반이 되는 분단체제와 태생적인 도덕적, 정신적 취약성에 대한 위협을 강하게 느낌에 따라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즉 이런 상황 아래서 장준하 선생 역시 지배세력과 같은 의식의 기반을 가졌으되, 세상의 변화를 직접 겪으며 서서히 올바른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70년대에 들어서며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74 남북공동성명’때까지 이어집니다.

그의 열정적 가슴과 실천적 용기는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권력욕에 의한 배신’이 일어나면서 또 한번 극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박정희와 숙명적인 라이벌이 되면서 그의 삶은 진정 올바른 의식을 갖추게 됩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장준하 선생은 다른 극우반공지배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활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파악하고 지지하였으며, 심지어 미국과의 화해를 위해 만남을 주선해 주시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지는 곧 극렬한 반대로 바뀌고 맙니다. 쿠데타 세력은 약속한대로 군대에 복귀하지 않고 숨겨두었던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며, 특히 박정희는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을 체포하여 갈아치우며, 자신의 영구적인 집권음모를 실행해 옮기고, 반공법과 인신구속특례법을 공포하여 혁신계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이를 통해 흐트러진 극우반공체제를 다시금 강화합니다.

이에 장준하 선생은 스스로 “사상계”를 통하여 박정희를 비판함은 물론...
함석헌 선생에게 부탁하여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유명한 글을 같이 실어냅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962년 3월 소위 ‘정치활동정화법’이란 것을 만들어 권력을 독점해 버리는데, 이 법에 의해 장준하 선생은 ‘부패언론인’으로 지목되어 험난한 박정희 시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적대적 관계가 박정희와 시작된 것입니다!!!

박정희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대리인으로 논쟁을 벌였던 김종필과 격렬한 ‘민족주의 논쟁’을 시작합니다.

>>> 요즘 민족주의를 팔아 자기 옹호나 자기 변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김종필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귀한 외화를 써가면서 사치한 외국호텔 창가에서 향수에 젖어 흐르는 눈물 같은 것이다.

(자신은 중국 광야에서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면서) 춥고 배고프고 발톱이 빠지도록 조국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뱃속으로 체험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김종필 등이 민도가 높아야 민주정치가 가능하다고 하면서 강력한 지도자 운운하는 것은 건방진 수작이다, 민도가 높으면서도 우리처럼 못사는 민족은 온 세계에 없다. <<<

(인용출처: “대한일보” 1963년 11월 6일자, 재인용: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박정희 세력이 주장했던 ‘민족주의’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역사인식 아래, 몽매한 대중에게 민주주의는 아직 필요치 않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전제군주적 통치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파시즘’ 또는 ‘군국주의’ 논리의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김종필이 강연한 내용을 들어보죠!!!

>>> 이씨정권은 사대주의와 퇴폐성의 근원이 된 유교를 국교화하여 이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하고, 봉건적 신분제로의 유교국가적 관료기구를 완비함으로써 오늘의 후진의 씨를 뿌려 놓았던 것입니다.

이래 오백년, 우리 조상들은 유교만을 지상의 것으로 숭상하였고, 유교는 그가 지니는 매우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우리 조상들로 하여금 무위도식하면서 그저 담론풍발 제사횡담 쓸데없는 비분강개로 장구한 시일을 허송케 함으로써 후세에 민족감상주의를 뿌리박았을 뿐만 아니라, 사화와 무자비한 당쟁은 민족을 분렬시켰으며... (중략)

마침내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 초에 긍하는 식민지 분할시대에 신흥 일본의 식민지로 된 것이 결코 우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인과를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중략)

1945년 이래 16년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시행기였습니다. 즉 내 몸에 배지 않은 보편주의 사상을 그대로 시행해본 것입니다. 결과는 정치는 파쟁으로, 경제는 파탄으로, 사회는 문란으로, 자유는 방종과 무질서로 각각 전락됨으로써… 민족을 신념과 예지로써 이끌어나가야 할 강력한 리더십이 강력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정치 풍토를 특징지우는 것에 강력한 행정부와 영도력의 확립이라는 권력 집중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

즉 이들은 강력한 독재권력과 일방적 통치방식만이...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그 명분은 ‘우리역사의 열등함과 비굴함’에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의 자주성 회복과 민주주의 발전을 꾀할 ‘강력한(?) 독재권력’이며 또한 독재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죠!!!

장준하 선생에게 박정희의 집권은...
우리 역사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오욕의 상징이었습니다!!!

5천년 역사를 이룬 조상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얘기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박정희와의 대립은 장준하 선생을 정치계의 투사로 내몰았고...
그는 더욱 강렬하게 박정희를 비판하며 올바른 현실인식에 다가갑니다!!!

그는 박정희의 손에 돌아가기 전까지 박정희 정권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의 반대투쟁에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한일회담 반대, 삼성밀수사건 폭로, 베트남 파병 반대... 그의 끓어오르는 열정과 행동의지는 67년 ‘옥중당선’이라는 기적을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의 상황은...
새로운 민주주의 열기의 부활을 꿈꾸듯, 학원과 사회 각계에서 자주화, 자율화 운동, 병영화반대운동이 있었고, 대통령선거에 이은 총선에서는 분열상을 보였던 야당이 예상을 뒤엎고 크게 약진하여 민심이 박정권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부실기업의 증가에 대한 조치로 83 조치를 통해 재벌의 입지를 강화시켜 줌은 물론, 정경유착을 한층 더 부채질하였습니다. 이런 국내상황과 더불어 미국과 중국의 접근으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데탕뜨 분위기는 ‘분단체제’를 권력기반으로 삼아 온 극우반공세력인 박정희 정권에 가장 큰 위협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이 생겨났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꺼져가는 민족통일에 대한 새로운 불을 지펴 올림은 물론이거니와, 외세의존적, 대결지향적인 분단체제의 극복을 남북이 공동으로 선언함으로써 그간의 남북간에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한 진정한 첫걸음이었다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이런 ‘74 남북공동성명’의 정국은 장준하 선생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과 인식을 ‘완전한 지평’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북 출신의 친미반공인사였던 장준하 선생은...
엄청난 탄압으로 궤멸적 상태에 있었던 혁신계 인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박정희 정권과 대립해 오다, ‘74 남북공동성명’과 이를 송두리째 뒤집는, 영구집권음모인 ‘유신쿠데타’를 보면서 ‘올바른 통일운동’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진정한 민족주의자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친미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완전한 의식의 탈바꿈과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합리적 이성에 의한 역사와 현실인식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973년에 썼던 “민족통일전략의 첫단계”의 초고를 살펴보죠!!!

>>> 분단적인 민족관, 국가관에 입각한 교육, 이념, 문화의 제가치관을 통일적인 민족이념과 가치관으로 고친다. 모든 가치를 통일에 두고 분단적인 사고행동을 반민족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유신을 폐기하고 냉전논리에 입각한 모든 제도, 법률, 가치관, 문화질서를 청산한다. <<<

해방 뒤, 남북의 분단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제화됨을 인식한 장준하 선생은 ‘분단체제’라는 말로 우리민족의 현실을 규정하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이의 극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라는 말로 그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자주 나타냈으며, 이런 민족통일에 장애가 되어왔으며, 또한 분단체제의 영구화를 통해 독재정권을 영구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박정희 유신쿠데타의 즉각적인 폐기를 주장했습니다. 분단체제를 끝까지 유지시키려고 했던 박정희 정권의 검은 속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면서, 해방 뒤 3년 동안의 민족사에 대해서도 완전히 탈바꿈한 시각과 평가를 제시합니다.

>>> 건국준비위원회는 민족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으려는 기민한 대책으로, 몽양을 비롯한 국내항일세력이 항일운동과정에서 획득한 전진적 확신의 표현으로 파악하였고, 송진우 일파가 이에 동조하지 못한 것은 일제 식민지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던 자주 친일세력으로서 도덕적 파경의 표시로 인식하였다.

또한 김구의 임정에 대해서는 이승만을 필두로 한 세력을 일찍이 극복하지 못했고, 반탁운동을 이승만의 민족분열의 명분으로 연결시켜 주었으며, 새나라 통일조국이 이념을 과감하게 제시하지 못한 점을 한계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백범노선의 실패원인으로 친일민족반역자의 타도, 반이승만 운동으로서의 대중적 역량을 확대하지 못했고, 반이승만 운동의 방법과 시기를 놓친 점 등을 들었다.

그 시기(1970년대) 어떤 전문 연구가도 미처 깨닫지 못한 놀라운 탁견이었다. 그는 몽양과 우사의 합작운동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백범의 통일운동을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

(인용출처: “비극의 현대지도자”, 서중석, 미발표 원고 “민족통일전략의 첫단계” 발췌)

분단은 우리 민초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된 삶을 살며, 기껏 극우반공지배세력이 던져주는 ‘먹이’로 배를 채우며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우리의 기억 속에서 거의 지워져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젊은 세대들은 박정희 신드롬에 붙잡히어 ‘지워버린 현대사’를 완전히 왜곡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이는 우리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실에 대한 열정과 합리적 이성을 되살려...
잃어버린 우리의 민족현대사를 되찾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올바른 길을 찾아 민족통일을 이룹시다!!! 암울했던 시대에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던 장준하 선생을 우리의 올바른 자화상으로 삼고 맘속 깊은 반성과 통찰의 시간을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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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역사 -> 박정희

박정희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손만대에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우익의 정통성 측면에서 보더라도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올바른 우익인사가 민족주의에 입각한 통일을 부르짖다가 친일파의 대부가 되면서 민족의 해방을 가로 챈 이승만 극우반동매판세력에 의해 모두 암살되었거나 국가보안법에 의해 비명에 사라졌기 때문에, 사실상 우익의 올바른 정통성은 이승만 정권에서의 조봉암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의 장준하 선생을 마지막으로 1975년 우리네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장준하 선생의 일생을 따라가 보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와 또 우리가 어떤 문제를 우리의 의식 속에 갖고 있는가를 뚜렷하게 알게 됩니다!!! 장준하 선생의 삶을 쫓는 기회는 다음으로 하고 여기서는 박정희를 쫓아가 보고 박정희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외세에 의지하여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그나마 독립협회에서의 항일운동에 의한 투옥 7년으로 독립투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1913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외세에 의지한 독립만이 우리 민족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에 집착합니다!!! 그에 붙여진 외교의 귀신이란 수사는 그가 미국에서 끊임없이 저지른 폭압적 언행을 바탕으로 한 여론조작의 다름 아닙니다!!! 심지어 임정에서 탄핵까지 받았던 인물로 신채호 선생은 아예 이승만과 같은 자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승만은 그나마 젊었을 때의 이력으로 해방에 대한 원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일본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전형적인 일본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그가 또다시 불타는 출세욕으로 공산당으로 변신했다가 급기야 4월 혁명을 맞습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끓어오르는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4월 혁명을 무참히 총칼로 짓밟고 나라를 암흑 속에 빠뜨립니다!!!

그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서 맨 처음 한 짓을 볼까요?
박정희는 먼저 자신의 약점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 이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법적인 근거부터 마련합니다!!! 마치 이승만과 그 하수인인 친일파들이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생각이 다른 사람들 모두를 싹쓸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듯이 말입니다.

1961년 장준하의 주선으로 군부 쿠데타 세력들은 미국과 화해할 기회를 창경원에서 갖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참석하였고, 박정희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 박정희는 스스로 최고회의의장의 자리에 오르며, 권력에 대한 불타는 욕심을 숨기지 않고 전면에 드러냅니다!!! 물론 장도영은 체포되었죠!!!

이 날,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을 위한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반공법과 인신구속특례법을 공포하여 혁신계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이고 이후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한 ‘여론 길들이기’ 작업에 착수합니다!!!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를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이 될 극우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왜 박정희는 4월 혁명을 계기로 터져 나온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을 무참히 짓밟고 극우반공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승만 정권보다도 더욱 열을 올렸을까요?

그 자신이 이승만과 견줄 수조차 없는 친일행적의 결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 목숨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연명해 온 친일파들의 기반을 속내를 역시 잘 읽고 있었고, 국가기구를 이용한 학살정치로 피해의식의 한 형태로 거의 모든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 그네들의 지배이데올로기인 ‘극우반공이데올로기’를 심어놓았기 때문에 이를 더욱 활용하여 자신의 결함을 포장하고 끓어오르기 시작한 통일에 대한 열망(이는 곧바로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를 일으키기 때문에 반드시 친일파의 청산문제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되면 군부에서 주장했던 ‘우국쿠데타’의 명분은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정이양이라는 허울로 국민과 그나마 나름의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정치세력들을 기만하는 사이, 극우반공체제의 강화를 통하여 공포적 국가주의체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곧바로 나라와 민족은 안중에도 없는, 4월혁명으로 흐트러진 ‘극우반공체제’를 정비하여 강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자행한 만행은 이루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좀더 새롭게 일반국민들, 즉 민초들의 입장에서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실제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박정희의 실체를 알려주는 데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고서 권력을 잡자 마자...
유족회 사건을 일으킵니다... 즉 억울한 집단학살에 대한 신원회복문제를, 4월 혁명과 이승만의 하야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하여 활동해 오던 유족들의 집단적 노력을 일거에 짓밟아 버립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우리네 전통적 관념으로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무덤 훼손까지 저지릅니다. 도대체 이 박정희는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자라고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죠!!!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어났던 법의 무시는...
역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적법한 절차도 따르지 않고 재판을 진행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느낄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긴 아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또 꺼내서 죽이는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어찌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겠습니까?

나라를 구한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자들이...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로 살아남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천인공노할 생체실험을 저지른 일제의 극우세력들과 다시금 손을 맞잡고 나라를 팔아먹습니다. 박정희는 유일한 논리는 ‘잘 살아 보세’였습니다. 잘 살아보자고 그렇게 외쳐대고 노력했던 결과물이 지금도 빚더미에 허덕대는 농촌의 모습입니까? 아마도 재벌들은 박정희의 ‘은공’을 하해와 같이 생각하겠지요!!! 대우의 김우중은 아마도 옛날 박정희 시대를 머릿속에 그리며 김대중 정권 때에 자신의 망가짐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가졌던 나라와 국민에 대한 생각을 잠깐 엿보기 위해 제가 썼던 ‘국가보안법의 기원’이란 글의 일부를 다시금 인용해 보죠!!!

>>> 김재규는 1979년 12월 8일 비공개로 진행된 군사법정에서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고 나서(부마사태는 10월 17일 발생하였고,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음) 현지에 다녀와 박정희에게 부산사태의 심각함을 보고하였을 때, 박정희와 차지철이 주고받은 말을 털어 놓았다... (중략)

자신의 부사사태 보고에 대하여 박정희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하겠다. 자유당 말에는 최인규라는 사람과 곽영주라는 사람이 발포명령을 하였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는 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라고 말한 것으로 증언하였다.

그러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말에 한 술 더 떠서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고 거들었다는 것이다... <<<

(인용출처: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서중석)

그에게 나라와 겨레, 나아가 나라의 실체인 국민들은 다 죽인다고 해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죠!!!

어쩌면 극우반공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찌든 우리 의식의 발전과정에 대한 가장 올바른 자화상이라고 할 만한 장준하 선생의 얘기를 살펴보죠!!!

장준하는 “사상계” 1961년 7월호에서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라는 제목의 권두언에서 “공산당의 전체주의 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최대의 사상적 무기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선용에 있다”라고 지적합니다. (장준하 선생은 사실상 박정희와 숙명적인 대결적 관계에 있으며 계속적으로 의식이 발전해 갑니다… 결국 70년대에 들어서며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74 남북공동성명’을 겪으며 참된 역사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1973년에 장준하 선생이 쓴 글을 보면, 그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잘못 인식했던 바들에 대한 바로잡음을 나타납니다… 결국 그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궁극적 선’임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나라의 발전이라는 대의적 견지에서 박정희의 쿠데타를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지지해 주던 장준하마저 나타낸 박정희의 권력욕에 비판을 가하고 나선 것이죠!!!

결국 극우반공이데올리그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박정희의 행동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이승만처럼 그 자신이 곧 극우반공이데올로기였으며, 절대선이었습니다!!! 결국 ‘절대선’은 자신이 키운 분신에 의해 부질없이 사라집니다. 스스로도 자기합치가 되지 않는 논리와 가치기준은 자기 안에서의 분열로 끝을 맺고 만 것입니다.

이런 박정희를 그리워하며 나타난 소위 ‘박정희 신드롬’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으며, 아직도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우리나라와 겨레의 수치일 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박정희에 견줄만한 아주 뛰어난(?) 독재자들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프랑코, 대만의 장개석… 그러나 그들은 그네들 나라에서 이미 반면교사로서 있어서는 안될 독재자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박정희처럼 나라를 배반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닐뿐더러, 그들의 집권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독재를 보완시켜줄 가장된 ‘애국의지(?)’에 대한 집착으로 오히려 정경유착을 단절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럼에도 그들은 그들 나라에서 그들에 받아야 할 비판과 비난을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모습은 어떻습니까?
겨우 우리역사가 제 정신을 찾은 때가 엊그제여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팔아먹던 자가 대통령이 된 것도 모자라서 그를 현대사의 위인으로 추켜 세우고 있습니다. 아마도 박정희는 땅밑에서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는 역사가 제자리를 찾게 될 그 어느 날을 두려워하여 아예 현대사를 얘기하지도, 연구하지도, 나아가 결국 아예 자손만대에 없어지도록(박정희가 바란 것은 아마도 이것이었지 않을까 합니다.) 하려 했기 때문에 지금에 우리들의 이 우스운 모습(박정희 신드롬)을 보며, “거봐, 내 말이 맞지?”하고 자족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나라를 팔았고...
그것도 모자라 국가권력을 장악해서는...
국민을 또 죽이고 또 팔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영구적인 집권으로 절대선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

그는 우리역사의 수치이자...
우리들이 갖고 있는 자기모순과 자기분열의 근원이며...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대사의 불행입니다!!!

우리 정말 정신 차립시다!!!
정통 우익들로부터도 비판 받고 비난 받았던 사람을 ‘민족의 영웅(?)’으로 착각하여 떠받들고 있음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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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장 신중대를 고발합니다!!!

아침에 버스를 타러 나가는 길에...

두 달이 넘게 날마다 범계역 입구에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환경미화원들의 눈물겨운 싸움을 봅니다!!! 오늘 아침엔 그 싸움의 알맹이인 "청소대행의 안양시 직영화" 제안에 대한 선전물을 받아 읽으며 문득 민방위 훈련시간에 신중대 안양시장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시정홍보를 열심히 하다가...

대중교통에 대한 얘기에 들어서서 갑자기 운수회사들이 손실이 많아져서 50%를 보전해 주었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민방위 대원이자 시민의 손이 번쩍 올라가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럴거면 아예 시영화를 하시지 그러세요?"

"그렇게 하면, 운수회사의 이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욱 득이 되고 운전기사분들도 더욱 대우나 환경이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신중대 안양시장은 너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시에서 직접 하면 경쟁력이 없잖아요?"

"전국적으로 시영시내버스는 과천밖에 없습니다. 과천은 경마장으로부터 거둬들이는 막대한 세금덕에 재정이 넉넉하기 때문에 우리랑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게 다 여러분들이 경마장에 돈을 기부해 주시기 때문 아닙니까?"

 

신중대 안양시장은 신도시의 시장을 주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경쟁력"이란 낱말밖엔 생각나는 것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시영화가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죠? 안양은 열난방공사를 민영화했다가 그 부작용으로 난방요금만 올려놓은 정말 재수없는 경우죠!!!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파렴치한들에게 도대체 시민들의 공익이란 게 가당키나 한 얘기겠습니까?

 

아직도 도무지 민영화의 논리로 내세우는 경쟁력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안양시장의 태도는 마치 시영화를 하지 못하는 책임이 시민들이 경마장에 가서 도박으로 과천시에 돈을 기부해버렸기 때문인 양...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만한 논리는 내놓지 못하고 헛소리와 가당치도 않은 구실로 시민들을 우롱하고 있으니...

 

"무언지는 모르지만 그들끼리는 정말 끈끈한 검은 유착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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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문화와 아이들

요즘 아이들에겐 집은 아파트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다 아파트에 산다. 아니 70%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것 같다.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파트 평수를 따지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누구네 집은 어떤데 왜 우리집은 작은지... 등등의 물음을 일찍부터 하기 시작한다.

 

"아빠, ㅇㅇ네 집은 43평인데 왜 우리집은 작아?"

 

이런 물음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아이는 삼촌이나 고모부, 이모부 등의 식구들을 만날 때마다, "회사 괜찮죠?"라고 버릇처럼 묻는다. 마치 꼭 그래야 한다고 가르친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큰 아이의 머릿속에 벌써 '세상의 살벌한 돈논리'가 아주 큰 모습으로 자리잡은 건 아닌가 싶다.

 

전 세계를 통털어...

아파트를 좋아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 사람들밖에 없다. 100년 전에 아파트가 맨 처음 생겨난 글래스고우에는 지금은 흉물로 남아 있다. 모두들 아파트를 싫어한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상황이 좀 다른 것 같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일본은 주거문화가 좀 다른 편인데... 아마도 서양문화와 문명을 나름대로 손을 대고 생각해 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이지 않나 싶다.

 

모두가 미쳐간다.

아이들도 벌써부터 미쳐간다. 좀더 넓은, 좀더 넓은... 그리고 좀더 좋은 곳으로 좀더 좋은 곳으로... 그런데 '그 좀더 넓고 좀더 좋은 곳'이 우리사회에서는 거의 똑같다. 이 또한 획일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넓은 집과 돈 싫다는 사람 있어"라고... 그러나 세상은 바로 그 차이 때문에 발전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정말 획일주의에 사로잡힌 사회다. 국가권력이 나서서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국가가 사회가 강요하는 길과 가치관을 싫다고 하여...

다른 길을 간 사람들은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에... 신문에 '특이한 볼거리' 정도로 취급되어 기사화되기 일쑤다. 사실상 사회에서는 거의 '왕따'인 셈이다. 아니 대개의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획일주의를 강요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 자랑스런 '한국사회'이다. 오로지 '하나의 길'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니... 그러니 모두들 되도록이면 강남에, 넓은 아파트를 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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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

'종교의 자유'... 아이들에게 과연 그 자유가 있을까?

종교는 문화다...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그나마 낫지만, 그래도 '집안의 문화'로서 '어른들로부터의 강요'는 없어지지 않는다!!!

 

어렸을 적, 성당에 다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아이들과 같이 어울려 놀 수 있었던 '공간'으로서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다른 것들은 지루하고 억압적인 느낌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외가가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의 자유'를 박탈 당했다. 문화란 게 다 그렇듯이, 종교는 스스로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저 문화로, 내려오는 관습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종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집안에 엄청난 분란을 몰고 오는 일이기 때문에 나름의 생각과 이성이 생긴 다음에도... '종교 선택(무종교 포함)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아이들에겐...

'종교의 자유'를 주고 싶다. 뭐, 하긴 지금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갖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어떤 특정한 의식과 분위기에 아이들의 '하얀 도화지'를 내맡기고 싶진 않다. 되도록 스스로 많은 것들을 듣고 보고... 이러는 데 차라리 많은 시간을 쏟게 하도록 하고 싶다. 지금 3대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기에... 이런 '바탕의 탈바꿈'을 위한 기회를 만드는 데조차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30년 정도... ㅎㅎㅎ... 정말 사람과 그 세상은 아주 천천히, 요즘 사람들의 성급함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시간에 걸쳐 바뀌고 느낄만한 결과들이 나온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신들은 그렇게 배타적일까? 신들이 얘기하는 것들은 모두 좋은 것들이긴 한데... 세상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아주 배타적이다. 그런데 이런 물음에 답을 얻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섯 해가 지나고 세상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하다가... 신이란 게 우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따라서 신의 발현은 늘 너무나 천차만별인 모든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 진다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살면서 깨달은 것들을 왜 아이들에게 무작정 강요하는 것일까?'

 

익숙해져 버려서 편안했던 것들과 다른 무언가는 늘 불편함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란 것도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딛고 서있는 '땅'이 절대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선험적 보수성'만 버린다면... 서로의 다양성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다양성이 바로 '삶과 세상 발전의 알맹이'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신봉해 온 '절대적 땅'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먹고 사는 문제의 기득권이란 게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불편하더라도...

아이들은 전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그것에 아주 큰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세상에 대한 모든 판단은 주관적이다. 어떤 가치관에 의해 그것은 비로서 '객관적'이 된다. 물론 자연에 대한 것이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 위에 맘껏 뛰놀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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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

옛부터 우리나라에선...

아이들에게 '베푸는(?)' 매질에 대해 '사랑의 매'라는 이름을 붙여 그에 담긴 높고 깊은 참뜻을 늘 생각케 했다. 그러나 과연 그게 늘 그런 참뜻에 맞게끔 역할을 하는지는... 사람들은 쉽게 답할 수 있다... 아니라고...!!!

 

나도 아이들에게 5년 전까지만 해도 매질을 했다.

물론 거의 없는 일이지만,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매를 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부모들은 스스로의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들의 삶에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온통 집어 넣는다... 그래서 부모가 드는 매는 '사랑의 매'가 되기 힘들다. 차라리 학교에서 선생님과 배우는 학생으로서의 관계라면 좀더 이성이 바탕이 된 진짜 '사랑의 매'가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은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빼내고 좀더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5년 전 마지막 '사랑의 매'를 큰 아이에게 댈 때...

솔직히 '사랑의 매'라고 하기엔 감정이 좀 앞섰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낀 나는, 흥분하여 아이를 윽발질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종아리를 5대 이상을 때린 것 같다. 큰 아이는 겁에 질려, 이미 사실을 말하고서도, 결국 정말 거짓말을 했다. 공포 분위기에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의 '스스로의 짐작에 대한 미친 확신'이 불러온 '일종의 고문'이었던 셈이다.

 

큰 아이는 그렇게 매 자국이 있는 종아리로 유치원을 다녔다.

그 매 자국을 보며 너무 맘이 아팠다. 왜 그랬을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감정적으로 앞선 나머지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이 때 깊이 반성한 뒤로는 절대로 매를 들지 않았다. 그냥 쥐어박는 일이 있었긴 하지만... 매를 대신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거나 벌을 주는 것으로 바꿨다. '상점제'도 도입하고... 지금은 조금 자리를 잡았지만... 그래도 큰 아이에겐 그 때의 기억이 공포로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도 큰 아이를 나무랄 일이 생겨서 나의 목소리가 좀 올라갈 때면 큰 아이의 얼굴이 정말 두려움과 여러 느낌들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이럴 때면, 꾸지람을 그만둘 정도로 심한 '자책'을 느낀다.

 

과도한 집착과 사랑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늘 양극단의 판단이나 생각들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내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다가 갑자기 깊은 수렁에 빠지거나 아님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게 된다. 이성적 소통 자체가 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나의 아이들에 대한 잘못된 과도한 사랑 갈무리가...

'아이들을 고문'한 것과 같은 결과와 후유증을 낳게 되었다. 우리사회의 과도한 피해의식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이중적 자세와 의식 등의 문제들이 바로 내 안에 내재화 되어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스스로를 돌이켜보며...

아이들과 구체적인 일상에서 새로운 길찾기를 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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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파쇼

아이들은 정말 어른들의 '거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나 부모처럼 가장 많이 부대끼는 사람들의 '거울'이다!!!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파쇼"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맘'을 알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 아버지가 칠순 생신날, "너희들을 키우며 가장 아쉬운 것은... 내가 너무 무섭게 했던 것인데... 내가 너무 매를 자주 들었던 건 아닌가 싶다!!!" 이 말씀은 장남인 내게 주로 큰 책임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시려고 주로 내게 매를 많이 드셨기에... 이 땐 아버지의 나이듦이 더욱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 땐 다 그랬죠...!!!"라고 위안을 드리며... 내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문득 떠올렸다.

 

'난 아이들을 키우면서 구김과 막힘 없는 정서를 갖게 하는데 온 힘을 써야지!!!'

 

이렇게 다짐하고서 아이들을 키워야겠다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음을 느낀다. 날마다 아침마다 아이들과의 실갱이에, 특히 사내아이들이라 여자아이들보다는 거칠고 훨씬 동적이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기가 일쑤다. 아이들은 세상의 진짜 모습을 잘 모른다. 그렇기에 세상 바로 세우기에 어른들은 온 힘을 쏟아야 하는데... 어디 세상이 그런가? 그렇기에 오늘도 아이들과 아침부터 온 힘을 써야만 하는 실랑이를 벌인다.

 

"아빠, 나 이거 입으면 안돼?"

"야, 그건 아직 다 안 말랐잖아! 마른 거 입어. 이거 어떠냐? 이건 색깔도 짙은 파란색이고 말이야... 아빠가 보기엔 이게 더 멋있어!!!"

"아, 난 그거 싫은데... 그럼, 차라리 이걸 입을게요!!!"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온 몸을 달구며 폭발직전까지 간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나 스스로와 싸우며 진정시키기에 온 힘을 쏟는다. 나의 짜증은 아이들의 '잠재적 파쇼'를 현실화시키는 것이기에... 스스로 그렇게 싫어하고 또 그래서 할 수 있는 저항과 힘들을 다 쏟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루 걸러 하루는, 꼭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나간다... 그 짜증의 순간, 아이들의 얼굴 표정이 바뀌는 것을 느끼며, 자책에 빠진다.

 

'난 아직도 정신수양이 덜 되었구나!!!'

 

아이들의 학교 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곤,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어 준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치며 가는 두 녀석의 뒷모습에 내 안의 '파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어느 과학자도 그랬다.

아니 지금은 생명의 본질이 '모든 사물의 네트워크'이라고 여겨진다. 적어도 추상화시키면 그 본질은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사회 역시 모든 사람의 이런 이어짐과 엮임으로 그 고갱이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우리사회의 '파쇼'가 날 이렇게 날마다, 아침마다 괴롭게 한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나에게 있는 죄라곤...

이 나라에서 태어나 서로 식구로 부대끼며 살아온 것 뿐인데... 그럼 도대체 누가 이런 '파쇼'를 내 안에 심어놓은 것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다 알까?'

'그리고 스스로 안에 있는 이런 '파쇼성'에 대해 스스로 느끼고 있을까?'

 

아이들과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

그들이 비추어 보여주는 내 모습을, 나쁜 모습을 이젠 거두어 버리고 싶다. 그런데 정말 쉽지 않다!!! 아이들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이런 정서가 바탕이 되어야 우리 사회가 정말 맑고 깨끗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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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신입사원연수

삼성의 신입사원 연수 또한 아주 끝내줍니다!!!

합숙훈련을 통한 의식화 과정의 '최첨단'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죠!!! 제가 겪은 신입사원 연수가 97년 즈음이니까... 지금은 그 악랄함이 더욱 '세련'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선 황당한 것은 철저한 통제입니다!!!
물론 술을 못먹게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데... 생각조차 삼성의 유일신인 이건희 회장에 대한 외경심을 갖도록 강요하는 데로 모든 연수과정들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 기가막힐 노릇이죠!!!

아침마다 일어나 체조를 하는 것이야...
어디든 그렇다 치고... 아침밥을 먹고서 맨 먼저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은 "땡리 뉴스"입니다. "땡리 뉴스"란 다름 아닌 "위대하신 이건희 회장님의 교시" 동영상을 보고 명상에 잠기는 것이죠!!! "위대한 이건희 회장님"은 1993년 이렇게 교시하셨는데... 늘 이런 식입니다!!! 감격에 복받쳐 우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을 대문짝만하게 땡겨 찍은 동영상을 보며... 자신의 영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무엇이 그리도 아쉬울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연수과정에서 배우는 분위기도 사뭇 군대식입니다!!!
매 우 억압적인 분위기... 심지어 중간 외박(한달간의 연수기간 중간에 하루 외박을 다녀옵니다)을 주는데... 이때 복귀할 때, 절대로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면 안 됩니다!!! 이건희는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데... 그깟 가벼운 자유로움조차, 돌아와 누우면 그만인 시간적 여유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죠!!! 아무튼 연수 책임자들은 마치 막 입대한 신병훈련 교관과도 같습니다... 아니 거의 똑같습니다!!!

"위대한 이건희 회장님의 교시"는 하루에 거의 두번 이상은 봐야 합니다!!!
바깥에서 활동하지 않는 날에는 세 번을 보게 되죠!!! 아주 진저리가 날 지경이죠!!! 저처럼 억압적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미쳐버리게 되죠!!! 군대에 있을 때보다 더욱 미칠 것 같았으니까요!!!

삼성 신입사원 연수의 압권은...
군대에서조차 하지도 않는... '사상검열'입니다... 어떻게 하냐구요?

각 팀마다 약 17, 8명으로 이뤄지는데...
여 기에 지도선배라는, 모범 경력사원들이 할당되고... 이들은 그 팀을 선배로서 지도하는데... 이들 지도의 핵심이 바로 '사상검열'입니다... 우선 모든 신입연수생들은 연수일기를 써야 합니다. 그 연수일기를 자신만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막판에 낸다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양반이죠!!! 왜냐구요???

저녁 일과 점호때마다 그 지도선배에게 내야 합니다!!!
그 래서 선배들은 밤에 잠을 설치죠... 왜? 18명의 연수일기를 꼼꼼히 따져 읽고 '사상검열'을 해서 일일이 의견을 달아주어야 하니까요...!!! 제가 이 황당한 검열에 날마다 저항을 하다 끝내 지도선배란 양반과 싸우고 말았죠!!! 날마다 삼성의 체계과 경영원칙을 비난했더니만... 나중에 손을 들고 말더군요!!! 날마다 그야말로 논쟁이었죠!!! 하마터면 짤리뻔했죠!!! 아마도 이때 차라리 짤리길 바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도선배들도 사람인지라... 그렇게까지 사상검열을 하진 않았습니다... 아마도 다른 '극악한 지도선배'를 만났다면... 아마도 다른 자유로운 직장을 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일기에 써야 하는 내용들을 짐작하시겠죠?!!!
물론입니다... 당근... 위대한 이건희 회장님의 교시를 잘 받들어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그 연수일기를 꽉 채우게 되면... 그야말로 '그들만의 연수과정'은 100% 성공인 셈입니다!!!

막판에 극기훈련을 하는데...
극기훈련이야 중등, 고등학생들도 하니까... 뭐,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근데 막판에 하다 보니...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이렇게 열심히 몸과 맘을 다져서 이건희 살찌우는 짓을 왜 하고 있나?"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대로 지금 삼성에 계신 분들을 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삼성을 이건희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시키는 그 사냥개들의 노름에 철저하게 세뇌되어 자신이 지금 어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많은 "삼성맨"들의 깨달음을 위해서입니다!!!

정말 우리 사회가 그간 걸어온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전체주의"...!!!
바 로 그 고갱이(?)를 그대로 간직한 전대미문의 한국 재벌, 아니 한국 기업의 상징이 바로 "삼성"입니다. 삼성을 겪고 나면, 우리 한국사회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나 보입니다. 군대를 다녀왔기에 더욱 그 느낌은, 기억의 비교로부터 더욱 뚜렷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슬픈 우리네 자화상!!!"
"먹고 사는 것이 얽매인 우리네 민초들은 자본과 국가권력의 사슬에 갇혀 '생각의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삼성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문득 해방 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무수히 있었던 "집단학살"의 장면이... 어느 책에서 본 사진으로 떠올릅니다. 그런 사진들과 그 현대사의 비극을 설명하는 글귀들 가운데... 이런 구절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우린 사람도 아니었죠!!!"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왜 끌려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이면 죽고 고문하면 고문당하고...!!!"

생각의 차이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그 무서운 "획일주의"가 국가권력을 통해 작동하는 그 오랜 시간을 거쳐 이젠 우리사회의 모든 곳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정한 세력들이...
자 신들의 목숨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그저 웃는 얼굴로 쳐다보지 않았다는 아주 황당한 이유만으로... 같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던 우리네 역사가 있었습니다. 불과 60년 전에 말입니다!!! 차라리 생각이 다르다고 선언이라도 하고 죽어간 사람들은 억울하지 않기라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린 삼성의 왜곡된 소유구조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나쁜 것들을 뿌리채 파헤쳐 보아야 합니다!!! 이 또한 우리네 현대사의 왜곡을 그대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죠!!!

삼성을 그만두며...
이런 생각을 또 했습니다!!!

"난 이제 내맘대로 살거야..."
"적어도 삼성의 이건희 개가 되진 않을거야..."

그런데 우리사회의 모든 곳에 그네들의 촉수가...
살 면 살수록 더욱 암울해지는 우리사회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게 됩니다... 젊었을 때의 '관념적 급진성'과 '순수한 열정'... 그나마 이것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는 잘 몰랐는데... 서서히 나름의 냉정함과 세상을 사는 지혜를 깨닫고 몸에 갖춰 갑니다... 잘 가다듬고 생각해 봅니다!!!

"분명 그때보단 나아!!!"
"그때처럼 온몸으로... 그러나 "푸른앞날"에 대한 굳센 믿음과 꿋꿋한 의지는 잃지 않고 가다 보면... 내 자식들은 좀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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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다함께&quot; 소개와 &quot;아펙과 제국주의&quot; 차례


 

"다함께"는 반전 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단체로...

"다함께" 신문과 소책자 발행, 포럼 개최 등의 활동과 함께, 여러 진보사회운동에 실천적으로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펙(APEC)과 제국주의"라는 소책자는...

"다함께" 회원인 김어진씨가 지은 것으로 아펙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아펙에 대처해야 하는가를 잘 살피고 있습니다!!! 지은이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올립니다!!!

 

<<< 아래 차례를 클릭하시면 내용을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

 


 

APEC과 제국주의

글 김어진
값 2,500원

차례

머리말


1장_APEC의 탄생 배경과 주요 회원국들의 이해 관계
  1. APEC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전략
  2. 일본의 APEC 정책과 미·일의 긴장과 갈등
  별첨 1 : 중국의 대(對) APEC 정책
  별첨 2 : 'APEC을 아시아에서 소강국으로 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공간으로'

2장_APEC을 통해 본 세계화와 전쟁
  1. APEC과 세계화
   1) APEC의 경제적 목표와 그 결과
   2) APEC이 내거는 시장화 조치들
   3) 시장화 정책의 뇌관 ABAC
   4) 규제완화와 APEC의 '반부패행동계획'
   5) APEC의 환경인식과 에너지 기업의 세계화
  2. APEC의 전환점과 부시의 전쟁 : '인간안보'의 본질

  별첨 3 : 아펙은 이주 노동자 규제 도구
  3. 반부시 : APEC 반대 투쟁의 중요한 고리

값 2,500원
구입문의 atgmail@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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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아침방송

낑깡님의 [삼성의 면접시험] 에 관련된 글.

삼성의 모든 계열사들은 아침마다 방송을 합니다!!!
아마 지금도 열심히 아침마다 사내방송을 하고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땐 분명 날마다 아침방송을 했는데... 혹여 지금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을텐데...

아무튼 그땐 날마다 아침방송을 했는데...
그 대부분의 내용이 아래와 같은 뜻을 주장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위대한 이건희 회장님께서는 이렇게 교시하셨습니다!!!"

실제 구체적인 내용들은 날마다 달라지지만...
얼마나 사람들을 쥐어짜고, 자신들이 강요하는 생각을 하도록 끊임없는 의식화 교육을 시키는지... '데저트 올'("Digitall"의 우리말 패러디 -> "Desert All")이란 삼성전자의 목표와 맞게도(?), 이런 의식화 교육을 통해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사막처럼 황폐화되어 갑니다!!! 삼성의 의식화 광고 또한 이런 "사막과 같은 황폐화"의 정책을 정말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죠!!! 이런 "데저트 올 의식화"를 위한 아침방송에 과연 모든 임직원들이 철저한가를 관리하기 위해... 삼성의 관리부서에서 하는 짓을 혹시 상상해 보실래요?

갑자기 불쑥 관리부서직원들이 돌아다닙니다!!!
들고 다니는 종이에 무얼 점검하여 적어가느냐 하면...

(1) 빈 자리 -> 누가 자리를 비웠나?

이 시간엔 화장실이 급해도 참아야 합니다!!! 왜냐면, 이건희 회장님의 위대한 교시가 내려지는 시간에 웬 오줌? 초일류기업 삼성을 이룩하여 위대한 선진조국을 건설하려면 아침방송에 오줌이나 설사가 나와도 참아야 하지요!!!

(2) 누가 떠드나?

감히 이건희 회장님의 교시를 조용히 듣지 않고 떠드는 사람은... 주로 옆사람과 '즐거운' 아침 얘기를 소곤거리는 "삼성맨"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3) 누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일하나?

"위대한 이건희 회장님의 교시"를 보지 않고(일거수일투족을 놓친다면 그야말로 불경죄로... 옛날 독재정권시절이었으면 아마도 체포당했을 것임???) 감히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고의적인 불경죄로 그 죄질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4) 끝에 삼성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 사람이 있나?

아침방송의 끝에 삼성가를 따라 부르는 시간이 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두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 다 일어나기 때문에 입을 보지 않고는 노래를 따라부르는지 아닌지를 제대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죠? 따라서 이 항목은 제대로 찾아내 평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5) 삼성가를 부르는 시간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최고의 불경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네들 말로 하면, 순전히 "빨갱이"죠!!! ㅎㅎㅎ... 정말 얘기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지네요!!! 그땐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연구실 책임자들과 티격태격하기도 했는데... 이만하면... 웬만한 "획일적 전체주의"라고 해도 견줄만한 곳이 있을까요?

정문을 들어서면 숨이 막히죠!!!
연구조직이어서 나름대로 자율적 관리체계를 구축했다고 하는데도... 관리부서의 행동은 정반대입니다!!! 가끔 정문에서 몇 시에 출근하는가를 점검하여 지각자 명단을 공개합니다. 다 좋은데... 이 조직은 자율출퇴근 체계를 운용하던 회사였습니다. 5분 늦었다고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관리부서 사람들은 늘 연구개발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보상이 크다고???
노동강도나 관리체계에서 오는 엄청난 압박을 생각해 보면... 글쎄... 그 보상이 큰 것도 아닙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어느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와 매우 절친했나 봅니다. 신도들을 확실하게 조종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아주 좍 꿰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보상이건 무엇이건... 모두 "위대한 이건희 회장님"께서 내려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납니다!!!

"이건희 회장님이 삼성반도체의 여직원들에겐 어느 대중연예인보다 더 인기입니다!!! ㅎㅎㅎ... 회장님만 오시면 아주 엄청난 환호가 쏟아집니다!!!"

삼성 홍보임원의 얘기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모든 것을 다했다니... 지금의 삼성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습니까?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때도... 정부에서 5년이 넘게 인수대금을 연기해 준 것은 물론... 오히려 지원자금까지 몽땅 쓸어가 챙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사업을 한다면... 어느 누가 사업을 못한답니까?

수십만, 아니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사람, 이건희 일가를 먹여살리는 꼬락서니가 바로... 한국 재벌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사회에 뿌리내린 지독한...
"획일적 전체주의"의 모습을 삼성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최첨단의 모습을 여러분들은 삼성에서 느끼실 수 있습니다!!!

모두를 디지탈로 만들어 더욱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건희 유일신" 사상으로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삼성!!!

"이들이 진정 21세기의 첨단전자회사 사람들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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