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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화

 연구실로 전화가 왔다.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남자가 거기 전자파 연구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고픈 유혹을 간신히 넘기고 '있습니다' 했더니 바꾸어 달란다. '접니다' 했더니 잠깐 침묵이 흐른다. 젋은 여자 교수라......나야 자주 겪는 일이지만 그는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하는 거겠지.


국내에 전자파 건강영향을 연구하는 다른 연구자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길래 어디 어디 누구 누구 저명한 교수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더니 한숨을 쉰다. 이미 그 분들한테 연락을 다 해보았는데 그 중의 한 분은 작년에 자료를 보냈으나 감감 무소식이고 다른 한 분은 나에게 한 번 연락해보라고 했단다. 허걱. 설마 그 양반이 일부러 토스를 한 건 아니겠지. 그냥 같은 질문에 대해 있는 대로 대답을 했겠지 하면서도 좀 찜찜한 생각이 든다.  

 

조리없이 말하는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그가 사는 동네에 고압선이 지나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많이 암으로 죽고 기형아가 출생했다고 한다. 부인도 7년전에 췌장암으로 죽었다. 전자파가 몸에 안 좋다고 이사가자고 했던 부인 말을 무시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진실을 밝혀달라.

 

그는 반복해서 횡설수설했는데 중간 중간에 토지보상, 비용 이런 단어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보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는 것 같다. 이렇게 전화상으로 듣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다.  

 

나의 건조한 답변

"전자파가 인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사실에 대한 자료를 들고 환경운동단체를 찾아가 보아라, 도움이 될 지 모른다'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

"아내가 죽고나서 많이 우울했다. 고압선에 확 불을 싸질러 버리고 죽고 싶다. 아직 장가 못간 아들때문에 참는데 한편으론 나 혼자 죽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허걱. 죽고 싶다니 이를 어쩌나. 거기다 경상도 사람이니 대구 지하철 참사 생각이 났다.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용기를 내세요.  일단 준비하셨다는 자료를 보내주시면 제가 읽어보고 도와드릴만한 내용이 있는 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자료 보내실 곳은....."

 

전화선을 타고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다. 한 노인이 울고 있다. 그가 편집증 환자이든 우울증 환자이든 그냥 외로움에 지친 노인이든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이리라.  이럴때 기지와 유머감각을 발휘해서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화를 끊고 드는 불길한 예감.

잘 알지도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은 전자파 역학에 대해서 공부해야 할 일이 계속 생길지 모른다는. 게다가 알고보면 별일 아닌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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