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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건강진단도 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 이 글은 뻐꾸기님의 [소신과 인내심] 에 관련된 글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내가 맡은 보건관리대행 사업장이 줄줄이 계약 해지를 한데다 최근엔 작업환경측정에서 유해물질의 농도가 초과했던 사업장이 떨어져나가서 심란한데 며칠전에는 대기업 계열사의 특수건강진단을 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회사는 내가 일년정도 사업장 주치의를 했던 곳이다. 사업장 주치의란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산업보건의 선임제도가 사실상 사문화되자 이를 부활시켜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노동부에서 2003년도에 만든 제도이다. 쉽게 말하면 의사인 보건관리자가 없는 곳에 의사들을 보내겠다는 것인데 주로 건설업이나 산재다발 사업장에 근로감독관이 전화를 해서 억지로 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 회사는 목소리높혀 일등을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지역에서 거점병원인 우리 병원 산업의학과에서 사업장 주치의를 선정하기를 원했다. 보건관리대행 사업장이 아니므로 검진담당 의사인 노선생이 하는 것이 순리인데 그 때 노선생이 너무 바빴고 그곳에 젊은 여성노동자가 많았기 때문에 내가 했다. 나의 사명은 2주에 한 번 의무실을 방문하여 건강상담 등 직업성 질환에 대한 예방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 일은 신규 채용자의 건강진단내용을 검토하고 그들이 건강진단 결과때문에 짤리기 않도록 하는 게 거의 다였다.

 

 처음 회사를 방문했을 때 회사 안전관리자에게 건강에 관하여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더니 '무재해, 무질병'이라고 했다. 세계 보건기구가 건강을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닌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상태'라고 정의한 지 수십년이 흘렀건만...... 하여간 그 회사에 들어오는 사람은 사소한 흠이라도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법정 채용건강진단 항목외에 여러가지를 검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의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수많은 이상 소견들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무증상 WPW증후군(부정맥의 하나)을 수십년간 관찰하면 어떻게 되는지, 무릎과 허리의 단순방사선 촬영에서 나타나는 비특이적 이상 소견이 임상적으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에 대해서 메드라인(의학정보dB)를 검색하면서 이런 사소한 문제로 취업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역할이 된 것이다. 

 

물론 채용시 건강진단은 채용이 확정된 후에 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수습생 신분이라는 법적으로 애매한 위치에서 하는 경우가 많아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래서 인권위원회에서 폐지를 권고하여 내년부터는 없어진다.

 

  이런 일을 하러 이주일에 한 번 시간을 낸다는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일년은 해보고 판단해야겠다고 생각하던중 건강이 나빠져서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 시점에 문제가 발생했다. 안전관리자가 비소에 대한 특검에 대해 문의를 해 왔다. 비소는 나폴레옹을 독살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는 독성 물질로 발암성이 있으며 우리나라 산안법상 특수건강진단 대상 물질이다. 그런데 실제 검진 항목에는 비소노출이나 그 영향을 평가하는 검사는 일차 검진에서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하는 선택항목이다. 그 회사의 비소노출관리에는 문제가 있었다.  작업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간헐적인 고농도의 비소노출이 심각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실제 그 작업이 이루어질 때는 작업환경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류기업답게 그 화려한 건물안에서 실질적으로 격리되어 있지 않은 비소작업공간으로부터 사무실 공간으로 확산이 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안전관리자에게 비소의 건강영향을 설명했고 먼저 정확한 노출평가를 한 뒤 특수건강진단에서 비소에 관한 특별한 문진과  요중 비소를 검사하도록 권고했다.

 

 특검결과 전체 비소작업자의 요중 비소의 평균은 노출기준의 1/2정도였고, 요중비소 초과자도 한 명 있었다. 작업환경 평가에서 노출기준의 1/2이라는 것은 관리가 필요한 농도이다. 일년에 2회정도 측정해서 그렇게 나왔다면 통계적으로 보면 연중 어느시기에 노출기준을 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출기준 초과자는 한번 더 검사를 했고 이번엔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 우리 검진담당의사인 노선생은 직업병 요관찰자로 판정했다. 안전관리자는 스토킹 수준으로 노선생을 괴롭혔고 나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나름대로 보건관리를 잘 해보려고 큰 돈을 들여 법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검진을 했는데 결과는 자신의 인사고과에 불리하게 나왔으니 도와달라고 하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완벽주의자에 고지혈증, 경도 고혈압에 불면증까지 있어 젊은 나이에 과로사할 위험이 높아보이는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소신껏 직업병 요관찰자 판정을 내는 것 보다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 회사가 요중 비소에 대해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게 현명하다는 당시의 나의 판단에 그에 대한 동정심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 의견은 문제가 된 작업자에 대해서 몇 번 더 검사를 한 결과를 가지고 판정을 하자는 것이었다.  한번의 초과는 검사상 에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 회사 주치의를 그만두는 마당에 노선생을 설득해서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어렵게 '건강진단의 의미'라는 두리뭉실한 제목으로 보건교육시간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비소작업자들에게 비소의 건강영향, 노출평가결과, 관리방안, 예방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긴장하면서 교육을 했지만  3교대근무때문에 늘 피곤하고 졸린, 이십대 초반의 작업자들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어쨌든 내가 나가기 전에 알 권리는 충족시켰으니 최소한의 의무는 다한 것이다. 주치의 그만둔다고 인사를 하러 온 안전보건관리의 최종 책임을 지고 있는 부서장에게 비소에 대한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했지만 신경써서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도  공장이 계속 확장되고 있어서 거의 잠을 못자면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급하게 신경쓸 것이 많은 상황이었기에 수십년뒤에 발생할 암에 대해서 걱정할 형편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결국 올해 건강진단은 짤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예상한 대로 되니까 씁쓸하다.  무노조 신화를 자랑하는 그 회사가 법을 어긴것도 아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걸 덜커덕 받아간 다른 병원에 대해서 동업자의 윤리를 지켜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접었기에, 비소노출관리가 앞으로 잘 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없다.  이럴 땐 근로감독관이 어떤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최근에 계약을 해지한 작업환경측정 초과 사업장에 대한 담당 근로감독관의 태도를 볼 때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도덕적 해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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