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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익힌다는 것은 몸으로도 아는 것이란 뜻이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을 [강의]에서 읽은 것 같다. 올해 특수검진을 새로 맡아서 하게 되면서 날마다 드는 생각중의 하나는 세상에 화학물질은 많고도 많고(순물질만 10만종이라나) 뻐꾸기의 지식은 어찌 그리도 적은지, 게다가 몇년전에 공부한 것만으로 버티다간 큰 코 다칠 수 있다. 왜냐? 의학지식이 매년 2배씩 증가한다고 하는데, 화학물질의 독성에 대한 정보도 만만치 않은 속도로 증가하기 떄문이다. 물론 인간이 궁금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정보이지만 그걸 배우고 익히는 자의 입장에선 따라갈 수 없이 많은 양이다.



  그 회사는 반도체 부품생산업체인데 이젠 납도 거의 안 쓰고 주석을 매우 약간 쓰며 면봉에 묻혀 불량난 부분만 사알짝 닦는 정도로 세척액을 사용하고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검진장소에 도착했는데, 웬걸 책상위에 편지가 한 장 놓여있다.

 

   며칠전 그 회사에서 쓰는 세척액 성분을 다시 확인해달라고 담당 산업위생사에게 당부를 한 결과. 작업환경측정때, 사측에서 IPA 라 해서 그런 줄 알고 분석했고 결과를 보고 MEK인 것 같아 사측에 다시 확인해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받았더니, 글쎄 1-브로로프로판이라는 것이다. 2년전 그것이 TCE니 아니니 논란이 있었다가 덜 유해한 IPA로 바꾸었다하여 그런 줄만 알았는데 어제밤에야 그게 아니라고 한다.

 

  아침부터 담당 산업위생사한테 전화해서 재차 경위파악을 하고 나서 재측정을 지시했다. 담당산업위생사왈, 그게 국내 산안법상 규제물질이긴 하나 노출기준 미제정이고 어쩌고..... "그거 ACGIH에서 10ppm으로 노출기준 정한 물질이요. 빠른 시일내 재측정하고 보고하세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썰렁하게 말하게 된다.

 

  2-브로포 프로판은 27명의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난소부전을 유발하여 충격을 준 세척제이고, 1- 브로모프로판은 그보다는 약해도 생식독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물질인데 이제와서 그 물질이 그거래요 하고 넘어갈 수는 없지. 정말 그 물질인지, 정확한 노출농도는 어떤지 파악해야 하는데, 국내노출기준타령이니 좀 짜증이 났다.

 

  130명을 5시간동안 검진하는 기록을 세우면서 세척작업자에 대한 집요한 문진에 들어갔는데, 약 1년전부터  월경기간이 줄거나 양이 줄어든 사람이 십여명 쯤 된다. 세척제가 바뀐 시점도 그 즈음. 여성 호르몬 검사를 추가로 냈다. 난소기능저하의 결과가 아닌, 그저 우연이기를 빌면서.

 

 사무직 남성 노동자가 6개월간 계속되는 기침을 호소하길래 들어보니, 하청업체에 업무상 갔다가 실수로 도금조 용액 냄새를 화악 맡게 된 뒤로 그렇다고 한다. 세상에, 정말 운 없는 사람이로세, 반응성 기도장해증후군에 부합하는 임상증상이네. 메타콜린 유발검사를 냈다.

 

  오늘은 간호학생 4명이 실습 나왔길래 그동안 잘 신경써주지 못해 미안해서 불러서 이것 저것 물어보고 가르쳐주었는데 아이들이 별 성의가 없어 보여 짧게 끝냈다.  말똥만 굴러가도 웃음이 나올 나이라 그런건지,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으나 까르르 까르르 하는 모습이 좀 그랬다. 쟤네들 또래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난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질은 쓰면서 2교대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때문에 내가 신경써서 일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도 마냥 즐거운 모습이 이뻐보일 수는 없다.

 

 마지막에 나타난 담당 과장의 얼굴이 좋지 않아 물어보니 둘째아기가 임신 6주인데 유산된 것 같다는 말을 바로 어제 들었다고 한다. 의사가 산모한테 직접 말한 뒤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런 건 보호자한테 말해야지 너무 배려가 없다고 속상해한다. 아기들은 이 세상이 맘에 안들어서 오다가 돌아가기도 하는데 다른 데 가서 태어나 잘 산다더라.....뭐 이런 위로밖에 더 하겠는가.

 

  검진마무리하면서 혹시나 해서 임상병리사한테 여성 호르몬 검사할 때 마지막 생리일 적었냐 물어보니 당당하게 그런 말씀 없으셔서 안 했노라 한다. "그건 임상병리사 기본인 줄 알았어" 쌀쌀맞게 말해놓고 후회한다. 좋게 말해도 될 껄. 30분쯤 후에 한달째 감기가 안 떨어져 고생이어서 낼은 휴가낸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더 미안하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 검진하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뭐..... 하는 마음 반, 평소에 미심적은 거 하나라도 확인하고 공부하고 하는 자세가 아쉬운 마음 반이다.

 

   새로온 업무담당자는 600명규모 회사에서 보건관리업무를 했었던 법학전공자로 또릿또릿 일 잘 하게 생겼더라.  열심히 해서 빛이 나는 일은 아니지만 애쓴 만큼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업무이니 신경써달라 부탁하자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데 힘차서 좋다.

 

   나오려는데 아니, 간호학과 교수가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그래, 바쁠 텐 일이 더 많아지는 법이지. 지난 번에 실습 잘 안 도와준다고 좀 서운해하는 전화를 받았는데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지기가 그래서 작업장 순회점검을 같이 했다. 하필 제품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생산본부장의 호의어린 설명때문에 30분이면 충분할 것이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병원복귀해서 판정하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진찰실을 빠져나오는데 보건관리 간호사인 이쁜 곰이 따라 붙는다. 이 회사, 저 회사 특검관련 현안을 보고하고 결정해달라는 것. 이야기하면서 연구실까지 와서 차 한 잔 주었다. 얼굴이 좀 가라앉아보인다 했더니 모친이 유방암의심된다 하여 금요일에 검사받기로 했단다. 그니는 부모님 늦은 나이에 얻은 고명딸이다. 

 

  으잉, 환경과 보건 세미나 시간에 늦었다. 원래 사업장 보건교육일정이 있어서 못 간다고 사전에 연락했었는데 파업으로 취소되었다고 해서 불참하고 마감 급한 일 처리를 좀 할 까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래도 공부해야지 하고 꾸역꾸역 들어갔다.  어, 그런데 손가락 선생님의 발표가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후반부만 들어 아까왔다. 세상에나, 암치료목적으로 방사선 조사를 한 뒤에 발생한 2차 원발암의 엄청난 위험도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쏟아져나왔더구나. 뒤이어 두번째 발표인 카이로스의 환경과 어린이 건강도 재미있게 들었다.

 

  누리가 전화를 했다. 오늘 영어수업 하나 안 하나 궁금해서 한 전화이다. 얼른 오라고 성화이다. 가자, 가자. 못 다한 일들은 내일 또 하지 뭐.

 

  배우고 익히니 즐거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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