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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 만난 이들

뻐꾸기님의 [주방기구 제조업체 작업장 순회점검] 에 관련된 글. 

  일거리가 없어 두 달 간 휴업을 했다고 한다. 그 회사는 내 기억속에서 이렇게 존재한다. 어두컴컴한 작업장에 울려퍼지는 엄청난 크기의 프레스 소음, 낡은 작업복을 입은 구부정한 초로의 노동자들은 일이 없으면 더 작아지고 일이 많으면 새벽까지 잔업하느라 피곤에 쩔어 더 작아진다. 수년 전 이미 다른 지역에 있던 공장이 문을 닫는 모습을 보았기에 더 안쓰럽다. 



작업환경측정결과, 물질안전보건자료, 보건관리대행 일지 등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는데 지난 일 년간 달라진 것이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보건관리 담당자가 또 바뀌었는데 중견간부로 바뀐 것으로 보아 아마 관리직을 감축한 모양이다. 수출길이 막혀서 그렇단다. 그래도 지난 이주전까지 한달간은 어디서 2만개 주문이 들어와서 다들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일이 없으니 직업병도 없을 터

 

연마작업자들은 대부분 동종업계에서 30년정도 일해온 고참들이나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인데 특별한 호흡기 증상을 호소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호흡보호구도 안 쓰고 말도 안 통해서 좀 그랬는데 필리핀 사람들은 귀마개, 마스크 잘 쓰고 간단한 의사소통도 되니까 좀 낫다. 그래도 크롬노출에 대해 좀 미씸쩍어 오랫동안 일한 사람은 작업전후 요중크롬과 요중 베타2마이크로글로블린을 몇 개 냈다.

 

조립공정의 여성 노동자들도 대체로 작업과 관련된 건강문제는 없었으나, 작업환경측정결과를 보면 노말헥산 노출량이 들쭉 날쯕해서 유기용제 관련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신경행동검사와 소변중 2.5 헥산디온 검사를 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건강한 것은 아니었다.

 

-  혈압이 약간 높고 불안과 우울증상이 심해서 정신과 약을 먹고 있던 이는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시모가 돌아가신 뒤로 증상이 많이 좋아졌다. 홀로 남은 시부는 시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 생각해보면 그 시모는 어찌 그리 모질게 했을까? 그이역시 사랑받지 못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죽고나서도 남은 이들이 속이 시원한 지경이니 그 인생이 참으로 불쌍타.

 

- 수년간 간기능이 매우 나쁜데 원인을 찾지 못하던 그녀. 처음엔 몰래 음주를 하는 게 아닌가 했었다. GOT/GPT가 100이 넘고 rGTP가 600이 넘어서 본원 소화기 내과에 다니기도 했는데 정확한 진단명이 나오지 않았다. 소화기 내과 전문의한테 물어보니 primary biliary cirrhosis 일 수 있으나 현재로서 무엇을 더 할 것이 없는 상태라 하더라. 오늘 표정을 보니 기분이 별로이다. 그동안 검진만 하면 이상소견이 나오고 알콜중독을 의심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그녀의 외모가 좀 야해보였고 누군가가 남정네들하고 어울려 술마시러 다닌다고 나한테 귀띔을 했었던 적이 있다. 그동안 오해한 점을 사과했더니 얼굴이 밝아졌다. 미안하기 그지 없다.

 

- 작년 검진때 혈색소가 5.3이 나왔는데 병원갈 생각을 안해서 우리 간호사가 딸한테 연락해서 혈액내과 진료보고 철분제제를 수개월 먹고 10.0까지 올라간 것 까지 확인했던 그녀.  제대로 대화가 잘 안된다. 그래서 주변 사람한테 물어보니 지난 5년동안 뭐 나올까봐 무서워서 검진을 안 받았다가 작년에 처음 검진을 받은 것이고, 한동안 얼굴이 말이 아니었는데 이젠 혈색도 돌아오고 좀 좋아보인다고 한다.

  혹시 다른 문제는 없나 물어보니 딴 살림났던 남편이 아파서 돌아오고 수년간 간병을 했는데 얼마전 죽었다 한다, 성격이 이상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종종 주지만 불쌍해서 그러려니 하고들 지낸다고..... 나중에 보건관리 담당자에게 들으니 일을 잘 못하고 자꾸 문제를 일으켜서 해고시키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잘 안되었다 한다.  

 

- 이런 시골에 있을 것 같지 않게 많이 배우고 고상한 사무직 노동자인 그녀. 혈압이 조금 높아서 계속 관찰하다가 결국은 작년부터 혈압약을 먹게 되어 매우 상심했었다. 누군가가 그녀로부터 거액의 돈을 떼어먹은 뒤부터 급격하게 높아졌던 혈압은 약기운에 기세가 꺽였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평화롭지 않다.

 

 그녀들의 건강을 좀 먹는 것은 시부모, 남편, 돈, 여성에 대한 편견 등등.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뿐인 또 다른 그녀들은 검진에서 약간의 이상소견만 나와도 표정이 어두워지곤 했는데 오늘은 검사결과들이 괜찮다 하니 고맙다 하며 웃으며 일어선다.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꼬박 꼬박 약을 잘 먹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건관리 담당자와 면담하면서 들은 말이 마음에 좀 걸린다. 여전히 검진날이 되면 월차내고 안 나오는 분들이 몇 명있다는 것. 언제 짤릴 지 모르니 건강문제가 드러나는 게 겁나기 때문, 또는 가진 게 없으니 무슨 병이 있다는 걸 알아도 별 뾰족한 수 없으니 그냥 피하고 만다는 해석이다. 

 

   어쨌든 검진이 끝나고 나니 마음속의 구름이 좀 걷혔다. 이 작업장에 대한 나의 어두운 기억과 달리 모두들 씩씩하게 잘 살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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