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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날

  #1. 아침에 검진하러 간 곳은 유리섬유로 인한 접촉성 피부염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작업장이었는데 오늘 가서 보니 오호, 피부 증상호소자가 한 명도 없다.  물어보니 환기시설을 개선한 이후로 피부증상이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개선을 할 수 있었냐고 물었다.  회사에서 무슨 캠페인을 하면서 제안제도를 실시했는데 노동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뭐가 변하는 곳도 있어야지, 일할 맛이 나지.

 



  

#2. 어제 내가 막 신경질을 냈던 곳의 노안부장이 장문의 편지를 썼더라.  어쨌거나 내가 화를 낸 것은 잘못이니 사과를 하고 오해는 좀 풀었다.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왜 나는 민주노총 사업장에 자꾸 화가 나는가.  그래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실망한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의사라고 사람들이 내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데 익숙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화가 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권력에 무감각해지지 않았는지 곰곰 생각을 해 보았다.  아니면 내가 나름대로 성의껏 일했는데 몰라주어서 서운한 건가? 그런 마음이 없진 않겠지. 

 

  사실 운동하느라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예의같은 것은 생략하는 게 싫다.  그의 편지속에서 '소금먹어가며 12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 이란 글귀를 읽으면서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 회사에서 문진에 방해가 되니 좀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을 하자 어떤 노동자가 말했다.  "이럴 때 모처럼 만나서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게 뭐가 문제냐".  검진하는 날은 모처럼 노동자들이 만나서 수다떠는 날이기 이전에 병원 한 번 가려면 큰 마음먹고 월차내야 하는 사람들이 의사와 상담하는 날이라고 답변해주었다.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의사와 상담할 권리를 침해하는 그 사람들이 싫다.  어떤 이에게는 절박한 문제가 있어 좀 상담이 길어질 수 있는데 그럴 때 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싫어진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존중받기를 바라는 것이 노동자의 권리라고 오해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곳에 가게 되면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3. 오후에 근골격계 증상조사결과에 의한 상담을 하러 사업장 방문을 했다.  황당무계한 사건의 연속이었던 곳인데 요즘은 분위기가 매우 좋아졌다.  방문초기에는 점심시간외에는 건강상담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작업환경측정에서 소음 초과 나왔다고 담당자를 못 살게 굴어 실질적으로 해고시킨 사건이 2번, 어깨가 너무 아프면 산재하고 쉴 수 밖에 없다는 말 했다고 회사가 발칵 뒤집어져서 항의전화 한 번,  소음특검대상자를 검진안하겠다고 버텨서 200만원의 손해를 보면서 특검을 하도록 한 일, 열심히 하는 담당 간호사 자르려는 목적으로 만족도 설문조사를 하지를 않나.... ..

 

  차타고 가면서 담당간호사 이야기를 들어보니 웃음이 나온다.   그동안 사무직 만성질환 관리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고,  근골격계 질환 예방과 소음감소를 위해서 수공구를 개선했고, 사장친구가 안전공학관련자라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19만원짜리 안전매트도 깔았고, 지난 번에 팔꿈치 통증이 너무 심했던 이는 근무중 치료받고 작업전환해서 웃으면서 지낸다 하고.... 등등..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은 노동조합이 설립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연구실에 돌아오니 5시. 

아침 7시부터 시작한 긴 하루 일정이 끝났다. 

전화가 왔다.  댄스스포츠 수강생 모 선생님이 지난 번 노동절때 결석자가 많아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오늘은 가 볼까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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