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오늘 검진후에 보건대행을 나갔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난다. 장비의 특성상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밥 만 먹고 쉬는 시간 없이 바로 현장에 돌아가 일을 해야 한다는데 꼬박 12시간 맞교대 근무이다. 즉 한 치의 에누리 없는 주당 72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뿜어나오는 각종 유독한 화학물질을 마시면서 강도높은 육체노동을 12시간씩 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족도 없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자원이 매우 취약한 사람들이다. 이주노동자, 그리고 상대적으로 버젓한 기업에 취직하기 어렵고 결혼을 하거나 가정생활을 유지할 형편도 안되는 사람들......
#1. 3년전 한국에 와서 검진에서 고혈압을 진단받고 약물투여중인 30대 몽골 남자는 오늘 측정한 혈압이 150/100 mm Hg이었고 매일 코피가 난다고 걱정이다. 그는 한국말을 모르고 나는 몽골말을 모르니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 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나 어쨌든 코피가 지속적으로 날 수 있는 심각한 질환을 배제할 수 있는 검사를 하고 나서 과로에 의해 조절 안되는 고혈압이 원인이라고 판단이 되면 작업시간을 줄이고 교대근무를 제한해야 한다고 사측에 설명했다. 다행히 사측은 온정적인 편이라 의료비용을 다 부담해주고 있는데 과연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조치가 가능할 지는 미지수이다. 어쨌든 곧 귀국예정인 그가 고향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2 엄청나게 뚱뚱하고 고혈압을 진단받은 몇 년동안 꾸준히 투약했으나 혈압이 180/110~160/100 사이인 30대 남자. 그는 일주일에 세번 1병 반씩 소주를 마시고 있으며 역시 주당 72시간 노동을 한다. 그가 먹고 있는 세 알의 혈압강하제와 두 알의 간기능 개선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금주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알콜문제는 삶에 대한 의욕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누구와 사느냐 물어보니 혼자 기숙사에 있다고 한다. 혈압을 잴 때 긴장을 풀기 위해 웃어보라고 하면서 요즘 있었던 가장 즐거웠던 일을 상상해보라고 했을 때 그의 대답은 "없는데요".
잠깐 고민했다. "그래, 뻔한 결과를 예상하면서 포기할 순 없다."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일단 3개월만 금주를 하고 근무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운동 20분씩 하고 혈압을 관찰해보자고 설득했다. 장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이 끝나고 나면 운동을 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근무전 가벼운 운동을 매일 권하고 있다. 담당 간호사에게 일주일에 한 번 씩 문자메시지 보내고 격려를 좀 해주라고 당부했다.
#3. 교대근무경력이 총 5년인 50대남자는 잠을 못 잔다고 한다. 야간근무땐 그냥 누워있는 수준이고 깊은 잠을 들어본 적이 없고 주간근무땐 3-4시간 정도 잔다고 한다. 물론 그도 혈압과 혈당이 모두 높다. 자세히 들어보니 젊은 시절부터 불면증이 있었고 10년전 쯤 정신과 약을 한동안 먹어본 적이 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요즘은 약도 많이 좋아졌고 부작용도 덜하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진료의뢰서를 써주면서 꼬셨다. 어제 야근하고 오전 내내 누워서 뒤척였다는 그는 그 길로 회사문을 나섰다. 다행히 신경정신과 의원이 있다고 한다. 하루 5시간 미만의 수면은 심혈관 질환의 독립적인 위험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자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일단 약을 좀 먹어보고 뭔가가 좋아지면 상담치료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 밖에도 비슷비슷한 사람들은 몇 명 더 만나고 나니 현기증이 일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병역특례와 같은 젊은 이들이다. 이들은 쉬러 왔다. 쉬는 시간이 없는데 어쩌다 의사가 방문하면 모두 상담할 수 있도록 하니 너도 나도 와서 앉아서 기다린다. 나같아도 그렇게 하겠다. 끔직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건강문제가 개별 회사수준에서 개인수준에서 예방가능한 것인지 자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한/다. 우리 방문이 이들에게 일이십분 정도의 휴식이라도 보장해준다는 것을 위로로 삼아야 할까?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