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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로 살아가기

hongsili님의 [학술 "용역'과 학문적 자율성] 에 관련된 글.

 

   정부 모 부처에서 좀 와서 서비스 산업 재해예방을 위한 의견을 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런 자리에 가서 별로 좋은 경험을 한 적이 없어 몇 번 거절끝에 일종의 의무감으로 다녀 왔다.  이름이 무슨 포럼이라는데, 관계 기관 공무원들과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 나라 산재예방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로 보면 되겠다.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공무원중 가장 높은 직위인 자가 서비스업 산재의 증가에 대해서 '산재를 즐기는'  현상이 문제라고 말하더라.  대체 무근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나 들어보니 이렇게 저렇게 사업주단체를 압박했더니 올해 산재가 화악 줄었다는 것이다.  아, 정말 괜히 왔어. 내 정신건강만 나빠지잖아. 

 

  그 자리에서 과거 및 현재의 '을'들에 대한 공무원들의 태도는 기가 막혔다.  그 모임의 경비를 현재 '용역'을 진행중인 연구자더러 부담하라 한다.  나는 어제 일자로 연구계약이 종료되어 해당사항이 없는 것을 알고 무척이나 아쉬워하더니, 그럼 그 중에서 가장 힘이 없는 조직에서 온 자한테 내라고 하더라.  허거덕.  연구비는 연구하는데 쓰는 돈이지 공무원들 밥 사라주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   한 소리할까 하다가 주어진 시간에 해야 할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우선순위가 떨어져 참았다.

 

  또 한가지 웃기는 것은  다음 회의 발제를 정하는데, 자기들 궁금한 것을 연구자들더러 정리 좀 해오라 한다.  낼 모레면 육십이 되는 자기가 이런 것까지 해야 겠냐, 자기들은 매우 바쁘다 하면서.  그런 무리한 요청을 받은 옆 사람이 '예'라고 할 태세라 내가 나서서 딱 잘라서 말했다.  각자 맡은 역할을 합시다. 내가 내는 세금으로 그런 사람 먹여살리고 있다니 분통이 터진다.  

 

  '갑'이란 자들에게 영혼이 없다고들 하지만, 염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 똥밟은 기분으로 집에 왔는데, 홍실의 글을 읽게 되었다.  최초로 '을'이 되어 계약 했던 연구에서 진저리나는 경험을 한 뒤로 그 발주처의 '을'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기억.  내가 못 고치겠다 하니 돈을 토해내라고 하더라.  그래서 법대로 합시다. 하고 끊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내가 서명한 계약서에 어떤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인지 자세히 들여다 보고서야  '을'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그 뒤로 5년 정도 지나서 '정책'보다는  '기술'적인 내용을 개발하는 과제는 괜찮겠지 하고 했던 다른 연구에서는 무려 20쪽에 달하는 수정요청사항을 받고 내 순진함을 탓했다.  그 과제는 기술적인 지침을 만드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떻게든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일을 겪은 주변 연구자들은 사소한 표현 등을 잔뜩 고쳐주고 나서 중요한 내용은 안 고치고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수정요청사항을 반영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살기도 피곤해서 앞으론 정부 기관에서 발주하는 건 정말 하지 말아야겠다 결심을 했다가 한 달만에 여러가지 이유로 그 결심을 깨고 이번 프로젝트를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연구상대역이 나름 훌륭하고 건전한 사회학자라 말이 되는 이야기를 주로 해서 다행이었다. 막판에 통계를 다 다시 돌려달라고 우긴 것만 빼고 연구상대역이라기 보다 공동연구자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와 토론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즐거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상급 기관의 담당자가 되도 않는 언행을 해 댔다.  열받아서 때려치겠다고 했더니, 누군가 그렇더라.  그렇게 더럽고 치사한 일들앞에서 강해지고 그럴 수록 연구를 끝까지 해 내는 것이 공익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황당한 일들 많아도 악조건을 뚫고 좋은 연구를 해야 하는 거라고, 나의 나약함을 꾸짖더라.  

 

  솔직히 말해서 '을'들이 노력해서 이 황당한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아예 상대를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홍실이 글을 읽고 상황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연구'보다 '실무'에 더 치중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뒤로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때론 내가 숨쉬고 살아있다는게 비겁합의 댓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그런데 홍실의 다음과 같은 말이 뒷걸음 치는 나를 불러세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불공정 근로계약서나 소비자 약관에 대한 개정처럼 정부의 학술연구용역 발주와 관련한 연구윤리 - ‘갑’과 ‘을’ 모두에게 해당하는- 에 대해 공개적인 논의와 새로운 지침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을’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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