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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진찰실에서 바라보는 삶

     전공의 선생이 사라져서 오전 원내검진 대타를 했다.   사라지는 사람은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휴대폰 꺼 놓고 도망가는 대목에서 내 인내심의 바닥을 보았다.  결국 내가 다른 일정을 연기해야 했다.  나, 뻐꾸기, 일정 변경에 알레르기가 좀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경우들도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누군가가 약속을 우습게 아는 태도. 즉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아는 오만함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닐우산의 과 환송회가 일주일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을 때 짜증이 좀 났다.  불가피한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반복된다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전공의가 자꾸 사라지는 것을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응급없고, 중환없고, 당직 없는 우아하고 편안한 생활에의 욕구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과라고 지원자를 볼 때마다 열심히 설명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단순반복작업이 진짜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한다.  

 

      덕분에 오랜만에 원내검진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전공의 선생이 인턴이나 하는 일을 계속하는 게 괴로와서 그만둔 이 일에 대해서,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한 사람에게 스스로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은 참 소중한 일이라 생각한다. 

 

     첫번째로 들어온 사람은 우리가 계속 관리해온 사업장에서 왔는데,  몇년동안 혈압이 약물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상태로 그냥 지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더니, 혈압 재면 약 먹으라는 말은 들었지만 왜 먹어야 하는지, 꼭 먹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한다. 두꺼운 챠트를 한 장 한 장 뒤로 넘겨보았다.  그가 만난 의사들의 글씨체를 확인하면서, 내 글씨는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이 되어보지 않고 비판할 때는 신중하라는 것을 늘 명심하지만 이럴 때는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진을 하는 걸까 궁금해진다.  물론 수검자가 충분한 설명을 듣고도 기억을 못할 수도 있으나 챠트에 쓰여있는 내용을 보면 의사들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경우, 검진을 할 때 수검자가 혈압이 높으면, 과거력,  가족력, 혈압이 높아질만한 위험요인 등에 대해서 묻게 되고, 당사자에게 가장 효과적일 권고사항을 포함해서 중요한 내용은 기록을 해 둔다.  이 사람의 챠트에는 특이사항 없음을 표시하는 기호밖에 없었다.  의사들이 단순반복작업을 단순하게 반복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뿐, 실제로 다른 의사들이 그에게 적절한 설명을 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도망가신 전공의, 첫번째 수검자건으로 기분이 별로 였는데, 검진이 진행되면서  집중하게 되면서 좋아졌다.  울 엄마보다 두살 아래인 여자분이 오셨는데, 참 곱게 차려 입고 오셨더라.  여러가지 검사 결과도 다 좋고, 운동도 꾸준히 열심히 하는데, 위내시경하면서 조직검사를 한 것이 마음에 걸리신다 하셨다.  그러면서 이 나이에 암인들 어떠하랴 하신다.  " 조직검사한다고 다 위암은 아니고, 혹 위암이라 하더라도 치료잘받으면 괜찮은 경우도 많아요. 손주들 시집장가 가는 것도 보고 증손주도 보고 오래 오래 재미있게 사실 수 있을 꺼예요. " 했더니, 손주 며느리 둘에 증손주도 보았고, 하고 싶은 것은 원없이 해보았으니 지금 가도 상관없다 하신다. 그런데 위암이면 맛있는 거 못 먹고 죽게 될 것이 좀 속상하다 하시며 깔깔 웃으셨다. 

 

  울 엄마도 요즘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얼마전 교회에서 영정사진 찍으신 뒤 기분이 이상하다 하시며, 요즘엔 미운 감정도 좋은 감정도 없어, 참 이상하지? 하셨다.  워낙 피가 뜨거운 분이라 그래놓고 며칠 뒤에 별 일 아닌 것으로 펄펄 뛰시긴 하셨지만.  그래도 부쩍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종교가 있어서 그런지 엄마의 마음은 평안해 보인다.  외할머니는 돌아시기 전에 병문안 갔을 때,   내 손을 붙잡고, " 나 죽는 거니? 나 좀 살려주라" 하셨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병실에서 쓸쓸하게 지내시면서 더 마음이 약해지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팠었다. 

 

   오늘 수검자중엔 남편 손을 꼬옥 잡고 들어오신 여자분이 있었다.  60세도 안되었는데, 치매가 있으시단다.  남편은 정신지체 아들이 몇년전 사고사할 때까지 돌보느라 너무 고생해서 그렇다 설명하셨다.  본인도 협심증 투약중이라 한다.  그 때까지 나온 검사결과가 깨끗해서 별로 설명할 만한 내용은 없었지만, 하나 하나 짚어가며 결과가 좋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자궁경부암 검사를 할 때는 부인 혼자 들어올 수 밖에 없었는데, 몸에서 심한 냄새가 났다.  아무리 남편이 살뜰하게 보살핀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리라.  자궁경부암 검사를 마치고 내가 손을 씻으러 다녀오는 길에 기다리는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검사실에 있는 부인이 궁금한 모양이길래, 그냥 한 마디 했다.  옷 갈아입는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알려주어 고맙다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 분들이 더는 아프지 말고 잘 사사시기를 빌었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이 더 많고 삶을 지속하는 것 조차 고통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는 후회없이 살았고,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산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중간쯤 있겠지.  반 정도의 수검자가 노인층인 원내 검진을 하다보면 숙연해진다.  별 거 아닌 것에 일희일비하는 나를 되돌아 보고,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다 싶고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지금 이 순간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검진 마치고 나오면서 아침에 기분 나빴던 일들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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