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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면 새로운 일들

      어제 열시쯤 집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할머니 사이가 썰렁. 별일 아닌 문제로 서로 서운하다 한다.  엄마의 사설이 길어지길래 일단 오늘은 이야기할 기운 없으니 그냥 자자 했고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 잠 든 사이에 출근.  울 엄마, 한 달에 한 번쯤 별일 아닌 일로 폭발하시는데, 잘 들어보면 나이들고 서러워 노여움이 더 깊으신 듯.

 

     출근해서 이메일함을 열어보니 사독회신이 와 있는데, 내가 미워졌다.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 급하게 투고하면서 찜찜했는데, 역시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깨달음.  이걸 왜 그렇게 급하게 투고했던가 후회막급.  차분하게 앉아서 고칠 부분이 좀 있었는데, 더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떻게 되겠지 하는 한심한 생각을 한 게 문제이다. 

 

    오늘은 원내 검진.  첫 수검자는 B형간염보균자로 매일 음주. 고혈압 진단 3년째 미치료.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난감. 게다가 처음엔 상당히 시큰둥한 태도였다.  음주및 간염 바이러스와 간경화와 간암, 고혈압에 대해서 차근 차근 설명하니까 좀 귀를 기울인다.  건강관리를 전혀 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몇달전 개인택시를 받았단다.  회사택시를 할 때는 자기 몸을 돌볼 여유가 전혀 없었단다. 이젠 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한다.   

 

    25명쯤 되는 소규모 제조업 회사에서 검진을 하러 왔는데,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 노동자 중의 한 명이 머리가 아프단다.  그 회사에서 2007년 부터 일했는데, 최근 4개월 전부터 한번 나타나면 3-4시간 지속되고 약을 먹어도 증상이 가라앉지 않는 두통.... 서로 손짓 발짓 하면서 여기까지 파악했다.  밖에 통역할 만한 사람  불러달라고 했더니 병역특례 청년이 들어왔다.  병특 청년은 방글라데시 말은 할 줄 모르지만 어쨌든 의사소통이 잘 된다고 하여, 몇 가지 더 확인해보았다. 첫째, 두통의 첫번째 가능성은 스트레스.   몇달전 본국에 가서 결혼을 하고 온 뒤로 잠도 잘 못자고 힘들어 하는 것 같다 한다.  이슬람 교도라 하길래 기도 하면 두통이 좋아질 수 있다고 두 손을 모아 몸짓을 해보이니, 피식 웃으면서 '"진짜?" 한다.  두번째 가능성은 고무성형 과정에서 나오는 흄과의 관련성. - 병특 청년은 특히 이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는 산업위생사를 보내서 작업환경을 점검하고 환기문제 개선을 권해보겠다 한다.  세번째는 뇌에 특별한 질병이 있을 가능성.  이건 첫번째 두번째 가능성이 아니라고 결론이 나면 신경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이지만 내가 이 사람을 또 만날 확률도 거의 없으니. 

 

    37년생 남자 수검자.   검사상 특별한 이상 소견은 없는데, 이야기가 길었다.  오늘은 사람도 별로 없으니 그냥 들었다.  보일러 유지보수 일을 하시면서 무거운 물건도 좀 들고 고된 작업도 좀 하신단다.  자식들은 이제 일 그만하라 하시지만 노는 건 더 힘들어서 하신단다.  일하러 나갈 때는 몸이 무거워 싫지만 막상 나가서 일 하다보면 지낼만 하다 하시며 웃는다.  " 저도 그래요. 오늘 아침엔 정말 일하기 싫었는데, 나와서 검진하다보면 또 할 만 하고 그래요" 맞장구를 쳤다.  뻐꾸기, 5시반에 눈을 뜰 때 상쾌한 기분이 아닐 때도 있고, 그런 날이면 몸과 마음이 무거워서 꼼짝도 하기 싫어지지만, 막상 나와서 일하다보면 또 살만하다, 아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런 저런 모습을 만나면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삼년 동안 마음 한 구석에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회사가 있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규제 대상은 아닐, 발암물질로 추정되는 성분미상의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있는데, 문제는 이게 그 회사의 발주처가 제공한 작업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란 점이다.   이를 어떻게 해 볼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회사에 해당 작업 노동자들의 건강보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문서로 써서 주었더니, 부담스러우니 없었던 일로 하자는 답변을 받았었다.  외국계 회사인지라 법적 기준 이상으로 안전보건관리를 하고 싶어 하고 실제로 노력하는 회사이지만, 주 거래처의 영업비밀을 건드릴 힘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검진하면서 만나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회사측에 적절한 보호대책을 요구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 뿐이다.   오늘 검진받으러 온 사람하고 긴 이야기를 했는데, 물량이 많아져서 유해작업은 전부 외주를 주었다 하는 말을 듣고 착잡했는데,  대신 적절한 호흡용 보호구가 하청노동자까지 모두 포함하여 지급되었다니 불행 중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약 80명 규모의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에서 제품 시험및 선별 작업을 4년 정도 한 노동자로 최근 경추 추간판 탈출증을 진단받고 산재요양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주에 연락이 와서 일차 통화를 했는데, 일요일에 추가 자료를 보냈다고 문자를 보냈고, 일요일에 이런 전화해서 미안하지만 좀 급하다 하여 약 80% 정도의 내용을 써 두었다.  오늘 직접 면담해서 몇 가지 더 확인하고  서류를 만들어서 주었다.  주말에 일하지 않으려고 결심을 해도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생각하면 더 골치가 아파서 그만두었다.  아, 그냥 되는 대로 살자.

 

   끝내고 나니 점심시간을 40분 초과했다.  외래 간호사는 밥먹으러 갔고, 검진팀장이 대신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면 외래 간호사가 남아서 일을 챙기는 것이 보통인데, 혹시라도 비정규직이라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고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밥먹으러 보내고 검진팀장이 남은 것이다.   우리 과 정규직원들은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섭섭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간에 그만두는 골치아픈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편 비정규직 직원들중 일부에서 씁쓸한 모습을 보기도 한다.   언젠가는 끝날 일인데 윗사람 한테 잘보이면 좋은 수라도 날 줄 아냐 비아냥 거리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왕따를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 일하는 곳이니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좀 속상하다. 병원 경영진이 성수기 비수기가 뚜렷한 과에 정규직으로 전원 채울 수 없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서 노력했고, 우리 과에 있는 2년동안 많이 배우고 어딜 가든 그 배움이 자산이 되어서 잘 되기를 바래서 교육훈련도 나름대로 하고 있다.   속상한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걸 몰라준다 뭐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더 속상한 것은 '비정규직' 이라는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리라. 

 

   시간이 훌쩍 지났다. 벌써 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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