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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중한?

   작년 연말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보고서에 마침표를 찍고 인쇄본을 내고 연구비정산도 거의 끝났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반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하기로 한 일들을 몇 개 미루어놓은 것을 마저 처리하고 나면 혼자서 며칠 어디가서 아무것도 안하고 먹고 자고 놀고 먹고 자고 놀고 지내보고 싶은데,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모르겠다.

 

   그 와중에도 기억해두고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어 잠안오고 일하기 싫은 밤에 적어둔다.

 

1. 주말에 비정규직 용접사로 만성 폐쇄성 폐질환, 천식, 폐섬유화증의심으로 산재신청을 했던 이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내가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낸 게 2월인데 몇 달이 지나도록 근로복지공단에서 소식이 없다하여 궁금했는데, 드/디/어 산재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폐 기능이 안 좋아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이.  부인도 없고 장성한 자식들은 외지에 나가 있어 혼자서 산다.  두어 번 전화를 했는데, 안부를 물으면 그냥 앉아 있어요, 움직이기도 쉽지 않아서요. 라고 답해서 안쓰러웠다.  그 사이 폐렴으로 입원했었고 퇴원하면서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 한다.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다면서 언제 한 번 들르겠다 한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우리 병원에 두 번 왔었는데 그 때마다 집에 가서 일주일씩 앓아누웠다는 말이 생각나 절대 오시지 말고 잘 지내시라 했다.  오늘 이 일에 도움을 준 산업위생사를 우연히 만나서 그가 안부 전했다 하니, 자기도 전화 받았다 하면서 웃는다.

 

2.  초고속 승진을 하던 모범 경찰이 약 8개월간의 우울증 투병끝에 자살을 했고, 어린 아이와 함께 이승에 남은 젊은 부인이 업무관련성평가서를 써달라고 찾아왔었다.   눈물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이에게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게 어려웠다. 경찰의 직무스트레스와 우울증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일곱시간쯤 걸렸는데, 좀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더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한 번 기각된 사안이기 때문에 이 서류에 큰 기대를 걸고 있을 고인의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내 생활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경각심사이에서 좀 흔들렸었다.  

 

   그러던 중 신문을 보니 모 경찰서장이 단속실적위주의 평가에 항의해서 사표를 냈다 한다.  그 부인이 준비했던 장문의 자료에 남편이 지구대 배치 이후 평소 단속실적이 저조해서 고민이 많았다는 내용을 읽은 게 기억이 났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던 거구나.  

 

3.  여러가지 이유로 좀 뜸하다가 다시 본격적으로 출장검진을 시작했는데, 하기가 싫더라.   몇년동안 나름대로 성의껏 이런 저런 권고를 해도 바뀌지 않는 모습만 눈에 들어오고 짜증이 계속 나서 하산할 때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께 검진마치고 나오는데, 문득  오늘 만난 사람들 중에 작년 보다 작업환경이나 건강상태가 조금 좋아진 사람도 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긍정적인 변화에는 무디고,  해결이 안 되는 문제들만 쳐다보는 내가 바로 문제였던 것. 

 

    내일 검진하러 가는 곳도 다녀오면 씁쓸한 곳이긴 하다.    사업장 수준에서 변화를 기대하기는 좀 어려운 곳.   생산일정 차질있으니 빨리 빨리 검진하라는 압력이 세게 들어오는 곳이라, 개별 노동자에게 건강과 관련한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설명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아서 좀 그렇긴 하다.  양질전화의 법칙을 믿고 그냥 꾸준히~~ 힘내라, 뻐꾸기. 

 

4.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작년에 내가 썼던 보고서 일부를 가지고   교육자료를 제작하는데, 그림을 3개를 보완해달라고 전화가 왔었다.  원시자료도 다 주었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들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선선히 하겠다 했다.   건물청소직, 거리환경미화원, 음식 조리직 등 서비스업의 고령 직종의 근골격계 질환 예방에 대한 연구였다.   연구결과가 조금이라도 유용하게 쓰인다는 게 그저 좋았던 것이다.  그래놓고 며칠 미루다 오늘 독촉 전화받고 오밤중에 후딱 해서 이메일로 보냈다. - -;;;

 

5. 이번에 했던 연구보고서에 관련  '국장님'이 관심이 매우 많으니 직접 와서 설명을 좀 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마침 며칠 후에 노동부에서 하는 포럼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로 했으니 그 때 와서 듣고 토론하는 게 좋겠다 했다.  가서 이야기한다고 말이 통할 것 같지는 않지만 고생해서 한 연구결과가  '정책수립의 기초자료'로서의 유용성을 인정받는다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다. 

 

  아무리 잠이 안 와도 내일 새벽에 나가려면 자야겠다.  저녁먹고 비닐우산이랑 수다 좀 떨면서 커피를 한 잔 마신게 실수였다.  이 밤에 혹시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안녕히 주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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