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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5 상부

(§5) 지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현단계에서 요구되는 범위까지만 전개해 보면, 이상의 두 가지  계기[1] 그 어는 한쪽에만 있지 않고 양쪽 안에 있을 때 비로서 지각의 진리로서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사물의 진리는 α) 아무런 구애를 주지않고 그냥 쭉 늘어져 있는[2] {온통 하얀 보와 같은} 보편성[3], 즉 다수의 Eigenschaft들이[4] 병존하는 <또한>이라는 테두리로서, 여기서 Eigenschaft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휠레(Hyle)와 같은} 물질 그 자체를 의미하고, β) 부정이지만 그 역시 아무런 접힘을 주지 않는 부정에 의한 통일[5], 달리 표현하면 대립적인 Eigenschaft들을 배제하는 {대자적인} 하나이며,[6] 그리고 γ) [마침내] 다수의 {개별성이 뚜렷한} 특별한 성질들Eingenschaften[7] 자체, 즉 α)와 β)로 갈라지는 두 가지 보편성의[8] 서로 관계함, 다시 말해서 <또한>이라는 무심한[9] 터전에서 그 안에 {마치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이 버리지 않고 간직한 헝겊 조각들을 호롱불 아래서 바늘로 손수 하나(!) 하나(1) 꿰매어 조각보를 만들었듯이} 서로 구별되는 [개별적인] 것들을 엮어내는 부정의 운동이다.[10]



[1]원문<Momente>

[2]원문<passive/수동적인>

[3]언어철학에서 이야기하는<외연>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 부분의 이해를 돕는 것 같다. 그리고 언어철학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헤겔과 감각적 확신간의 대결이 이루어지는 터전은 언어다.  왜냐하면 감각적 확신이 표현(Ausdruck)하는 것은 그것이 말이든 손가락으로 지시되든 표현으로서 언어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존재적인 차원에서 사물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때 철학은 영 희한하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생물학이 해야 할 일에 나서는 것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지각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세상에 있는 물건을 지시하는<명사>와 그런 명사를 포함하는 문장/명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헤겔과 감각적 확신간의 진검대결 및 승부는 언어라는 터전이 아니라<생명>이라는 터전에서 비로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지만.

[4]여기서Eigenschaft를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헤겔이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사물의 구성되어감은 언어철학이 분석하는<표현>사용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가 있겠다. 예를 들어<고구마>라는 표현은 그 안에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고 고구마<휠레>를 갖는 모든 고구마를 포함한다(외연). 이때 고구마의 성질은 오로지<휠레>일 뿐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 아무튼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헤겔도<Eigenschaft>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부분적으로만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가, 아니면 역자가 알아서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분석해야 하고, 번역시 적당한 말을 찾아야 하는데 이 일이 쉽지 않다.

[5]원문<die Negation ebenso einfach>

[6]이것은<내포>와 관련해서 이해하면 도움이 되겠다. 한 개의 고구마가 내포하는 것으로서의 성질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내포>가 이야기하는 성질도 독특한 성질이 아니라 모든 감자가 내포하는[보편적인] 성질이다. 외연과 내연에서 이야기 되는 성질이 독특한 성질, 즉 해남 고구마이지만 그것도 현산면 미세마을에서 무주님이 재배한 고구마 맛이 되려면 규정이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한다. 

[7]헤겔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성질>이라는 한다. 배가 다 배가 아니라<나주 배>가 있듯이,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해남 무주님의 고구마>, <대구 사과> 등이 있듯이 헤겔은 여기서 개별성으로서의 성질을 이야기하고 있다.

[8]원문<Momente>

[9]원문<gleichgültig>

[10]여기서 들뢰즈가 헤겔을 제대로 이해했나 물어볼 수 있겠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헤겔이 지향하는 조각보와 같은 보편성을 제대로 읽었는가라는 문제와 이런 조각보를 만드는 부정이 이중 부정, 즉 부정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는가라는 문제다. 들뢰즈는 단순한 부정만 읽은 것 같다. 그러나 헤겔이 지향하는 것과 들뢰즈가 지향하는 것이 똑같이 조각보와 같은 보편성인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헤겔은 이중부정을 통해서 이런 조각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고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라고 하는 것 같다. 이것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역자의 능력부족으로 우선 내비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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