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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르크스가 헤겔의 “보편정신”(논리학 3, 32쪽)을 역사유물론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운데 ‘allgemeiner Verstand’ 또는 ‘general intellect’를 언급했다면 이것은 은유적인 사용, 사변적인 응축, 엄밀히 따지자면 허용될 수 없는 인격화이다. 마르크스의 일반지성은 루소의 일반의지만큼이나 경험적인 주체로 [찍어 올려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은 단지 과학적으로 확립된 문화기술들의 특수한 수준과 이러한 문화기술을 매체로 하여 개인적으로 발전되는 지성[인]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러한 지성인들의 발전은, 지식더미가Wissensmasse 어떻게 획득되고 어떤 분포 양상을 보이며 어떻게 접근을 가능하게 하든지 간에, 이런 사회적으로 축적되고 특수한 양식으로 사용되는 지식더미와 이를 전유하고 사용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전승을 전제한다. 자본론 3권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적-정치적 실천에 주목하면서 ‘보다 현세적으로’ “연합된 지성”assoziierter Verstand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MEW 25, 267쪽). 이것은 “자유롭고 동등해진, 공동의 합리적인 계획에 따라 의식적으로 활동하는 생산자들의 연합”(MEW 18, 62쪽)이라는 정치적인 목표에 상응한다 (MEW 18, 62쪽).
‘일반지성’이라는 카테고리는 앞을 내다보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의미만은 아니다. '일반지성‘은 이미 작동하는 것으로서 블락/봉쇄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블락/봉쇄 속에서 일반지성은 부정적으로, 그의 블락/봉쇄가 위기를 야기하는 가운데, 현재화되어 있다. ‘일반지성’allgemeiner Verstand의 [발전방향을 횡단하여 좌절시키는] 자본주의적 [개입과] 방해가, 즉 전체사회의 프로세스가 시장의 프로세스로, 그 프로세스가 아무리 부분적으로 추상적으로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두뇌 없이’ 진행된다는 사실이 인류menschliche Gattung의 생활조건들을Existenzbedingungen [주사위]놀음판에 위에 올려놓는다. 사회적 합리성잠재력들로 규정된 경제양식은 유기적인/순환적인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정의와 같은 목적을 [둘러싼 노력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벵상에게서 마르크스적 의미로서의 ‘일반지성’이라는 카테고리가 지배적인 관계로부터 [일정한]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것을 내재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엿보인다. “다층적인 교환행위” 안에서 형성되는 일반지성의 “다원적인 성격 때문에 - 바로 여기에 일반지성이 강점이 있다”(1993, 126쪽 이하) - 벵상은 ‘일반지성’의 ‘일반성’이, “즉 일반지성이 도와 가동되는 것(생산, 소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이 제한된 것으로 본다 (129쪽). 벵상은 일반지성이 개별인의 다재다능을 촉진하고 노동을 경향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으로 전화하는 것을 요구하는 생활양식을 초래한다고 한다 (같은 곳). 그러나 '일반지성‘이 전개하는 공동적인 지적 그리고 사회적 역능Macht은 정치적 개입이 “그 역능들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구조화되고 어떤 분포양상을 보이고 있는지에 겨냥하지 않는 만큼, 자본에 의해서 돌려지고 그 가치증식목적에 맞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자계급이 대자계급이 되어야 한다는 말하기에 유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초국적 하이테크 자본주의 시대는 자본주의의 과학화된 생산양식에 힘입은 즉자적인 ‘일반지성’의 시대다. 이 시대는 다원적이고 모든 재능을 다방면적으로 개발한plural-universell 이성이 관철되게 하는 과제의 문턱에서 주춤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계화되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총체적으로 합리적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세계화된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시스템총체로서의 비합리성systemische Irrationalität이 세계화된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상호배타적으로 활동하는 ‘개별지성인들’particular intellects의 분주함Getriebe의 결과로 나오는 비합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지성인들의 ‘지성’은 글로벌하게 먹거리를 취함으로써 재생산되는 매체 안에서 형성된다. 가능[태]를 따르면 이러한 ‘지성매체’Intellektualmedium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화 되었다. 일반지성allgemeiner Verstand과 ‘일반성’Allgemeinheit을 그 현실화에서 배제하는 자본주의적 배제 간의 모순들이 인터넷 시대에서의 투쟁들에 [이러한 모순으로 각인된] 모양새를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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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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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여기서 ‘일반지성’의 시대라는 말[하기]가 지적화(知的化)되고 유연화된 노동에 대한 [작업지시 명세로 기술된] 요구와 (관련 Paq 1987 참조) 함께 첨단기술 생산력이 스탠더드가 되었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일반지성이 그것 밖에 안 된다면], [일반지성]이란 표현에 원래 연계되었던 마르크스의 핵심/주요사상이 사라져 버릴 것이고 ‘일반지성’이라는 명제Theorem에서 그 비판적 힘이 생명력을 상실할 것이다. 네그리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점을 인지했는지] ‘일반지성’을 “자본 내부에서의 인간두뇌 소모의 분기와 분지”로 파악하고, 이러한 프로세스가 이미 “노동의 사회적 지성이 고정자본을, [예전의 사회화와는] 비할 바 없는 사회화의 물질성을 다시 전유할 수 있는 지점까지 진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의 원래 의도를] 반영하려고 시도한다 (1998b, 175쪽).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기껏해야 자본주의적-기술주의적으로 협소화된 의미에서[만], [그룬트리쎄]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사회적 생활프로세스의 조건들 자체가 일반지성의 통제아래 들어왔고 그에 상응하게 개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MEW 42, 602쪽). [사태가 이러한데] 이런 상태가 지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 협소한] 로리아주의가Lorianismus(그람시)* 될 것이다. [이런 로리아주의 경향을 네그리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스스로 “70년대 이래 이미 지속적으로” “우리는 이미 공산주의에서 살고 있다”(1996a, 106쪽)는 명제를 생각했다고 한다. 그 공산주의가 비록 물리에르 부탕이 말한 (1998, 8쪽) “자본의 공산주의”, 즉 “생산과 풀 수 없게 엉클어진 과학 조직의 사회화의 증가”로서의 “자본의 공산주의”일 뿐이라도 그렇다. [그러나 진정 해야 할 일은] 바로 다층적으로vielfach 적대적인, 바로 이러한 개별적인 이윤전략에 의해서 규정된 “사회화”의 성격을 분석하는 일일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지속적으로 더 포괄적이 되는 기술과학적인 지식의 재전유”에 주목하는 것이(네그리 1998a, 78쪽) 유익하다 할지라도, “생산과 생활사이의 모든 차이의 종말”을 선포하고 이러한 망상적인 근거에 기반하여 사회적으로 어렴풋하게 존재하는 모든 등급의 인텔리겐치아에게, 특히 개별화되고 흔히 고립된 ‘고등’ 직업/교양교육과정의 참여자와 졸업자들에게, “임금노동을 거치는 과정 없이”(라짜라토/네그리 1992, 34쪽) 그들이 [바로] 순수한 “새로운 사회적 노동자”(네그리 1996a, 88쪽)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을 두고 덜 멍청하다고unsinnig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있는 핵심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만드는 과장으로 네그리는 (1996a) 그들에게 "사회와 권력질서의Machtordnung 중심에 이젠 “언어적인 활동들로 합성”된 생산이 들어섰다고 선포한다.
* 로리아주의는 그람시가 이태리의 [진보]사회학을 아킬레 로리아(Achille Loria)의 예를 들어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용어로 도입. 그람시는 로리아로 대표되는 이태리 [진보]사회학을 조야한 실증주의이며 느슨하고 협소한 과학관을 갖고 있다고 비판. 그람시는 로리아를 “노동자문제를 다루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더 깊이 있게 하고, 수정하고 또는 극복한다고 믿는 실증주의적인 인텔리겐치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비판하고, 이태리에서의 “특정한 문학적 과학적 생산의 기질”로 요약되는 로이아주의는 “문화의 빈약한 조직과 그에 따른 통제와 비판의 부족과 연관되어 있다"(그람시, §25)고 함. [종교적 보수] 브레시안주의와 함께 로리아주의와 연계된 인물들이 [예컨대 나중에 이태리 파시즘을 지지한 독일 [진보]사회학자 로버트 미헬스Robert Michels처럼] 이태리 파시즘이 등장하는 토대를 가꾸고 유지해 준 글쓰기와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 로리아는 또한 자본론 3권 서설에서 엥엘스의 적나라한 비판의 대상이 됨. (Das Argument 185호(1991), 그람스와 시민사회 참조, 베를린비판이론 연구소 홈피에 올라와 있음 http://www.inkrit.de/argument/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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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리 벵상은 ‘일반지성’이라는 마르크스 용어에 “다원적인plural, 다형적인vielförmig, 지속적인 전화과정 속에 있는 지능”이란 의미를 부여한다. ‘과학적-기술적 인텔리겐치아가 생산을 거부할 경우, 그것이 붕괴될 만큼 사실적으로 포스트포드주의적’ 경제에게 결정적인 자원이 된 “진화하는 상황지능”(intelligence évolutive des situations)이란 의미다 (1993, 122쪽). 벵상은 새로운 지적노동의 말하기[논리]를 대화적이고 소통적이며 성찰적인 것, [즉] 비선형적이고 [상호] 보완성을 추구하며 변하는 상황을 유희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서술한다. 반면 가치증식논리에 관해서는 모든 면에서 그 반대의 것을 진단하는데, 이것은 (이윤최대화와 관련하여 [자본이 자기] 성찰성을 [=자기가치증식을] 일부로/무의식적으로 빠뜨리는 경우를Verdrängung 제외하고) 별로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앞서가는/잘나가는 기업경영진들도 역시 이런 파라미터에Parameter에 오리엔테이션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벵상은 사회의 ‘일반지성’allgemeiner Verstand을 자본 혹은 상품으로서의 형태규정성에서 유래하는 접근제한, 배제, 소유권 등에 의해서 다층적으로vielfach 봉쇄된 것으로 서술한다. 이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첨단기술 지적노동자들이 일반적인, 지적인 유통에서 차단될 경유, 그들 고유의 생산력들이 절감되고 그 발전이 방해될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본에 의한 봉쇄 그 자체가 모순에 빠져있다. 그런 까닭에 차단/경계를Grenze 선택적으로 오픈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지성’allgemeiner Verstand의 필드를 [바둑에서 세력을 형성하는 돌들을 갈라치듯이] 갈라쳐 길들이기 위한 신자유주의 전술은 [접근이 허용된] 승자와 [접근이 거부된] 패자로 양극화하는 것이다 (1993, 123쪽).
안토니오 네그리는 포스트포드주의를 “‘일반지성’의 체제”내지 “‘일반지성’에 기반한 생산양식”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생산양식에 서비스[제공]을 사회화하는 “경향으로서의 핵심적인 요소”가 특징적이라고 한다(1998b, 173, 177, 174쪽). 마우리찌오 라짜라토는 서비스[제공]을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의 심장”으로서 경제의 최현대 부문이라고 선언한다. 다른 모든 부문은 비생산적이라는 것이다 (199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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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일반지성’에 속한다는zugeschrieben 규정들은 자신을 다원적인plural, 자율적-공산주의적인 주체(후기자율주의자들의 [알아먹기 힘든 말인] 은어Jargon로는 ‘다중’)와 연계하는 사회그룹들이 [일반지성을] 어떻게 떠받히는가에Anrufung 따라서 여러 가지로 잡다하다variieren. “[그래서] ‘일반지성은’der allgemeine Verstand 인공적인 언어놀이들을, 정보이론들 및 시스템이론들을, 심지어 가장 비공식적인 ‘언어놀이들’까지 포함한다”(비르노 1990, 13쪽). 이러한 언어놀이들의 전문화에도 불구하고, 말할 때 언어의 무궁한 잠재력에서 순간적이고 반복불가능한 발언Äußerung이 현재화Aktualisierung되듯이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아래 글자 그대로 “일반적인 것이 [표출되는] 지성”intellect in general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비르노 1996b, 194쪽 이하). 이때 ‘일반지성’은, “객관적인 지식구체화들로Wissenskonkretisierungen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조작[가능]성(operability)을 갖춘 [생각이 아니라 현실에서 정말 관철되는] 현실적 추상Realabstraktion”이라는 것이다 (비르노 1996a, 23쪽). - 표현의 통일성이 단지 궁색하게만 사견된 의미의 다양성을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있다. “어렴풋한diffus 주지성Intellektualität”과 ‘일반지성’은 “지식의 역능 자체에 고유성질로 달려있는 다양성Vielheit(Multitude)을”, 즉 “다양한 [주체들이 취하고 살아가는] 생활형태들을Lebensformen [생명 자체에서 표출된] 생명의 형태들Formen-des-Lebens로 구성하는konstituieren 통일적인 역능을 호명한다." 이들이 “도래할 정치의 지도개념Leitbegriff과 통일적인 센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감벤 1996,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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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세기 마지막 3분기에서의 미세전자 혁명이, 자본주의적 형식을 안으로부터 텅 비게 하면서 진행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과학화라는 마르크스의 일반지성에 대한 예견을 최소한 부분적으로 확인한 것처럼 보인다. 현황을 이렇게 보는 파올로 비르노는(Paolo Virno)는 마르크스의 테제가 “별로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마르크스의 테제를 따르면 “추상적인 지식이 ... 바로 생산으로부터의 자립성에 근거하여 가장 핵심적인 주요생산력이 된다”는 것이다(1990, 10쪽, 동일하게 1996b, 22쪽). 그러나 생산적으로 응용된 지식은 [분명] ‘생산으로부터 자립’하지 않고, 비르노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지식의 자기추동적 성장”(1996a, 21)이란 테제는 점점 더 지식생산의 자본과정으로의 종속을 [보지 못하고] 거기서 빗나가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가 “일반지성(내지 주요생산력으로서의 지식)을 남김없이 고정자본과 동일시하고”, 일반지성이 동시에 “과학적-기술적 인텔리겐치아, 대중지성 등 산노동으로 현상화되는”(1990, 12쪽) 것을 간과했다는 비르노의 견해 역시 맞지 않다. 후자[=산노동으로서의 과학적-기술적 인테리겐치아/대중지성]는 [일반지성의] 중요한 계기Moment를 기술하고 있지만, 그 계기를 절대화하고 [그럼으로써] 로싼나 로싼다가 지적하듯이, ‘일반지성’이 “신속하게 ‘죽은 노동’으로 전환될 수 있다”(1991/96, 71쪽)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1 철의 장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유형의 유럽 국가사회주의가 붕괴될 때, 이태리에서는 대학생 대중이 대학을 점거하는 일이 일어났다. 바로 그때 후기자율주의가 출현하였다. 이태리 자율주의 - Autonomia operaia - 의 계급적 토대, 포드주의적 대중노동자, 즉 단조롭게 반복되는 조립라인 노동의 주체가 (Wright 2000, 참조) 자동화의 도정에서 공장 밖으로 밀려나 해체된 후에 남은 잔여 자율주의 운동의 인텔리겐치아는 대학의 항의운동을 보고서 대학생들을 새로운 혁명적인 주체의 일부로 규정하고identifizieren, 그들을 “대중노동자”의 뒤를 [대를?] 이어 [현상화된] “대중지성”Massenintellektualität이라고 표현한다. 1990년 2월 호소문(바쉐타Bascetta외 여럿)에는 대중지성을 “전혀 부수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자본주의 축적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지식이 주요요소를 이루는 벗겨져 드러난 생산의 신경“이라고 칭한다. [반면] 마르코 멜로티Marco Melotti 외 여럿(1996)은 이와 같은 일반적인 계급의 공준화Postulierung를 문제시 한다.
이런 ‘경기’를 [틈타] 새로 만들어진 잡지 Luogo Commune [common sense란 의미의 luogo comune의 comune을 commune(꼬뮌)으로 대치?]의 1990년 11월 첫 호에 마르크스가 생산력발전의 잠재성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그 깊이를 가늠하는 그룬트리쎄의 해당 절을,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기계[에 대한] 단편’Maschinenfragment이라고 지칭하고, 그 대부분을 실었다. 그리고 원문 사이사이에 학생들의 결의문 인용구를 삽입했다. 그리고 ‘일반지성’을 다루는 글 두 개를 실었다(비르노 1990, 지아놀리 1990). 이때부터 ‘일반지성’이라는 표현이, 특히 ‘비물질노동’(직접적으로 사물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육체가 지배적인 노동 혹은 ‘손노동’Handarbeit이 아닌 모든 노동이 사실 비물질노동이다)과 연계되어 후기자율주의를 구별해 주는 핵심적인 구호 하나가 되었다.
후기자율주의자들은 우리가 [현재] “일반지성의 시대”(지아놀리 1990, 19쪽)에, 즉 마르크스가 윤곽을 그린 일반지성이 지배하는 생산세계가 일상적인 현실 및 부축적의 신경중추가 되고(물리에르 부탕 1998, 7쪽), 나아가 “일반지성의 영역은 경제의 세계화”(카스텔라노 1994, 53쪽)이며, 그리고 모든 노동이 비물질적으로 되는 경향을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반면 모두노Modugno가 보기에는 “‘일반지성’의 사회적 역능Macht이 이미 직접적으로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에게 넘어갔고” 새로운 생산양식이 “일반지성을 인간의 두뇌로부터 돌이킬 수 없게 분리”(1994, 14, 16쪽; 이와 유사하게 팔라Pala 1997, 66쪽) 했다. - 이러한 [모두노의] 비판은 거꾸로 ‘첨단기술’이 실지로 지식과 능력Kompetenz을, 비록 모순적인 형식으로지만 (Paq 1987 참조), 개별 작업현장으로 옮겨 놓았다는 사실에 근거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자동화는 보다 높은 능력개발로 이어진다.” - 이 1975년 [일반적인 견해에] 역행하여 주장된 논쟁을 위한 구호Streitlosung(프리다 하우크 외 여럿)는 대폭 올바른 견해로 확인되었다 (물론 노동자계급의 파편화Fragmentarisierung, 상승하는 대량실업, 그리고 불안한/비정상적인prekär 고용형태를 동반하면서). 비르노는 이런 프로세스의 결과를 “산노동 내부에서의 ‘일반지성’의 재분배”(1990, 13쪽)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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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앞의 경제내적으로 논증된 붕괴론 외에 마르크스는 보다 정치적-해방적 행위조건들로 이어지는 두 가지 선들을 더 추적한다. 첫 번째 선은 노동시간단축의 양적인 측면을, 두 번째 선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식 잠재력들과 생산과정통제와 맺는 관계 안에서 그들의 재배치란 전략적 측면으로 이어진다.
양적으로 - 자본이, 개별생산물을 놓고 볼 때, “힘의 지출[로서의] ... 인간노동”을 최소화시킨다는 것은 “해방된 노동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노동해방을 위한 조건이다”(MEW 42, 598쪽). 이제 잠재적으로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로의 개인의 “강등”, 즉 개인의 “노동에의 종속”이 종말에 이른다“(604쪽).
질적으로 - “인간이 생산과정 자체를 [대상화하고] 그와 관계하는 가운데 감시자와 규제자로 등장하는 만큼 노동은 더 이상 그렇게 [=생산과정에 픅 삽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생산과정 안에 갇힌 것이 아닌 것으로 현상화된다. (...) 인간은 자연과정을 산업과정으로 전환시키는 가운데 [비유기적인 자연과 직접 관계하지 않고] 그와 그가 다루는 법을 습득한 비유기적인 자연 사이에 [산업과정으로서의 제 2의?] 자연과정을 중재자로 삽입한다. [결과] 인간은 생산과정의 주요중재인이 되기보다는, 그 옆에 등장한다”(601쪽). - 마르크스의 눈앞에는 기계화만 있지만 그의 서술은 결정적인 관점에서 사실을 앞서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사람들이 직접적인 생산과정에서 밖으로 나와 “감시자와 규제자”의 위치로 들어서는 것은 피드백을 겸한 복합적인 제어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아직, 프로세스테크놀로지적인 설비가 됐든 공구기계가 됐든, 그런 것들을 측정기술과 제어기술과의 결합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기계복합체와 ‘체인을 이루게’ 함으로써 더 이상 살아있는 노동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거대한 [자존적인] 물리적 폐쇄시스템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형태로서의 컴퓨터화에 대한 표상을 갖고 있지 않다. 기계화의 기반위에서 진행된 마르크스의 분석은, “더 이상 그렇게”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당시의 주어진 상황으로부터의 [새로운 상황의] 부각을 [섣불리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제하면서 하지만, 사후적으로 예견적-[현실]서술적인 내용을 함유하는 분석으로서의 의미가 점점 더 부여되고 있다.
1.3 [마르크스 분석은] 직접적으로 아직 증기기관으로 각인된 19세기의 산업화 첫 단계의 테크놀로지를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인간을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기계로 다루고”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투자하기보다는 “영혼이 없는 메커니즘”에만 투자한다고 비판한 개량주의적 기업가 로버트 오웬의 1840년 저작을 인용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생산의 과학화 프로세스에는 [그게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려면] 생산자의 과학화가, 아니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처분가능하게 되는 시간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최대의 생산력으로서의 ... 개인의 전면적 발전”이 요청된다. “현실적인 경제가 노동시간의 절약”에 있다면, 이건 “결코 향유의 단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파워(power)의 발전, 즉 생산을 위한 능력의 발전을 의미하고 그에 따른 향유능력뿐만 아니라 향유수단의 발전을 의미한다“(607). 마르크스는 오웬의 사고과정과 연계해서 그러한 인간발전의 자본주의 내재적인 범주화를 성찰한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인간발전의 자본주의적 범주화는 ‘인간자본’에 대한 투자라고 불린다. “이 투자는 직접적인 생산과정의 관점에서 고정자본의 생산으로 고찰될 수 있다. 이때 고정자본은 인간 자신이다”(607쪽).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기계적 설비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간 뇌의 기관, 대상화된 지식의 힘이다”(602). 고정자본이 필연적으로 사물적인 설비들로 현상화된다고 해도, ‘지식의 힘’이 필연적으로 고정자본인 것은 아니다. 비록 자본이 인간의 노동력을 섭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인간들은 결코 자본이 아니다. - 푸리에와 연계해서, 노동의 놀이됨이란 그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는 자유시간과 노동시간의 변증법을 스케치하고 노동하는 주체를 강조한다. “여가시간이자 좀 더 고도의 활동을 위한 시간인 자유시간은 그 소유자를 당연히 다른 주체로 전화시켰다. 바로 이렇게 다른 주체로서 그는 다시 직접적인 생산과정에 들어간다. 직접적 생산과정은 동시에, 형성되는 인간과 관련해서 고찰할 때, 실행과Ausuebung 실험과학처럼 훈련Disziplin이며,1 사회의 축적된 지식이 존재하는 머리의 [주인인] 형성된 인간과 관련해서는 물질적으로 창조하고 대상[물]로 재현되는 과학이다.”(607쪽)
1.4 이상 ‘일반지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프레임의 윤곽이 그려졌다. “고정자본의 발전은 일반적 사회적 지식 - knowledge - 이 어는 정도로 직접적인 생산력이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따라서 사회적 생활과정의 조건들 자체가 일반지성의 통제아래 들어왔으며 또 그에 상응하게 변형되었는가를 보여준다.”(602쪽)
이 문장에는 세기적인 긴장이 응축되어 있다. 사회적인 생활조건들이 “일반지성의 통제 아래 들어왔으며 또 일반지성에 상응하게 변형되었다”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통제와 변형이 사회적인 생활조건들에 관련되는 만큼이나 물질적인natural 생활조건들에도 관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사회적 생활과정의 조건들”을 말할 때 단지 물질적-기술적 조건들, 즉 사회적인 기계총체Maschinenpark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파악은 1857/8년 수고를 촉촉이 적셔주고 있는 변증법적-실험적 사고방식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룬트리쎄의 마르크스는 경향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잠복적인latent 가능성들을 읽어 낼 수 있는 경험적인 징후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비록 자연과정의 과학적-기술적인 채용이Indienstnahme 계급대립적이고 지식의 비밀유지와 그때그때의 타인에 의한 사용을 배제하기 위한 체제를 동반하는, 시장에서의 사적 전략들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보지만, 그는 동시에, 바로 거기서, ‘일반지성’이 지향하는 의미로서의 [사회적인] 통제의 객관적인 가능성을 본다. 고정자본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정도”, 즉 얼마만큼 생산력들이 “사회적 실천의 직접적인 기관들”(같은 곳)로서 생산되는 게 진척되었는가의 정도가 잠복을Latenz 의미한다. 물론 이처럼 잠복해서 붙어 자라난angewachsen 가능성은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연적인 생활조건들의 기반을 사회적인 생활조건들의 기반과 마찬가지로 점점 더 빠르게 파괴하는 [가치증식 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는] 자족적인selbstreferentiell 가치증식과정 안에 사로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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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28호에 볼프강 하우크(Wolfgang Haug)의 Argument에 발표된 논문 "일반지성"이 곽노완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다. 근데 볼프강 하우크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비판적 사전"(Historisch-kritisches Wörterbuch des Marxismus)에 똑 같은 제목의 article을 썼다. (곽노완 번역문 바로 가기)
사전에 실린 글과 곽노완이 번역한 글은 대동소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사전에 실린 글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공부겸, 번역 연습겸 사전에 실린 글을 번역해 본다. 사전에 실린 글이 Argument에 실린 글과 같은 경우 곽노완의 번역을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안 그런 경우, 주를 달아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
마르크스는 ‘general intellect’(allgemeiner Verstand/일반지성)란 영어 표현을 딱 한번 사용하지만, 이 표현이 첨단기술적인 생산양식과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취하는 위기적인 형식에 대한 조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반지성’은 경향적으로 일반적인 접근이 가능한 지식이란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런 ‘일반지성’이 사회적 생산의 결정적인 기반이 되고 노동가치Arbeitswert를 통해서 조절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그 역사적인 한계에 다다를 만큼 생산력향상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 특히 이태리의 후기자율주의에서 '일반지성‘이란 표현은 정치적 동원에 쓰이는 구호가 되었는데, 이것은 이론의 임의화란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1. 마르크스는 ‘일반지성’이란 [용어를] 『그룬트리쎄』(MEW 42, 602)에서 - 수고에는 이 대목의 가장자리에 두 줄이 그어져 있다 (MEGA II.1.2, 582쪽 이하) - 과학이 주요생산력이 되도록 하는 경향을 담아내기 위해서 도입한다. 도입맥락은 고정자본과 생산력발전을 다루는 절이다 (MEW 42, 590-609). 후기자율주의 주변에서는 이 절을 판찌에리(1961)의 뒤를 이어 [그 의미를] 일방적으로 단축하여 “Maschinenfragment/기계단편”(예컨대 비르노Virno, 1990, 9) 혹은 “capitole sulle machine/기계에 관한 장”(네그리, 1978, 169)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일반지성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단축하지 않고]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생산자들, 축적된 문화적-인지적-기술적 잠재력(일반지성), 그리고 자본이라는 [삼대요소간의] 관계들이 생산력발전의 해방적이고 역사이론적인 차원들의 향방을 가늠하기 위한 분석이 전개되는 전략적인 삼각형을 이룬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일반지성’이라는 말은1 특히 노동일반allgemeine Arbeit 개념에 사태(事態)적-이론적으로 가깝다. 마르크스가 이 관계에서 선취한 자리옮김과Verschiebung2 모순을 둘러싸고 [현재] 앞으로 올 사회를 예견하는 상상이 점화되었는데, 바로 이점이 그룬트리쎄의 이 작은 절에 탁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반지성’이란 말에서 테마가 되는 것은 “일반적 사회적 노동”(595쪽) 혹은 “일반적 과학적 노동”(596쪽)의 산출과 기능의 전체로서 “지식과 숙련, 사회적 두뇌의 일반적 생산력의 축적”(594쪽), “일반적 진보”(595쪽), “인간 두뇌의 일반적인 역능의 발전”(601쪽), “일반적 사회적 지식, knowledge”(602쪽) 등이다. 여기서 관심은 “자연의 힘이 사회적 지성에 종속”(605쪽)됨에 따라 “[기존] 생산과정의 [...] [어느 한] 과학적 과정으로의 전화”(596쪽)에 놓여있다. 한편으로 노동의 생산성은 점점 더 “과학의 일반적 상태와 테크놀로지의 진보, 또는 이러한 과학의 생산에의 적용”(600쪽)에 달려있고, 다른 한편으로 “발명”이 “사업”(600쪽)으로 전화되는 가운데 자본에 의한 [특정] 과학의 가치증식을 통해서 [여러 과학 가운데 특정] 과학의 발전이 선택적으로 “강행된다”(595쪽).
1.1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과 그 잠재력의 자본주의적 형태규정성을 분석하고, 뿐만 아니라 거꾸로 과학화가 자본관계에, 그리고 교환가치를 통한 사회적 생산의 규제에, 특히 노동하는 주체가 일반적 지식역능에 대해 갖는 위상에 미치는 반작용을 분석한다. 마르크스가 내다본 것은 “생산과 부를 담보하는 대지주(大砥柱)”가 시간으로 측정되는 “인간이 몸을 놀려 작업하는 직접적 노동에 묶여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일반적 생산력을 [갈고 닦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Aneignung, 자연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그의 현존형태인 사회신체에 의한 자연 다스리기3”(601쪽)가 [미래를 여는]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축적된 잠재력들이란 매체 안에서 지금까지의 그 어느 현재화Artikulation4 형태에서 보다 더 무한하게 자기를 전개하는 가운데 개인화되는 “사회적 개인”에 관한 전망으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질은 역사적인 “사회적 관계의 총체”속에서[만] 그 현실성을 갖는다는 6번째 포이어바흐 테제의 생각이 떠오르는 대목이다(MEW 3, 7쪽 참조). 이러한 총체에는 언어와 문화, 뿐만 아니라 ‘기기환경'과 [그런 기기를 다룰 줄 아는] 능숙한praktisch 조작지식으로 요약되는, 일반적인 인간화매체처럼 기능하는 복합적인 사회적 유산이 속한다. 과학이 주요생산력이 됨으로써 전통적으로 계급[소속]에 따라 [경계선이 그어진] 접근과 전유기회가 경향적으로 탈경계화 된다.
자본주의적 형태규정성은 막대하게 성장하는 과학적-기술적 잠재력이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인식의 첫 단계에서5 설비자본(고정자본)이 되어 대립하고 “노동의 증가된 생산성이 오히려 ... 노동자들 자신의6 쓸모없음을 [관철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것”(그룬트리쎄, 598쪽)을 야기한다. “과학은 ... 노동자의 의식 속에서 존재하지 않고, 기계를 통한 낯선 역능으로서, 기계 자체의 역능으로서 노동자에게 작동한다”(593쪽). 그 결과 사회적 지식과 일반지성allgemeiner Verstand은 “고정자본의 ... 속성(594쪽)”으로 작동하고, [그래서] 사회적 노동의 일반현상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성과를 공짜로 거둬들이는 “자본 안에” 있게 된다.
“직접적인 노동”은 “질적으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지만 일반적 과학적 노동, 자연과학의 테크놀로지적인 적용에 비해 하위 요소로 전락한다.” “개별적” 노동으로서의 직접적인 노동은 이제 단지 “자연의 힘Gewalt을 부리는 공동의 노동” 속에서만 생산적이 되고, 그 결과 “직접적 노동의 사회적 노동으로의 승격이 [개별노동에게는] 자본 속에 대표되고 집중된 공동성에 견주어볼 때 자기를 무기력으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현상화된다”(596쪽).
여기까지 마르크스의 분석은, [그룬트리쎄의] 이 부분 수용에서 자주 간과되는 점인데,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볼 수 있는 발전들에 관한 것으로서, 마르크스에 앞서서 이미 전형적으로 서술되어 고전으로 정립될 만큼 진전된 발전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룬트리쎄의 해당 절은, 마르크스가 1845년 브뤼셀에서 발췌한 앤드류 유어 저작의 프랑스어 번역판(1836)에서의 한 인용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기존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다가] 이론적 분석이 기존관계를 넘어서도록 내버려둔 건, 일반적 사회적 지식과 지성의 해방적 잠재력의 향방을 예견적으로 가늠하기 위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여기서 노동의 임노동으로부터의 해방에 [필요한] 필수적인(충분조건이 아닌) 전제조건과 함께 자본주의의 역사적 한계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때 자본은 한편으로는 “노동시간을” - 노동자의 시간이 아니라 “특정 대상 생산에 필요한 할당량”(597쪽)으로서의 시간을7 -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노동시간을 부의 유일한 척도와 원천”, 간단히 말해서 “사용가치의 교환가치”로 설정하는 가운데 “모순 집행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601쪽). 자본은 “그리하여 생산을 지배하는 [일반적] 형식으로서의 자신이 해체되도록 박차를 가한다”(596쪽). 순전히 양적으로 측정되는 노동과 더불어 사회적 부의 생산을 위한 임금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이 부수적인 것이 될 때 비로소 교환가치에 기반한 조절은 “붕괴된다”(601쪽).
첨언Bemerkung - 1930년대 모스크바 편집자들은 노동시간을 “사용가치의 교환가치”로 파악하는, 실질적으로 압축된 마르크스의 공식에서 아무것도 관념하지 못하고 해당 대목을 “교환가치 = 사용가치의 {척도}”(그룬트리쎄, 1953년, 593쪽 참조)로 보충하였다. 그러나 시간으로 측정된 추상노동이 실지로 재화(‘사용가치’)의 교환가치의 ‘실체’를 형성하는 반면 교환가치는 절대 사용가치의 척도가 될 수 없다. - MEGA 2판 발행인들과 이들을 따르는 MEW (42권) 발행인들은 그 첨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MEGA (II.1.2, 581쪽)은, 납득이 안가지만, 한술 더 떠 [Mass(척도)의] 기교적-고풍적 서체인 “Maaß"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후기자율주의자들로 하여금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는 이론을 내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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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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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도서관에서 이 글을 찾아 읽고 있는데 - 그 전에는 historical materialism지에 영역된 것만 보았습니다 - 이렇게 훌륭한 번역문이 있군요! 감사합니다.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allgemeine Arbeit를 노동일반으로 번역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펭귄판에는 universal labour로 비봉판에는 보편노동으로 번역되어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저는 일반노동 -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련된 노동 - 이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전"의 allgemeine Arbeit 항목도 찾아 읽어야 하는데 독일어 실력이 딸려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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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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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서 질문을 드려서 죄송한데요.. 혹시 그룬트리세 독일어판 가지고 계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전부 일반적 노동으로 번역했는데 이게 좀 이상해서요. 이를테면.."요컨대 개별자의 노동(즉, 그의 생산물)을 직접 화폐로, 실현된 교환 가치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노동을 직접적으로 일반적 노동으로 규정하는 것, 즉 그것이 화폐와 교환 가치가 되어야 하고 사적 교환에 의존하는 바로 그 조건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 교환 가치에 입각한 노동은 개별자의 노동이나 그의 생산물도 직접적으로 일반적이지 않으며, 대상적 매개에 의해서, 그것과는 상이한 화폐에 의해서 비로소 이 형태를 획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개별자의 노동은 화폐를 매개로 해서 일반적 노동이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무차별적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왜냐면 맑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교환 가치로서 노동 시간은 노동 시간의 질이나 양을 표현할 뿐 그것의 자연적 속성들에는 무관심하며, 따라서 동일한 노동 시간을 대상화하는 다른 어떤 상품으로도 변환될 수 있는 상품, 즉 그것과 교환될 수 있는 상품에서 대상화되어야 한다. 대상으로서 노동 시간은 그것의 자연적 속성과는 모순되는 이러한 일반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도 일반적 성격은 모든 것이 화폐(노동시간)으로 전환될 수 있는 무차별적인 성격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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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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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에서 allgemein은 일반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보편으로도 해석할 수 있어요. 혹시 김호균이 보편적 노동(교환가치의 토대 위에서 교환에 의해 비로소 보편적인 것으로 정립되는 노동, 사회적 노동)과 노동 일반, 노동 일체를 마구 헷갈리고 있는 것 아닐까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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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댓글 달아서 죄송해요. ㅠㅠ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련된 노동"이면 보편적 노동이 맞아요. 왜냐면 보편적 노동은 역사의 산물이라고 했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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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general intellect"를 사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자연은 기계, 기관차, 철도, 전보, 자동 방직기 등을 제작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의 근면의 산물이다.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 의지의 기관이거나 자연에서의 인간 의지의 활동 기관으로 전환된 자연적 재료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손으로 창출된 인간 두뇌의 기관들이다. 대상화된 지력이다. 고정 자본의 발전은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이 어느 정도까지 직접적인 생산력으로 되었고, 따라서 사회적 생활 과정 자체의 조건들이 어느 정도까지 일반적 지성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 이 지성에 따라 개조되는가를 가리킨다. 사회적 생산력이 지식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기관들, 현실적 생활 과정의 직접적인 기관들로서 어느 정도까지 생산되었는가를 가리킨다." 요강 II 382쪽.
여기서 일반적 지성의 통제 아래를 unter die Kontrolle des general intellect라고 썼습니다. 그 위에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은 allgemeine gesellschaftliche Wissen라고 썼습니다. 그 뒤 385p.
"직접적인 교환에서는 개별화된 직접적 노동이 특수한 생산물이나 생산물 부분에 실현된 것으로 나타나고, 이 노동의 공동의 사회적 성격 - 일반적 노동의 대상화이고, 일반적 욕구의 충족으로서의 그것의 성격 -은 교환에 의해서만 정립된다. 이와는 반대로 대공업의 생산 과정에서는, 한편으로 자동 과정으로 발전한 노동 수단의 생산력에서는 자연력의 사회적 오성(Verstand)에의 복속이 전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
여기서 일반적 지성이나 사회적 오성은 모두 보편적 노동을 다르게 말한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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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균은 보편-특수-개별 범주를 모르는게 분명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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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general intellect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전반적 지성으로 번역해야할 것 같아요.ex) general awareness about bullying 왕따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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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제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자연력의 사회적 오성(Verstand)에의 복속"은 노동력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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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봐야될 것 같네요.대상화된 지력 = 고정 자본 = general intell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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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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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굳이 general intellect라는 영어를 사용한 것은 general이 생식을 의미하는 generic과 연관된 단어이면서 군대에서 지휘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 아닐가요. 기관(organ)이라는 말과 연과지어 보면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봤을 때 고정 자본을 사회의 두뇌로 본 것 같아요. 하지만 맑스는 자본은 본질적으로 유동 자본이라고 했어요. 자본을 자본이게 하는 것은 결국 유동자본이란 뜻이죠. 유통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하죠.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부가 정보
hee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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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님.1. 그륀트리세 독어판입니다: dhcm.inkrit.org/wp-content/data/mew42.pdf
2.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abstrakt allgemeine Arbeit(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용어를, 3권 (5장)에서는 abstrkt가 없이 allgemeine Arbeit(비봉판에는 보편적 노동으로 번역)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요. 이 둘의 의미는 다릅니다. 전자는 동질의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후자는 과학과 기술과 관련된 인간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사용합니다.
3. 그런 측면에선 저는 보편 노동보다는 일반 노동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편에는 동질적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느껴져서요. 그런데 보편노동이 맞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역사의 산물이다라는 표현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맥락에서 이런 표현이 사용되나요?
4. 위의 번역문에도 나오지만, "일반적 사회적 노동", "일반적 과학적 노동" 등이 모두 과학에 종사하는 노동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때, 마찬가지로 일반 노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르크스가 왜 과학에 '일반'이라는 단어를 결부시켰는지는 궁금합니다. 마르크스는 과학의 발전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거기에 힌트가 있을 수도 있겠구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비판적 사전'에 allgemeine Arbeit 항목이 있는데 이걸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하시다면 스캔을 해서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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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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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3번을 먼저 말씀드릴께요.요강 I 75p.에서 맑스는 "어떤 특정한 노동 종류에 대한 무차별성은, 어떤 것도 모든 것을 지배하는 노동이 아닌 실재적인 노동 종류들의 매우 발전된 총체를 전제로 한다"면서 "그러한 상태는 부르주아 사회들의 가장 근대적인 현존 형태(미국)에서 가장 발전되어 있다. 요컨대 여기에서는 "노동"이라는 범주의 추상인 "노동 일체", 노동 자체, 즉 근대 경제학의 출발점이 비로소 실제로 사실이 된다. 요컨대 근대 경제학이 우선적으로 앞세우고 있고, 매우 오래되어 모든 사회 형태에 유효한 관계를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추상이, 가장 근대적인 사회의 범주로서 실제로 사실인 것으로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역사적인 산물인 것- 일정한 노동에 대한 무차별성.. 이하 생략"이라고 합니다.
allgemeine Arbeit는 추상적 인간노동이 구체화된 형태죠. 그런데 그것을 맑스는 역사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allgemein은 구어에서는 일반적인 것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 때는 besonders의 반대말이에요. 우리가 일반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듯이 독일어에서도 allgemein은 평범한, 평균적인 것을 의미해요.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보편이에요. 모든 것, 일체. 하지만 영어에서 general 역시 이런 뜻으로 쓰일 때가 있어요. 총파업을 general strike라고 하죠. 독일어도 Generalstreik라고 해요. 맑스가 굳이 general intellect라는 영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4번에 대해서는 번역문을 보면 자연으로 시작하죠. 자연은 아무것도 제작하지 않는다. 그 뒤에 고정자본이 나옵니다. 고정자본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죠. 인간의 근면과 사회적 노동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죠. heesang님은 맑스가 왜 과학에 '일반'이라는 단어를 결부시켰는지 궁금하다고 하시지만, 제 생각에는 대공업의 발전은 인간 노동력의 상품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노동력은 질적으로 상이하지만 교환가치의 토대 위에서는 양적으로만 차이가 납니다. 맑스는 그것을 보편적 노동이라고 한 것 같아요. 모든 노동의 동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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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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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썼는데 다 날려버렸네요. 다시 쓸 순 없고 어쨌든 4번이 마음에 걸려서 찾아봤는데 요강 II 370~373까지 보면 die allgemein gesellschaftliche Arbeit는 살아있는 노동이 아니라 대상화된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그리하여 지식과 숙련의 축적, 사회적 두뇌의 일반적 생산력의 축적은 노동에 맞서서 자본에 흡수되어 있고, 따라서 자본의 속성, 보다 정확하게는 .. 고정 자본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사회적 과학, 생산력 일체의 축적과 더불어 기계류가 발전하는 한에 있어서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이 나타나는 것은 노동자에게서가 아니라 자본에서이다. 사회의 생산력은 고정 자본으로 측정되고 고정 자본에서 대상적인 형태로 실존하며, 반대로 자본의 생산력은 자본이 무상으로 점취하는 이 일반적 진보와 더불어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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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리고 pdf 파일은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보니까 저한테 무용지물이네요. ㅠㅠ 저번에 제가 메일로 부탁드려서 받은 heesagn님 글은 한 문장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마이 어렵더라구요.. 잘 보관해뒀으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 5년 뒤에 읽어보겠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