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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장 파울, 독일의 황혼, 일부]
프랑스식과 독일식: 마지막 보기
군인이 언제나 들이닥칠 수 있는 집에 살면서 이런저런 짐을 져야하는 짐꾼 밖에 아닌 우리 독일인에게서 프랑스인이 본뜰 만한 게 있다면 아마 우리의 도주성, 경박함, 그리고 자주 변하는 감성일 것이다. 프랑스인은 굳어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강건했다. 여러 면에서 새로운 세대의 유일한 카토들이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데카르트의 철학을 고수하고 또 볼테르의 철학을 고수할 수 있었겠는가! 코르네유, 라신, 그리고 볼테르 등 그들 비극의 성자 3인이 요지부동의 요새가 되고 세대의 유행이 된 문학을 제공하지 않았는가. 상비군에서 시작하여 천편일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정된 것들의 창시자인 프랑스인들은 비극에서처럼 그들의 오래된 관심사인 연락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가장 중요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오래된 것이다. 여기에 바로 그들의 본명이 있다. 몽유병환자는 권총소리에는 깨어나지 않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깨어난다. 바로 이런 이름이 그들의 본명이다.
반면 우리는 제자리에서 껑충 뛰는 독일식 곡예사, 유럽에서 흔적없이 녹아버리는 소금, 또는 갖가지 제국의 육체를 윤회하는 심령이라 해야 할 것이다. [...]
이렇게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쉽게 시대를 쫓아 따라갔고 시대는 또한 우리를 항상 걷어갔다. [...]
하긴 여태 단절의 연속으로 이어진 불화 가득한 독일 제국의 헌법은 우리로 하여금 황제가 군림하는 수도와 함께 특수한 지역의 사상(Residenz-Meinung)에 묶여 있지 않게 함으로써 어떠한 민족, 심지어 독일 민족이 될 수 있는 자유를 부과했다. 이렇게 우리는 결국 모든 면에서 개방되고 충분한 코스모폴리턴이 되어 어디나 들어맞는 민족(Allerwelts-Nation)이 되었다. [...]
그러나 모든 미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집에 머물러 있는 게 쉽지 않다. 더구나 자기 자신을 계산에 넣어야만 겨우 하나의 미를 찾을 수 있는 자기 집에서 말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본뜨는 건 말할 나위 없고, 심지어 우리 자신 스스로를 본뜨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더 원형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복사본이기 이전에 오리지날들이다. 위대한 천재들이 자기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본뜨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 우리 것을 다른 민족에게 옮기고 이들의 것을 우리 민족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 우리는 극락 행 지옥 행 따지지 않고 어떤 놈이든 뱃삯만 주면 다 옮겨주는 카론처럼 옮기는데 급급하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유럽의 더할 나위 없는 흉내쟁이와 맞장구 치는 자들로서 모든 것을 우리 것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우는 제단은 이동식 제단으로서 어떤 나라에 가든 그 나라의 신 앞에 펴고 얻어먹을 수 있는 제단이다. [...] 우리의 이런 변덕스러운 양상에 잘 어울리는 게 있다면 다른 나라 및 사람들과 교환함으로써 매번 아쉽고 급급한 유행과 처신의 변화를 공급받는 게 아닌가 한다. 심지어 댄스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우리는 우리 앞에 풍부하게 진열된 외국에서 들어온 댄스를 추기 바쁜데, 우리 독일 댄스를 Anglaisen, Ecossaisen, Polonaisen, Quadrillen 등 외국 댄스와 함께 Allemande란 낫 서른 이름으로 추기까지 한다. (...) 더이상 웃을 수 없는 건 우리 사회의 마당이 외국의 미와 처신으로 주조된 마당일 때다. 이때 우리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함으로써 그저 동물과는 반대로 어떤 음식과 기후이든 끄떡없는 인간 그 이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에 나가면 외국 유행의 발자국에 발을 맞추는 우리지만 집에 오면 토착민을 걷어차는 대척자가 된다. 그저 하나의 변화를 따오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사람은 바로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을 만들고, 새로운 유행을 따르지 않는 건 최신 유행을 들고 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우리를 유럽의 원숭이라고 부르는 건 어떤 동물학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고귀하고 진지하고 우중충한 오랑우탄이라면 몰라도.
2021/03/10 |
2021/03/09 |
2021/03/08 |
2021/02/06 |
2019/10/22 |
[이어서]
철학은 축시대 Achsenzeit발생 당시 손가락 다섯 개로 셀 수 있는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세계관에 속했다. 이것이 철학에겐 운명이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플라톤주의가 발생함으로써 믿음과 지식에 대한 담론은 그 이후 그리스 철학 유산의 발전에 구성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이 담론은 철학이 어떻게 – 철학 개념을 사용하는 기독교 교리의 형성과 맞물려 – 종교적 유산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취하고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식으로 변환했는지 보여주는 후기형이상학 사유의 계보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지침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런 의미론적인 삼투에 칸트와 헤겔을 추종하는 세속적인 사유의 주제인 이성적인 자유 및 실천철학의 기본개념들이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 우주론은 다시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성서에서 기원하는 의미론적 내용들은 후기형이상학의 기본개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철학이 아직 감히 감당할 수 있고 또 감당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철학이 세속적인 성격을 과시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앞에서 언급한 종교적 기원의 유산과 밀착되어 결정된다. 그러나 이 유산은 단지 오늘날 서로 경쟁하는 두가지 형태의 후기형이상학 사유 중 그 하나만 물려받았다. 이 상황을 후기형이상학 사유의 경험주의적 혹은 자연주의적 줄기만이 종교적 유산에서 철저히 벗어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가정에 대한 반박은 역사적이고 동시에 유물론적인 청년헤겔학파의 사유가, 어쨌든 헤겔을 이어받고 있다고 하지만, 헤겔에 등을 돌리는 급진적 종교비판의 골이 깊는 단절이 말해주고 있다. 그들이 물론 역사 안에 있는 이성의 흔적에 대한 관심과 보편적으로 철학의 노고는 이성적 생활관계의 증진을 지향하는데 있다는 철학에 대한 이해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철학의 직무에 대한 자기이해는, 철학사를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을 뛰어넘어 불규칙한 학습과정의 연속으로 꿰맬 수 있는 경우, 철학사에 대한 이런 수긍 가능한 해석으로 뒷받침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계보학적<< 서술의 진행과정에서 학습과정을 야기한 우발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이성개념 및 이에 상응하는 철학사유에 대한 중차대한 자기이해의 견지를 뒷받침하는 원인들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계속]
2021/05/15 |
2021/03/09 |
2021/03/08 |
2021/02/06 |
2019/10/22 |
[이어서]
그렇지만 그때그때마다 처하게 되는 도전적인 상항에서 나아갈 길을 찾으려는 인간 욕구에 대한 철학 사유의 실천적인 관계에 나타나는 계몽지향적인 박동Impuls은 전혀 자명한 게 아니다. 이 박동이야말로 우리에게 있는 이성적인 자유를 사용하게끔 하는 미지의 결단력에서 rätselhafte Initiative zum Gebrauch unserer vernünftigen Freiheit 그 힘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이 대주제가 칸트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으로 하여금 열심을 다하게 했다. 아니 사로잡아 부역하게 했다. 이 대주제가 또한 내 연구 전체를 꿰뚫고 있다. 반면, 오늘날에 이르러 과학주의적인 형태를 띤 고대 필연주의의 망령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필연주의와 수행적인 행위의식간의 모순을, 자유의지를 [이것과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개념화하는 반창고로 눈가림 하지만 결코 해소하지는 못한 채 말이다. 인류가 스스로 생산한 경제적, 기술적 성장역동성에 따르는, 해결하지 못한 부차적인 결과의 복잡성에 휩쓸려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만연하는 숙명론이 여기서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철학이 자신의 생성콘텍스트를 재차 확인하는 순간, 이성적인 자유의 사용이란 주제는 전혀 감소되지 않은 막중한 의미로 되돌아온다. 절대적인 시작에서 출발할 수 없고, 이어서 view from nowhere 라는 가설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밖에 없다고 인식하는 순간, 철학은 자신이 내리는 판단의 자주성을 단지 역사적인 자기관계로만 담보할 수 있다. 이 자기관계는 물론 그때그때마다의 숙고가, 그가 처해있는 사회적 관계 및 정치적 도전이란 역사적인 자리에 묶여있다는 성찰 따위로 숨가쁘게 헐떡거려서는 안된다. 역사적인 자기확인은 보폭을 더 넓혀 철학 유산의 두 줄기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이 후기형이상학 형태를 띠고 내버린 유산에 비추어볼 때 비로소 철학이 이어받은 유산을 균형을 제대로 갖추고 인식할 수 있다. 이성적인 자유의 사용으로의 자치(自治)Emanzipation는 해방과 동시에 규범적인 속박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이후 주체철학이 인간중심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특히 회복하는 혹은 „구원하는“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작별할 수밖에 없도록 한 원인들에 대한 이해가 비로소 우리의 눈을 열어 의사소통적으로 사회화된 주체들이 이성적인 자유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협력할 자세/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계속]
2021/05/15 |
2021/03/10 |
2021/03/08 |
2021/02/06 |
2019/10/22 |
[번역 독해]
90세 노장 하버마스의 작품 ...
책 제목: Auch 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2019.11.11
서문
과연 어떤 동기가 또한 나로 하여금 노년기의 한가한 일거리로 상당 기간 동안 줄기차게 철학사를 다루게 했는지 그 하나는 밝히고 지나가고 싶다. 별다른 게 아니었다. 내가 예전에 읽지 않았던 수많은 중요한 원전들을 마침내 읽고 그 빈틈을 채우는 재미와 우리가 직면한 것을 다루는 맥락에서 내가 이미 여러 번 소비한 다수의 저서들을 이번엔 비교적 평탄한 삶을 회고할 수 있는 노년기에 접한 철학 교수의 입장에서 다시 읽는 재미였다. 원전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제야 처음으로 체계적인 관점에 유용한 소재로만 ‚사용‘하지 않고, 다수의 경우 어느 정도 그 저자를 자극하고 도전적으로 만드는 생활환경에 몰입하는 전기적인 관심으로 대하게 되었다. 이게 물론 이제 이 나이에 도서관에 차고 넘치는 참고문헌을 더 이상 다 참고할 수 없다는 게 한 장 한 장 써 내려갈 때마다 뼈저리게 느껴지는 이처럼 무모하고, 엄격히 말해서 신뢰할 수 없는 이 작업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서양 철학사를 다시 쭉 훑어보는 작업이 지향하는 건 잘해야 다음과 같은 독해를, 보다 정확히 말해서 흔히 회자되는 메타이론적인 질문에 주목하여 얻게 될 독해를 보다 타당성 있게 해주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질문은 철학 앞에 던져진 직무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아직 가능하다면 그게 과연 오늘날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이 책의 제목은 원래 <후기형이상학 사상의 계보학에 관하여. 믿음과 지식에 대한 담론를 지침 삼아 쓴 또 다른 철학사>로 하려고 했다. 이런 바로크적인 범람에 대하여 출판사가 문제제기를 했더라도 나의 의도를 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 원고를 마감하지 전 계획된 책 제목을 줄여서 우울하게 <또 다른 철학사>로 하기로 결정했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저명한 에세이 <인류의 교양을 위한 또 다른 역사 철학/Auch eine Philosophie der Geschichte zur Bildung der Menschheit>에 빗댄 제목이다. 그 이유는 <세번째 중간 고찰Zwischenbetrachtung>를 마치고 나서 내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칸트와 헤겔의 전통에서 19세기 중반을 전후로 한 후기형이상학의 초기단계를 거칠게 스케치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한편에서는 흄과 벤담의 전통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칸트, 셸링, 그리고 헤겔의 전통에서 진행된 이리저리 가지를 친 논증의 줄기들에 관한 서술이, 특히 이 두 ‚진영‘간 핵심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점화된 토론을 분석하고 다시 두루 통과하는 작업이 나로 하여금 20세기 후반의 토론에, 다시 말해서 내가 생전에 직접 참여했던 토론에 깊숙이 빠져들어가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여하는 관찰자로서의 내게 이 논쟁에서 눈에 띈 점은 접근방식의 경쟁에서 양자의 배경에 있는 가정의 차이가 그대로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진리-, 합리성-, 혹은 언어이론이든, 사회학의 논리학과 방법론이든, 윤리적인 접근방식이든 아니면 더욱 두드러지게 도덕-, 법-, 그리고 정치이론이든 그 어떤 영역을 막론하고 그런 차이가 재생산되었다. 한쪽에서는 분석하는데 있어서 개별적인 주체의 관념과 지향, 행동양식과 기질에 기반하여 접근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똑 같은 질문을 다루는데 있어서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되는 상징 및 조절 체계에서, 즉 언어들, 실천들, 생활의 형식들 및 전통들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각 영역에] 상응하는 담론의 유형에 기대어 해당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능력 취득에 필수불가결한 주관적인 조건들을 탐구한다. 이 경쟁상황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른 책 한 권이 더 필요했다. 그러기에는 이제 더 이상 힘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패러다임적인 중요성을 갖는 이 논쟁에서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논증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내가 다른 곳에서 이미 다루기도 했다.
그렇다면 20세기 언어철학내에서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진 이 패러다임경쟁의 전사(前史)가 왜 관심거리가 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양측의 이론적인 전철들의 방대한 계보학이 어떤 쓸모가 있단 말인가? 논쟁들 그 자체가 체계적인 질문의 해명에 충분하다는 게 분명하지 않는가. 짧게 대답하면 이렇다. 내겐 다른 주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련의 논쟁적인 근본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패러다임적인 전제에서 드러나는 철학에 대한 함축적인 이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직업적인 이해를 둘러싼 논쟁에서 제기되는 원인들은 철학사에 대한 특정한 ‚독해‘를 지지하는 혹은 반대하는 원인들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유의 문제 설정의 유용성에 바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된다. 철학적 사유의 고유한 직무에 대한 견해들은 수행된 철학적 탐구라는 줄기에서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가지처럼 줄기에서 다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지금의 직업적인 철학의 자기이해가 차기의 자기이해에 밀려나지 않는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종류의 논점들이 이런 류의 다툼에서 유효한지 알고 있는가? 모든 설득력 있는 철학적 접근들은 자명하지 않는가. 새로운 철학적 접근이 있을 때마다 철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취해야 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가? 이런 반론에 쿤의 과학적인 패러다임의 우발적인 기복이란 이미지가 겹진다. 그리고 중기 푸코의 견해를 따른다면 굳이 담론의 가면 뒤에서 또한 지배적인 사회권력들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이런 반론에는 철학에서의 패러다임교체 역시 학습과정으로 자극되어 일어나고 패러다임의 우발적인 기복이란 파이어아벤트의 잘못된 이미지조차 어느 정도의 지속성을 전제한다는 점이 대치된다. 어쨌든 간에 자신의 정체성이 지금까지의 철학사의 연장 속에 있다고 스스로 밝히는 이론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종전까지는 칸트가 제시한 근본문제,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내게 남겨진 희망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이 4가지 질문에 답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전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철학에 아직 미래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저 문제제기의 품위(Format)만 살아남고 철학은 이제 그저 개념분석적인 숙달을 겸한 전문분야(Fach)와 자기 역사의 관리자로서만 살아남지 않게 되었나 한다. 철학은 이제 다른 모든 학과처럼 끊임없이 확대되는 전문화의 대열을 따르고 있다. 몇몇의 장소에서는 이미 인지과학에 종사하는 개념분석적인 서비스업의 역할에 전입하여 소멸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학과의 핵심이 점점 더 커지는 경제-, 생물-, 혹은 환경윤리적인 컨설팅 수요를 충족하는 유용한 공급소로 전락하여 가닥을 잡을 수 없게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관찰 그 자체에 별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마음을 진정 요동하게 하는 건 철학 역시 점점 더 심화되는 전문화를 매개로 한 모든 학문적 분업의 내적 역동성과 학문적 진보의 일반적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엄밀하게 따지자면 반론할 수 없는 바람직스러움에 있다. 왜냐하면, 전문화는 철학이라는 우리 학과에 특수한 양식의 도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에는 오직 진보만을 가져다 주는 게 알다시피 시야에서 전체를 상실해서는 안되는 철학에 있어서는 또한 지금까지 그 존재의 근거가 되었던 앞의 근본문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자신의 길을 찾으려면 <전체에 기대>야 한다면, 이런 표현은 당연히 이제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세계상에 기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른바 <학문적인> 세계상에 기댈 수도 없다. 세계상의 시대는 17세기 이후 사라졌다. 거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내 관심을 끄는 질문은 철학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자기 및 세계 이해에 대한 우리의 합리적인 해명에 기여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남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저 ‚및‘이야말로 전문화의 진행에 깔릴 위험에 처한 저 주제를 꼭 찔러 집어주고 있다.
철학 역시 과학적인 사유 방식에 속한다. 그러나 철학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점점 더 작은 것에서, 즉 보다 좁고 정밀하게 규정된 대상 영역에서 습득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축적되는 과학적인 지식(Kenntnisse)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게 뭔지 설명하려고 할 때 과학과 계몽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의 우리에게, 현대를 함께 살고있는 우리에게,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우리에게. 바로 이 국면에서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의 지도로 나아가는 실천적인 자기관계야말로und dieser praktische Selbstbezug auf unsere Lebensführung 학습의 진보와 검증을 거친 세계에 대한 지식의 증대를 소화하는 각각의 장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점점 더 조망할 수 없게 되는 지식코스모스를 망라하는 전체와 대면하는 관계를 마련하는 발판이 된다. 사태가 이럴진대 철학이 방향 정립에 대한 우리의 공공연한 욕구를 총체적으로 대면하는 관계를 포기한다면, 내 생각에, 이 요구를 감당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지라도, 철학 고유의 자산에 반역하는 게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대에 철학이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는데, 곧 대상화하는 과학의 곁에 붙어 합리적인 세계 및 자기 이해에 기여하는 자기준거적인 관계로부터 작별하는 가운데 계몽의 역할을 잘라 던져버리고 과학주의적인 자기오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철학의 실천과 견해가 그렇다. 철학이 – 칸트가 그가 마주한 시대에 그랬듯이 –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성을 자율적으로 사용하고 그들의 사회적 삶을 실천적으로 꾸려 나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기를 원한다면, 철학은 철학가의 가훈을 지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및 세계에 대한 점점 더 심화되는 전문화된 지식의 복잡성증대에 체념해서는 안된다.
[계속]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2021/02/06 |
2019/10/22 |
쿠르트 마르티(Kurt Marti)의 주기도문
unser vater
der du bist die mutter
die du bist der sohn
der kommt
um anzuzetteln
den himmel auf erden
dein name werde geheiligt
dein name möge kein hauptwort bleiben
dein name werde bewegung
dein name werde in jeder zeit konjugierbar
dein name werde tätigkeitswort
bis wir loslassen lernen
bis wir erlöst werden können
damit im verwehen des wahns komme dein reich
in der liebe zum nächsten
in der liebe zum feind
geschehe dein will –
durch uns.
[이렇게 번역해 봄]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여,
어머니가 되시고
아들이 되셔서
하늘을 땅에 불지피시려
부지깽이로 오신 이여,
그이의 이름이 거룩하게 명명되게 하시고
그이의 이름을 착명하여 본질을 운운하며 꼰대걸음하지 말게 하시고
그이의 이름이 운동이 되어서
그이의 이름이 언제나 변화의 멍에를 짊어질 수 있게 하시고
그이의 이름이 생동의 말씀이 되사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기꺼이 놓아줄 때까지
우리가 속박으로부터 놓아질 수 있을 때까지
그리하여 망상이 그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가운데 그이의 나라가 임하사
이웃을 향한 사랑 속에서
원수를 향한 사랑 속에서
그이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
우리를 통하여.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2021/03/08 |
2019/10/22 |
apoikia oikias 번역을 위한 자료
"아파트 공화국의 가족주의"
http://m.hani.co.kr/arti/opinion/column/837941.html#cb
" ... 그저 동물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2021/03/08 |
2021/02/06 |
조국 사태?
"[도시/polis라 할 수 없는, 아무런 질서/결속력이 없는] 먹고자는 집만이 종양처럼 무성하게 자란" (apoikia oikias,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2b) 곳에서 자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란 결국 "같은 젖꼭지에서 젖을 빨던 자와 자기 새끼와 그 새끼를" (homogalaktas, paidas te kai paidon paidas, 같은 곳) 위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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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영(animus)에서 이런 종류의 오류들을 씻어내려고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듯 실체(res)에 대한 말(verba)이라면 그 어떤 종류도 마다하지 않고 인용하였다. 우리들의 지성(intellectus)이 이런 말을 영양분으로 삼아 강건하게 되어서 점진적으로 거룩하고 숭고한 영역을 향해 일어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에 „주님의 날개 그늘에 나를 숨겨 주시고“에서와 같이 물체에서 취한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또는 „내가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에서 볼 수 있듯이 영적 피조물에서 여러 말을 옮겨와(transtulit)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로는(dici)그렇게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없는 것에서 이런저런 말을(vocabula) 억지로 끌고와(traxit) 말(locutiones)을 만들거나 이상야릇한 말(aenigmata)을 엮어 짜는 법이 없다. 이 세번째 종류의 오류를 범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고 그 어떤 피조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추정하는 자들로서 자신을 스스로 진리로부터 차단하여 공허하기 그지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성경은 늘 피조물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사물을 바탕으로 하여 마치 어린 아이가 즐거워하고 쫓는 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 연약한 자들의 시선을 (aspectus) 이끌어 점진적으로 각자의 도에 따라 고귀한 것은 찾고 야비한 것은 버리게 한다. 그러나 모세에게 한 말씀 „나는 곧 있는 자다“,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등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마땅한 서술이지만(dicuntur) 피조물과 관련해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서술은 성경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있다〉(esse)는 물체(corpus)뿐만 아니라 영(animus)에도 어떤 식이로든 서술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이 말을 — 정확하게 알 수야 없지만 — 어쨌든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서술로 이해되도록 분명하게 해 두기를 원치 않았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그 분에게만 불사가 있고“라는 사도의 말도 마찬가지다. 영(anima)도 모종의 방식으로 죽지 않는다고 서술되고 또 사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불사란 피조물은 전혀 가질 수 없고 오직 조물주의 속성인 불변이라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오직 그 분에게만“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다윗 역시 똑같이 말한다. „주께서 그것들을 바꾸시면 바꿔지겠으나 주는 한결같으십니다“.
3. 하나님의 본질(substantia)은 그 본질의 어떠한 변함없이 변하는 것들을 만들고, 또 그 본질의 어떠한 시간적인 움직임없이 시간적인 것들을 창조한다는 것을 통찰하고 완전히 안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 마음(mens)의 정화(purgatio)가 필수다. 그래야먄 저 형언할 수 없는 것이 형언할 수 없는 상태로 비춰질(videri)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정화의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우리는 믿음으로 양육되고 믿음의 인도 아래 그래도 견디고 갈 수 있는 길에 올라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저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하기에 적합하고 용이하게(habilis) 만들져야 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sapientia)와 지식(scientia)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육(carnalis)과 세속(animalis)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자면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땐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그의 권능을 내세워 선포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인간적인 약함을 받들어 선포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한다. 조금 더 가서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하지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이런 말을 들으면 벌컥 화를 내고 의도적인 기쁜 나쁜 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대개 위와 같은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그들 스스로 듣는 말을 담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자들에겐 종종 근거(ratio)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뭔가 알려고(quaerere) 하면서 요구하는 그런 근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들 스스로 그런 [다자가 인정하는] 근거를 규정할(sumere) 만한 힘이 없고, 우리 역시 어쩌면 그런 근거를 찾아내거나(apprehendere) [만인 앞에서] 서술할(proferre)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근거는 어디까지나 저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알기 원하는(exigere) 것이 도대체 뭔지 저들 스스로 인식하기에 너무 무딜(inhabilis) 뿐만 아니라 그러기 위해 갖춰야 할 자질이 전혀 없다는(minimeque idonei) 걸 보여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저들은 우리가 학식이 없는 것을(imperitia) 감추기 위해서 간교한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학식있는 [전문가](peritia)가 되는 걸 시기해서 악의에 찬 행동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격분하고 이성을 잃은 채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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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책과 함께 아우렐리우스 주교에 보낸 편지)
한없는 축복을 누리고 지극히 순수한 사랑으로 존경 받아야 마땅한 아우렐리우스 주교님께, 성스러운 형제임과 동시에 동료이신 주교님께 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의 인사를 드립니다.
온전하고 참으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에 관하여 청년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가 이제 늙은이가 다 되어서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 책을 다 집필하고 나서 다시 꼼꼼히 교정하려고 작정했습니다. 근데 누군가가 그 전에 덜 된 책을 슬쩍 훔쳐가버렸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나서 집필을 중단했습니다. 저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한 편이 완성될 때마다 따로따로 발간하지 않고 전체를 한묶음으로 발간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연구의 진전과 함께 뒤의 내용이 앞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저의 결심이 제가 원했던 것보다 먼저 제 책을 손에 쥐게 된 자들 때문에 성사될 수 없게 되어서 저는 집필을 멈추고 이 사실을 저의 다른 글에서 폭로하여 저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걸 고려해 보았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가능하면 저 돌아다니는 편들이 제가 발간한 책이 아니라 제가 저의 저서로 발간하기에 마땅하다고 평가하기 이전에 도난당한 편들이라는 걸 알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수많은 형제들의 간절한 청구와 특히 주교님의 요청에 결정적으로 강요되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 힘든 책을 완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교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난 당한 편들이 이미 사람들 손에 널리 펴져 있었기 때문에 교정본이 저들과 너무 차이가 나면 안되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교정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책을 주교님께 헌사하도록 우리가 매우 아끼는 형제 및 집사를 통해서 보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듣고 사본을 따고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이 책이 원래의 명제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제가 저의 원래 계획을 이행할 수 있었다면 이 책은,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를 설명하는 어려움과 저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틀림없이 훨씬 더 상세하고 분명하게 집필되었을 것입니다. 서설없이 이 책의 네 편 혹은 다섯 편만 가지고 있거나 또는 열두 편을 가지고 있지만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마지막 편들이 없는 사람들은 이 발간본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원하고 하기만 하면 빠진 부분을 모두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아무런 변경없이 그대로 받으신 책의 앞에 두어 서설로 쓰라고 지시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제1권
1. 이 삼위일체론을 읽고자하는 사람은 먼저 알고지나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내가 굴리는 이 펜은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업신여기고 이성(ratio)에 대한 주제넘고 그릇된 욕망(amor)으로 인해 오류에 빠지는 사람들의 궤변에 눈을 부릅뜨고 대항한다는 점이다. 이들 중 일부는 물체에(res corporea) 관하여 신체적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하여 알게 된 것을, 혹은 타고난 인간재능 및 이를 삶에서 십분 활용하는 부지런함으로 또는 축적된 학문의(ars) 도움으로 취득한 개념을 감히 물체가 아닌 영적 실체에 (res incorporea et spiritalis) 적용하여, 전자를 후자로 헤아리고 해석하려고 덤비는 자들이다. 다른 이들은 또 별 관심이 없으면서 의견을 내놓으라 하면 인간 영(animus)의 본능(natura)과 그 경향(affectus)에 따라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내놓고, 하나님에 관하여 논할 때면 저 오류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들의 말에 주절주절 비틀어지고 기만적인 기준을 부여하는 자들이다. 그런가하면 이런 유의 사람도 있는데 다름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우리가 보듯이 정말 변천하는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고 눈을 들어 의식이(intentio) 변함 없는 실체, 즉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향하게 하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허무와 무상의 운명에 얽매인 자들이라 한편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여지기를 원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입견을 더욱 더 담대하게 주장하고, 옹호하는 입장을 바꾸기 보다는 그릇된 의견을 정정하지 않으려고 더 많은 정성을 들여 본인 스스로 통찰의 길을 차단하는 자들이다. 이거야말로 참으로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병이다. 즉 하나님 알기를 마치 물체를 아는 것처럼 하는 자, 하나님이 무슨 [귀]신(anima)이라도 되는 양 하나님 알기를 마치 영적 피조물을 아는 것처럼 하는 자, 마지막으로 하나님 알기를 물체를 아는 것처럼 하지도 않고 영적 피조물을 아는 것처럼 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것을 믿는 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그들이 안다고 하는 것이 물체에서 뿐만 아니라 만들어져 어딘가 거하는 영적 존재에도, 그리고 조물주 자신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만큼 누구보다 더 멀리 진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희다거나 빨갛다고 생각하는 자는 분명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희고 빨간 것은 적어도 물체에서는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한때 잊으시고 한때 다시 기억하신다거나 이와 유사한 일을 하신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더 작은 오류를 범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적어도 영적 존재에서는 발견되는 일들이다. 반면 하나님의 권능은 자신을 스스로 낳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적 피조물과 함께 물체적 피조물이 그렇지 않는 만큼 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어디를 보아도 자신을 스스로 낳아서 실존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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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어서]책을 쓰는 일과 이에 요구되는 집중은 삶에 허용된 시간을 갉아먹는다. 정년퇴직교수의 삶의 고독과 자유를 누리면서 똑같은 주제를 놓고 십년 이상 지속된 이 작업은 쉽게 강압적인 고행의 형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우테Ute [부인] 덕분이다. 방금 읽은 것을 놓고 그와 함께 나눈 지속적인 대화를 통한 고무적인 분위기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다. 이런 것을 넘어 밝히고자 하는 건 단순하지만, 말이란 틀을 사용하여 건져내기 어려운 사실, 즉 그의 동행이다. 이게 내게 갖는 의미는 이 헌사로도 변상할 수 없을 것이다.
슈타른베르크, 2018년 12월
[원문 Präsenz를 <동행>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 Präzenz는 Parousie (신의 임재)의 번역어가 아닌가 한다. 사실 이 말을 하려고 하버마스 최신작 서설의 번역을 시작했다. 구약이 서술하는 하느님 경험은 하느님을 봤는지 안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느님이 동행한다는 걸 사실로 믿는 게 아닌가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에 이르기까지 믿는 사람들이 이 동행에서 힘을 얻었다는 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암튼 하버마스가 부인 우테에 기대어 하느님 경험이 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수행적 모순, 즉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하느님 경험을 연출하는 모순을 서술하는 작품이 하버마스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