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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2)

1. 포스트구조주의 재방문. 없는 것이 있게 된 경위

 

그들의 이름들은 다 잘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는 이론 슈퍼스타가 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봉자의 수는 아마 마르크스만을 별로 놀라게 하지 않을 정도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때그때의 표어를 제공하는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자크 데리다의 영향은 2004년 그의 [때] 이른 별세가 문예란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대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진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무대에 등장하면 수천 명이 환호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뿌리를 둔 경계인이며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슬라보이 지젝이야 더 말할 나위없다. “포스트구조주의”란 본래적인 의미가 없고 [단지] 외부로부터 부여된, 아무런 사상체계가 그 바탕에 있지 않는 에티켓[일 뿐]이라고 근거 있게 지적된다(참조: 예컨대 Lorey et al. 2011: 11). 그러나 이런 주장의 저편에서는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 [위기를 직면한] 바로 근래에 들어서 - 비통일적인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들을 [하나의] 이론영역으로 측정하려는 시도가 상당 수 이루어지고 있다(참조: 예컨대 Moebius/Reckwitz 2008; Stäheli 2000; Angermüller 2007). 60년대와 70년대 프랑스의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고,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미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은1) 사회인문과학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그 맥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런 문화적 전환이 관철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것들의 문화적, 그리고 상징적인 구조화에 [연구의] 눈길이 미치게 되었다. 68년 5월의 파리가 포스트구조주의에 있어서 갖는 의미는 [역으로] 많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이 60년대 및 70년대의 운동에 미친 영향과 마찬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68년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국가론과 이데올로기비판이 제시한 전략적 전제들과 억압에 기초한 권력모델로 방향이 잡혀진 좌파 정치와의 즉각적이고 근본적인(radikal) 절단을 알리는 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점은 (경향적․점차적으로) 미시정치로 바탕이 색칠된 주체화와 욕망의 문제들로 이전되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학생운동은 [물대포장갑차가 쏘는 물에 쓸려] 거리에서 세척되어 담론이란 지하로 밀려 내려갔다.”(Eagleton 1994: 127)고 논박한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 이런 논박은 이글턴뿐만이 아니었지만 -, 일반적인 탈정치화와 동등한 의미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된 거의 모든 이론가들의 정치적인 개입과 운동근접성은, 프랑스 감옥운동에서의 푸코의 역할, 인종주의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들뢰즈의 개입,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태리 자율주의와의 긴밀한 관계, 또는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 활동에서의 역할 등과 함께 다면적으로 검증되었다.2) 이와 같은 이론과 정치의 긴밀한 연계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이, 특히 (물론 여기에 제한되지 않고) 퀴어 운동들의 발생[과정]에서 수행했던 지대한 역할들을 두고 볼 때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서 오로지 상아탑에 올라간, 고도로 추상적인 아카데미주의만을 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1) 포스트구조주의가 다양한 “물결”과 함께 상이한 학과들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다사다난하게 수용된 이후 (이런 식으로 특히 철학에 이어서 언어학 및 문예학에서) 얼마 전부터 독일 사회학과에도 도착하고(Moebius/Reckwitz 2008: 7) 문화학적으로 방향이 잡혀진 분석기술로 독일 대학에 계류하게 되었다. Gender Disability Studies, Postcolonial Studies, 문화 및 신체사회학 등과 같은 개별연구영역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분석의 아주 큰 영향을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 및 산업사회학, 불평등 및 복지국가연구, 뿐만 아니라 경제비판 및 국가론 등과 같은 독어권의 다른 영역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프로그램이 여전히 이물질이다.

 

 

2) 참조 Kuhn (2009: 56f.): “언급된 모든 이론가들은 정치적으로 활동했고 일부는 (..) 매우 급진적/근본적인 맥락에서 그랬다. 이들이 참여했던 맥락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서 [그들의 혁명적인 성격을 의심하고] 모든 혁명적인 성격을 박탈하려는 비판자들이 참여했던 맥락보다 현저하게 더 급진적/근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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