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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혁명과 나토

나토의 리비아 개입이 ‘진보진영’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 혼란의 저변에는 나토의 실체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몇 가지 문제를 스케치 해보고자 한다.

 

1. 동서냉전의 종말로 나토의 존재근거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토는 버젓이 살아있고 유럽과 미국의 주요개입기구로 변신하였다. 하지만 나토는 발칸반도개입에서의 문제(유고전관련 유엔안보리의 비토, 결과 나토의 유고전 개입은 국제법상 불법),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의 개입에서의 [정당성/합법성] 문제점을 해소하지 못했다. 나토의 이런 문제점 의식과 2005년 유엔이 “responsibility to protect”조항을 체결하게 된 배경간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재조명해야 할 것 같다.

 

2. [진보진영보다] 나토가 더 훨씬 변증법적으로 아랍혁명을 대하고 있다. 변증법의 문제는 어떻게 세상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데 있지 않다. 세상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형이상학을 만드는 것이고, 전통 형이상학보다 더 관념적인 것이 된다. 변증법의 핵심은 변화무쌍한 세상일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가에 있다(Wolfgang Haug, 실천적인 변증법을 위하여(Für praktische Dialektik). 이런 맥락에서 나토는 그간 개입을 위한 매끈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바둑에 비교하자면 다양한 포진으로(푸코의 디스포지티브) 진보진영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허우적거리게 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담론이 나토의 디스포지티브를 강화하고 있다. 진보진영이 나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나토는 아랍혁명이 EU의 위기로 발전하지 않게 면밀하고 정밀하게, 개별적인 개입양태가 서로 모순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일사불란하게 개입하고 있다.

 

아랍주재 EU 가입국의 외무부, 정보부, 각종 학술단체들이 아랍에서의 상황개진을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수한 보고, 분석, 조정, 조율 등이 필경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개입시나리오를 준비하였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독일의 안보리에서의 기권관련 EU내 균열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이런 균열은 보다 방대한 EU의 개입시나리오를 가능하게 한다. 리비아 개입 초기에는 독일이 미, 영, 불 군사회의에서 제외되었지만, 다시 메르켈 총리를 보란 듯이 3국 군사회의에 참여시키고 있다(참조. 독일 제일경제신문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의 분석 „메르겔의전략이적중할수있는이유“)

 

3. 유엔과 나토가 마련한 „Responsibility to protect“란 선물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트로이의 목마일까? 이 목마에서 뛰쳐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목마를 선물로 주고 간 그리스군을 믿을 수 없었던 라오콘은 „그리스사람은 그들이 선물을 들고 올지라도 두렵다 (timeo danaos et dona ferentes; 베르길리우스의 에네이스2권; 이 문장은 „바로 선물을 들고 오기 때문에 그리스사람들이 두렵다“로 번역될 수도 있다.)“라고 했다. 요는 그 다음 라오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트로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있다. „인권“이란 성스러운 선물에 허둥대는 „진보진영“의 모습이 트로이사람들의 행동에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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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혁명과 이북

아랍혁명에 안개가 자욱하다. 특히 리비아에서의 아랍혁명을 두고 이런 말 저런 말들이 오간다. 나 자신도 그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갈팡질팡한다. 내 사유의 위치는 어디인지, 그 자리는 어디인지 알아보고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 자 써 본다. 더구나 리비아의 상황을 한반도와 연계하는, 즉 이북의 김정일 체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와 결부시키는 상황을 두고 볼 때 이 일은 상당히 시급한 것 같다.

 

나에겐 리비아사태를 바라보는데 우수한 망원경도 면밀한 현미경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망원경, 현미경이라 할지라도 시력을 상실한 눈에 갖다 대면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에 기대에 우리가 평범한 시력으로 알아 볼 수 있는 것들 몇 개를 늘어 놀까 한다.

 

 

1. 외세에 대한 리비아 인민의 심성

 

외세에 대한 리비아 인민의 심성에 대한 분석이, 이곳 진보넷의 몇[번역]글 외에는 없다. 근데, 리비아사태를 이해하는데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집트혁명을 통해서 분명해진 것은 이집트 군수뇌가 상당부분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반면, 카다피의 군대는 최소한 미국의 혹은 나토의 말을 듣지 않는 군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다피와 그 군대가 반제투사란 이야기는 아니다. 카다피가 용병을 사용해서 버티고 있다는 것도 마키아벨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용병의 성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용병은 주인이 굳건히 서 있거나 이길 확률이 있다고 생각할 때 도망가지 않고 싸우는 자들이다. 그럼 카다피는 뭘 중심으로 하여 굳건히 서있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서있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리비아 사태에 기대어 이북[체제]를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떠드는데 진정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다.

 

리비아의 심성을 살펴보아야 하듯이, 이북 인민의 외세에 대한 심성도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주체사상의 실체가 반미라는 것을 두고 볼 때 더욱 그렇다. 이북 인민의 반미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하버마스식의 담론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현실에 근거하여 작동하는 푸코식의 ‘디스포지티프’인가를 분석하고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통사회주의를 운운하면서 이북 인민의 반미심성은 차지하더라고, 이남인민의 반미심성을 간과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남인민의 반미심성은 특유하여 이곳 독일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을 자문하는SWP연구서에서조차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햇빛정책’에서‘평화와번영을위한정책’으로, 50년이지난미국과이남의동맹이넘어서야할과제 등). 그리고 촛불시위에서 보았듯이 반미심성은 분출구를 찾으면 불거지는 이남인민의 심성이다. 이런 인민의 심성을 간과하고 제국주의문제를 그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담론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담론의 수준에서 이북체제문제를 사유하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성능 좋은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뭔가를 보고 분석하는데, 그 분석이 내놓은 실천은 진부한 수준 이하일 뿐이다.

 

“이와는 달리 북한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의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고립에서 벗어나 남한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과 교류하고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찾아야 한다. 사실 국가권력에 통제되지 않는 전면적인 교류확산이야말로 북한 지배층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다. 북한의 지배층이 아닌 이러한 교류와 연대에 기초해 북한 체제가 왜 가짜 사회주의인지, 대중 스스로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 서는 투쟁의 방향은 무엇인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노신, 아랍민주화는지지! 카다피는연대? 북한에는침묵?) 어쩌자는 말인가? 폴러첸 같이 풍선에 라디오를 달아서 이북에 공급? 민주투사 이북잠입?

 

 

2. 벵가지 인민을 죽게 내버려 둬?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난 이 질문을 달리 제기하고 싶다. 벵가지 혁명군이 나토지원을 요구해야 했나?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난 뭘 요구해야 하나?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이남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지향한다면 반듯이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인 것 같다.

 

1980.5.26일 새벽 광주민중항쟁의 거점 도청사수는 외로웠다. 그때 미국을 불러, 아니면 인권을 옹호하는 유엔을 불러 진압군을 좀 폭격 해달라고 했어야 했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남에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어날 혁명에 대한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준비하게 하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제국주의문제를 담론의 수준을 넘어 혁명세력의 힘을 확장하는 디스포지티프로 이해하고 다듬어 나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한 것은 이남의 혁명이, 자본주의체제로부터 빠져나가는 혁명이 ‘외세’의 개입 없이 진행될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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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공부하자는 게 왜 문제인가

http://www.ohmynews.com/NWS_Web/Article/tb/index.aspx?cntn

 

"목숨 걸고 공부하자는 게 왜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오리지날 보수"의 유양초등학교 최창해 교장에게 드리는 답.

 

독일 나치가 운영(!)하던 유태인학살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들어가는 문에는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다른 유태인학살수용소 <부헨발트>에 들어가는 문에는 <각자에게 자기 몫을>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각자에게 자기 몫을>오리지널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장은 목숨 걸고 교장을 해야 하고, 선생을 목숨 걸고 선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 4권에서 이야기 한 이 가치에 기대는 보수는 이 구호가 유태인학살수용소의 간판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본질을 보여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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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작불님의 [장애를 가지다? 장애가 있다? ] 에 관련된 글.

나에게 장애인이란 표현은, 그것을 변형시켜 장애가 있는 사람 아니면 장애를 가지 사람이라고 고쳐 써도 생소하다. 아니 생소하다기 보다는 얼른 목구멍, 혓바닥, 그리고 입술을 넘어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시골고향에서 사람들이 장애인이란 낱말을 쓰지 않아서 귀에도 생소하다.

 

소꼴을 베었던 논둑과 함께 미꾸라지 붕어를 잡고 놀던 개울도 어디론가 사라진 정리된 들판을 걷고 있었다. 저만치서 낫 익은 아저씨가 온다.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는데, 얼굴은 그때 그대로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왔어요.> <, 그래, 00이 왔구나.> 초등학교 다닐 때 고향을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데 아저씨는 날 어제 헤어진 사람같이 금방 알아본다. 수많은 날들과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야 셀 수 있는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날 금방 알아본다. 아저씨는 눈이 먼 봉사다. 눈이 멀쩡한 사람도 날 금방 못 알아봐서 좀 그랬는데, 눈 먼 아저씨가 이렇게 날 금방 알아봐주니 이제야 <고향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 언제부터 이런 말이 쓰여지기 시작했는가?

 

장애역사(Disability History)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사람을 특정한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특징에 기반하여 <장애>, 그리고 <정상>이란 범주를 적용하여 구별하였는지 연구한다. 이런 접근은 <장애>라는 범주를 적용하는 것과 [항상] 연계되어 있는 권리침해, 차별대우, 그리고 제외를 사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물적 역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차단의 결과물로, 그리고 문화적 가치, 기대, 그리고 사회적 행위(practique)의 생산물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장애> 혹은 <정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성질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체제 안에서 <장애><정상>의 상호종속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학문적-정치적 담론에서, [노동력을 관리하는] 관료주의적 기구 안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범주다.” 이런 맥락에서 19세기 말 생리학에 기반한 의학이 마련한 바탕에서 진행된 장애담론에서 “[인간의 기계적] 성능과 생산성이 결정적인 사회적 가치기준으로 형성되었다”. (Elsbeth Bösl, Die Geschichte der Behindertenpolitik in der Bundesrepublik aus Sicht der Disability History.  in: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 201023 참조)

 

무슨 말인가?

 

<살아있는 노동력>을 빨아 가치를 생산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합리화>란 이름아래 몸과 마음을 기계적인 작동체계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한다.

 

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분리한 자본은 우선 육체노동을 완벽하게 빨아먹기 위해서 몸의 동작을 스톱워치를 가지고 분석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차대전을 전후로 해서 독일에서 개발된 <정신공학/Psychotechnik>을 한번 살펴보자.

 

<정신공학>이 발전하게 된 배경은 일차대전 후 노동력이 절대로 부족한 상황에서 상이군인을 노동전선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관련 진행된 연구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신체분석, 출처: Staatliche Kunsthalle Berlin und Neue Gesellschaft fuer bildende Kunst의 1984년 전시회 "합리화" 82쪽)

 

 

(좌계표로 줄질하는  동작분석. 출처: 같은 책 83쪽)

 

(팔이 잘린 상이군인. 출처: 같은 책 85쪽)

 

 

("정상"인과 "팔없는 사람"이 줄질하는데 소요하는 시간. 초로 계산되어 있음. 출처: 같은 책 88쪽)

 [놈들은 이렇게 "살아있는 노동력"을 빨아먹기 위해서 면밀하게 분석한다. 다 빨아먹은 몸뚱이는 폐기처분하는 경향이고, 이제 정신노동이란 것을 집중적으로 빨아먹기 위해서 갖은 분석을 다하는데 이번에도 놓치면 안 되겠다.]

 

(Heinrich Hoerle, Denkmal der unbekannten Prothesen/무명의 인간장구 기념. 같은 책 76쪽)

 

(Heinrich Hoerle, 공장노동자 1922. 출처: 같은 책 91쪽)

[자본이 몸을 어떻게 보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장애담론"은 자본주의에서 진행되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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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의회와 중앙권력

칸나일파님의 [진보정치, 지방선거 생각 2] 에 관련된 글.

먼발치에 있고 또 한국정당의 역관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진보진영, 즉 변혁을 추구하는 진영이 지지해야 하는 정당, 혹은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다. 단지 칸나일파님이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지적한 몇 가지 쟁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몇 마디 해보고자 한다.
 

기초의회 선거를 통해서 기성정치의 벽을 넘어 지역을 사고하는 당선자들이 기초의회를 장악하여 생활진보 걸음 나아갈 있는 정책을 있다는 견해는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이것은 독일의 경우 지자체가 태동한 바덴뷔르템베르크지역 기초의회에서 최대당인 기민당보다 무소속후보가 30.38% 42.12% 비율로 훨씬 많이 진출해 있다는 사실이 뒷받침해준다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 Kommunalpolitik in den deutschen Ländern, 2003, 33 참조).

그러나 이런 현상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의 지자체가 1808년 프로이센의 슈타인 남작(1757∼1831)의 개혁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중세후기부터 농민전쟁과 민주주의 혁명이 잦았던 바덴과 뷔르템베르크 지역에서 태동했다는 점에 있다.

지자체에 대한 이런 접근은 지자체가 [존 롤즈가 닦아 논 지평에서 자란 마이클 월처 류의]공동체주의보다는 파리 꼬뮌에 더 가까운 자치정부의 태동이었고, 이러한 자치정부가 농민전쟁에서의 패배, 민주혁명의 좌절 등으로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졌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관련 페터 블리클레(Peter Blickle)가 도입한 기초단체주의”(Kommunalismus)라는 개념에 기대어 스위스 국경지역의 남부독일에서 기초단체(Gemeinde)가 자치정부를 설립하려고 했던 노력을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지역의 기초단체(Gemeinde)는 중세 후반기 이후 정기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모여 행정집행인(Amtstraeger)을 선출하고, 해서는 안될 일과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이런 것을 어긴 행위를 처벌하는 재판을 열었다. 이런 구성원총회가 소집되지 않는 기간에는 농촌지역에서는 四人혹은 六人, 도시지역에서는 시평의회가 기초단체의 규범집행을 수행하게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기초단체주의란 공동체의 실생활관련 제반 사항을 조직하는 것으로서 구성원총회는 제헌의회의 성격을 가지며, 행정과 법집행을 자치적으로 집행하면서 대내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 안에서는 위의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법규는 기초단체의 자생적인 권리에 의한 것으로서 모든 구성원이 누리는 권리와 의무가 된다. 그리고 이런 권리와 의무는 협동조합적인 연합에서 자율적으로 노동하는 농민 혹은 수공업자가 갖는 권리가 된다.

이런 기초단체주의는 기초단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기초단체에서 발전된 규범을 전체사회에 적용하는 경향을 갖게 됨으로써 결국 공화주의로 나아가가 된다. 이런 경향은 중앙권력체제를 형성하여 인민을 신민으로 만들고 행정의 대상으로 삼는 절대군주제와 맞부딪치게 되어 농민전쟁, 민주혁명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기초단체문제는 중앙권력과의 투쟁의 문제와 그리고 직접민주주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참조: Heinrich R. Schmidt, Gemeinde und Sittenzucht im protestantischen Europa der Frühen Neuzeit, in: Peter Blickle (Hrsg.), Theorien kommunaler Ordnung in Europa. 구글도서검색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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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근님의 &quot;성을 매개로 한 여성 또는 남성의 행위가 노동일 수 있는..&quot;에 대한 답글


현실에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둘로 구별될 수가 있겠다. 하나는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침몰하는 접근이라고 하겠다.

 

맑스의 사상은 철저한 이데올로기비판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첫째와 같은 현실접근을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한다.

 

성매매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어떤이는 절대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주 홀가분한 접근이기도 하다. 혁명이 가져다 주는 정체된 상에 기대어 성매매를 다루기 때문에 성매매의 현실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고 그것을 서술할 필요도 없다. 혁명이 가져다 주는 절대사회상 아래 성매매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다룰 가치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매매 현실에 직시하고 거기에 침몰하는 접근은 짐이 많다. 경험세계에 들어가 법제 등 구체적인 사항을 요구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그 요구사항이 합목적적이지 않았다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성매매 현실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결론지을 일이다라는 것은 제쳐놓고라도 이런 현실적인 접근은 최악의 경우 성매매를 다루는 모든 구체적인 것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추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은 예를 들어 감옥수가 감옥에서 노동을 할 때 임금을 줘야 하는가, 줘야 하면 얼마나 줘야 하는가 하는 것과 같은 아주 보잘것없는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예를 들어 1998.7.1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BVerfG, 2 BvR 441/90, http://www.bverfg.de/entscheidungen/rs19980701_2bvr044190.html)이 그런 내용이다. 감옥수의 시간당 임금이 당시 1.5 마르크였는데 이것이 기본법 11(“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다.”)에 명시되어 있는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판결이다.

 

진보 또는 좌파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현실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이 이하로 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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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베헤모쓰. 그리고 신

낭만주의적 국가론은 국가를 신체와 가족에 비교한다. 이 국가론에 따르면 국가는 확장된 가족공동체이며 이런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어떠한 규정의 제약도 받지 않는 의지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의 재현이 바로 수령으로서의 대통령이다.

 

이런 대통령은 신과 같은 예단의 능력이 있고 (“대통령은 국가안보 비상사태의 원인을 예단해야 할 고유한 책무”. 정호승/특별기고) 또 잘못하더라고 잘못을 따질 수 없는 수령이다. (“원인 제공은 이 정부의 잘못된 대북정책”. 정호승/특별기고)

 

수령은 민족을 악에게 구출하지 못해도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 수령이 유익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령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Franz Neumann, 베헤모쓰, 국가사회주의[나치] 구조와 실제)

 

 

정호승도 이런 국가론을 따르고 있다. “입대 4개월 만에 희생된, 시신조차 찾지 못한 천안함의 막내 정태준 일병 영정은 차마 바라볼 수 없다.” 정태준 일병은 그냥 해군 일병이 아니라 막내. 정호승은 일가족의 막내가 죽었는데 어찌 가만 있을 수 있는가라고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락되고 어떤 행위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법치사회이전의 가족관에 사로잡혀 있다.

 

정호승은 이런 무법적인 복수와 보복을 부처님이 요구한다고 한다. 독화살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독화살은 막내정태준 일병의 등에 비수를 밖은 민주주의자와 노동운동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국가의 한 부분이 사라지고 옷가지나 머리카락, 손발톱만남은 것에 신도 분노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 졌다고 한다. 이런 신을 가엽게 여기는 우리정호승이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구약성경 이사야 42 14절과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숨이 차서 헐떡이는,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부르짖겠다.” “깎아 만든 우상을 믿는 자여, 부어 만든 우상을 보고 우리의 신들이십니다하고 말하는 자들은, 크게 수치를 당하고 물러갈 것이다.“

 

베헤모쓰를 쳐부수는 신이 나타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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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Dolchstosslegende>. 그리고 나치.

정호승 :

“봄 비가 내린다. 연사흘 줄곧 내리는 이 비는 통곡의 봄비다. 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채 서해에 수장된 천안함 장병 46명이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다. […]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도 물증을 찾아야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우울하다. 햇볕정책의 결과가 바로 이것인가. 그 동안 남한이 북한에 보낸 ‘화해의 햇빛’은 지금 ‘기습공격의 그늘’이 되어 우리 아들들을 수장시키고 말았다.” (정호승, donga.com 특별기고. 강조 ou_topia)

 

나치하 제국자료청:

“[독일제국 군대가] 저항의 최후수단을 다 동원하지 못하고 1918년 11월 11일 적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휴전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선에서 사기가 떨어진 전투력이 아니었다. 전투에 나선 군대의 등에 단도를 찍는 국내의 혁명이었다.” (나치하 제국자료청이 1942/1943년 발간한 “1914-1918년 세계대전”의 마지막 부분)

 

아돌프 히틀러:

우리는 외부로 향한 새로운 투쟁을 전개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휴전을 강요한] 11월 범죄자들이 등뒤에 있는 한, 독일 시그프리드의 등에 다시 창이 꽂힌다는 사실을. (아돌프 히틀러, 1923.1.27 „민족의 파수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데 가장 크게 쓰여진 도구는 다. 는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독일군이 비겁하게 뒤에서 등에 단도를 찍는 기습공격을 당하여 패하게 되었다는 힌덴부르크가 1918년 11월 18일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의 조사위원회에서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퍼뜨린 거짓말이다. 사실은 독일제국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힌덴부르크와 그의 참모실장 루덴도르프가 1918년 8월 14일 빌헬름 2세에게 연합군의 우세를 인정하고 패전을 피할 수 없다고 휴전을 권한 것이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거짓말이었고 책임을 정치로 돌리려는 술책이었다. 힌덴부르크가 패전의 원인으로 드는 것은 구체적으로 1917년 제국의회의 평화결의와 1918년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다. 즉, 민주주의자들과 노동운동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적의 영토에 깊숙이 들어가 있고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군의 등을 치고 계획적으로 군의 사기를 떨어드렸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은 극우와 나치가 악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하고 대변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입에 거품을 무는 증오에 찬 선동에 사용되었다. (참고, 독일역사박물관 웹사이트 www.dhm.de/lemo/html/weimar/innenpolitik/dolchstoss). 

 

 

정호승의 특별기고가 목적하는 바가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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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운동

간장 오타맨...님의 [한국이주운동 과정과 이주운동 현황 및 활동과제] 에 관련된 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주노동자운동의 확대경으로 지적해 주신 문제점들을 참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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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진보와 지적활동. 그리고 소박성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천안함 침몰에 대한 특별기고를 읽으면서 파시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호승의 파쇼발언은 엉뚱한 사고가 아니라 그의 시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이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호승의 시 한편으로 그의 세계관을 촘촘히 엮어내어 그것을 그의 파쇼발언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어쩌면 억지로 보일 수도 있겠다. 

논자 자신도 현단계에서는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즉 정호승의 시를 사유하고, 사유된 사상을 만인이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이념으로 다듬어 논 수준에 와 있지 않다. 그래서 이하의 글은 정호승과 그의 시를 사유하는 과정에서의 중간보고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전제하고 말문을 열어본다.

우선 정호승의 시인으로서의 성실성을 살펴보자.  <작가세계> 2009년 가을호에서 '나는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오마이뉴스에서 인용)이라는 데서 정호승은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따르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럼 소크라테스가 한 행위에서 소크라테스의 자세란 어떤 것이지 한번 살펴보자. 플라톤의 대화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순수한 학문도 아니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적인 지식도 아니다. 여기까지는 정호승도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부분, 즉 자기자신을 명확하게 알아보는 것은 멀리하고 있다. 소박해서 그런지 아니면 지적활동을 하기 싫어서 그런지, 아니면 정호승의 소박이 바로 지적활동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자신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것은 반드시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logon dounai kai dexasthai/플라톤, 국가 제7권, 531e) 자기 말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호승의 특별기고는 그가 소크라테스 정신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시인이고 소크라테스적인 정신의 저편에 서있는 시인임을 보여준다.

<경향>과의 인터뷰나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정호승은 ‘알기 쉬운 말로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 같다. 소박한 백합꽃과 같은 인상을 주는 시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소박성에는 거짓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소박성은 아마 앙겔루스 실레지우스의 장미일 것이다.

“장미는 <왜>라는 질문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꽃을 피워도 다른 이유없이 꽃을 피운다. 장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누군가가 자기를 보나 걱정하지 않는다.”(Die Rose ist ohne Warum./Sie blühet, weil sie blühet./Sie achtet nicht ihrer selbst,/fragt nicht, ob man sie siehet.)

그러나 정호승의 소박성은 이런 소박성이 아니다. 누군가가 봐주기를 원하는 소박성이다. 아니 이런 소박성을 알아보는 “나”가 시의 중심에 서있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소박하지 않고 추상적인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간 낭만주의적 운동의 산물이다. 마치 베르테르가 동생들에게 빵 썰어주는 로테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세상은 멀리하고 자신에 도취되는 행위의 산물이다.

진보가 지향하는 소박성이 이런 것일까? 진보가 지향하는 소박성은 구체적인 결핍과 요구가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다. 모든 해방이 이루어진 상황에서만 가능한 소박성이다. 이것을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한다.

 

행복한 사건

 

아이가 달려온다.

엄마, 앞치마 묶어줘!

앞치마가 묶여진다.

 

Glücklicher Vorgang

 

Das Kind kommt gelaufen

Mutter, binde mir die Schürze!

Die Schürze wird gebun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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