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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빈집점거운동

ou_topia님의 [적법, 불법, 똥은 마찬가지] 에 관련된 글.

 

스폰티스(즉흥행동주의자), 슐라피스(기성세대가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비판하는 기성세대거부자), 카오텐 (질서를 모른다고 비판하는 기성세대가 쓰는 말). 새로운 청소년.청운동의 심리적, 정치적 전망(Spontis, Schlaffis und Chaoten. Psychologische und politische Perspektiven der neuen Jugendbewegung)

 

칼-미샤엘 쿤쯔(Karl-Michael Kuntz)

 

빈집점거는 정치계주류와 서독의 다수를 이루는 다소 보수적인 기성세대에겐 불안한 것이고 자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사실은 명백하다. 즉, 빈집점거는 거주공간을 찾아 헤매는 떠돌이들의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종이쪽지에 불과한 정책과 요구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기는 대안운동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는 시도임과 동시에 그 결정체다. 또한 젊은 유권자의 지지로 가능했던 녹색당 혹은 ‚다색리스트‘의 [선거에서의] 약진은 기존3대정당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렇게 빈집점거는 삶, 사회, 민주주의, 그리고 미래에 대한 토론과 입장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질문이 야기된다. 왜 지금까지 박력 없다는 냉소를 받아왔던 청소년.청년들이(Schlaffis) 빈집을 점거하고, 아주 다양한 대안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 됨에도 불구하고 병역을 거부하게 되었는가? 왜 하필이면 빈집점거가 대안적인 삶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출발점으로 대두되었는가? 빈집점거와 시간적으로 평행을 이루면서 아니며 내용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진행되는 정치운동이 단지 타다 금방 꺼지는 짚불에 불과한 것인가? 주류 정당은 불이 꺼질 때가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운동“이 식어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문제를 질질 끌고 가기만 하면 되는가? [기존체제에] 순응하는 보수다수와 새로운 것을 즐거이 받아들이는 대안주의자들간 이념적 차이가 얼마나 깊고, 근본적이며, 견고한가? 이들간 소통과 공존에 있어서 문제는 무엇이고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 한마디로, 대안운동에는 어떤 원인, 의미, 그리고 미래전망이 있는가?

 

이 글에서 대안운동의 특수한 성격을 스케치하고, 대안운동의 동기를 아브라함 매스로우의 욕망모델에 기대에 앞으로 전개될 다양한 발전가능성을 스케치해 볼까 한다.

 

대안운동은 다양한 흐름과 프로젝트그룹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평화운동, 반핵운동, 여성운동, 폐가점거수리운동, 도시의 거주지역주민운동, 자율관리 청소년센터, [심리]치료그룹, 시민권운동, [자율적인] 유치원 등 말이다. 동시에 아주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이념적인 흐름들이 합류하여 대안운동이 들끓는 역동성을 지니게 한다. 공동행동, 집결장소, 공동매체 등으로 이어져 있는가 하면 아주 섬세한 뉘앙스 차이로 서로 간격을 두거나 내용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시민인니시어티브와 같은 그룹에서는 주류사회의 기구들과의 관계가 매우 유연하고 유동적이다. 수많은 그룹이 중점을 달리하여 다양한 타개대상을 설정하고, 다양한 뉘앙스와 색채를보여주고 있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가치관에서는 몇몇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장주의신봉(Wachstums-Fetischismus),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소외를 야기하는 과대한 소비, 최첨단으로만 치닫는 기술[문화], 후견으로 행세하는 관료주의 등의 거부에는 통일되어 있다. [긍정적이 면에서] 그들은 다 사회적이고 개별적인 자기실현, 내적 정신적 그리고 창조적인 능력 개발 및 발휘에 찬성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대안주의자들에게는 „존재“가 „소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정서Grundstimmung)는 특히 빈집점거에 명백하게 가시화된다. 건축물을 보존하여 자원과 노동을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것을 방지한다. 거주공간을 수리.복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개발하고 자기실현적인 노동을 한다. 돈 지랄하고 돈 드는 사치대신 요령을 살린 창조성이 들어선다. 자율적인 자기노동으로 타율적인 노동을 줄인다. 동시에 빈집점거는 인간의 기본욕구, 즉 지붕아래 살려는, 물질적으로 보호된 공간에서 살려고 하는 욕구에 역행하는 소유권제도를 멀리하고 경멸한다. 마지막으로 빈집점거는[파괴적이지 않고] 형성적인 항쟁을 가시화하는데 몇몇 되지 않는 가능성의 하나다. 군비확산, 원전, 고문, 검열 등 구체적인 경험세계에서는 가시화되지 않는 다양한 폐해와 위협에는 시위 외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반면 거주공간을 파괴하는 것은 점거 후 복구.수리를 통해서 부조리한 짓이라는 것을 백일하에 들어나게 할 수 있다. 점거 후 복구.수리해서 사는 사람들을 내쫓는 행위는(원전설립을 위한) 토지를 보호할 목적으론 경찰을 투입하고 거주공간을 스스럼없이 파괴하는 것은 내버려두는 이치에 어긋나고 반인간적인 시스템의 자세를 빼도 박지도 못하게 고발하는 것이다. 이럴 때 어쩔 수 없다고 매번 등장하는 „사태적 강제“가 허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은 정치인들이 만든 법과 세제로 가능하게 된바, 역시 그들이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인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법률가들은 [„그런걸 어째“하는] [하버마스의 감초인] ‚사실적인 것의 규범력‘(normative Kraft des Fakischen)을 관철하는 데는 도가 터 항상 그 근거를 마련하는 길을 찾아낸다. 이런 상황에서 실천적인 관철력, 즉 이론의 실천가능성을 백일하에 드러나게(anschaulich) 하는 빈집점거운동이, 관성적인 형태를 넘어선 실천형태가 대대적인 공.동조를 받으면서 정치적 영역에서까지 성과를 이룩하게 되었다.

 

과반수 이상의 독일시민이, 정확하게 51 %가 여론조사에서 빈집점거에 동조한다고 대답했다. 이 여론조사는 보수적인 엘리자베트 뇔레-노이만 교수가 소장인 알렌스바흐 여론연구소가1981년 초에 실시한 것이다. 31%는 이해가 안 간다고 대답하고, 18%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좋을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중략] 마침내 전통적으로 국가권위에 허리를 굽히는데 익숙한 시민이 최소한 „출입금지“란 푯말이 서있는 잔디밭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관대하게 보게 된 것이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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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법, 불법, 똥은 마찬가지

„적법, 불법, 이러나 저러나 똥은 마찬가지“(„Legal, illegal, scheißegal").

 

이 구호는1970년대 이후 생활 자결.자치권을 주장하면서 빈집을 점거하고 농성하는 학생 및 청년들이 용역깡패를 동원한 부동산소유자와 그 집행인 경찰에 대항하여 외쳤던 구호. 전통적인 거주공간을 다 철거시키고 현대화한다는 명목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나가게 강요하고 폐허가 되게 방치해서 싹 쓸어버릴 수 있는 빌미를 만들려고 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그리고 이런 틈에 독일 세제의 구멍을 악용하여 납세의무로부터 빠져나가려고부동산놀이로 집을 사들인 저속한 자들의 소유권행사 주장에 대항하여, „폐가가 되게 소유하는 것보다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낫다“라는 구호로 맞섰던 무정부주의자들.

 

빈집점거운동(Hausbesetzer-Szene)은 70년대 프랑크부르트에서 시작하여 서베를린, 뉘른베르크, 프라이부르크, 괴팅엔, 함부르크, 슈트트가르트, 칼스루헤 등 독일 대학도시에서 일어나고 진행 중인 운동.

 

정부는 빈집점거청년.대학생들을 불법악성무리라고 규정하고 법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강력한 투쟁 전개. 그들은 거주공간확보를 넘어서 고립대신 협력, 상상력빈곤대신 활기찬 대안, 타자에 의한 결정대신 자발적 궐기를 요구하며 투쟁. 이런 완강한 버팀에 국가권력이 처음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무력을 투입하고 급기야 대량검거로 반응.

 

돌이 날라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유리창문들이 산산조각이 나자,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주민들이 공.동조하자 거주공간결핍문제는 법과 경찰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이슈로 부상. 결국, 거주공간확보와 빈집점거문제는 더 이상 은밀하게, 그리고 당사자가 피해보는 방향으로 처리될 수가 없게 공론공간 형성.

 

원문: Stefan Aust, SabineRosenbladt, Hausbesetzer

 

시간이 나는데로 이 책을 틈틈이 소개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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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슈바벤 사람들 이야기 - 루이제 하러 "천천히 먹고 오래 씹어라"

슈트트가르트 근방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 독일 서남부지역 슈바벤엔 종종 간다. 비행기에서 내려 친구가 살고 있는 동네에 가면 아주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산뜻하고 정돈된 길과 집들. 허허벌판 길거리에도 과일나무를 심어놓은 배려(?) (아니면 땅 놀리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거기에 가면 뭔가 근질근질한 베를린의 분산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던 중 몹쓸 병에 걸려 슈발츠발트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이 지방 특유의 억양과 여성에 푹 빠진 기억, 그리고 오후 한나절 산야를 걷다가 선술집(Kneipe)에 들려 덜 빠개진 밀알로 만든 짙은 밤색의 <검은빵>에 슈발츠밸더 쉰켄을 두툼하게 잘라 올리고, 또 그 위에 싱싱한 양파를 둥글둥글 썰어 올린 간식, 밀알이 입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씹히는 맛 등 이 지역은 나에게 항상 훈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지역이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그 지역사람에 대한 글을 써봐야지 하고 있다. 늘 그러듯이 생각만 하고 있다가 오늘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이런 글이 있다. “슈바벤에대한 이미지– 한 지역성격의 구성”제하 튀빙엔 대학 실증(경험?)문화학과 프로젝트그룹이 진행한 연구결과를 묶어 편찬한 책이다. 거기에 프리데만 슈몰(Friedemann Schmoll)의 “천천히 먹고 오래 씹어라 – 루리제 하러(Luise Haarer)가 지은, 그럴 의도로 쓰지는 않았지만 슈바벤을 대표하는 토양요리책이 된 역사”란 논문이 눈에 띄고 재미있어 보인다. 요리는 좋아하고, 잘하고(smiley), 또 매일 해야 하니까(sad) 뭔가 건질 것이 있을 것 같아서 읽어보았다. 소개해 본다.

 

 

 

“기본요리법에 따른 요리와 [빵/케이크]굽기(Kochen und Backen nach Grundrezepten)”란 제목으로 1932년 처음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 27번이나 재발간 되어 백만 권 이상 팔린 이 요리책을 슈몰은 이제 재대로 된 슈바벤의 부엌이라면 빠질 수 없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그 발간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1932년 루이제 하러가 이 요리책을 처음 선보였을 때는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장르의 책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였다. 그리고 이런 붐은 독일에서 살림하는 일이 폭 깊은 변화에 처하게 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보살핌을 주역으로 하는 여성이미지가 밖에 나가서 취업하는 여성시대가 시작되면서 통째로 흔들리게 되었고, 기술혁명은 세탁기로부터 시작하여(1870년부터 수동세탁기 사용), 전기오븐(1891년 이후), 진공소재기(1906년 이후) 등 차쯤 살림살이를 정복하게 되었다. 일상생활의 지식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자연적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싱크대와 광 사이를 오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길잡이란 매체가 필요해 졌다. 지속되는 현대화 바람에 빠지게 된 살림살이는 전통적인 일상생활지식으론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끝없이 보이던 엄마와 할머니의 지식창고에 더 이상 기댈 수가 없게 되었고,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정돈된 요리책이 요구되었다.

 

근데, 이런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시대의 유행에 따라서 멋있게 보이는, 이것이 좋다네 저것이 좋다네 하는 식생활습관의 어지러운 변동에 따라 많은 요리책이 발간되었는데 살아남은 책은 몇 권 안 된다. 그 중 하나가 이 요리책이다. 그 이유를 슈몰은 이렇게 설명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이 아는 사람들 사이엔 아직도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이유는 아래와 같은 마법공식에서 기인할 것이다. 알쏭달쏭한 요리법을 거추장스럽게 늘어놓는 대신 간단명료한 기본요리법을 요리기술의 왕도로 가르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개개인이 창조력과 기발한 착상을 착착 쌓아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이런 기본요리법의 원칙은 간직과 갱신의 맛나는 밸런스, 전통과 변화의 적절한 믹스, 잘 닦여진 것으로 전해 받은 것과 새로운 창조의 공전을 담보하고, 검증된 것을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이니시어티브를 장려하는 원칙이었다.

 

1958년 판, 루이제 하러의 말을 들어보자.

 

기본요리법과 기본법칙이란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소개된] 요리에 변형을 주고 더 개발하는 수단이 모든 지각있는 여성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런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을 쓴 사람이 어찌 목사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겠는가. 루이제 하러는1892년 헤르츠펠트(Härtsfeld)에서 태어난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우라흐(Urach)로 이사해 여성가사학교(Frauenarbeitsschule)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한 영국인 가정에서 가사를 돌보는 일을(Haustochter) 한다. 약혼남이ㅜ1차 대전에서 전사한 후 독신으로 살다가 나중에 수(手)작업 교사 헬레네 뢰쉬(Helene Rösch)와 동거한다. 1917년 고향으로 돌아와 25세에 슈트트가르트 소재 슈바벤 여성단체의 가사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가사학과 교사 자격증을 딴 후 1923년부터 에쓰링엔(Esslingen)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중 위 요리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영향으로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문화부에서 가사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할 내용과 교사교육 및 재교육을 담당하는 고급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957년 은퇴한다. 그리고1976년 헤렌베르크(Herrenberg)에 있는 양로원<저녁쉼터/Abendruh>에서 별세한다.

 

 

슈몰은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이 단순한 요리책만이 아니라고 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은 단순한 레씨페 모음집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루이제 하러는 맛나게 하는 요리법들을 하나로 엮는 가운데 우리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책을 선사하고 덕과 몸가짐을 교육한다. 실용성, 깨끗함, 검소, 열심, 절약, 그리고(…) 허풍이 들어가진 않은 참신한 맛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이런 여성타입은 이젠 뷔르템베르크지역 개신교 여성동아리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런 여성타입을 만들어내는데] 루이제 하러도 한몫한 것이다.

 

그러나 쌀이 나무에서 열리는 것으로 알고, 슈퍼에서 사시사철 야채와 과일을 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 요리책은 신선한 충고를 준다.

 

서구 공업화된 나라라면 사시사철 어떤 식품이라도 사 먹을 수 있게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루이제 하러는 잃어버린 계절의 리듬을, 예전에 논밭에서 계절 따라 나온 것으로 차린 반찬의 바뀜으로 맛볼 수 있었던 계절의 리듬을 다시 갖다 준다. 루이제 하러에게는 모든 것에 자기 시간이 있다. „항상 시장에 뭐가 나오는지 고려하라. 그리고 과일과 야채를 살 땐 잘 익은 시기를 기다리고, 생선을 살 땐 잡는 시기를 기다려 사라.“라고 충고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나라는 유행을 따라가는 맛, 휘황찬란한 뭔가를 보여주려는 스타일이 지배하지 않고 자연이 다스리는 나라다.

 

뿐만이 아니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쌀독에 쌀이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넘쳐나는, 가난과 풍부함의 교차를 기억하라고 한다.

 

„살림살이할 돈이 부족할 경우, 누룩으로 과자를 만들어라. 누룩으로 만든 과자는 버터와 달걀이 들어가지 않아도 부스러지지 않고 맛있다.“

 

그리고 같은 요리에 약간의 변화를 줌으로써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일생생활과 특별한 날간의 미소한 차이를 느끼게, 하늘의 향한 일요일과 그저 그런 평일을 구별하게 한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은 „단순한“, „정성들인“, 그리고 „좋은“ 애플케이크를 구별하고, 구겔호프(혹은 구겔후프/모자모양의 카스텔라)의 경우 심지어 „단순한“, „좀더 낳은“, „정성들인“ 그리고 „아주 정성들인“ 등으로 세분한다. 요리 대가 루이제 하러는 버터를50그램 더 넣거나 아니면 평소보다 달걀 한 개를 더 넣어 오늘이 쉬는 날인지 아닌지를 미소한 맛 차이에서 느끼게 한다.

 

목사가정에서, 그것도 모든 것을 하는데 있어서 성서에 근거를 두는 (예컨대16세기 이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의12가지 요구도 복음서에 근거를 두고 제기됨) 이 슈바벤 지역에서 태어난 루이제 하러가 청교도적인 절약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으랴.

 

„시장을 볼 때 항상 식품의 가격과 그 영양가치를 비교하여라.“ (…) 가스오븐의 불은 반듯이 요리준비를 다 마치고 솥을 올려놓은 다음에 켜라.“ 그리고 „불이 솥 밑에서 옆으로 나오지 않게 주의하라.“

 

이런 청교도적인 절약이 지배하는 살림살이의 최고봉은 남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하는데 있다. 슈바벤 부엌엔 물론 남은 음식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있을 수 없다.

 

군지 오래된 검은빵(Schwarzbrot)은 야채와 함께 쉽게 먹을 수 있는 국으로 변화고, 딱딱해진 브뢰챈[주먹만한 빵. 보통Brötchen이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Weck, Semmel, Schrippen 등으로도 불린다.]은 갈아 반죽해서 크뇌델을 만들고, 김빠진 맥주는 싱크대 구멍에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라, 녹말분과 계란 몇 개를 넣어 걸쭉하게 만들고 그 위에 개피가루 뿌리는 둥 마는 둥 해서 먹는, 옛날 남독 아침식탁에 늘 등장하던 맥주국이 된다. 그리고 가이스부르크(Gaisburg)이란 슈트트가르트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거주 도시의 이름을 따 만들고 뷔르템베르크주 군인들이 즐겨 먹던 „가이스부르거 행진(Gaisburger Marsch)“이란 수프 역시 이렇게 낡은 것을 새롭게 하는 창조적인 남은 음식 재활용에서 나온 것이다. 어제 먹고 남은 스페쯜레(Spätzle – 반죽을 강판에 밀어 만든 길이 짧은 국수, 멀게 우리 수제비와 비슷함.)를 그저께 먹고 남은 듬성등성 썰은 감자와 함께 육수에 섞어 만든 – 가계부가 허락하면 수프용 고기를 더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관두어도 괜찮은 – 국이다. 예전엔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 노동자와 농부의 살림살이 부엌 밖으론 나오지 못하다가, 지금 들어선 소위 미식가식당의 메뉴판에까지 올라가고 고급 문화유산으로 취급되고 있다.

 

루이제 하러의 요리책은 우리 머리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요리법을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려준다. 그리고 이 요리책은 이렇게 토양에 기반하기 때문에 몇 번 시도했지만 다른 지역에선 거의 판매되지 않았다. 사가는 사람은 어김없이 슈바벤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토양적인 요리, 지역주의, 그리고 가정주부문학간의 복잡한 상호영향관계를 파헤쳐보는 것이 음식민속학에서 해볼만한 연구과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빌헬름 하인리히 릴(Wilhelm Heinrich Riehl)이 일찍이 관찰했듯이 „여러 족속을 두고 볼 때 입과 위에 대한 것보다 더 보수적인 것은 없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되고 이듬해 독일 전국에 무게와 길이를 재는 하나의 잣대가 도입되면서 부엌문학부분에도 역시 획일화가 시도된다.

 

„담백하고, 좀더 우아한 시민식탁을 위한 대형 그림요리책“의 지은이 마틸데 에르하르트(Mathilde Ehrhardt)는 빌헬름[제국]시대의 요리책이 수행하는 목적이 제국의 부엌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있다고 한다.

 

„다수의 요리책에서 노출되는 취약성을 찾아내는 것에 발행인은 주목하였다. [이젠] 어떤 가정주부라도, 동서남북 어디에서 살든지 독일언어권내에서 생활하면, [요리에 관하여] 뭔가 궁금한 일이 생길 때 이 책을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제국이 선포되고 난 이후부터 토양적인 요리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요리책은 아마 국민국가(Nationalstaat)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역의 정치적 주권이 중앙정부로 넘어가는 상황에 맞서 부엌과 함께 맛을 음미하는 목구멍이라고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

 

이어 슈몰은 루이제 하러 요리책의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루이제 하러의 성공비결은[요즘 유행하는 슈바벤 하이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기술발전으로 야기된 변화를 합목적이라면 받아들인다는 열린 마음과 막 전개되는 여성취업노동시대에 들어와 전통적인 여성의 자기역할이해에서 점진적이고 끈끈한 변화를 이야기한 이 요리책의 양면적인 모더니티에 있을 것이다. (…) 루이제 하러는 토양적으로 각인된 요리와 살림살이를 받아들이고 보살핌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여성역할에 대한 전통이데올로기를 여성취업시대로 이행하는 보수주의를 고집했다. 일상생활에 관한 지식이 점점 더 과학으로 둔갑하는 시대에 [요리와 같이 다양한 작업이 동시에 아니면 줄지어 진행되어야 하는] 복합적인 일의 기본구조를 알게 하는데 성공했다.

 

아무튼 루이제 하러가 소개하는 요리는 요즘 들어 유행하는 소위 덜 가공화 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영양학자들이 재발견해내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루이제 하러의 성공은 체르노빌사태, 광우병, 몸매관리, 다이어트, 콜레스토롤 등 음식에 관한 조언이 난무하는 시대에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정언적 명령과 같은 엄격하지만 친절한 명령에 대한 향수에 있을 수도 있겠다.

 

루이제 하러는 „밥을 먹을 땐 필요 없는 온 갓 잡음, 격렬한 대화, 그리고 독서, 라디오와 같은 정신 사납게 하는 여타 행동을 삼가라. 이 모든 것들이 소화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친절하고 지시하고 여유를 갖고 밥을 먹으라고 한다. „천천히 먹고 오래 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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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녹색당 역사

사진1: 루디 두치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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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지지데모에서 연설하는 68운동의 상징 및 독일사회주의대학생연맹 대표이자 학생운동지도자였던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 독일 보수매체, 특히 “빌드짜이퉁”으로 선동된 피격사건의 후유증으로 1979년에 사망. 사망직적 녹생당에 입당. 녹색당은 70년대 후반에 반핵운동을 주축으로 하여 환경보호운동, 평화운동, 인권운동, 여성해방운동, 두리반과 같은 거주공간을 사수하는 농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다양한 신사회운동의 결합체로 결성됨. 당시 독일의 상황은 “독일의 가을”로 역사에 기록되는데, 반제투쟁을 주요이념으로 하여 정.경의 핵심인물을 납치.저격하는 방식으로 제국주의 중심부에서 전투를 전개한다는 적군파의 도시게릴라전으로 어지러운 상황. 당시 헬무트 슈미트 사민/자민 연정은 적군파를 색출하고 고립한다는 목적아래  “그믈망 수사(Rasterfandung)”, 적군파 수감자를 완전 고립시키는 조치(“Kontaktsperre”) 등 인권을 침해하는 조치를 도입.

 

사진2: 녹색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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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색깔이 강한 신사회운동은 1980년 1월 칼스루헤에 모여 창당대회를 갖고 전국정당으로 결성됨.

위 사진의 초대 녹색당 지도부. 로테이션제도로 지금은 공론장의 기억에서 사라진 인사들(August Haussleitner, Norbert Mann, Herbert Gruhl, Gisela Schüttler, Dietrich Wilhelm Plagemann, Karl Kerschgens, Alfred Vordermeier). 제도권 밖의 투쟁을 바탕으로 하여 결성된 녹색당은 루디 두치케가 요구한 제도권내에서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점진적으로 장악한다는 전술채택.

 

사진3: 본(Bonn) <호프가르텐/Hofgarten>에서 반전시위하는 군인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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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총선에서 연방하원에 진출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사민/자민 연정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소위 “나토이중결정”에 의한 중거리핵미사일의 독일배치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 확산. 1981.10.10 약30만 명이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 대학의 캠퍼스 <호프가르텐>에서 반전반핵시위. 이런 반전반핵시위는 군인들에게까지도 확산.

 

사진4: <바커스도르프/Wackersdorf>핵원료 재처리공장 건립을 저지하기 위해서 경찰과 몸싸움하는 반핵시위대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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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의 주축을 이루는 반핵운동은 “벤드란트 자유공화국”(Republik Freies Wendland)을 선포하고 자체 라디오방송을 운영하고 원전건립지역에 촌을 만들어 거주하는 등 강력한 투쟁전개.

 

사진5: 1983년 조기총선에서5.6%를 득표하여 연방하원에 진출한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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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반전평화운동의 상징 페트라 켈리. 그 옆은 마리루이제 벡  

 

사진6: 1987년 전당대회에서 뜨개질 하는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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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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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헷쎈주 사민/녹색연정의 환경부장관으로 선서하는 요쉬카 피셔. 신고 있는 운동화가 겉차림을 중시하는 수구꼴통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는지 물의를 일으킴. 저 운동화는 지금 오펜바흐(Offenbach) 가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

 

사진8: 1990년 통독후 실시된 총선에서 연방하원에 진출한<동맹 90>. <동맹 90>의 게르드 포페(Gerd Poppe)와 동독사회통일당 최후 총리 한스 모드로우(Hans Mod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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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통일독일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서독 녹색당은5%이하 득표로 연방하원에서 탈락. 대신 동독의 <동맹 90>는 동서독지역에 상이한 선거법을 적용하여 연방하원에 진출. 1993년 서독의 녹색당과<동맹90>이 동맹90/녹색당으로 합당.

 

사진9: “너는 나 외 신을 둘 수 없다.” 로테이션제도에도 불구하고 녹색당의 당권을 장악한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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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1998년 총선에서 녹색당이 정권에 참여하면 소위 “생태계세금”으로 자동차 휘발유 값이 5마르크(2.5 유로)까지 올라갈 거라고 공략하는 기민당 사무총장 페터 힌쩨(Peter Hi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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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 6.7%을 득표하여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게 된 녹생당 피셔, 당시 사민당 당수 오스카 라폰테인, 사민당 총리후부 니더작센주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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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라폰테인은 독일 재무부를 통해서 국제금융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슈뢰더의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사민당에서 탈당하고, 종업원평의회에 기반한 독일노조의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된 <취업안정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Wahlalternative Arbeit und soziale Gerechtigkeit>에 참여. WASG는 이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예인 민주사회주의당(PDS)가 좌파당(Die Linke)으로 합당.

 

사진12: 피셔의 변신과 함께 유고전을 놓고 녹색당내부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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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소보전 개입을 앞두고1999년 5월 소집된 임신전당대회에서 „유럽에서 아우슈비츠를 허용할 수 없다“라면서 독일연방군 유고전 개입지지를 당원에게 호소하는 피셔가 „피세례“를 받았다.

 

사진13: 녹색당 노선을 놓고 피셔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근본주의자/Fundis“ 대표 유타 디트푸르트(Jutta Ditfurt). 당권을 피셔가 이끄는 소위 „현실주의자/Realos“에게 내주고 탈당. 이후 <생태계민주당/Ökologisch-Demokratische Partei>를 창당하고, 프랑크푸르트 시의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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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의 유고전개입 논거를 „아우스슈비츠를 빙자한 거짓말“이라고 비판.  

 

사진14: 적.녹연정이 원전을 가동하는 전력회사와 합의하여 달성한 <핵하차/Atomaustieg> 정책에 반발하는 녹색당 당원. “엄청나게 좋다는 정부의 핵하차는 임금님이 입은 새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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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하차는 더욱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비판.

 

그림15: 70년대부터 무정부주의자와 거주공간사수 농성의 본거지인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서 2002년 총선에서 녹색당후보로 처음으로 직선된 하원의원 크리스티안 스트뢰벨레(Christian Ströbele). (오토 쉴리와 함께) 적군파 멤버들을 변호했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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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드 자이프리드(Gerhard Seyfried)의 그림. 녹색당이 대도시에선 대중정당으로 부상한 것을 보여주고 있음. 프라이부르크, 튀빙엔 등의 대학도시의 시장은 이미 녹색당이 차지하게 되었고, 2011.3.27일 바덴-뷔르템베르크와 라인란트-팔츠 주총선과 함께 실시된 헷쎈주 기초단체선거에서 시장을 사민당이 예약해 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녹색당 후보가 시장에 당선.

 

사진16: <슈트트가르트21> 중앙역 신축사업에 반대하는 주민을 무력 진압한 주정부와 경찰. (201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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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선에서 기민당/자민당이 참패하게 된 첫째 원인. 녹색당은 어정쩡한 사민당과 달리 처음부터 주민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주민요구의 대변자가 됨.

 

사진17: 왼쪽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선 녹색당 후부 빈프리드 크레치만(Winfried Kretschmann)과 터키인 2세 녹색당 공동당수 쳄 외즈데미르 (Cem Özdem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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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ww.sueddeutsche.de/politik/erfolgsgeschichte-einer-partei-gruen-ist-die-zukunft-1.1077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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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집권보수연정 기민당과 자민당 본거지 주총선에서 참패

“원전가동기간을 연장하는 자는 자기 정치생명을 단축할 것이다.”

 

이걸 단지 수사학적인 표현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떵떵거리며 원전가동을 연장하였던 기민당/자민당 보수진영의 정치생명이 단축되었다.

 

오늘 주총선결과로 근 60년 동안 줄곧 집권하여온 기민당/자민당이 녹색당주도하 녹.적연정에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관련 몇 가지 메모

 

1. 민주주의 문제

 

– 녹색당 후부 빈프리드 크레치만(Winfried Kretschmann) 인터뷰: 이번 선거결과로 “시민사회(Buergergeschaft)가 강화되었다.” “슈트트가르트21” 사업을 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한 전 주정권. 소위 “절차민주주의”에 대한 반발. “Wutbuerger”(화난 시민)– 직접민주주의 문제

 

2. 생태계/환경보호운동

 

 – 약30년 동안 반핵을 변함없이 주장하여온 녹색당의 대대적인 승리

 

3. 사민당의 “주변화”(?)

 

4. 좌파당의 저조한 득표(약2.5%).

 

5. 생활환경(“땅”)에 애착을 갖는 “참신한 보수”의 정치세력화

 

6. 독일 기독교 경건주의(Quietismus)의 본거지. 생태계보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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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독립선언, 추진, 그리고 성취 - 펠트하임

생명 있는 것은 끝없이 커지거나 끝없이 작아질 수 없다. 모두다 나름대로의 크기를 가지고 거기에 알맞은 활동공간을 갖는다.

 

어쩌다 한 표 던지는 민주주의란 체제아래 살고, 소켓에 플러그를 꽂으면 전기가 흐르고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한없이 커질 수 있다고, 끝이 없다고 착각하고 산다.

 

그리고, 뭔가 거대한 것에 붙어있어야만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전기공급.

 

근데 독일의 한 조그만 마을이 전력회사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지금 자력으로 필요한 에너지 공급을 100% 충당하고 있다.

 

펠트하임은 주민 145명의 조그만 마을이다.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약 60여 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근데 이 마을은 온수와 전기를 재생에너지로 100% 자력공급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이장, 면장뿐만 아니라 세계방방곡곡에서 배우려 오고있다.

 

가격도 가장 저렴한 에너지공급자보다 10-20% 밑도는 상황.

 

1996년 풍력발전기 몇 대로 시작해 지금은 태양열전기, 바이오 가스, 자체 변압기, 충전기 등 자력공급을 위한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비한 상태다.

 

<Energiequlle>란 회사로 시작하여 지금은 주민이 모두 주주이며, 실업 또한 없다. 자력전력생산으로 창출된 일자리가 무려 70개다.

 

에너지 독립 불가능? 거짓말이다.

 

링크:

http://www.rbb-online.de/theodor/archiv/theodor_vom_25_04/feldheim ___das_1_.html

http://www.energiequelle-gmbh.de/downloads/eindorfsteigtaus.pdf

http://www.unendlich-viel-energie.de/de/der-deutsche-erneuerbare-energie-preis/leitstern-2008/laenderprofile/brandenburg/feldheim-in-brandenburg-ein-dorf-macht-sich-unabhaengig.html

http://www.brandenburg.de/sixcms/media.php/4055/feldhei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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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미국 아스펜 연구소 독일 지부에서 만나기로

미국과의 직접협상을 주장해온 이북의 입장을 미국이 일정 수렴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관련 <베를린너 짜이퉁/Berliner Zeitung>지는 2011.3.23 온라인판에

 

이번 만남의 장소가 동.서냉전시 중재자 역할을 했던 아스펜 연구소 독일지부란 점에 주목하고,

아스펜 연구소는 동서 냉전시 양블럭의 지도자들이 부드러운(neutral) 분위기에서 만나 문제해결의 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한 연구소라고 부각.

 

이번 만남을 통해서, 미국정부인사는 참여하지 않는 비공식만남이지만, 지금까지 김정일 정권의 양자협상요구거절로 일관해온 미국의 입장에 약간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추가보도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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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스트(Schlast)

슐라스트(Schlast)

 

어제 새로운 낱말 하나를 배웠다. <Schlast>.

 

“Reality Kills”란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시내구경을 하다가 배운 낱말이다.

 

계단엔 화창한 봄날 따스한 오후를 맞아 대학생들이 파충류처럼 햇빛을 쬐고 있었다. 그래, 파충류지, 이성의 빛을 받아야 하니까. 이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우리완 좀 다르지. 암튼, 그 사이를 뚫고 막스 고르키 극장에 들어가 물어보니 오후 5시에 문을 연단다. 네원, 좀 빨리 열면 안돼나. 오후가 텅 비게 되었다. 짝지와 약속한 시간도 당 멀었고.

 

<노이에 바허/Neue Wache>에 들려 케테 콜비츠의<피에타>를 둘러보고 어슬렁 어슬렁 박물관 섬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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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신박물관>의 단장은 이미 다 끝나고 주변정리공사가 한참이다. 합각머리를 쳐다보고 기분이 잡쳤다. 폐허상태일 때에는 보지 못했던 글귀가 거기 박혀있다. <멍청한 사람이 아닌 이상 예술을 증오하지 않는다>. 우아한 지성에 있는 우쭐이랄까, 뭐 이런 것이 스친다. 즈그들끼리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라틴어로 박아 놓았다. 예술이 왜 증오의 대상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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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가몬 박물관 앞도 공사중이다. 일하는 노동자들이 저쪽 한 구석에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다. 다가가서 인물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목구멍에서 러시아/동유럽의 소리가 나온다. 니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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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주의를빙두르면서돌로된몸들이꿈틀거렸다군데군데무리로밀집되어엎치락뒤치락서로얽혀있거나아니면산산조각이되어파편만남아있는몸들이었다몸통몸을받치려고뻗어내린팔일부가깨져나간엉덩이울퉁불퉁한덩어리등으로만남아있는파편에서몸의온전한형태를엿볼수있었다몸들은어떤형태든지항상정면대결의동작을취하고있었다몸을피하는순간적으로뒤로물러서는공격하는몸을쭉뻗거나혹은구부려방어하는동작이었다곳곳에는그런동작을알아볼수없는형태까지몸이지워진상태였다그러나아직홀연히남아있는한발짝전진하여버티고있는발홱돌려진등장딴지의윤곽등에의해서몸들은모두를하나로뒤덮는운동의일부를이루고있었다그것은거대한투쟁이었다거무칙칙한벽에서솟아오르는이투쟁은까마득한기억속으로완성된자기모습을더듬어나가다가다시무형의상태로침강하고있었다황량한땅바닥에서뭔가를움켜쥐려고쭉뻗어올린어깨와단절되어허허한공간에붕떠있는손깊이패인상처투성이에딱벌린입꽹한눈곱슬곱슬한수염이나붓거리는학대와혹사로일그러진얼굴폭풍에훌렁거리는망토의주름이모든것들이비바람에희석되어사라지기직전이었고본래의모습으로 돌아가기직전이었다금방부스러질것같은깨진조각들이었지만사사로운것들하나하나가모두자신의표현을간직하고있었고거기서전체를읽고알아낼수가있었다.“

 

페르가몬 신전에 배치된 하늘의 신과 땅의 신들과의 싸움에서 착취자와 직접생산자간의 투쟁을 읽어낸 페터 바이스의<저항의 미학>을 생각하다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고 산보를 계속하기로 했다.

 

 

뻥 뚫린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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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저렇게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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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독 공화국 궁궐)

 

이런 식으로 복구될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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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근데 땅이 기억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슐라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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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Schloss>와<팔라스트 데어 레푸블릭/Palast der Republik>이 어울린 <슐라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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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에게 찬찬히 설명해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슐라스트>가 뭔지 알게 되었다. 저 아이의 마음에 <슐라스트>의 꽃이 피기를 바라면서 짝지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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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만화

REALITY KILLS – 만화와 무대에 올라온 전쟁이미지“이란 제목아래 베를린 막심 고르키 극장에서 지금 (3월20-26일까지) 전시회 및 연극이 진행 중이다

 

이 전시회를 개최하는 막심 고르키 극장측의 취지를 보면

 

21세기에 사는 우리는TV앞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서 전쟁을 스펙타클로 소비하고 주견 없이 한 표 던지는 인간들이지만 희생은 실지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어떻게 하면 이런 인식하에 전쟁과 폭력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을까, 매체를 통해보는 전쟁이미지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함.

 

몽타주와 포토샵이 영상자료와 사진이 한 순간의 증거물이란 것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이런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에 와서 손으로 그린 Comic이 - 한 사실관계가 이렇다고 매일 밤 무대에서 재현하여 직접 보여주는 극장과 함께 – 현실 미달이라는 자기결함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여유 있게 다룸으로써 공론의 광장에서 새로운 의미로 지각되고 있다고 - [어, 이곳 부처님을 두고 하는 이야기 같네]  - 분석하고

 

Comic과 극장은  우리가 흔히 역사 혹은 현실이라고 일컫는 것이 항상 조작된 것에 불과한 것임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이런 매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낯설게하기(Verfremdung)가 TV 방송이나 글이 할 수 없는 주관적인 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고 함.

 

이어 이런 예술형식이 정말 차별화된 대안적인 전쟁담론을 가능케하는 포럼을 제공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사람과 사람간의 싸움을 동반하는 잔인성과 고통이 글과 이미지로 번역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테마를 구체화하고

 

전쟁이미지가 점점 불어나는 오늘날에 Comic과 극장을 동시에 사유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라고 함.

 

 

 

이 프로젝트관련 (70년대 말 독일정부가 적군파를 외부의 적으로 설정하고 여론까지 통제하던 시기, 좌파의 새로운 매체가 필요하다는 의식아래 1978년 몇몇 사람이 시작하여 지금 신사회운동의 유력매체가 된) taz지는 2011.3.22 이 프로젝트에 전시되는 3명을 소개하는데

 

말타 출신 조 사코의 만화 <보스니아>관련

 

조 사코는 대상화하여 최종결단을내리는역사서술에 빠지는 위험을 <팔레스티나>란 만화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르포만화수단으로 피한다고 함.

 

<보스니아>는 사코가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일 때 5개월 동안 거기서 (그 중 한 달은 고라즈데에서) 생활하고 만든 작품인데

 

사코의alter ego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지 않고 오로지 받은 인상, 목소리, 그리고 정보를 고정하여 시각화하는 “관찰하는 매체”로만 작용하고

 

소재를 사람과 그들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하여 늘어놓고, 티토, 빌 클린턴 등의 연설 인용문과 혼합시키고 역사적인 설명을 여기저기에 흘려놓고, 인터뷰대상을 그들의 기억하는 장소로 옮겨놓음으로써  단순한 영상이미지 다큐로부터 탈피한다고 함.

 

전쟁으로 인한 결핍, 상상 불가능한 잔인성 등이 이렇게 하여 견디기 힘든 윤곽을 드러내는데, 사코가 제공하는 컨텍스트는 단지 이런 것을 해석해보려는 시도이며 임의적인 조명이지, 조급한 이해나 전쟁신화화는 여기서 불가능하다는 것.

 

 

쟈크 타르디 관련

 

이는 신화화는 거리가 멀고 독특한 계몽을 지향하는 만화가로서 일찍이 1차 대전을 군인의 신체에 대한 무제한적인 명령권으로 현상화된 전도된 권력구조의 표현으로 그렸고

 

이 만화에서 전선에서 겪었던 일을 냉소적인 목적합리성으로 콤멘트하는 1인칭 화자의 형식으로 밑으로부터의 역사서술을 시도했다고 함.

 

거기서 잘린 몸, 갈기갈기 찢어진 신체, 내장, 피, 흙탕물 등을 주로 페이지 당 3개의 패널로 구성된 엄격한 형식에 배치하고 그 위에 냉소적인 글로 전쟁소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기계와 마찬가지인 한 부속품으로 떨어지는가 보여준다고 함.

 

주말에 이 전시회에 가볼까 한다. 부처님 약 오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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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춰 방크> 스왑게래로 손해본 기업 손해배상해야 - 연방대법원 판결

독일 연방대법원이 은행의 금리놀음 관련 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춰 방크/Deutsche Bank>가 손해배상을 청구한 중소기업에게540.000 유로를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관련 독일 중도좌파 유력 일간지 <쉬드도이춰 짜이퉁>은 (http://www.sueddeutsche.de/geld/2.220/bgh-prozess-um-zinswetten-deutsche-bank-muss-zahlen-1.1075423, 2011.3.22) 연방대법원 판결이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수많은 중소기업과 기초단체 공기업이 <도이춰 방크>와 장기적인 금리와 단기적인 금리차이를 가지고 놀음하는 소위 „Spread Ladder Swap“거래를 하고 나서 많은 손해를 보았는데, 이번 판결로 <도이춰 방크>를 상대로 하여 손해배상청구를 관철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함.

 

<도이춰 방크>와 SL-Swap거래를 한 중소기업과 기초단체 공기업 수는 약200개 정도이며 액수는 약 10억 유로에 달한다는 것.

 

연방대법원은 <도이춰 방크>가 거래시 고객에게 앞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하는 의무(Aufklaerungspflicht)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 특히 이런 스왑거래엔 „막중한 이해관계대립“이, 즉 고객의 손해가 바로 은행의 이익이라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은폐했다는 점에 주목.

 

주심판사 울리히 비허스(Ulrich Wiehers)는 „(이런 거래를) 내기놀음과 비교하는 것은 리스크를 별로 문제없는 것으로 만드는 비교“라고 하고 스왑의 리스크는 „제한되어 있지 않고 고객을 재정적인 파탄“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그런 놀음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 이어 „<도이춰 방크>는 의도적으로 투자자가 손해“를 보게 스왑을 조작했다고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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