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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뭉크가 그린 <길을 가는 노동자들>이란 제목의 그림이 엄습하듯이 떠올랐다. 노동자들은 그림자를 무겁게 늘어뜨리면서 길고도 긴 황량한 길을, 끝없이 이어지는 리듬에 맞춰, 해 뜨는 이른 아침에 혹은 해지는 저녁에 가고 있었다. 쾰러의 그림과 함께 한 인생의 도정을 묘사한 이 그림이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림 중간에 구부정한 자세에 움푹 들어간 눈으로 앞만 빤히 바라보면서 길을 가는 짧은 수염의 노동자의 형상에서 나는 항상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두 그림의 복사본이 쇠사슬을 끊는 회색의 노동자를 묘사한 그림과 함께 우리 부엌 벽을 장식하는 유일한 그림들이었다. 한 그림은 파업과 봉기를 표현하였다면 다른 그림은 지속되는 도정과 다시 작업을 재개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이든 사람, 젊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매일의 노동량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을 불렀다가 다시 집으로 보내는 사이렌 소리에 따라 오고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노동에 본질을 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아이쉬만에게 이 그림을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흐름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나는 아이쉬만에게 쾰러라는 화가가 생산관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1886년 미국의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파업>이었다. 브레멘에서 살 때 우리는 오래된 하퍼스 위클리지에서 이 그림의 복사본을 오려 내어 부엌에 걸어놓았다. 1899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전시된 이 그림은 색상에 있어서 멘첼의 그림과 달리 생동감이 넘치고 뭔가 짜릿하게 다가오는 것이 전혀 없었다. 대신 붓질이나 그림구성에 대한 질문을 배제하는 사실성에 초점을 맞춘 삽화적인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주의가 다른 데로 흘러가지 않고 오직 내용에만 머무르게 했다. 그림 왼쪽엔 공장주가 열주현관의 문을 열고 나와 서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층계 맨 위에서 무쇠로 만든 장식이 어우러져 있는 난간 뒤에 스탠드 칼라에 커프스 단추와 실크해트 차림으로 서있었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이를 악문 표정이었다. 마치 시가를 잡고 있는 것처럼 오른손의 손가락을 약간 치켜 들고 있었지만 손은 비어 있었고 그 손동작은 놀라움과 힘없는 방어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노동자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의 자세 또한 아직 그들이 누리는 특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는 계급의 자신감에 젖어있었지만, 그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과거의 것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세력이 성장해서 그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네모진 마름돌이 버티고 있었지만 겁에 질린 하인은 그를 이미 반쯤 떠난 상태였다. 위엄을 부리고 서있었지만 그 위엄은 아무런 핏기가 없었고, 그에게 용기란 것이 있다면 노동자들이 층계를 밟고 올라와 그를 층계참에서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무지에서 나오는 용기일 뿐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수히 이 그림을 보아왔고, 그리고 부모와 토론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매번 새로운 해석으로 치닫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주었다. 공장주의 집 앞 툭 터진 공간에 모인 노동자 그룹이 불거진 분쟁의 발전가능성이 다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 그룹의 대변자는 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뿌연 연기로 희미한 지평선에 있는 다른 공장들과는 달리 연기를 내뿜지 않는 공장을 가리키면서 층계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공장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위협하는 태도를 다양하게 취하는 가운데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건지 기다리면서 대변자와 공장주간의 충돌을 지켜보고나 아니면 서로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한 여성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뭔가를 곧바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몸짓으로 보여주는 한 노동자를 달래고 있었다. 그림 오른쪽엔 종이를 접어서 만든 모자를 쓴 한 노동자가 먼지가 가득한 땅에서 [짱]돌을 주워 들려고 몸을 굽히고 있었다. 산성과 같은 시커먼 갈색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들고 나와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몸을 깎아내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노여움이 가득 찬 상태로 언덕을 달려 층계 앞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마지막 종업원들이 그을음으로 시커먼 공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기 뒤편에 보이는 마부도 움푹 패인 질퍽한 땅에 마차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가고 있었다. 그림의 뒤 배경에서 반복되는 [짱]돌을 움켜쥐는 동작은 이젠 오직 무력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공장주는 노동자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뻣뻣하고 얼어붙은 자세로 홀로 서있었고, 노동자들의 기세는 그를 금방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공장주를 보호하여 그에게 다가설 수 없게 하였다. [짱]돌은 던져지지 않을 것이었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든 발전시켜 나아가려고 애를 써도 그 모든 것이 층계 앞에서 멈추어 섰다. 멀리 서 있는 사람들의 동작은 분노가 가득했고, 단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벽돌집 가까이에 와서는 그런 모습이 누그러져 주저하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용기를 상실한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주의 집으로 쳐들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썩어 문드러질 주인의 거만을 보호해주는 무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장주의 집 뒤에는 볼 수는 없지만 중무장한 방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오렌지나무가 즐비한 오솔길을 따라서 다시 강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쉬만에게 층계를 올라가서 그 늙은이를 한방에 처리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할 수가 있었던 일인지 자주 그려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절름발이 상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여기 유럽에서도 이와 같은 단순한 행위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직 러시아에서만 노동자들이 층계를 올라가는 내디딤을 했던 것이었다. 노동하는 대중이 그림 안에서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무르익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고 지속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층계를 뛰어오르는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이해한 것이지만 이 그림이 묘사한 사건이 들끓는 동요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 내포하고 있었다. 화가는 유토피아적 사고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명백하게 노동자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직접 보고 경험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멘첼과 다를 바 없이 학습하고 훈련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의 육중한 육체성을 그리는데 있어서 프로이센 궁중화가와는 달리 노동자들을 상품생산의 마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종으로 묘사하지 않고 자기를 자각한 주체로 그렸다. 노동자들은 불거진 투쟁행위에서 착취자와 대립하고 서있었다. 멘첼의 압연공장에서는 착취자가 성가시게 하는 노동자가 없이 아직 묵상을 즐길 수 있었는데 말이다. 노동자들이 층계 앞에서 멈춘 것은 이성이 강요한 것이다. 개별적인 공격은 무의미하고 곧바로 총탄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분에 찬 기다림,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뒤흔드는 행동은 조직[화]를 통해서 이행될 조치를 알리는 징조였다. 검은 복장으로 층계 위에 서있는 저 놈을 볼 때마다 치솟아 오르는 뭔가에 나도 역시 사로 잡혔다. [그러나 차분히] 그림을 분석하고 토론하면 화가의 지혜로움과 역사적인 통찰력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1886년, 이 해는 미국에서 대중파업이 개시된 해였다. 1일 8시간 노동제를 위해서 데모하고 시카고에서는 경찰이 노동절 집회에 모인 노동대중을 유혈 진압한 해였다 1850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917년 미네아폴리스에서 가난하게 죽은 쾰러의 그림은 계급간의 적대적인 대립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증인으로서 오늘날에도 그 현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내용의 대화를 뚜렷하게 상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화의 내용이 또한 멘첼이 그린 폭 2.5 미터 넓이의 <압연공장/Eisenwalzwerk>이란 그림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의 컬러인쇄판을 놓고서 아버지가 노동을 주제로 하는 이런 그림이 왜 이제 가능하게 되었는가 설명했었던 적이 있었다. 의식화된 노동자계급의 성장으로 인하여 할 수 없이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 주류 예술계에서도 이런 그림이 걸릴 수 있도록 한자리를 내주고 거기서 맘껏 해보라고 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다시 이런 아량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슬며시 회수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 그림의 원본은 후에 국립미술관에서 직접 보게 되었지만, 아무튼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노동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그림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중공업 공장의 분위기가 거기서 사용되는 기계와 도구에 대한 넓은 식견으로 실감나게 재현되었다. 뿌연 수증기, 굉음을 내뿜는 대형망치, 크레인과 잡아당기는 쇠사슬의 삐걱거리는 소리, 기계에 부착된 플라이휠의 회전, 타오르는 열기, 가열된 철의 백열, 불끈 하는 근육, 이런 모든 것을 그림에서 직접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림의 중간에는 대장장이들이 무리를 지어 타오르는 금속블록을 뒤쪽을 약간 치켜 올린 손수레 차에서 룰러 밑으로 밀어붙이는 장면이 보이고, 그림의 오른쪽에는 찌그러진 양철 판의 보호아래 철관과 쇠사슬 사이에 맥이 풀린 듯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쉬는 몇 명의 노동자가 양철 그릇에서 밥을 떠 먹고 있고, 물병을 입에 갖다 대고 있었다. 그림 왼쪽 구석에는 교대가 끝난 노동자들이 웃통을 벗고서 목과 머리를 씻고 있었다. 장구(裝具)를 가지고 손을 놀리고 몸을 굽히는 모든 동작, 그 뿐만 아니라 지치고 파김치가 되어서 한 구석에 그저 주저 앉아있는 모습 이 모두가 거대한 공장내부의 한 부분을 그리고 있었다. 힘을 전달하고 버티는 축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는 사이에 노동자들이 죄이다시피 널려 있었고, 저 멀리 몇 군데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세상의 빛은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한 것으로 보였다. 이와 같이 땀에 범벅 되어 기계와 노동자가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묘사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노동자들이 여기서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그저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었다. 번쩍 들어 올리는 힘과 그 힘에 의한 진동을 점차 멈추게 하는 것이 습득한 데로 빈틈없이 진행되게 하는 것, 집게잡이를 거머쥘 때의 더 없는 집중, 신경을 곤두세우고 압연블록을 받아낼 지렛대를 잡은 작업반장, 그을음을 뒤집어 쓴 몸을 문질러 닦는 모습, 그리고 모든 생기가 빠져나간 몸뚱이들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은 단 한가지만을, 즉 노동, 달리 표현하면 노동해야만 한다는 원칙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원칙이 말하는 속셈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나서 비로서 이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게 되었다. 이런 노동은 아버지가 이야기한 자기실현의 과정으로서의 노동이 아니었다. 이 그림에 나타난 노동은 어디까지나 최하가격으로 이루어진 노동이었으며, 노동력을 구매한 자에게 최고 이윤을 남겨 주기 위한 노동일 뿐이었다. 그림에는 노동자들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삶을 거기서 하는 일에 투자한 듯이 보이고 그들이 공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노동자들이 불빛에 비춰 무슨 동상이라도 되는 듯 힘있게 그려지고 공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중에 국립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놓고 아버지는 첫눈에는 노동자들이 압도적인 우성(Dominanz)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손톱끄트머리까지 분업의 법칙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노동자들이 마치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지만 노동자들은 오직 타자가 소유하는 기계와 장비에 묶여 실존하고 있었다. 소유하는 타자들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지만,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물건으로 예속되어 일하고 있었다. 쓰레기범벅인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노동자들은 이런 얽매임에서 한 순간 자유롭게 자율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오직 다음 신호가 다시 부를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강력한 힘은 오직 그들이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작업에서만 발휘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 팔뚝의 움직임은 전혀 위협적인 면이 없었다. 그들은 그 팔뚝을 물품을 생산하는 데에만 쓸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였다. 노동의 찬양은 노동의 억압에 대한 찬양이었다. 불 튀기는 불똥을 뒤집어 쓰면서 훨훨 타오르는 철물을 둘러싸고 있는 노동자들, 파김치가 되어서 생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시선으로 밥을 먹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삶에 찌들인 눈빛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빈 잔들을 바구니에 챙기는 젊은 여성, 이들 모두가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장의 깊이는 어디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없게 희미했다. 수직수평의 철 기둥과 관이 즐비하게 무슨 격자구조물과 같이 끝없이 이어졌다. 형체가 연기 속으로 뿌옇게 자취를 감추는 공장은 [예속의 쇠우리]에서와 같이 도주가 불가능한 그런 세계였다. 오늘날에 들어서 우리는 이제 사내식당이 있고, 샤워실이 있고, 옷 갈아 입는 방이 따로 있고, 그리고 기술적인 개선을 통한 혜택을 기대해 볼 수가 있지만, 생산과정 자체는 멘첼이 [파리]꼬뮨이 가루가 된지 4년이 지난 1875년 묘사한 것과 하나도 틀림이 없는 그런 상태였다. 그림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한 곳에 모아 나중에 철도레일, 포신의 받침대, 포신이 될 철물을 생산하는데 다 투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평화적인 속성을 녹여 폭력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그 폭력은 그들이 알아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서 그들을 항해 가해지는,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그런 폭력이었다. 오른쪽 맨 앞에 눈이 푹 꺼진 여성의 모습에서는 그녀가 야생동물의 굴과 같은 지하구멍에서 살고 있고, 그녀의 아이들은 배고픔을 달래고 있다는 것이 역연히 드러났다. 화가는 그녀의 빈곤을 선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혹사시키는 노동을 재현하였다. 화가는 노동자들이 몸을 씻고 밥을 먹어야 하는 열악한(unwürdig) 상황을 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아무런 분노를 자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려, 뭔가 숙명적인 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내놓고 있었다. 노동하는 사람이 행위의 주체였다. 빈틈없이 그리고 자신 있게 주어진 업무를 척척해 나가고 있었다. 모든 손놀림, 모든 동작이 노동자에게 자기의식이 가득한 위대함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능률은, 아버지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오로지 보이지 않는 돈궤와 금고를 채우기 위한 목적 외 다른 목적이 없이 강제되는 노동이었다. 화가가 노동자의 사회적 현실을 느끼고 거기에 동정하는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뿐이지, 이리저리 깊게 페인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뜨거운 불길 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장구를 불끈 거머쥔 노동자들이, 당시 이미 조직된 노동자의 힘이 알려지고, 소개되고, 그리고 노동자의 조직으로 사회적으로 실재하였지만 그것과는 괴리되어 묘사되었다. 알파라발社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나는 멘첼이 누구를, 감탄하는 구경꾼들 앞에 내놓았는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제국의 독일노동자를, 공산당선언이 스며들 틈이 전혀 없는 독일노동자를, 독일제국에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는 것이 유일한 존재사유인 독일노동자를 내놓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번쩍이는 불빛에 어우러지게 묘사된 형상들은 철의 하수인이었다. 이 철에는 뭔가 원소적인 요소가 있었다. 이글거리는 열과 함께 철은 그냥 금속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산업제국주의의 팽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받는 임금 외 다른 가치가 없었다. 생생하게 묘사된 공장은 [그림]전문가를 기쁘게 하겠지만, 공장의 주인공은 노동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얗게 타오르고 슬래그를 내뿜으면서 룰러 밑으로 깔려 들어가는 쇳덩어리였다.“
페터 바이스(Peter Weiss)의 <저항의 미학/Ästhetik des Widerstands>을 번역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로 할 것 같으면 직접적인 동기가 없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놈이라 아직까지 손을 대지 못했다. 근데 진보넷 블로거 브르디가님의 블록그 (blog.jinbo.net/unpolished/?pid=73#comment_261158)에서 진행된 토론을 보고서 <저항의 미학>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군데를 번역해 볼까 한다. <저항의 미학>은 예술작품을 노동자가 직접 사유하는 과정을 그리고, 그리고 그런 사유과정에서 의식화되는 노동자를 소개하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소설이다.
<저항의 미학>은 현재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남덕현박사 외 여럿이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덕현박사는 <저항의 미학>에 대한 논문으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내가 하는 번역이 어쩌면 copyright 문제에 걸릴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진보넷 관리팀이 잘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안되면 <해적질> 할 수밖에 없고…
우선 3개의 그림을 사유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번역하여 소개하겠다.
첫째 그림은 아돌프 멘첼의 <압연공장/Eisenwalzwerk>, 두 번째는 로버트 쾰러(Robert Koehler)의 <파업/der Streik>, 세 번째는 뭉크의 <길을 걸어가는 노동자/Arbeiter auf dem Weg>이다.
우선 그림을 올려놓고 번역이 완성되는 데로 번역된 글을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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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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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잘 읽었습니다. 저항의 미학이 번역 중이라는 소식이 반갑네요.. 다만 기다림이 굉장히 길것 같기도 하네요. 꼭 읽고 싶은 책인데 이렇게 부분으로나마 접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