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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미학> 아돌프 멘첼의 <압연공장>

 

이런 내용의 대화를 뚜렷하게 상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화의 내용이 또한 멘첼이 그린 폭 2.5 미터 넓이의 <압연공장/Eisenwalzwerk>이란 그림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의 컬러인쇄판을 놓고서 아버지가 노동을 주제로 하는 이런 그림이 왜 이제 가능하게 되었는가 설명했었던 적이 있었다. 의식화된 노동자계급의 성장으로 인하여 할 수 없이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 주류 예술계에서도 이런 그림이 걸릴 수 있도록 한자리를 내주고 거기서 맘껏 해보라고 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다시 이런 아량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슬며시 회수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 그림의 원본은 후에 국립미술관에서 직접 보게 되었지만, 아무튼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노동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그림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중공업 공장의 분위기가 거기서 사용되는 기계와 도구에 대한 넓은 식견으로 실감나게 재현되었다. 뿌연 수증기, 굉음을 내뿜는 대형망치, 크레인과 잡아당기는 쇠사슬의 삐걱거리는 소리, 기계에 부착된 플라이휠의 회전, 타오르는 열기, 가열된 철의 백열, 불끈 하는 근육, 이런 모든 것을 그림에서 직접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림의 중간에는 대장장이들이 무리를 지어 타오르는 금속블록을 뒤쪽을 약간 치켜 올린 손수레 차에서 룰러 밑으로 밀어붙이는 장면이 보이고, 그림의 오른쪽에는 찌그러진 양철 판의 보호아래 철관과 쇠사슬 사이에 맥이 풀린 듯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쉬는 몇 명의 노동자가 양철 그릇에서 밥을 떠 먹고 있고, 물병을 입에 갖다 대고 있었다. 그림 왼쪽 구석에는 교대가 끝난 노동자들이 웃통을 벗고서 목과 머리를 씻고 있었다. 장구(裝具)를 가지고 손을 놀리고 몸을 굽히는 모든 동작, 그 뿐만 아니라 지치고 파김치가 되어서 한 구석에 그저 주저 앉아있는 모습 이 모두가 거대한 공장내부의 한 부분을 그리고 있었다. 힘을 전달하고 버티는 축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는 사이에 노동자들이 죄이다시피 널려 있었고, 저 멀리 몇 군데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세상의 빛은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한 것으로 보였다. 이와 같이 땀에 범벅 되어 기계와 노동자가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묘사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노동자들이 여기서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그저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었다. 번쩍 들어 올리는 힘과 그 힘에 의한 진동을 점차 멈추게 하는 것이 습득한 데로 빈틈없이 진행되게 하는 것, 집게잡이를 거머쥘 때의 더 없는 집중, 신경을 곤두세우고 압연블록을 받아낼 지렛대를 잡은 작업반장, 그을음을 뒤집어 쓴 몸을 문질러 닦는 모습, 그리고 모든 생기가 빠져나간 몸뚱이들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은 단 한가지만을, 즉 노동, 달리 표현하면 노동해야만 한다는 원칙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원칙이 말하는 속셈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나서 비로서 이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알게 되었다. 이런 노동은 아버지가 이야기한 자기실현의 과정으로서의 노동이 아니었다. 이 그림에 나타난 노동은 어디까지나 최하가격으로 이루어진 노동이었으며, 노동력을 구매한 자에게 최고 이윤을 남겨 주기 위한 노동일 뿐이었다. 그림에는 노동자들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삶을 거기서 하는 일에 투자한 듯이 보이고 그들이 공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노동자들이 불빛에 비춰 무슨 동상이라도 되는 듯 힘있게 그려지고 공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중에 국립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놓고 아버지는 첫눈에는 노동자들이 압도적인 우성(Dominanz)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손톱끄트머리까지 분업의 법칙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노동자들이 마치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지만 노동자들은 오직 타자가 소유하는 기계와 장비에 묶여 실존하고 있었다. 소유하는 타자들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지만,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물건으로 예속되어 일하고 있었다. 쓰레기범벅인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노동자들은 이런 얽매임에서 한 순간 자유롭게 자율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오직 다음 신호가 다시 부를 때까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강력한 힘은 오직 그들이 뭔가를 손으로 만드는 작업에서만 발휘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 팔뚝의 움직임은 전혀 위협적인 면이 없었다. 그들은 그 팔뚝을 물품을 생산하는 데에만 쓸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였다. 노동의 찬양은 노동의 억압에 대한 찬양이었다. 불 튀기는 불똥을 뒤집어 쓰면서 훨훨 타오르는 철물을 둘러싸고 있는 노동자들, 파김치가 되어서 생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시선으로 밥을 먹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삶에 찌들인 눈빛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빈 잔들을 바구니에 챙기는 젊은 여성, 이들 모두가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장의 깊이는 어디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없게 희미했다. 수직수평의 철 기둥과 관이 즐비하게 무슨 격자구조물과 같이 끝없이 이어졌다. 형체가 연기 속으로 뿌옇게 자취를 감추는 공장은 [예속의 쇠우리]에서와 같이 도주가 불가능한 그런 세계였다. 오늘날에 들어서 우리는 이제 사내식당이 있고, 샤워실이 있고, 옷 갈아 입는 방이 따로 있고, 그리고 기술적인 개선을 통한 혜택을 기대해 볼 수가 있지만, 생산과정 자체는 멘첼이 [파리]꼬뮨이 가루가 된지 4년이 지난 1875년 묘사한 것과 하나도 틀림이 없는 그런 상태였다. 그림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한 곳에 모아 나중에 철도레일, 포신의 받침대, 포신이 될 철물을 생산하는데 다 투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평화적인 속성을 녹여 폭력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그 폭력은 그들이 알아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서 그들을 항해 가해지는,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그런 폭력이었다. 오른쪽 맨 앞에 눈이 푹 꺼진 여성의 모습에서는 그녀가 야생동물의 굴과 같은 지하구멍에서 살고 있고, 그녀의 아이들은 배고픔을 달래고 있다는 것이 역연히 드러났다. 화가는 그녀의 빈곤을 선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혹사시키는 노동을 재현하였다. 화가는 노동자들이 몸을 씻고 밥을 먹어야 하는 열악한(unwürdig) 상황을 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아무런 분노를 자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려, 뭔가 숙명적인 것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내놓고 있었다. 노동하는 사람이 행위의 주체였다. 빈틈없이 그리고 자신 있게 주어진 업무를 척척해 나가고 있었다. 모든 손놀림, 모든 동작이 노동자에게 자기의식이 가득한 위대함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능률은, 아버지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오로지 보이지 않는 돈궤와 금고를 채우기 위한 목적 외 다른 목적이 없이 강제되는 노동이었다. 화가가 노동자의 사회적 현실을 느끼고 거기에 동정하는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뿐이지, 이리저리 깊게 페인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뜨거운 불길 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장구를 불끈 거머쥔 노동자들이, 당시 이미 조직된 노동자의 힘이 알려지고, 소개되고, 그리고 노동자의 조직으로 사회적으로 실재하였지만 그것과는 괴리되어 묘사되었다. 알파라발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나는 멘첼이 누구를, 감탄하는 구경꾼들 앞에 내놓았는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제국의 독일노동자를, 공산당선언이 스며들 틈이 전혀 없는 독일노동자를, 독일제국에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는 것이 유일한 존재사유인 독일노동자를 내놓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번쩍이는 불빛에 어우러지게 묘사된 형상들은 철의 하수인이었다. 이 철에는 뭔가 원소적인 요소가 있었다. 이글거리는 열과 함께 철은 그냥 금속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산업제국주의의 팽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받는 임금 외 다른 가치가 없었다. 생생하게 묘사된 공장은 [그림]전문가를 기쁘게 하겠지만, 공장의 주인공은 노동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얗게 타오르고 슬래그를 내뿜으면서 룰러 밑으로 깔려 들어가는 쇳덩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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