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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가우크 취임사 (이어서 2)

그리고 우리는 이런 공통성을 자유, 평화, 그리고 연대의 틀 안에서 더불어 살려고 하는, 유럽 안에 있는, 앞의 의미로서의 우리나라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무지와 잘못 이해한 [정치적] 올바름에 눈이 어두워 현실적인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그릇된 길로 들어 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미 연방대통령 요하네스 라우가 12년 전 베를린 연설에서 인상 깊게 그리고 명료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우의 지적을 참작하면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앞에서 말했듯이 불안, 원망(르상티망), 그리고 부정적인 투사라는(negative Projektion) 길잡이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손님/이방인을] 환대하는, 열린 사회를 위해서 연방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는 재임시 끈끈하고 탄탄한 자극을 주셨습니다. 연방대통령 불프님, 이런, 귀하의 마음이 밀접해 있는 것이 저의 마음에도 와 닫아 지속적으로 놓여 있게 될 것입니다. 귀빈 여러분, 우리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어디서 왔든지, 뭘 믿든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지와 무관하게 똑 같은 위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성공한 사회융화의 대가로서 위엄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융화 거부에 대한 제재로서 위엄을 취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헌법은 우리의 인간됨과 함께 우리에게 타자 안에서  형제자매로의 우리를 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타고 난 참여와 권리를 갖는 형제자매로서 말입니다.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역사의 파격적인 진동이 지난 후 특히 유럽에 있는 우리 앞에 비좁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참다운 학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인용하겠습니다. „타자와 함께 산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로서 사는 것이다.“(„Mit dem anderen leben, als der andere des anderen leben.“). 그는 이런 맥락에서 유럽의 윤리적, 정치적 과제를 보았습니다. 이런 유럽을 향한 긍정도 이제 보존해야 합니다. 바로 위시시에 민족국가 차원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유별나게 두드려집니다. 유럽의 함께하기는 재차 확인하건데 연대란 삶의 숨결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위기시에 우리는 더 많은 유럽을 감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로 독일인 다수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이런 유럽적 사유에 다시, 그리고 계속해서 미래를 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확인합니다.  유럽은 우리 세대에겐  [다양한] 서양의 전통, 고대의 유산, 공통의 법질서, 기독교와 유태교적 유산 위에 세워질 미래의 약속이었습니다. 저의 손자손녀들에게는 유럽이 이미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와 기회와 열린사회의 걱정으로 [얼룩진] 가시화된 생활현실 입니다. 이런 생활현실이 저의 손자손녀들에게만 놀라운 득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우리 아이들과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라고 하기를 바라는 이 나라가 어떻게 더 모습을 갖춰야 할까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그리고 그 외 다른 지역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그룹이익과 공동체[안녕]이익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데 유일하게 적합한 체제 입니다. 이 체제의 특성은 완벽성이 아니라 배우는 시스템이란데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정당과 다양한 민주적인 기구 옆에 우리 민주주의의 제2의 축이 존재합니다. 능동적인 시민사회 입니다. 시민발안, [특정 사안에 대한] 즉석 행동(Ad-hoc-Bewegungen), 디지털 네트워크공동체의 일부 또한 그들의 앙가주망 뿐만 아니라 대항으로 역시 의회민주주의와 그 부족함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하나 더 첨부하자면,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달리 우리나라는 광신자와 테러리스트들의 몹쓸 정신을(Ungeist) 물리치는 민주주의자들이 넉넉 합니다. 이들 모두, 서로 다른 정치적 종교적 기반에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앗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라고 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충성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충성하는 이유는 이 나라가 완벽하기 그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나라를 아직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우리 내 극우들에게 엄연명백하게 말합니다: 너희들의 증오가 우리를 고무한다. 우리는 우리 나라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에게 우리의 불안을 선물로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과거로 떨어질 것이고 우리 민주주의 살 것이다.

다른 정치적 성향의 급진주의자들도 똑 같은 우리의 결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교라는 겉옷을 두르고 광신주의와 테러를 우리나라 안으로 가져오고, 유럽 계몽의 뒤로 떨어지는 자들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말합니다: 민족들은 자유를 향해서 행군하고 있다. 너희들은 어쩌면 이 행군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궁극적으로 그 행군을 가로막지 못 할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적인 기구에 대한 시민의 거리감이 제게 걱정을 초래합니다. 낮은 선거참여율, 또 정치적 앙가주망에 대한,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폄하 혹은 심지어 경멸이 그리 합니다.  사적 공간에서 종종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뭐라고, 네 지역단체 회의에 참석하러 간다고?  내가 제대로 들었나, 노조 활동한다고? 그럼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활동을 쿨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 활동들이 없었다면 대체 우리 사회가 어디에 있을까라고. 우리 모두 이런 통치자와 피통지자 간의 거리로 얻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양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 입니다: 점점 더 벌어지는 거리를 어쩔 수 없다고 하지 말아라. 이 말은 정치 행위자에게 우선 이런 뜻입니다: 열어놓고 명백하게 말하라. 그럼 상실한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피통치자 시민에게는 이런 걸 감당하라는 말 입니다: 소비자만 되지 말아라.  너희들은시민이다. 건설하는, 함께 건설하는 사람이란 말 입니다. 참여가 가능한 사람이 까닭 없이 참여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 현존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큰 가능성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즉  책임을 삶 속에서 사는 (Verantwortung leben)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감히 선물 하나를 부탁하겠습니다. 신뢰입니다. 최종적으로 제 인격을 신뢰해 달라고 부탁 드립니다. 그 전에 우리 나라에서 책임을 떠맡고 있는 사람들을 신뢰해 달라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시 통일되고 건장하게 자란 이 나라의 주민들을 신뢰해 달라고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그 전에 다시 여러분 모든에게 과감하게 그리고 끊임 없이 자신의 [힘을] 신뢰하는 것에 굳건히 하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간디의 말 한 마디에 따르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진보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이건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한 나라에게도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후손과 후손에게 돈을 물려줄지 혹을 재산을 물려줄지 모릅니다. 그리나 불안을 따르지 않고 용기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꿈꾸지만 않았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신과 사람들에게 감사할 바입니다. 이런 유산은 우리 후손들이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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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 언론윤리 준수하는가?

거짓말보다 더 나쁜 게 있다. 반쪽도 안되는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다.  

2012.3.18뷔르셀 발 연합뉴스 기사  <새 독일 대통령에 선출된 요아힘 가우크>가 이런 나쁜 짓을 하고 있다.

1.    „선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

요아힘 가우크의 아버지가 배타는 사람(„선원“)이었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평범한 선원이 아니었다. 나치 상선대의 선장이었으며 예비역 중위였다. 요아힘 가우크의 부모는 각1934년, 1932년 나치당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다.  (참조: http://de.wikipedia.org/wiki/Joachim_Gauck#Herkunft_und_Nachkriegskindheit_in_der_DDR_.281940.E2.80.931951.29/  미주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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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부활절: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그디니아(독명:그딩엔)에 주둔한 아버지를 방문한 가우크, 여동생, 그리고 엄마. 참조: 독일 보수 일간지 디 벨트 .http://www.welt.de/politik/article13877996/Die-privaten-Bilder-des-Joachim-Gauck.html)


2.    „ 선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동독 정부에 의해 체포돼 러시아 군사법정에서 25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그 자신도 1950년대에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에서 3년여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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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크의 아버지가 시베리아에서 만들어 보낸 엽서. 디 벨트는 가우크의 아버지가 첩보행위를 했다는 빌미로  1951년 체포되어 25년 형을 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고 한다. (참조: 디벨트 http://www.welt.de/politik/article13877996/Die-privaten-Bilder-des-Joachim-Gauck.html)


가우크 아버지는 1951년 6월 27일 체포되었다. 2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요아힘 가우크는 감옥생활을 한 적도 없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생활한 적도 없다.



3.    „로슈토크시의 반체제 운동 단체인 `새 포럼'의 대변인을 맡아 활동한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이듬해 통일될 때까지 동독 비밀경찰에 의해 철저한 감시를 당했다.“

가우크의 아들 크리스티안과 마르틴은 1987년 서독으로 이주했다. 근데 그들이 조부 금혼식 참여차 동독에 입국할 수 있었다. 당시 동독 출입을 슈타지가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슈타지의 허락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당한 특혜다. 가우크가 슈타지 끄나풀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근거를 제시하는 그런 주장도 있지만]. 단지 가우크가 동독에서 상당한 특혜를 누렸던 사람이었다는 점을 상기하고자 한다. (참조: http://www.spiegel.de/spiegel/print/d-172695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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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2.2 마르틴 가우크의 동독 출국 허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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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말하기 – 크리스티안 불프 사임과 가우크 대통령 지명에 얽힌 이야기

크리스티안 불프의 사임과 가우크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한 것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민주주의와 말하기 혹은 말 못하게 하기가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 독일 정통 보수일간 FAZ와 자생 좌파일간 taz의 동시적인 기사가 눈에 뜨인다. 크리스티안 불프 전 대통령의 이임 의전예식과 관련해서 FAZ는 말 못하게 하기를 조명하고,  taz는 자유민주주의 가우크란 인물의 가공으로 가려진 구동독혁명에 관한 다른 이야기하기를 제시한다.

크리스티안 불프의 사임을 둘러싼 이야기가 뇌물수수 혐의에 이어서 대통령 연금을 주자 말자는 이야기와 대통령 이임 의전예식을 허용하자 말자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전직 대통령 모두가 불참을 선언하고 독일 의전서열 5위인 헌법재판소장이 „진행 중인 수사절차때문에 참석이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라는 사유로 불참에 가담했으나 연방상원의장 겸 임시 대통령 대행 호르스트 제호퍼, 메르켈 총리 등 내각이 거의 모두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이임 의전예식이 진행되었다. 대통령궁 앞에 집결하여 부부젤라 소음으로 의전예식을 방해하려는 시위대의 노력이 허사였다. 의전예식은 아무런 일 없이 진행되었다.
 
이를 두고 2012.3.9 FAZ는 의전예식의 의미는 [국가 권력의 자리에 올라간] 개인의 모순적인 행동을 덮어 그 뒤로 개인이 사라지게 하는데 있다고 지적하고 오로지 정해진 틀을 반복하고 그런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민주주의적인 말하기를 배제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고 분석했다.

가우크에 얽힌 이야기는 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전 국민이 지지하는 참신한 „시민대통령“(Bürgerpräsident)이란 평을 받았다가 SNS의 반가우크운동이 확산되어 이젠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 구동독 반체제운동이 다시 조명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서2012.3.9 taz 톰 슈트로슈나이더(Tom Strohschneider)의 평론 „가우크의 그늘에 덮은 것“(Aus dem Schatten Gaucks)을 전문 번역하여 아래 소개한다.

원문은 여기

요하힘 가우크가 인권운동가였나? 이 질문을 놓고 지난 며칠동안 이리 뒤집어보고 저리 뒤집어보는 답들이 있었다. 구동독 반체제 활동가들은 차기 대통령으로 선정된 가우크가 1989년 전환가을을 맞이하여 „막판에 떠나는 기차“에 뛰어 올라탔다고 1968년 이후 적극적으로 동독의 쾌쾌묵은 체제 반대에 참여한 목사 한스 요헨 취헤(Hans-Jochen Tschiche)의 표현을 빌려 기억한다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신포럼) 발기인인 하이코 리츠(Heiko Lietz)는 가우크가 수년을 거쳐 „세워진 가공된 인물“이라고 평한다. 다른 이들은 가우크의 편을 들기도 했다. 예컨대 [중도좌파] „쥐드도이춰 짜이퉁“의 구스타브 자이프트(Gustav Seibt)는 „[가우크를] 소급적으로 동독 반체제 활동가에서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환기했다. 그런가 하면 taz의 일코 자샤 코발추크(Ilko-Sascha Kowalczuk)는 „SED 독재에 대항하여 과감하게 싸웠던“ „89세대가 모두“ „그들이 대항했던 지배자들과 같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꿈을 공유했다“는 비판으로부터 방어한다.

이 말은 약간 [노이에스 포룸 대표자] 베를벨 볼라이와 [동독 최후 SED 서기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 에곤 크렌츠가 한 동아리 사람이었다는 뒷맛을 남긴다. 정말 그랬나? 반면 전환은 오늘날 공론장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었다는 지적은 옳다. – 1990년 10월 3일로부터, 즉 사건의 마지막 장에서 뒤돌아 보는 시각은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고 동반했던 꿈들을 사각지로 사라지게 했다.

이미 몇년전에 사회주의자 인권운동가였고 통합좌파당(Vereinigte Linke) 발기인이었던 토마스 클라인(Thomas Klein)이 동독 반체제 운동의 성격을 „오늘날 지배적인 정치가치관에 입각하여“ „차후적으로“ 규정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동독 반체제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그 발전과정과는 괴리시키고 단지 활동가들이 당시 지향했던 목적의 현재 독일 상황과의 합치가능성여부만을 가지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자기 자리를 확실하게 찾은 과거 동독 반체제운동 일부의 상징인 된 가우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가우크는 전환에 있어서 시민-자유주의적인 동기와 통일로 향하는 민족적인 흐름을 상징하고 슈타지 문서 보관소 초대 수반으로서 동독을 [동독 국가안보부 수장] 밀케유산으로만 보는 협소한 고찰의 체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9년 가을 초창기에 사안이 되었던 것은 절대 단지 „한 민족“, 슈타지 건물에 쳐들어가 자료실을 점거하는 것, 그리고 여행자유화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이 절대 우선적인 것도 분명 아니었다. 적극적인 행동을 했던 소수의 반체제운동가의 대부분은 제3의 길, 생태적인 재건,  결정참여권의 신장이란 깃발을 높이 들었다.
 
예컨대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운동은 „사회정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연대사회“가 되기를 희망했다. 평의회민주주의 이념을 실험하고 새로운 경제모델과 법정치의 대안을 고안했다.
 
1989년에서 199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몇 달간에 전환에 관하여 적잖게 출판된 문건들을 모은 모음집의 제목 „역사는 열려있다“, „이성의 잠에 대항하여“ 등은 이런 역사의 개방성과 유토피아적 동력을 대변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몇 명 안되는 동독의  „꿈꾸는 자“에게만 매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었고 서독 좌파도 사로잡는 그런 것이었다.
 
예컨대 [녹색당의 유일한 지역구 의원/베를린 프리드리히하인-크로이츠베르크] 한스 크리스티안 스트뢰벨레(Hans-Christian Ströbele)는 당시 동독혁명의 „첫 귀결“로 „헌법보호청을 집어치우고 완전히 없애는 것“(„Abrüstung und Nulllösung beim Verfassungsschutz“)을 요구했다. [나찌] „민족지하연맹“(NSU) 살인마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오를 둘러싼 논쟁을 감안하면 아직도 매우 시급한 사안이다. 로버트 융크(Robert Jungk)는 당시 동독의 전환에 상응하는서독의 민주주의와 투명성 신장을 아젠다로 했다. 이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시급성을 상실하지 않은 사안이다.

어쩌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지만 당시 동독에서는 그 몇 달 어느 순간부터 한편으로는 서독 정치판의 패걸이들(Politikbetrieb)과 서독 경제의 이해관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충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동독 „인민운동“(Volksbewegung)의 서독 마르크와 통일 요구에 부응하여 실세를 등에 업은 현실정치세력 한 패가(eine realpolitische Kraft des Faktischen)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동독반체제운동가들의 요구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이런 괴리가 동독반체제운동이 접했던 큰 문제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이런 [예견 불가능한 휘발적인]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역동성에도 대항하여 당시 고안되고 토론된 것을 보면 어쩌면 나이브하게 보여질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이 이야기 했던 말의 흔적이 대체적으로 공론장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거기엔 정확한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를 개혁한다는  „재건청사진“(„Umbaupapier“)에, 기업에서 새로운 좌파적인 길을 모색하는 새로운 출발에, 아니 전혀 다른 새로운 헌법에 대한 논쟁에 근거하는 전통을 세우는 것을 신독일이 허용할 수도 없었고 원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문을 열어재꼈다. 그러나 정치는 다른 이들이 했다.“라고 22년이 지난 지금 취헤 목사가 말한다. 이 말은 가우크를 염두한 말이기도 하다. 가우크가 정치무대에 올라올 땐 정치적 봄이 이미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으로만 제한된 궤도에 올라 경직되기 시작했다. 1990년 1월 말 노이에스 포룸에서 처음으로 통일에 찬성하는 자들이 일어서는데 가우크가 거기 있었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깊은 단절을 느꼈다.  1990년 3월 선거로 소집된 인민의회의 의원으로서 그는 동독인권/시민운동가 다수의 지침에 역행하여 통일조약에 찬성했다.
 
역사학자 마르틴 자브로우(Martin Sabrow)는 오늘날까지 지배적인 동독혁명서술과 관련하여 그런 이야기하기는 무엇보다 먼저 „민족적인 자유 및 통일운동의 열정“(„Pathos einer nationalen Freiheits- und Einheitsbewegung“)을 강조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런 열정은 가우크란 인물에서 살아있는 기념비를 찾았다. 그게 제대로 된 일인지 안 그런지는 논쟁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려는 마음과 청산되지 않은 옛 개인감정이 일정한 역할을 하는 다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이 차기 대통령이 역사의 일부만을 대표하고 그리고 다른 것들을 그늘로 사라지게 하는 방법으로 대표했다는 것에는 아무런 변함을 주지 못한다. 1999년에 이미 인권운동가들이 가우크 앞으로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서 „당시 동독 야권과 1989년 가을 시민운동이 쟁취하려고 투쟁했던 것이 [통일] 독일에서 이루어졌다“라는 가우크의 주장을  우리에겐 적용하지 말라"고 항의한 바 있다.

이건 아직도 유효하다. 그리고 다시 전 동독반체제인사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기 대통령에 관한 논쟁이 [역사의 사각지로 밀려난] 동독 야권으로 하여금 공론장의 기억에서 그 전통의 위상에 알맞은 자리를 차지하게 하고 있다. 동독의 전환은 가우크를 초월하는 것이었고, 전환은 가우크의 좌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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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크? - 살아남은 자와 사라진 자

베르벨 볼라이(Bärbel Bohley)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베르벨 누구?

구동독에서 반전반핵평화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조직하고 일선에 섰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내 자신, 베르벨 외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얼른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단 하나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반공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그 사람들은 엄연한 사회주의자로서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는 것을 반대하고 1국가 - 2체제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동독이 서독에 팔려가는, 동독 것은 다 잘못되었다는 식의 ‚전환’(Wende)과 이런 ‚전환’의 시기에 줄타기 바쁜 기회주의자들과 대조적으로 사회주의의 개혁을 외쳤던 크리스타 볼프 등의 서명문 „우리 나라를 위해서“가 분명히 기억된다.

가우크는 어떤 사람인가?

동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지도했던 사람이란다. 로스톡에서? 동독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는 라이프찌히-베를린으로 알고 있는데? 반전반핵평화운동을 조직한 사람들로 알고 있는데? 로스톡에서 동독 민주화를 지도하는 선생노릇을 했다?

어? 동독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 가우크가 있었나? 본적이 없는데?

타쯔(taz)지 컬럼니스트 데니츠 위첼(Deniz Yücel)은 동독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목사 가우크가 동독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제재가 사라지자 비로서 목소리를 높였고, 전환 후에는 뒤질세랴 더 열심을 내서 동독체제를 고발했다고 한다. ‚나 동독 싫어’.  

가우크를 반공주의에 눈이 어두어 나찌만행을 상대화하는 사람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가우크가 기자의 도움을 받아서 쓴 책  „여름에 맞이라는 겨울 – 가을에 스며있는 봄. 회고“ 을 서평하는 자리에서 크리스토프 플라이쉬만(Christoph Fleischmann)은 이렇게 말한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가우크는 종종 적색테러와 나찌테러를 동일시하기에 적합한, 말도 안되는 비교를 즐겨 한다. […] (가우크: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일부로서의 배반을 문제시하지 않은 사회가 아직까지 [동독 이전에] 없었던 것 같다. […] 나찌시대에서조차 비밀경찰 게스타포와 은밀히 협력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공산주의 불법(Unrecht)를 나찌 불법과 같은 선상에 놓거나 아니면 그 위에 놓으려는 경향은 그의 생을 보면 이해가 된다. 가우크의 아버지는 1951년 „끌려갔다”. (…) 서독에서는 나찌시대 때 한 일에 놓고 부모와 자식간 격렬한 말싸움이 벌어졌지만 가우크가 처한 상황에서는 나찌에 대한 그런 말싸움이 일어나기 힘든 것이었다.   불법은 우선 틀림없이 사라진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점령된 폴란드에서 해군장교로 주둔해 있을 당시 스스로 불법을 저지르진 않았나 독자들이 알 길이 없다.”

나찌에 대한 입장관련 더 심각한 비판도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3.6.1 나찌 만행에 참여한 이유로 1950-1953간 Forst-Zinna수용소에 사형되거나 생을 마친 사람들의  유해가 동독공산주의의 희생자가 되어 „전쟁과 폭력 희생자를 기념하는 (würdig/존귀에 합당한) 묘지“로 이장되고 이듬해 5월 9일 이들을 기념하고 전시하는 해프닝(?)이 작센 토그가우(Torgau)에서 벌어졌다. 이렇게 기념된 117명  대다수가 나찌만행에 참여한 사라들이었다. 부분적으로는 러시아 „명예회복위원회“가 번복하거나 형을 감소한 사례는 있지만 59명에 대해서는 전쟁 및 대학살 범죄자로 모든 명예회복신청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다.

근데 가우크가 거기 그런 나찌를 기념하고 전시하고 기리는 자리에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나찌가 기념되었다. 나찌 집단수용소 감금자와 강제징역노동자  1017명을 외딴 창고로 몰고가 불을 지르고 나오는 사람은 다 총살한 만행에 가담한 발터 비어만(Walter Biermann)과 아르노 브라케(Arno Br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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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 희생자 단체들이 가만 있었겠는가? 가우크가 나찌 희생자를 기념하는 행사에 초대되거나 심지어 주연설자로 초빙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다시 한번 타쯔 컬럼니스트의 말을 들어보자.


근 10년동안 슈타지 문서관리청 수장이었던 가우크가 – 수장 권한으로  기지(Gysi) 등 좌익당 소속 옛 동독 인사들의 행보에 초점을 맞췄다는 비판도 있음 -    동독을 비난하는 동기는 국가조직, 특히 정보조직를 경계시하는데 있지 않고 오로지 독일정통을 자랑하는 세력의 천하디 천한 반공산주의에 있다는 것.  


헌보청이 좌파당을 감시하는 것을 놓고 가우크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가우크: „헌보청이 좌파당내  특정인과 그룹을 감시하면, 그럴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헌보청은 우리 법치국가 밖에 존재하면서 좌파를 핍박하는 그런 조직이 아니다.“


타쯔 컬럼리스트 : „<권력의 부처 행세를 하는> 요아힘 가우크가 내놓는 지성, 자유사랑, 그리고 비판정신은 이미 이 두 문장에 다 포함되어 있다.“ [슈타지 문석관리청을 „Gauck-Behörde/가우크청“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Joachim "Behörde" Gauck“이란 표현은„Gauck-Behörde“의 순서를 도치하여 공권력에 자신을 환영하는 가우크의 심리를 까는 표현]


Occupy 운동을 „멍청한 짓“이라고 하고, 독일 내 아랍계 사람들이 교육수준이 낮은 것을 유전적으로 뒷받침하려고 책을 쓰고 떠들고 돌아다니던 사민당소속(!) 자라찐 (Sarazzin)을 용감하다고 평하고 [독일 정통보수가 말은 하지 못하고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이민자가 너무 많고 정통독일인(Altdeutsche)은 소수뿐인 지역이 없어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유태인 학살을 사상 예가 없었던 것으로 만들지 말자고 내놓고 사회보장제도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데 기여한다는 발언하는 등 언제 가우크에 대한 환상이 깨질까?


보수진영의 정치적 계산 속에서 후보로 추대된 그가 그런 계산을 꿰뚫어 보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참신한 사람이라면 기분잡쳐서라도 두번째 추대에는 엿 먹으라고 „No“ 했을 것이다. 멍청한 사람인가? 아니면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인가? 암튼 줄타기 잘하는 사람이다. 언제 무슨 말을 해야 줄에서 떨어지지 않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 줄이 신자유주의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정통보수가 내려준 줄이라는 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참조:

인디메디아 ( http://de.indymedia.org/2012/02/325146.shtml)

http://www.zeit-geschichten.de/th_03d_c5.htm
http://www.christoph-fleischmann.de/pages/de/archiv_zum_lesen/rezensionen/813.htm
http://www.nrw.vvn-bda.de/texte/0130_gauck_do.htm

http://taz.de/Kolumne-Besser/!8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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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크 인물평을 대신하여

2010년 6월 30일 [연방하원의원과 각주 정부가 파견한 의원을 50대 50 비율로 구성하여 소집되는]  14기 연방총회(Bundesversammlung)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흑황연정이 반가우크 입장을 고수하는 것을 독일정통보수 일간 FAZ는 2010.6.7 다음과 같이 평했다.  (관련기사 )

0 통독후 독일 정치인들의 공론공간에 대한 성찰(öffentliche Reflexion)과 자신에 대한 반성이 10대의 그것으로 퇴보한 반면, 요하힘 가우크는 그의 저서 „여름에 맞이하는 겨울 - 가을에 스며있는 봄“(Winter im Sommer – fruehling im Herbsrt)에서 볼 수 있듯이 베를린 공화국 정치계와 대조적으로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이런 10대 아이의 성찰수준으로 떨어진 정계의 모습은 기능장애에 걸린 가정에서 메르켈이 엄마노릇을 하는 모습으로, 혹은 응급실 의사 노릇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지적.


0 이어 흑황연정을 소위 „시민[세력]연정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흑황연정이 말하는 시민은 뭐냐고 질문하면서, 소비자로 전락한 시민을 다시 내용 충만한 자유개념으로 살려야 한다고 지적.


0 이와 관련 앞에서 언급된 저서에서 가우크가 한 말, 즉  „어떤 사람을 향한 , 더더욱이 어린이를 향한, 어떤 가치를 향한, 신을 향한, 예술을 향한, 자연을 향한, 어떤 일을 향한, 어떤 마음/몸가짐(Stil)을 향한  사랑에서 나 밖에 있는 그 무엇을 항해 기울어지는/굽어지는 [인간사회의] 바탕이 되는 보살핌(fundamentale Geneigtheit)이 발생한다. 책임으로서의 자유를 사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갖고 태어난 가장 좋고 깊은 역량(Potenzen)을 맞이하게 된다.“란 말을 인용하면서  시토앵으로서의 삶을 소비자로서의 삶으로 대체하는 경향과 달리 가우크의 자유개념은 시민개념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관조가 아니라 개입이라고 지적.  


0 가우크의 민주주의 개념 관련 그는 브레히트가 한 말을 달리 표현하면서 민주주의를 복잡한 것이지만 아주 단순한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면서, 민주주의는  어떤 형식적인 합의가 아니라 회의와 과학 사이를 오가는 변증법적인 동요(Unruhe)를 수반하는 믿음과 유사하다는 것.


0 가우크는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정치, 자유주의, 그리고 시민주의의 관한 자기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originäres) 신바람나는 민주주의 이해를 개발한 지성인이라면서,  기독민주연합, 기독사회연합, 그리고 자유민주당 등  이런 세 가지 이념에 기초한 정당들이 가우크를 연방대통령으로 뽑지 않을 것을 앞두고 이건 이성/지성적으로 합리화 될 수 없는 짓이라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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