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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28
    [의자놀이], 글쓰기, 그리고 진중권의 좆까는 소리(49)
    ou_topia
  2. 2012/08/27
    발터 벤야민 - 변증법적 이미지
    ou_topia
  3. 2012/08/27
    의자놀이, 단상 6
    ou_topia
  4. 2012/08/25
    의자놀이, 단상 5
    ou_topia
  5. 2012/08/25
    의자놀이, 단상 4
    ou_topia
  6. 2012/08/16
    의자놀이, 단상(4)
    ou_topia

[의자놀이], 글쓰기, 그리고 진중권의 좆까는 소리

공지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로 진중권이 이런 글을 썼다.

“‘의자놀이’를 둘러싼 의자놀이” (여기에도 게재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 근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는 느낌이 들면 들수록 역겨운 느낌이 더해진다.

왜 그러지?

소제목 “난무하는 해방의 서사”에서 왜 그런지 좀 분명해진다.

이 부분 전문 인용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하종강-이선옥이 새로 건물을 짓고, 그것을 하종강의 이름으로 등록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하종강이 그 건물을 공지영에게 임대한다. 그러자 이선옥이 나타나 자신이 건물의 공동소유주이니 자신에게도 임대료를 내라고 하는 격이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선옥은 이 사안에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 혹은 양도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책의 기획 자체가 공익을 위한 것이고, 저자는 물론이고 인용된 필자들, 책을 만든 출판노동자들 모두가 재능을 기부했다. 게다가 칼럼의 내용도 되도록 널리 복제될수록 좋은 공익적 콘텐츠에 속한다. 그런데 소유권 등기도 안 한 이선옥이 나타나, 그 공익적 콘텐츠에 대한 사유권을 주장하다가, 저자의 사과가 없다고 공익적 콘텐츠의 배포중지를 요구한다. 남세스럽지 않은가?
 
 자본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사유재(저작권)로 보나,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공유재(공익적 콘텐츠)로 보나, 애초에 이선옥이 낄 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하종강과 일부 자칭 좌파들은 특유의 스테레오타입를 사용하여 이번에도 신속히 또 하나의 이야기를 찍어냈다.

 ‘거대한 문화권력에 맞서 힘없는 무명 르포 작가의 권리를 수호하는 싸움.’
 
 이로써 공지영은 밤의 여왕이 되고, 이선옥은 착취당한 민초가 되고, 하종강은 정의의 기사가 되고, 트위터러들은 그 뒤를 따르는 민중의 군대가 된다. 이 해방의 서사가 아무리 숭고해 보여도, 그것은 오직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순도 100%의 허구다.”



“삽살개의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라 사냥개로.

그래,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등록, 임대, 임대료, 공동소유주, 권리, 양도 등 법률용어가 난무한다. 이런 용어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법대생들에게 맡기고 자본주의 법체계 시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이런 용어들처럼 겉만 도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아주 단순한 내면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칸트는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시원/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Rechtslehre" 첫 조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민]법체계의 기본명제다.

“법적 내 것(meum juris)이란 나와 붙어있는 것인데, 어떻게 붙어 있느냐하면 다른 사람이 내 동의 없이 그것을 사용할 경우 나를 찢는 행위가 될 만큼 붙어있는 것이다. 사용 가능성의 주관적 조건을 통틀어 소유라 한다.” (Das Rechtlich-Meine (meum iuris) ist dasjenige, womit ich so verbunden bin, daß der Gebrauch, den ein anderer ohne meine Einwilligung von ihm machen möchte, mich lädieren würde.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s Gebrauchs überhaupt ist der Besitz..)

이선옥이 아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을 써본 사람은 글쓰기가 애 낳는 것과 같음을 알 것이다. 글쓰기를 좆까 배설하는 식으로 하는 ‘남성’은 모르겠지만. 그래 니들을 싸 질러대고 쾌감을 느끼겠지만 이선옥은 글을 낳으면서 아파했고 애를 호적에 안 올렸다고 지랄하고 비아냥거리는 걸 보면서 또한번 아파했을 것이다.

그래,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사회주의적 관점의 기본은 어디에 있는가? 앞 칸트의 첫 명제에 함의되어 있다. 무산계급은 다른 사람에 의한 “법적 내 것” 사용에 있어서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굶어 죽음을 선택하면 몰라도.

사회주의적 관점이 지향하는 것이 뭔가? 공동소유다. 이게 뭔지 다시 칸트를 조회해 보자.

같은 책 20조항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래서 내가 계약을 통해서 취득하는 것은 (약속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속이다. (...) 계약에 의한 내 것의 양도는 항구성법(lex continui)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 이 항구성은 나아가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 [계약당사자] 양자(promittents et acceptantis)의 특정한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통합된 의지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달리 표현하면, 약속하는 자가 먼저 자기 소유를 다른 사람이 선점할 수 있게 내버리는 (derelinquit), 혹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여(renunciat) 다른 사람이 바로 그 권리를 챙기는, 혹은 그 반대의 식이 아니다. 양도는 결국 행위인데, 그 안에서 대상이 한 순간 양자 모두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Durch den Vertrag also erwerbe ich das Versprechen eines anderen (nicht das Versprochene). (...) Die Übertragung des Meinen durch Vertrag geschieht nach dem Gesetz der Stetigkeit (lex continui). (...) Diese Stetigkeit aber bringt es mit sich, daß nicht eines von beiden (promittentis et acceptantis) besonderer, sondern ihr vereinigter Wille derjenige ist, welcher das Meine auf den anderen überträgt; also nicht auf die Art: daß der Versprechende zuerst seinen Besitz zum Vorteil des anderen verläßt (derelinquit), oder seinem Recht entsagt (renunciat) und der andere sogleich darin eintritt, oder umgekehrt. Die Translation ist also ein Akt, in welchem der Gegenstand einen Augenblick beiden zusammen angehört.)

사회주의적 관점이 지향하는 것이 뭔가. 자본주의에서는 한순간만 가능한 공동소유를 최소한 장기화하자는 것이다. 이 요구는 허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이론상 필연적이고 그래서 가능한  가능한 것에 실질적, 실천적인 힘을 보태자는 것이다.  것을 실천적으로 이룩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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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 변증법적 이미지

"Man sagt, daß die dialektische Methode darum geht, der jeweiligen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ihres Gegenstandes gerecht zu werden. Aber das genügt nicht. Denn ebensosehr geht es ihr darum, der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des Interesses für ihren Gegenstand gerecht zu werden. Und diese letztere Situation liegt immer darin beschlossen, daß es selber sich präformiert in jenem Gegenstande, vor allem aber, daß es jenen Gegenstand in sich selber konkretisiert, aus seinem Sein von damals in die höhere Konkretion des Jetztseins (Wachseins!) aufgerückt fühlt. Wieso dies Jetztsein (...) an sich schon eine höhere Konkretion bedeutet – diese Frage kann die dialektische Methode freilich nicht in der Ideologie des Fortschritts sondern nur in einer, an allen Teilen diese überwindenden Geschichtsanschauung erfassen. In ihr wäre von der zunehmenden Verdichtung (Integration) der Wirklichkeit zu sprechen, in der alles Vergangene (zu seiner Zeit) einen höheren Aktualitätsgrad als im Augenblick seines Existierens erhalten kann. Wie es als höhere Aktualität sich ausprägt, das schafft das Bild als das und in dem es verstanden wird. Und diese dialektische Durchdringung und Vergegenwärtigung vergangener Zusammenhänge ist die Probe auf die Wahrheit des gegenwärtigen Handelns. Das heißt: sie bringt den Sprengstoff, der im Gewesenen liegt (…) zur Entzündung. So an das Gewesene herangehen, das heißt nicht wie bisher es auf historische sondern auf politische Art, in politischen Kategorien behandeln."


Walter Benjamin: Das Passagen-Werk, in: Rolf Tiedemann (Hg.): Walter Benjamin - Gesammelte Schriften, Band V.1, Frankfurt am Main 1991, S. 494f.
 

 

"사람들은 말하기를 변증법적 방법은 [대상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대상이 처해있는, 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방법에서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방법이 대상으로 삼는 것에 개입하는 존재가(Interesse) 처해 있는 구체적-역사적 상황을 또한 충실하게 담아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근데 둘째 상황은 개입하는 존재(Interesse)가 항상 스스로 [변증접적 방법의] 대상 안에서 자신을 미리 형성한다는데, 특히 그 대상을 자기 안에서 구체화한다는데, 그 대상이 옛날있기에서 지금있기(깨어있기!)로, 보다 높은 구체화로 한자리 더 올라온 것을 느끼는데 내포되어 있다. 어떤 이유로 이 깨어있기 (...) 자체가 이미 보다 높은 구체화를 의미하는가?  - 이 질문은 사실 변증법적 방법이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아니 오히려 오직 바로 그 진보이데올로기를 모든 부분에서 극복하는 역사관에서만 제기되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역사관에서 [비로소] 증가하는 현실의 농축(통합)이 이야기될 수 있겠는데, 이건 지나간 모든 것들이 그들이 존재했던 순간보다 더 높은 현실성수준을 취할 수 있는 현실의 농축(통합)이다. 지나간 것이 자기를 보다 높은 현실성으로 드러나게 각인함에 따라 이미지가 창조되는데, 이때 지나간 것은  바로 그 창조된 이미지로, 그 이미지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나간 연관성들의 변증법적인 삼투(滲透)와 재-현재화가 [우리가 지금 맞서고 있는] 현재 실천의 진리에 대한 판가름인 것이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삼투와 재-현재화가 지나간 것 안에 있는 폭탄에 (...) 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나간 것에 접근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지나간 것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 (historisch) 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나간 것을 정치적인 카테고리로 다룬다는 말이다." (ou_topia)

 

 

<의자놀이>란 폭탄을 만들어 놨는데, 왜 뇌관을 때리지 않고 거기다 물총질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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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6

하종강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논쟁을 보면 까깝하기만 하다.

왜 <의자놀이>의 이미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지?
 
난 <의자놀이> 출간과 관련해서 공지영이 한 일이 “의자놀이”란 제목을 만들어 낸 일 외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공지영의 기여보다 더 큰 기여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념의 노동이 엿보이는 제목이다. 이게 “교양시민”이 자기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성찰”의 결과라고 해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애플사를 한 번 봐라. “i-pad"란 이름을 완전히 자기 걸로 하기 위해서 중국 모 기업에 어떤 액수를 지불했나? 조중동이 왜 이리도 조용하나? “의자놀이”란 책 제목이 가지는 파워 때문이 아닐까?

“의자놀이”란 이미지를 평하는 글은 노정태의 “공지영, '쌍용차의 눈물' 보며 <도가니>에 빠지다!” 밖에 없다.

“공지영의 <의자놀이>(휴머니스트 펴냄)는 아주 좋은 제목이다. 이 책이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를 다룬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제목이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를 놓고 빨리 앉는 사람이 살아남는 놀이'의 은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분석이다. <의자놀이> 이미지를 은유의 수준에서 처리하고 있다.

구글에서 “벤야민”을 검색해보니 35만 8천개 등록이 검색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무려 239만개의 등록이 검색된다. 근데 “변증법적 이미지 ∧ 의자놀이”는 0 이다.

<의자놀이>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변증법적 이미지”가 아닌가? 벤야민 전문가들은 많은데 왜 이리도 <의자놀이>에 대한 “변증법적 이미지” 접근이 전무하지? 물총 쏘는 것만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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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5

스케치

 

1. 도로시아 랭의 사진 <이주 어머니/Migrant Mother>의 뉴딜의 사회공학( social engineering)에서의 기능/역할

 

2. <의자놀이>와 박근혜의 사회공학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관련링크

http://www.zeithistorische-forschungen.de/site/40208749/Default.aspx

http://paulturounetblog.files.wordpress.com/2008/09/case-study-migrant-mother.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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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4

<의자놀이>를 놓고 이상야릇한 대립구도가 빚어졌다. 애기했다시피 난 이 대립구도에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없다.

난 처음부터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명제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1. 공지영의 <의자놀이>는 진보가 말하는 “배제 서사”의 발전형이다.

르포하면 얼른 생각나는 책이 있다. 귄터 발라프의 <가장 낮은 곳>이다. 이런 책이다.

“『가장 낮은 곳 Ganz unten』은 귄터 발라프 Günter Wallraff가 1983년 3월부터 2년 동안 국적과 신분을 위장하고 터키인 노동자, 알리(레벤트 시니르리오글루)로 살면서 독일 사회와 노동 현장에서 겪은 차별과 착취에 관한 체험르포이다. 1985년 첫 출판 된 이 책은 지금까지 독일어판으로만 35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으며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 출판 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1) 르포 형식의 이 책은 13장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장마다 발라프는 자신의 체험 보고를 묘사하고 다른 동료들이 겪은 체험도 함께 끼워 넣으며 이야기 속의 이야기나 대화체 형식으로 표현하였다.”(서정일(한국외대), 변장과 위장을 통한 사회 비판과 폭로 - 귄터 발라프의 르포 『가장 낮은 곳』, http://brecht.german.or.kr/jungbo.net/Hwizard/contents/ jahrbuecher/22/3-2%EC%84%9C%EC%A0%95%EC%9D%BC.pdf)

이 르포는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폭로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귄터 발라프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라프 르포의 핵심은 [몸소]체험이다. 근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실을 인식 저편의 즉자(an sich)로 규정하고 그걸 꾀를 사용하여 고스란히 취하려는 직관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정신현상학 서론)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헤겔이 행한 비판의 논지는 현실이란 인식 저편이 아니라 대상과 인식이 항상 어우러져 있는 총체성(Totalität)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수고하여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은 ‘까 발라진 팩트’(factum brutum)들이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은 그런 것들을 주워 모아 [인과성에 따라] 엮어 꿰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이란 수없이 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문이란 그런 “원들의 원”(Kreis von Kreisen)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 철학의 정점은 시스템이 아니라 엔치클로페디아이다.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가 처한 현실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탁월한 사람이 몸소(authentisch), 원천에 가서 (originell) 찍어 올리는 factum brutum이 아니다. 이런 총체성들이 현존하는 양식은 자료다. 수많은 신문기사, 법원판결, 병원기록, 경찰서 기록, 이주노동자외국인단체 상근자의 진술, 외국인의 이주노동자의 일기 등등 널리 펼쳐져 있다. 이 걸 “원들의 원”으로 만드는 것이 ‘외국인 이주노동자 현실’의 진리다. 여기에 수고가 있다. 역사를 학문으로 만드는 첫 마당에 이런 수고가 있었다. 진리는 찍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노동의 고삐를 채워”(“ἐπιπόνως”) 수많은 자료를 “탐색하는”(“ηὑρίσκετο”) 과정의 결과였다. (“ἐπιπόνως δὲ ηὑρίσκετο”,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2장).
    
“[몸소]체험”은 진짜 수고하는 척 한다. 모습뿐만 아니라 말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들여 변장하고 위장하여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찍어 올리지만 이건 "개념의 노동"(Arbeit des Begriffs)이 결여된 놀이에 가까운 것일 뿐이다.

공지영과 휴머니스트사의 <의자놀이>가 최소한 이런 맥락에서 싹수가 있는 것이고 공지영의 “나 고생 했어”는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되는 것이다.   


2. 쌍용차 해법을 두고 공지영/휴머니스트사식 르포와 김기원식 학문하기 사이에 진검승부가 있어야 한다.

김기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 “공지영의 ‘의자놀이’와 쌍용차의 해법”에서 하종강으로 매개된 공지영과 이선옥간의 대립을 빗나간 논란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립은 자연 소멸되든지 양자가 소통하든지 해서 암튼 해소될 것이다.

맞다. 쌍용차 해법이 문제다.

이걸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첫째, 경제학 문제다.

우선 경제학이란 게 뭔지 논쟁해야 한다. 경제학이 수학인지 아니면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달려있는 철학이고 정치인지, 다시 말해서 정치경제학인지 사투해야 한다. 실존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정치경제학이 폐기처분된 후 경제학은 수학이 되었다. 근데 그게 가져다 준 게 뭔가? 세계를 말아먹는 금융위기가 아닌가? 정확한 수학에 기댄 경제학이 왜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하는가? 수학에 기댄다는 게 자본에 기댄 것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였나?

둘째, 학문하기 문제다.

여기 진보넷 바깥블로그 <Social and Material>의 heesang님은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기”를 권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학자인가? 수고하여 현실세계의 ‘총체성’들을 “원들의 원”으로 만든 학자다. 10년 이상 별 볼일 없는 상업편지까지 검토해 가면서  자본론을 집필한 학자다. 어찌 보면 공지영이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고 있다. 현실을 직접 찍어주는 뭔가에 의존하지 않고 ‘총체성’으로 널려있는 자료들을 최소한 한 곳에 모은 것이다. 정치경제학 싹수가 있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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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놓고 의자놀이가 진행 중인가?

모르것다.

아는 것은 단지 의자놀이는 계급의식이 없는 집단에 먹히는, 그리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연대를 해체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이다. 먹고 뱉어내는 자본의 행패를, 비 피해 가듯이 피해 갈 수 있는 찬스가 있다는 <룸펜 자유주의자>들에게 어울리는 놀이다. 우산을 준비할 수 있다고도 한다. 아니, 우산 몇 개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공지영이 재능기부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껍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발현인가, 아니면 룸펜자유주의자의 의식이 깔려있는 발언인가?

계급, 계급의식? 고리타분한 말과 분석틀?

레닌의 계급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인 생산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대부분 법규로 고착되고 문서화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의 역할에 따라, 그리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임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의 다른 표현] 취득양식과 그 몫의 크기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인간의 대집단들을 계급들이라고 칭한다. 계급들은  규정된 사회적 경제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차이의 결과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집단들이다.” (레닌, 위대한 대안, 1920.4.11 신문  “공산주의적인 수보트닉”에 게재, http://www.erich-koehler-ddr.de/dokumente/initiative.html, 2012.8.16)  


계급의식?

레닌이 계급정의에서 말한 자리는 체화될 것이다. 뭉크의 그림 <길가는 노동자들>을 사유하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노동자계급의 체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ou-topia)


계급의식은 계급이 자기 자리를 떠날 때 생기는 의식이다. 민족의식은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다. 생물학적인 것과 개별 인간의 카테고리에 근거한 의식은 자기의 존속을 주장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계급의식은 완전히 다르다. 계급의식은 계급을 부정한다. 자기 자리를 떠나면서 자기부정을 하는 운동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유적존재를 실현하는 유일무이한 휴머니스트 의식이다. 계급의식의 노동자는 “공지영으로서” 뭘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뭔가를 요구한다. 사회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자부심에 근거한 요구다. 노동자는 기부금 수혜자가 아니다. 인간의 유적존재를 물질적으로 담보하는 계급이며, 만인을 위한 부를 요구하면서 “계급사회는 아니다”라는 부정운동을 하는, 계급투쟁을 하는 계급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근데 계급투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아마 능력이 부족해서 계급투쟁의 서브텍스트를 읽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근데 가끔, 계급투쟁이 고리타분한 것이 된 현재 다시 민족, 종교, 개별 인간 등의 카테고리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야만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계급투쟁의 인간역사가 개시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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