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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편하다. 속이 상한다. '남이야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던'. 물론, 68세대의 자유분방한 미학에 젖은 눈으로 보기엔 촌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들을 멀리하고 싶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책에서 답습한 역사를 늘어놓으면서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왜 그렇게 사는지. 끈질기게 질문한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이번엔 문외한의 무지에 도피한다. 그래도 놔주지 않는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So nicht(이건 아니다).“
이북에 대한 평가였다. 아니다. 결국, 나에 대한 평가였다. 자유분방함을 만끽하고 싶은 나의 거부감이었다.
2.
어느 한 지인이 서명운동 서명지를 들이댄다. 박근혜 청와대에 청원하는 내용이다. '재독한인 1세대를 좀 살게 해 달라.' 연금으로 기초 생활을 할 수 없거나 빡빡한 생활을 해야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속을 찡그리면서 서명한다.
문재인 청와대에 별반 청원이 있다. 속이 찡그러지는 건 마찬가지다.
3.
'진정성의 정권'에 진정 어린 청원.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관계의 범주에 '성'이 붙어서 '거리 둠'이 없는 구체적인 혼합물이 되었다. 폐쇄회로. 개념이 아른거린다.
도보다리 회담은 가시적이지 투명하지 않다.
4.
진정성이 아니라 게임이다. "삐딱한 관점"(der linkische Gesichtspunkt, 횔더린)에 미래가 있다. 역풍엔 돛을 삐딱하게 달고 좌우 지그재그로 나아가야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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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논쟁을 보면 까깝하기만 하다.
왜 <의자놀이>의 이미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지?
난 <의자놀이> 출간과 관련해서 공지영이 한 일이 “의자놀이”란 제목을 만들어 낸 일 외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공지영의 기여보다 더 큰 기여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념의 노동이 엿보이는 제목이다. 이게 “교양시민”이 자기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성찰”의 결과라고 해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애플사를 한 번 봐라. “i-pad"란 이름을 완전히 자기 걸로 하기 위해서 중국 모 기업에 어떤 액수를 지불했나? 조중동이 왜 이리도 조용하나? “의자놀이”란 책 제목이 가지는 파워 때문이 아닐까?
“의자놀이”란 이미지를 평하는 글은 노정태의 “공지영, '쌍용차의 눈물' 보며 <도가니>에 빠지다!” 밖에 없다.
“공지영의 <의자놀이>(휴머니스트 펴냄)는 아주 좋은 제목이다. 이 책이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를 다룬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제목이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를 놓고 빨리 앉는 사람이 살아남는 놀이'의 은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분석이다. <의자놀이> 이미지를 은유의 수준에서 처리하고 있다.
구글에서 “벤야민”을 검색해보니 35만 8천개 등록이 검색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무려 239만개의 등록이 검색된다. 근데 “변증법적 이미지 ∧ 의자놀이”는 0 이다.
<의자놀이>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변증법적 이미지”가 아닌가? 벤야민 전문가들은 많은데 왜 이리도 <의자놀이>에 대한 “변증법적 이미지” 접근이 전무하지? 물총 쏘는 것만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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