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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편하다. 속이 상한다. '남이야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던'. 물론, 68세대의 자유분방한 미학에 젖은 눈으로 보기엔 촌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들을 멀리하고 싶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책에서 답습한 역사를 늘어놓으면서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왜 그렇게 사는지. 끈질기게 질문한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이번엔 문외한의 무지에 도피한다. 그래도 놔주지 않는다. "이게 사회주의인가?" „So nicht(이건 아니다).“
이북에 대한 평가였다. 아니다. 결국, 나에 대한 평가였다. 자유분방함을 만끽하고 싶은 나의 거부감이었다.
2.
어느 한 지인이 서명운동 서명지를 들이댄다. 박근혜 청와대에 청원하는 내용이다. '재독한인 1세대를 좀 살게 해 달라.' 연금으로 기초 생활을 할 수 없거나 빡빡한 생활을 해야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속을 찡그리면서 서명한다.
문재인 청와대에 별반 청원이 있다. 속이 찡그러지는 건 마찬가지다.
3.
'진정성의 정권'에 진정 어린 청원.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관계의 범주에 '성'이 붙어서 '거리 둠'이 없는 구체적인 혼합물이 되었다. 폐쇄회로. 개념이 아른거린다.
도보다리 회담은 가시적이지 투명하지 않다.
4.
진정성이 아니라 게임이다. "삐딱한 관점"(der linkische Gesichtspunkt, 횔더린)에 미래가 있다. 역풍엔 돛을 삐딱하게 달고 좌우 지그재그로 나아가야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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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러듯이 [갓난아이의] 느낌이 먼저다.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뭔가 아니다. ‘역사의 천사’에게 내 몸을 맡길 수 없다. 반면 ‘기억의 천사’에게는 내 몸을 맡기고 싶다.
‘역사의 천사’와 ‘기억의 천사’는 20세기 노동[자]운동의 패배와 나치파시즘의 득세 앞에서 좌파가 취할 수 있는 둘로 갈라지는 자세(Haltung)의 비유(Sinnbild)다.
한국에서 벤야민이 유행(?)하게 된 것 아마 한국 노동[자]운동이 일단 패배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기억의 천사’가 더 ‘유행’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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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참조한 파울 클레의 "앙엘루스 노부스"(Angelus Novus"/새로운 천사) - 역사의 천사
페터 바이스가 "저항의 미학"에서 참조한 뒤러의 "멜렌콜리아" - 기억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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