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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7

횔더린의 찬가/송가 <라인강>을 어쩌다 번역시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늘 그러듯 별 준비없이 덤볏는데, 가면 갈수록 태산이다. 횔더린에 대하여 아는 게 고작해야  페터 헤르트링의 역사소설 <횔더린>과 그의 시를 한때 부르노 간츠(Bruno Ganz)의 목소리를 통해서 밤새 듣고 또 들었던 것이 전부다. 하나 더 있다면, 쬐끄만 좌파 출판업체 “붉은 별”(Roter Stern)이 감히 출간한 횔더린 전집을 F.시의 시민도서관에 종종 들여다 본 것 + 횔더린에 심취하여 그가 머물렀던 곳을 하나하나 찾아본 것 (아직 다 못했다.)

 


<라인강>의 내용 파악을 멈추고 그 구조를 잠깐 살펴보려고 한다. <라인강>은 15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5연을 일반적으로 3연을 하나로 하여 5부로 구분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근거는 횔더린이 원래 자필원고에 <라인강> 모두(冒頭)에 쓴 글에 있다.

 

„Das Gesez [=Gesetz] dieses Gesanges ist, daß die zwei ersten Parthien [=Partien] der Form <nach> durch Progreß u Regreß entgegengesetzt, aber dem Stoff nach gleich, die 2 folgenden der Form nach gleich dem Stoff nach entgegengesetzt sind die letzte aber mit durchgängiger Metapher alles ausgleicht.“

“이 노래의 법은 첫 2 부는 형식상으로는 진보와 퇴보로 대립하나, 소재상으로는 동일하고, 다음 두 개의 부들은 형식상으로는 동일하나 소재상으로는 대립한다. 이와 달리 마지막 부는 소재와 형식을 두루 관통하고 통일하는 은유로 모든 것의 화해를 이룬다.”

 

여기서 두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1.“durchgängig”의 이해에 있어서 횔더린 전문가(?)들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최소한 그들이 하는 말이 이해하기 힘들다. 헤겔 <정신현상학>의 <지각>편이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이 표현을  <지각>편에서 처럼 소재와 형식을 아우르는 “화해” 혹은 “통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2.“이 노래의 법”(das Gesez dieses Gesanges)이란 표현이 쉽지 않다. 법이란 건 보편적인 것인데, 이게 어찌 “이 노래”, 즉 개별적인 것의 소유물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하여 예술 작품은 “act of self-legislation”으로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스스로 만든다고 떠들기도 한다. (참조: ᅠJoshua Robert Gold, Minority Report: Approaching Peter Szondi’s Hölderlin Studies, in: Russell Berman and Joshua Gold, eds., Peter Szondi and Critical Hermeneutics, S.114,  https://books.google.de/books?id=3kZkF6tSjZsC&pg=PA114&lpg=PA114&dq=das+gesetz+dieses+gesanges+szondi&source=bl&ots=tE_QFZEp8t&sig=SB1BGTUcz5NkTjrx-sMrFOVILcE&hl=ko&sa=X&ei=Wx-IVJS1O8bVPZKrgYgG&ved=0CCAQ6AEwAA#v=onepage&q=das%20gesetz%20dieses%20gesanges%20szondi&f=false)

“이 노래의 법”이란 표현은 “이 나라의 법”이란 표현과 유사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횔더린이 말하고자 하는, <라인강>이란 노래를 통해서 구상함과 동시에 현실화한 “노래”(Gesang”)란 우선 어느 한 “나라”처럼 풍부한 내적 분화가 (innere Differenzierung) 있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 내적 분화를 서술하는 방법, 혹은 법으로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아우르는 변증법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 변증법이 <정신현상학>의 변증법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다.


암튼, 횔더린이 <라인강> 모두에 삽입한 “길잡이”에 근거하여 <라인강>을 5부로 구분한다. 3연을 쭉 한 부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울리히 가이어(Ulrich Gaier)는 형식과 소재의 동일 및 대립이 <라인강>에서 어떻게 서술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다섯 부를 매우 다르게 구분한다 (참조: Ulrich Gaier, Aufmerksamkeits-Ebenen. Ein Hölderlin-Lehrgang,   http://www.hoelderlin-gesellschaft.de/fileadmin/user_upload/Dokumente/Hoelderlin_Lehrgang.pdf). 근데, 내가 보기에 설득력이 없다. 글 몸체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 몸체(Textkörper)에 충실한 구분은 <라인강>의 구분에서 “aber”(반면)와 “jetzt”(지금)을 간과할 수 없다. 다들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라인강>의 분화.분절의 마디에 등장하는 핵심어는 앞 두 낱말이다. 이에 따라 구분하면 <라인강>이 영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는게 보인다. (이에 대해선 다음에)

 
여기서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횔더린의 ‘모두발언’을 반영하면 <라인강> 첫 낱말이 “법”이고 마직말 낱말이 “혼돈”(Verwirrung)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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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6

[Heureka! 앞 연과 다음 연의 연관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다음 연 첫 행 세번째 낱말 ‘aber’의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새벽이 역시 발견의 시간인가 보다. 잠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생각하는 가운데 답이 보였다. 다음 연의 내용은 신은 신선놀음으로, 마치 바둑을 두듯이, 우리 인간을 가지고 장난한다는 것. 희랍 신관인데, 이런 신관이야말로 바로 앞 연에서 서술된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 관계가 파괴되어 파생된,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과 함께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게 보였다. ‘aber’가 ‘그러나’가 아니라 앞의 연과 뒤따르는 연을 한 ‘쌍’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이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번역한 연들이 ‘aber’에 의해서 한 쌍을 이룬다 (3, 4 연 제외). 이런 ‘aber’를 내멋대로 “변증법적 aber’라고 이름해 본다.]

 

신이 되려고 하는 완고한 자의 욕망에 상응하는, 그런 욕망과 한쌍을 이루는 신[관]은 이렇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희랍 신들은 자신들의 영원불멸에 충만하여 [진정]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영웅들과 인간들과 그밖에 살다가 죽어야만 하는 생명체들이다. 왜냐하면, 유유자적하는 복받은 신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도 신이 내리는 벌을 받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면 (si hoc fas est dictu), 저네들이 뭔가를 느끼고자 하면, 그들의 이름을 빌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몸부림에 참여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느껴주는 [대]타자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횔더린이 여기서 인용하는 로마의 표현 ‘si hoc fas est dictu’ 혹은 ‘si fas est’의 fas에서 유출할 수 있는 것은 이 연에서 이야기되는 신관은 다름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말이 비운이 되는 (fatum) 숙명론이란 것.) [희랍류의] 신들에겐 이런 놈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신들은 신을 대신하여 느끼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는 대가로, 신들처럼 되려하면서 신에 어울리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떠벌이(Schwärmer/낭만주의적 몽상가)에게 자기 집을 산산조각 내고, 자기 집의 사람과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둘 다에게 똑같은 폭군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서진 집의 잔해에 묻는 벌을 내린다.      

 

Es haben aber an eigner
Unsterblichkeit die Götter genug, und bedürfen
Die Himmlischen eines Dings,
So sinds Heroën und Menschen
Und Sterbliche sonst. Denn weil
Die Seligsten nichts fühlen von selbst,
Muß wohl, wenn solches zu sagen
Erlaubt ist, in der Götter Namen
Teilnehmend fühlen ein Andrer,
Den brauchen sie; jedoch ihr Gericht
Ist, daß sein eigenes Haus
Zerbreche der und das Liebste
Wie den Feind schelt' und sich Vater und Kind
Begrabe unter den Trümmern,
Wenn einer, wie sie, sein will und nicht
Ungleiches dulden, der Schwä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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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6

[Heureka! 앞 연과 다음 연의 연관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다음 연 첫 행 세번째 낱말 ‘aber’의 의미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새벽이 역시 발견의 시간인가 보다. 잠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생각하는 가운데 답이 보였다. 다음 연의 내용은 신은 신선놀음으로, 마치 바둑을 두듯이, 우리 인간을 가지고 장난한다는 것. 희랍 신관인데, 이런 신관이야말로 바로 앞 연에서 서술된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 관계가 파괴되어 파생된,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과 함께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게 보였다. ‘aber’가 ‘그러나’가 아니라 앞의 연과 뒤따르는 연을 한 ‘쌍’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 이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번역한 연들이 ‘aber’에 의해서 한 쌍을 이룬다 (2, 3 연 제외). 이런 ‘aber’를 내멋대로 “변증법적 aber’라고 이름해 본다.]

 

신이 되려고 하는 완고한 자의 욕망에 상응하는, 그런 욕망과 한쌍을 이루는 신[관]은 이렇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희랍 신들은 자신들의 영원불멸에 충만하여 [진정]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영웅들과 인간들과 그밖에 살다가 죽어야만 하는 생명체들이다. 왜냐하면, 유유자적하는 복받은 신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도 신이 내리는 벌을 받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면 (si hoc fas est dictu), 저네들이 뭔가를 느끼고자 하면, 그들의 이름을 빌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몸부림에 참여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느껴주는 [대]타자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횔더린이 여기서 인용하는 로마의 표현 ‘si hoc fas est dictu’ 혹은 ‘si fas est’의 fas에서 유출할 수 있는 것은 이 연에서 이야기되는 신관은 다름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말이 비운이 되는 (fatum) 숙명론이란 것.) [희랍류의] 신들에겐 이런 놈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신들은 신을 대신하여 느끼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는 대가로, 신들처럼 되려하면서 신에 어울리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하는 떠벌이(Schwärmer/낭만주의적 몽상가)에게 자기 집을 산산조각 내고, 자기 집의 사람과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둘 다에게 똑같은 폭군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서진 집의 잔해에 묻는 벌을 내린다.      

 

Es haben aber an eigner
Unsterblichkeit die Götter genug, und bedürfen
Die Himmlischen eines Dings,
So sinds Heroën und Menschen
Und Sterbliche sonst. Denn weil
Die Seligsten nichts fühlen von selbst,
Muß wohl, wenn solches zu sagen
Erlaubt ist, in der Götter Namen
Teilnehmend fühlen ein Andrer,
Den brauchen sie; jedoch ihr Gericht
Ist, daß sein eigenes Haus
Zerbreche der und das Liebste
Wie den Feind schelt' und sich Vater und Kind
Begrabe unter den Trümmern,
Wenn einer, wie sie, sein will und nicht
Ungleiches dulden, der Schwä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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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5

[횔더린의 삶은 비록 혁명가의 삶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의 생각의 중심에는 항상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횔더린에서 프랑스 혁명을 사상한 하이데거류의 해석은 1945년 패망한 “독일정신”의 난장이들이 따르는 해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연 해석.번역이 어렵다. 여기에 횔더린의 삶과 “횔더린의 유일한 친구”(페터 헤르트링, 그의 역사소설 <횔더린>, 579쪽)인 혁명가 이작 폰 징클레어(Isaak von Sinclair)의 삶이 삼투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연은 ‘doch’로 시작한다. ‘그러나’ 정도로 해석.번역할 수 없다. 연인관계에서 한사람이 크게 잘못하여 상대가 결별을 선언할 때 흔히 등장하는 표현이 “Ich liebe dich doch”다. ‘나의 잘못이 다 맞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정도가 되겠다. 1989년 11월 13일 동독 인민회의에서 국가보안부 장관 에리히 밀케가 한 말이 생각난다. “Ich liebe – Ich liebe doch alle – alle Menschen ...” “나는 사랑한다. 나는 정말(doch) 모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누가 그걸 믿어? 평범한 사람들을 못살게 했던 현상이 정면으로 반박하는데.  현상과 들여다 볼 수 없는 내면이 사이비관계가 될 때 등장하는 표현이 ‘doch’다. 나이 30을 갓 넘은 1801년에 이 시를 쓴 횔더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암튼, 이런 사이비를 인식했는지 거듭 강조하는 표현으로 첫 행이 시작된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천년까지 누리리라

 

에 <단심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줄이 있으랴  
 

로 대답한 정몽주의 심정이었을까?]

 

 

 


그러나 그는 결코, 결코 그것[젊은 날의 혁명적 열기/프랑스 혁명]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자가 근원을, 젊은 시절의 순수한 목소리를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거처할 수 있는 모든 땅(Wohnung)이 다  꺼지고 [땅을 지배하는] 법이 또한 다 꺼져서 인간의 대낮이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Unbild, 당시의 아델룽 사전에 따라 번역)  될 것이다. 누구였는가? 누가 맨처음 사랑으로 맺어진 결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서로에게 올가미가 되게 하였는가?  [이런 썩어빠진 사랑의 올가미에 목이] 굳어진 완고한 자들이 비로소 천상의 불을 취할 수 있다는 자신의 권리에 확신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각자의 권리인 천상의 불을 조롱하지 않았던가? 이때 비로소 (사망으로 향하는) 인간의 길을 경멸하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대담 무쌍한 일을 선택하고 감히 신들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 않았던가?           

 

Doch nimmer, nimmer vergißt ers.
Denn eher muß die Wohnung vergehn,
Und die Satzung und zum Unbild werden
Der Tag der Menschen, ehe vergessen
Ein solcher dürfte den Ursprung
Und die reine Stimme der Jugend.
Wer war es, der zuerst
Die Liebesbande verderbt
Und Stricke von ihnen gemacht hat?
Dann haben des eigenen Rechts
Und gewiß des himmlischen Feuers
Gespottet die Trotzigen, dann erst
Die sterblichen Pfade verachtend
Verwegnes erwählt
Und den Göttern gleich zu werden getracht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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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4

[다음 연 첫 행 “Ein Gott will aber sparen den Söhnen”의 첫 낱말인 부정관사 “ein”의 의미가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문학작품에서 정관사와 부정관사는 해당 명사에 관한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정관사의 경우 이미 도입된 내용에서, 반면 부정관사의 경우 뒤에 도입될 내용에서 해당 명사의 정체가 밝혀진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Ich fuhr auf einer Landstraße, da stand ein Auto – 나는 어떤 지방도로를 주행하고 있었다. 거기 차 한대가 서 있었다. 이 차에 대한 정보는 뒤에서 도입되는 내용에 있다. 그래서 부정관사는 보통 약간의 긴장, 기대, 혹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부정관사의 다른 용법은 일반화(Generalisierung)의 한 방법인 “대표 단수에 의한 일반화”(exemplarische Generalisierung)에서 사용된다. “Ein Mann weint nicht.” (남자는 울지 않는다. “너 남자 맞아? 왜 울어?” 란 의미다.)

 

“ein Gott”의 해석.번역에서 우선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횔더린이 이야기하는 ‘신’은 흔히 이야기되는 신이 아니다. 이 신의 정체는 뒤에서 밝혀진다. 이 외에 횔더린은 삶이 충만한 곳에, 즉 사랑 우정 더불어살기(Geselligkeit)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성취되는 [시.공간의] 곳에 다양한 신이(복수!) 거주한다고 생각했다는 (참조: R. Safranski, Romantik, Eine deutsche Affäre, S.166) 정도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첫 행의 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다른 표현은 “aber”다. 반대의 의미라기 보다는 “Christmas comes but once a year.”에서의 ‘but’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한다. ‘익히 알고 있듯이’ 정도라 할까.]

 

[자식들의 행동을, 자신이 스스로 체험해서, 익히 알고 있는, 자식의 삶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인] 신은 자식들이 정처없는 삶을 사는 걸 면하게 해주고 싶어하면서, 흐르는 물들이 깊은 곳에서 라인강 처럼, 단지 성스러운 알프스에 억제되어, 그에게 막말로 분노할 때 [조용히] 미소짖는다. 이런 연단의 장에서 모든  것이 또한 숙성된다. 이런 연단을 받고 산맥을 떠난 후 라인강이 자신에 만족하여 독일 땅에서 조용히 흐르고, [남을 등쳐 먹지 않지만 이득을 남기는] 좋은 [사]업에 푹 빠져 [예전의] 그리움을 달래는 모습, 아버지 라인강[으로 성숙하여] 땅을 일구고 도시를 세워 사랑하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          

 

Ein Gott will aber sparen den Söhnen
Das eilende Leben und lächelt,
Wenn unenthaltsam, aber gehemmt
Von heiligen Alpen, ihm
In der Tiefe, wie jener, zürnen die Ströme.
In solcher Esse wird dann
Auch alles Lautre geschmiedet,
Und schön ists, wie er drauf,
Nachdem er die Berge verlassen,
Stillwandelnd sich im deutschen Lande
Begnüget und das Sehnen stillt
Im guten Geschäfte, wenn er das Land baut,
Der Vater Rhein, und liebe Kinder nährt
In Städten, die er gegrün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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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3

그래서 즐겨 날뛰는 깔깔거림이(ein Jauchzen) 그의 말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기저귀] 포에 칭칭 감긴 채(in Wickelbanden)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럴진대, 먼저 강둑들이, 삐뚤어진 것들이 그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와 그를 덮쳐(durstig) 에워싸고, 지네들의 울타리 안에서[im eigenen Zahne; Zahn/이빨에서 Zaun/울타리가 들린다.] 그를 잘 보호하겠다는 미명아래 아무런 사심이 없는 그를 [묶어] 이러저리 끌고 다니려고 욕망할 때, 그는 그런 뱀들을 비웃으면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그런 것을 먹이삼아 앞으로 돌진해 나간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가 서둘러 그를 온순하게 하지 않으면, 즉 그가 클 수 있게 해주지 않으면, 그러면 그는, 번개처럼, 땅을 쪼갤 수 밖에 없다. [쏜살같이 흐르는] 그의 뒤로, 마술에 걸린 듯, 숲들이 늘어지고 산들이 멀어지면서 폭싹 주저앉는다.

 

Drum ist ein Jauchzen sein Wort.
Nicht liebt er, wie andere Kinder,
In Wickelbanden zu weinen;
Denn wo die Ufer zuerst
An die Seit ihm schleichen, die krummen,
Und durstig umwindend ihn,
Den Unbedachten, zu ziehn
Und wohl zu behüten begehren
Im eigenen Zahne, lachend
Zerreißt er die Schlangen und stürzt
Mit der Beut und wenn in der Eil'
Ein Größerer ihn nicht zähmt,
Ihn wachsen läßt, wie der Blitz, muß er
Die Erde spalten, und wie Bezauberte fliehn
Die Wälder ihm nach und zusammensinkend die Be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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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2

대하(大河) 중 가장 고결한(edel) 대하의, 자유인으로 태어난(freigeboren) 라인강의 목소리였다. 그는 저 위쪽 형제들 테씬과 론강과는 다른 것을 소망하였다. 그는 이들과 작별하고 유랑하기를 원했다. 왕처럼 [거침없는] 혼은 성급한 그를 아시아로 유랑하게 했다. 그러나 숙명 앞에서 욕망(Wünschen)은 어리석다. 나아가 가장 눈먼 사람들은 신의 아들들이다. 인간은 자기 집을 알고, 동물에게는 집지을 곳을 아는 [지혜가] 주어졌지만, 신의 아들들에게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결함이 경험이 없는 혼에 주어져 있다.

 

[다음 연의 첫 행 “Ein Rätsel ist Reinentsprungenes”는 번역 불가능하다. 글 몸체(Textkörper)가 소리로 발현되지 않는 미세한 차이로 – ‘h’로 – 찢어지기 때문에 충실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리가  Rein(순수한)과 Rhein(라인 강) 차이를 말소함으로써 이름과 이름된 것 간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름짖기의 '방법' – 비본질적인 것은 다 걸러낸 순수성 – 이 또한 본질과 함께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강이름 “Rhein”은 ‘흐름’을, 헤라클리트의 “panta rhei”를 담는, 흐르는 물의 본질인 ‘흐름’의 순수한(rein) 이름이다. 강이름 “Rhein”이 명시적이진 않지만, 그 이름의 순수성이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강이름 Rhein은] 흐름 그 자체를 이름하는, 순수하게 발원한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인 이름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이름이다. [‘나는 나다’라는 야훼의 이름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노래일지라도 이 불가사의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흐름, 운동 그 자체로] 시작한 너는 [항상] 흐름, 운동으로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흐름의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각각의] 처지상황에 대응하는 훈육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흐름으로서의 너의] 탄생과 갓난아이에게 비춰진 광선에 가장 많은 것을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태가 이럴진대, 과연 어디에, 자유롭게 머무르고, 전생(全生)에 오로지 마음 속 깊은 곳의 소원을 성취하는 자가, 그러기에  알맞은 높은 곳에서, 그리하여 성스러운 품속에서 행복하게 태어난 라인강 외에 어디에 있을까? 

 

Die Stimme wars des edelsten der Ströme,
Des freigeborenen Rheins,
Und anderes hoffte der, als droben von den Brüdern,
Dem Tessin und dem Rhodanus,
Er schied und wandern wollt', und ungeduldig ihn
Nach Asia trieb die königliche Seele.
Doch unverständig ist
Das Wünschen vor dem Schicksal.
Die Blindesten aber
Sind Göttersöhne. Denn es kennet der Mensch
Sein Haus und dem Tier ward, wo
Es bauen solle, doch jenen ist
Der Fehl, daß sie nicht wissen wohin?
In die unerfahrne Seele gegeben.

 

Ein Rätsel ist Reinentsprungenes. Auch
Der Gesang kaum darf es enthüllen. Denn
Wie du anfingst, wirst du bleiben,
So viel auch wirket die Not,
Und die Zucht, das meiste nämlich
Vermag die Geburt,
Und der Lichtstrahl, der
Dem Neugebornen begegnet.
Wo aber ist einer,
Um frei zu bleiben
Sein Leben lang, und des Herzens Wunsch
Allein zu erfüllen, so
Aus günstigen Höhn, wie der Rhein,
Und so aus heiligem Schoße
Glücklich geboren, wie j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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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훨더린의 송가 "라인강" - 1

[일러두기: 번역이라기 보다는 이 시를 이해하려는 독해다.]

 

라인강[의 하이데거식의 존재가 아닌 역사적인 삶]  
이작 폰 싱클레어에게 [헌사]

 

나는 [세상사의 흐름과 결별된] 무성하게 우거진 (dunkel) 담쟁이덩굴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망각한채, 숲으로 들어가는 협로의 언저리에서, 하염없이 [독어의 과거를 희랍어 과거형인 아오리스트로 이해하고 이렇게 번역] 앉아 있었다.  생각으로 다다를 수 없는 태고의 그때였다. 샘터(Quell)를 찾아, 태고로부더 하늘님의 성이라 일컫고 내 눈엔 신의 모습인 알프스 산맥의 계단을 내려오는 금빛찬란한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정오였다. 아직도 이것저것이 내밀하게 결정되어 인간에게 이른다는 알프스산맥, 거기로부터 나는 숙명을 청취했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따스한 그늘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푹 빠진  나의 혼이 이탈리아로 쏠리고 나아가 뽕나무 우거진 희랍의 모레아 반도로까지 배회하기 시작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숙명은 하이데거 식의 위로부터 오는 존재의 숙명이 아니었다. 아래로부터 오는 역사의 숙명이었다.]

 

태고의 무시간성에서 지금(ᅠjetzt)이 나를 깨웠다. [신들이 재밌게 사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산맥 안으로부터, 하얀 눈으로 뒤덮혀 은빛찬란하게 빛나는 정상이 아니라 아래쪽 깊은 곳으로부터, 그리고 [소와 양이] 유희하는 녹지 아래로부터, 우거진 숲들이, 첩첩 바위들이 전율을 느끼면서 온종일 내려다 보는 그곳으로부터, 가장 차가운 심연으로부터 나는 젊은이의 [라인강의] 소리를, 해방을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미쳐 날뛰고, 어머니 지구와 그의 씨를 뿌린 천둥의 아버지게 한탄하고 자비를 구하는 걸 보았지만 덧없는 인간들은 그곳을 피했다. 광명이 없는 곳에서 결박된채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 반신(半神)의 광란이 보기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Der Rhein

An Isaak von Sinclair

 

Im dunkeln Efeu saß ich, an der Pforte
Des Waldes, eben, da der goldene Mittag,
Den Quell besuchend, herunterkam
Von Treppen des Alpengebirgs,
Das mir die göttlichgebaute,
Die Burg der Himmlischen heißt
Nach alter Meinung, wo aber
Geheim noch manches entschieden
Zu Menschen gelanget; von da
Vernahm ich ohne Vermuten
Ein Schicksal, denn noch kaum
War mir im warmen Schatten
Sich manches beredend, die Seele
Italia zu geschweift
Und fernhin an die Küsten Moreas.

 

Jetzt aber, drin im Gebirg,
Tief unter den silbernen Gipfeln
Und unter fröhlichem Grün,
Wo die Wälder schauernd zu ihm,
Und der Felsen Häupter übereinander
Hinabschaun, taglang, dort
Im kältesten Abgrund hört'
Ich um Erlösung jammern
Den Jüngling, es hörten ihn, wie er tobt',
Und die Mutter Erd' anklagt',
Und den Donnerer, der ihn gezeuget,
Erbarmend die Eltern, doch
Die Sterblichen flohn von dem Ort,
Denn furchtbar war, da lichtlos er
In den Fesseln sich wälzte,
Das Rasen des Halbgot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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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의 안티고네

안티고네

"Zum Hasse nicht, zur Liebe bin 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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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횔더린: 판단과 존재 (Urteil und Sein)

판단(Urteil)은  가장 고귀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지적 직관에서 더없이 친밀하게 통일되어 있는 객체와 주체의 [Subjekt-Objekt=Selbstbewusstsein/자의식, 역자] 근원적인 분리다. 이 분리에 의해 비로써 객체와 주체가 가능하게 되는바, 근원분리(Ur=Teilung)라 할 수 있다. 분리의 개념에 이미 객체와 주체가 상호 관계하는 관계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또한 객체와 주체가 각자 일부를 이루는 전체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있다.  <<나는 나다>>[라는 판단]은  이런  근원분리의 개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례다. 다만 이론적인 근원분리일 뿐이다. 왜냐하면, 실천적인 근원분리에서는 [자아가] 비자아에 대립하지, 자기 자신에  대립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성]과 가능성은 구별되어 있는데, 그 구별이란 간접적인 [대상] 의식과 직접적인 [자아] 의식간의 구별과 같다. 내가 어떤 대상을 가능하다고 생각할 경우, 나는 단지 어떤 대상에 현실성을 부여한 지나간 의식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는[=의식은] 현실이 아니었던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가능성의 개념은 이성의 대상들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의식 저편의] 대상들은 전혀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의식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오직 필연성의 개념만이 유효할 따름이다. 가능성의 개념은 오성의 대상들에게  유효하고, 현실성의 개념은 지각과 직관의 대상들에게 유효하다.  

존재는  주체와 객체의 결합을 표현한다.

주체와 객체가 단지 [전체의] 일부를 이루는 형식으로만 통일되어 있지 않고 절대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경우, 다시 말해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분리할 수 없도록 통일되어 있는 경우,  오직 이 경우에만, 지적 직관에서 그러듯이, 절대 존재(Sein schlechthin)를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외의 경우에는 절대 불가능하다. [예컨대 절대적인 자아, 혹은 절대적인 주체성 등은 말이 안 된다. - 역자].
그러나 이 [절대] 존재를 동일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나는 나다"라고 할 경우, 주체(나)와 객체(나)는 전혀 분리대상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분리할 수 없도록 통일되어 있지 않다. 정반대다. 자아는 오직 <나>로부터 <나>를 분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자의식 없이 어찌 나!할 수 있을까? 자의식은 그럼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나를 나에게 대립시킴으로써, 나를 나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그러나 이런 분리에도 불구하고 나를 대립되는 나안에서 똑같이 인식함으로써.  어디까지 똑같은 것으로 인식하는가?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고 또 질문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면 [나와 나는]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성은 객체와 주체가 절대적인 통일을 이루는 일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동일성은 절대적인 존재와 같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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