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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7

몇가지 관찰.

1.
„Hälfte des Lebens“의 첫 행에 왜 „mit gelben Birnen“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노란 배’라고 하는데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호루병 모양의 독일산 배가 노랗지 않기 때문이다. 잘 읶어도 누렇지 노란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란 꽃’이라고 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노란 배’라고 하니까 한참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 루이제 카쉬니쯔의 추측이 맞다면 횔더린은 이 시에서 보덴제 호수 근방의 전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최근 가서 본 결과 배보다 사과가 더 많다 (횔더린 당시엔 배가 더 많았을 수 있지만). 암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 표현이다.

그래서 그랬나? 이 시가 처음 출간될 땐 ‚mit gelben Blumen’(노란 꽃)이었다고 한다. 근데 Nobert von Hellingrath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분석하고 „mit gelben Birnen“으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시 세개를 하나로 엮고 첫 두행을 새로 창작하고 거기다 제목을 „Die letzte Stunde“에서 „Hälfte des Lebens“로 바꾼 것을 볼 때 이 시의 출간이 시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다시 음률을 분석해 보면서 이 시의 첫 두행이 현실전경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목가적인 전경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몇자 적어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첫 두행이 묘사하는 전경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제도된(konstruiert) 전경이다.

첫 두행은 약강이 엇갈리는 약강격으로써 각 3개의 강(Hebung)을 가지고 있다. 이 강을 따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e (gelb-en) – i(Bir-nen) – ä(häng-et)
o (voll) – i(wild-en) – o(Ros-en)

다시 나는 소리에 따라 음성기호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Ɛ – i – Ɛ
o – i – o

일정한 규칙성이 엿보인다. 끝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마치 원과 같이 갇힌 구조다.

이렇게 보니 첫 두행이 그리는 전경이 그저 목가적이지 않다. 뭔가 썰렁하다. 그리고 „mit gelben Birnen“이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합법칙성에 따라 선택된 표현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2.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이 대목에서 일종의 수행적 자기모순이 엿보인다.

백조가 하는 행동을 보면 입맞춤에 만취하여 머리를 굽혀 물에 적시는 하향동작이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고 대려 상향한다. „trunken“의 u에 따르는 ü는 반음 정도가 더 높고 다음 행 „tunkt“의 u는 다시 반음 더 올라가 „trunken“의 u 보다 한음이 더 높다. 여기서 수행적 자기모순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읽을 수 있다면 이게 내가 이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맥락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직 명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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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6

부론: 1798년 11월 12일 횔더린이 노이퍼에게 보낸 편지

 

원문은 여기

 

(...)

 

지금 내 생각과 바램은(Gedanken und Sinne) 온통 시가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것이 될까(das Lebendige in der Poesie)란 질문을 놓고 왔다갔다해. 내 시가 아직 그런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한없이 느껴. 까마득하지만 내 혼은 전심을 다해 그것을 향해 몸부림하고 있어. 그리고 내 작품들로부터 살아 있는 것의 이런저런 모습이 빠져있는 것을 느끼고 또 느끼면서도 [잘못된] 시적 행보에 휘말려 방황하는 날 잡아 건져내지 못하는 무능함이 엄습하면 난 어리아이처럼 자주 눈물을 흘려. 컨트롤이 안돼. 답답해. 세상은 어릴적부터 내 정신을 후려쳐 내면으로 기어들어가게 했고 나는 아직 그런 상황에 매달려 시달리고 있어. 시인이 되려다가 나처럼 [방황하고] 실패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체면을 잃지 않고 도주할 수 있는 철학이란 병원이 있지. 그러나 난 내 첫사랑, 어릴적의 희망들로부터 손을 땔 수가 없어. 대려, 뮤즈의 달콤한 고향, 단지 우연에 의해서 쫓겨난 고향에 이별을 고하기 보다는 아무런 성과와 명예없이 몰락하는 편을 선택하겠어. 날 하루 빨리 참다운 것(das Wahre)1으로 데려다주는 좋은 조언이 있으면 일러줘.  내게 부족한 것은 [묵직한] 힘(Kraft)이라기보다는 가벼움(Leichtigkeit)이고, 큰 줄기들(Ideen)이라기 보다는 뉘앙스들(Nüancen)이며, 하나의 큰소리(Hauptton)라기 보다는 굽어굽어 펼쳐지는 다양한 소리들이며(mannigfaltig geordnete Töne), 빛(Licht)이라기 보다는 그림자들(Schatten)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 내가 현실적인 삶에서(im wirklichen Leben) 천박한 것(das Gemeine), 그리고 일상적인 것(das Gewöhnliche)을 너무 두려워했다는데 있어. 네 말이 맞아. 나는 어쩜 이런 것들을 멀리하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ein rechter Pedant)이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Pedanten), 내가 제대로 봤다면, 보통 냉정하기 짝이 없고 사랑이 없지만 내 마음(mein Herz)은 오히려 달빛 아래(unter dem Monde) 있는 [모든] 사람 및 사물과 망설이지 않고 형제자매하기 바빠. 내가  꽉 막힌 이유는 순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어도 돼. 현실에 의해서 나만 찾는 내 이기심이 흐트려질까봐 두려워서 꼼꼼하게 천박한 것과 일상적인 것을 꺼려했던 것이 아니야. 그런 것들에 의해서 마음 속 깊은 참여(innige Teilnahme)가, 나로 하여금 다른 것들과 기꺼이 하나가 되게 하는 참여가 흐트려질까봐 두려워서 그랬어. 난 내 안에 있는 따스한 생명이 대낮의 차가운 역사에 노출되면(an der eiskalten Geschichte des Tages) 차갑게 식어버릴까봐 두려워. 이 두려움은 내가 어릴때부터 날 때리고 파괴하는 모든 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드렸기 때문인 것 같아. 그리고 이 예민함은, 내가 경험해야 했던 것에 견주어 볼 때, 내 자신이 그런 것들을 넉넉하게 이겨낼 만큼 견고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게 조직되지 않았다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아.  이제 그런 것들이 보여. 보인다고 도움이 될까? 그렇다고 믿어. 뭐 이 정도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파괴되기 때문에 나는 그 만큼 더 나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물들에게서 뭔가 이익이 되는 것을 얻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사물들을 그대로(an sich) 취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내가 지향하고 또 지향하는 삶(meinem wahrsten Leben)에 유용한 범위내에서 취한다는 말이야. 나는 이제 그런 것들을 접하게 되면 [버리고 멀리해서는 안되고] 애당초부터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소재로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것들 없이는 내 혼이(mein Innigstes) 절대 완벽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생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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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횔더린이 말하는 "참다운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National - Nationell

유럽, 아니 독일, 아니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좌파는 „Nation“하면 안색이 달라진다. „나찌“가 „나찌오날쏘찌알리스무스/Nationalsozialismus“의 „Nation/나찌온“을 줄인 말이니 안색이 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좌파가 아니더라도 „Nation“하면 기색이 별로 좋지 않거나 쓸데없는 말을 들었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많은 독일인은 „Nation“과 아직 불편한 관계에 있다 (통동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 그 관계가 좀 풀렸다는(entspannt) 이야기도 있다.)

근데 독일의 이런 상황이 8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을 독일에 소개하는 걸 어렵게 했다. 특히 NL계열의 민족주의를 좌파에 소개하는 것이 그랬다. 장황한 설명이 항상 필요했다. 그리고 번역부터 문제가 되었다.

„민족“을 „Nation“으로 번역해야 하나? „Nation“이 국수주의라는 함의로 넘어서 바로 „나찌“로 연결되는 독일 좌파의 풍토에 NL이 말하는 „민족“을 „Nation“으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민중신학을 통해서 독일개신교 주변에 먼저 알려진 민중개념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독일말에는 „national“과 유사한 „nationell“이란 형용사가 있다. 요새 쓰지 않는 말인데 독일 현시대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Botho Strauss)의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어떤 책이었는지 깜깜하다. 다만 보토 슈트라우스에 퐁 빠져 있을 때였고, 독일 전통좌파를 까는 맥락이었다고 어렴풋이 기억된다. 떠돌이(생활?)에 지쳐서 그랬는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였다. 아도르노의 „최소한의 도덕“의 미시적인 정확함과 노발리스의 간결함이 어우려진 글 때문에 퐁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nationell“이란 낱말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나중에 횔더린이 1801년 12월 4일, 그러니까 걸어서 근 600km떨어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나기 며칠을 앞두고 뵐렌도르프에 쓴 편지에서 사용한 낱말이란 걸 알게되었다.

횔더린은 이 편지에서 „nationell“을 „eigen“과 같고 „fremd“에 대비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eigen“은 ‚몸에 베어있는, 토속/토향적인 것’이란 의미로 „fremd“는 ‚외래적인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횔더린이 살펴보는 ‚토속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의 변증법을 떠나서 „nationell“이란 것의 의미가 명료하고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인터넷을 헤매다가 이 두 단어를 설명하는 일간지 „taz“의 블로그를 검색하게 되었다 (http://blogs.taz.de/wortistik/2007/06/18/nationell/). 주지하다시피 „taz“는 70-80년대 베를린 크로이쯔베르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안운동 세력이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진 신문이다. 데틀레프 귀어틀러(Detlef Guertler)란 블로거는 „nationell“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nationell“은 „national“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으로 열광적이지 않고 „국가긍지/Nationalstolz“나 „국가대표팀/Nationalmannschaft“ 등과 같은 복합명사의 일부로 사용될 수 없고, 오로지 형용사로만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national“이란 형용사는 „Nation“이 2격으로 사용되는 곳에서만, 예컨대 ‚Mannschaft der Nation’을 ‚Nationalmannschaft’란 복합명사로 줄이는 형식으로만 사용될 수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nationell“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Küche der Nation/민족의 부엌/요리/맛’이란 표현에 기댄 „Nationalküche“(‚민족요리’)란 표현은 있을 수 없고, 다만 „nationelle Küche“(‚익숙한/몸에 베어있는/토속/토향적인 맛’)이란 표현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nationelles Klima“(‚전형적인 기후’), „nationelle Sprache“(‚독일 (땅)에서 자라 통용되는 독어’) 등의 표현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근데 „nationell“의 함의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마지막에 가서 설명된다. „taz“지가 만들어진 배경에 주목하면서 „taz“는 „nationelle Zeitung“(‚(출신 배경이 정확하고 자력으로 자라난) 토속적인 신문’)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 전역에서 구독되고 „Zeitung für Deutschland“(‚독일을 위한/대표하는 신문’)이라고 자긍하는 „FAZ“지는 ‚nationale Zeitung’('범국가적인/민족적인(?) 신문')이 될 수야 있겠지만, 정체가 (누가 돈줄을 대고 어떤 이데올로기에 속하는지가) 분명한 „nationelle Zeitung“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nationell“에는 행위주체가 분명하고 정확하게 스며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민족민주주의의 „민족“을 „Nation“으로 번역할 수 없었는데 그럼 이제 „nationell“은 어떻게 번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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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9

재밌는 말  두 마디

 

„Es giebt (…) einen Hospital, wohin sich jeder auf meine Art verunglükte Poët mit Ehren flüchten kann – die Philosophie.“ (1798년 11월 12일 횔더린이 노이퍼(Neuffer)에게 쓴 편지에서 인용)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인이 되려다가 [방항하고] 실패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다 쪽팔리지 않고 도망쳐 [칩거할 수 있는] 철학이란 병원이 있다.

„[Es ist] die Schwäche der Dichtung Schillers, dass sie die Philosophie Kants in dichterische Form [bringt, und] die Schwäche der Philosophie Hegels, dass sie die Dichtung Hölderlins in philosophische Form [bringt].“ (Walter Bröcker, Das was kommt, gesehen von Nietzsche und Hölderlin, Pfullingen 1963, S. 50, zitiert nach: Peter Szondi, Poetik und Geschichtsphilosophie I, Frankfurt am Main 1974, S. 215)

쉴러 시가 빈약한 점은 칸트의 철학을 시형식으로 옮긴데 있고 헤겔 철학이 빈약한 점은 횔더린의 시를 철학형식으로 옮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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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5

2.4 „Weh mir“ – 속임수에서 깨어난 비명

„Hälfte des Lebens“를 엄밀하게 읽어보는 동기는 이 시를 헤겔 정신현상학의 „Die Wahrnehung –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지각 – 혹은 사물과 착각/불량거래/속임수“와 맑스의 상품분석 그리고 이에 기대는 상품미학(Warenästhetik)의 맥락으로 연결지으려는 시도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덜 읶은 시도일 뿐이다.  헤겔과 맑스의 해당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시도의 첫 실마리를 „Weh mir“라는 비명에서 찾고자 한다.

„Weh mir“를 „서러워라“ 혹은 „슬프도다“라고 번역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골수에 사무치고 동정을 거부하는 이 비명이 자기연민에 빠지는 정도의 슬픔으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중심을 뒤 흔드는 이 비명에는 당사자가 이토록 비명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는데 깊이 참여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파우스트> 그레첸의 „Weh“ 비명이 그렇다. 그러면 왜 참여했을까. 속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각/속임수에서 깨어난 반응은 분노다. 그레첸은 하인리히에게 „Heinrich! Mir graut’s vor dir.“/하인리히, 널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라고 한다.

„Weh mir“는 또 요새 쓰지 않는 말이다. 이 표현을 요새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 질문에 „나는 멍청했다.“(„Ich bin doof, blöde, ein Blödian, eine dumme Gans.“)라는 대답이 가장 많은 호응을 받는다 (http://de.answers.yahoo.com/question/index?qid=20090628110742AAZlS7Z). 이것도 „Weh mir“란 표현의 중심에 멋모르고 속았다는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Weh mir“를 뒤의 내용하고만 연결하면 이런 강렬한 비명이 될 수 있을까? 안 그럴 것 같다. 백조에 기대했던 착각에서 깨어난 시적 주체의 비명으로서만 이런 비명이 가능할 것 같다.

1연의 마지막 낱말 „Wasser“이후 연속되는 w-두음 (Wasser, Weh, wo, wenn)도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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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4

2.3.1 5행 „und“와 성사되지 못한 대화

이 시 5행의 „und“는 사전적인 의미로, – 비트겐슈타인을 따르자면 – 구체적인 사용과 괴리하여 이해하고 번역할 수 없을 것 같다.

여기 이 „und“의 구체적인 사용에 관하여 두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새로운 상황의 전개이며 다른 하나는 말을 주고 받는 대화상황이다.

루터 번역 독어 성경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있다.

„Und Gott sprach: Es werde Licht!"

한글 번역은 다 이 „und“를 생략하고 있다. 여기 이 „und“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됨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und는 대화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말을 건 사람이 말을 다하고 나서 „Und?“하고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고문실에서 고문하는 사람이 고문 당하는 사람을 잔뜩 협박하고 나서 „Und?“하고 „술술 말하기“를 기다리는 상황도 이런 상황에 속한다.

이 시 5행의 „und“이 이런 상황을 알리고 있다. 백조님들의 태도가 예기치 못했던 것이고, 그들과의 대화가 단절됨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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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3

2.3 Und trunken von Küssen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Ins heilignüchterne Wasser.

보통 이 시의 1연은 목가적인 풍경을, 2연은 이에 대조되는 아픔과 쓰라림을 노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앞 행 „Ihr holden Schwäne“의 소리가 목가적이지 않다. 밝은 모음 i-o-e에 시작했지만 ä-e 어둔운 모음으로 끝난다. ‚ä’는 비운을 느끼게 한다. 뭔가 기대하면서 백조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기대했던 것을 받을 수 없다는 비운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은 이 행의 흐름을 주관하는 약강 혹은 단장(Iambus) 음보(音步)가 마지막에 가서 한 걸음 빠져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완성된 음보라면 ‚Ihr holden Schwäne da’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뭔가 허전하다. 뭘 기대했는지 알 순 없지만 말걸기(Anrede)에 대답하는 말받기(Gegenrede)가 없을 것을 예상하게 한다. „Schwäne“라고 부르고 뭔가 허전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런 허전함에 이어지는 다음 행 „Und trunken von Küssen“은 음율의 속도가 빨라진다. 느릿느릿 오르락 내리락 했던 잔잔함이 서둘러 앞으로 나가는 박자로 바뀐다. 행진곡에 쓰여지는 약약강(Anapäst) 음보가 5,6 행의 경우 중간에서 속도를 높이고 있다. 6행에서는 또 상박없이 바로 강/장으로 들어가는데 허둥댄다는 느낌까지 준다 (Karl Eibl: Der Blick hinter den Spiegel. Sinnbild und gedankliche Bewegung in Hölderlins „Hälfte des Lebens“ (20.02.2004). In: Goethezeitportal. URL: http://www.goethezeitportal.de/db/wiss/hoelderlin/haelfte_eibl.pdf, 2012.2.3 참조). 여기 진보넷 블로거 Daydream님이 이 시를 읽으면서 전쟁을 연상하기도 했는데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백조님들이 하는 짓이 우아하고 사랑스럽지 않고 행진하는 군인과 같이 무지하고 꼴 사나운 면이 있다. 기계적이다.

그리고 „und“가 이해하고 번역하기 어렵다.

고트프리드 벤(Gottfried Benn)은 이 시를 읽으면서 5행의 „und“가 눈에 거슬린다고 했단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이런 경유를 생각해 보자.

„나는 죽어라고 일했는데 넌 뭐했어? 잠만 퍼 잤잖아!“

이 표현을 독어로 번역해 보면 이 정도 되겠다.

 „Ich habe mir den Arsch aufgerissen und gearbeitet. Und du? Was hast du gemacht? Du hast nur gepennt.“

이 시 5행의 „und“도 und의 이런 사용법이 아닌가 한다. 기대했던 것과 어긋나는 행위, 그리고 기대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행위를 이 „und“가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시와 관련해서 이야기되는 비운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백조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3행의 „Die Mauern stehn/Sprachlos und kalt, im Winde/Klirren die Fahnen“의 시제가 현재형임을 봐서도 비운은 겨울이 오면/되면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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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2

2.2 Ihr holden Schwäne

‚hold’의 의미도 쉽지 않다. 요새 쓰지 않는 말이다. 좀 아이러니하게 가미하지 않으면 느끼하기 때문이다. 횔더린이 살던 당시에는 안 그랬단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그냥 ‚사랑스럽다’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루크레티우스 „De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첫 줄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Aeneadum genetrix, hominum divomque voluptas,/alma Venus“/’에네이스 가문의 시조이시며, 인간과 신이 모두 군침 흘리며, 젖 가슴이 풍부한 비너스여’. 근데 이 표현에서 „alma Venus“/’젖을 주는 비너스’를 독어로 흔히 ‚holde Venus’로 번역한다. 이에 기대어 ‚hold’의 의미엔 젖 먹이면서 아이를 굽어 살펴보는 엄마의 자세가 스며있다고 짚어보자.  
 
헛다리 짚은 것일까? 어원사전을 보니 안 그런 것 같다. ‚hold’은 (광산이나 채석장 등에서 석탄 혹은 돌을) ‚비스듬하게 높이 쌓아 올린 더미’란 의미가 있는 ‚Halde’와 어원을 같이 한다. 이런 어원에 기대어 롤프 쭈버뷜러(Rolf Zuberbühler)는 ‚hold’가 백조가 머리와 목을 비스듬히 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고 한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 다. 그리고 1793년 요한 크리스토프 아델룽(Johann Christopf Adelung)이 편찬한 사전 „Grammatisch-kritisches Wörterbuch der Hochdeutschen Mundart, mit beständiger Vergleichung der übrigen Mundarten, besonders aber der Oberdeutschen“은 ‚hold’를 „Geneigt, des anderen Glück gerne zu sehen, Liebe gegen denselben zu empfinden/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즐겨 살펴보고 애정을 느끼는 쪽으로 기울어진 [그런 disposition이 있는]’이라고 설명한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Ihr holden Schwäne“하면서 백조를 부르는 말걸기(Anrede)에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말걸기로  시적 주체가 등장하다. 근데 한가지 눈에 띄인다. 주체가 주체로 등장함과 동시에 아무런 형태없이 사라진다.

시적 주체(poetisches Subjekt)는 보통 강력한 창조자(poietes)로 등장한다. 시적 주체가 등장하는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 호라티우스가 „반두지아의 원천/fons bandusiae“을 노래하는 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 네번째 연, 2행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me dicente“. 문장의 흐름에 종속되지 않고 따로 우뚝 서 있는 소위 ‚ablativus absolutus’격으로 시적 주체가 등장한다. 해석해보자면 반두지아의 원천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노래하기/말하기 때문이다’란 것이다.

근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백조에 말을 거는 시적 주체가 대려 객체가 되어 ‚날 좀 봐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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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ou_topia님의 [횔더린 - Die Hälfte des Lebens (반쪼각난 삶)] 에 관련된 글.

 

횔더린의 시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1.

번역에도 „유물론“을 적용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유물론적 번역“이란 용어가 있다면 아마 번역할 때 작품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작품의 문자에, 그 몸에, 그 몸의 짜임새(Textur)에, 그리고 그 몸에서 나오는 소리에 주목한다는 말을 담고 있을 것이다.

2.   

„Hälfte des Lebens“의 번역에서 어려운 점이 많다. 우선 횔더린이 사용하는 낱말의 의미가 생소하다.

2.1    „hänget“

„hängen“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의미를 보자면 ‚달려 있다’다. 이 의미로 첫 문장 „das Land hängt  in den See“를 번역하면 ‚들판이 호수(안으)로 달려 있다’가 되겠는데 생소하다. 이 생소함을 이런 저런 그림을 그려 해소할 수 있겠다. 그러나 횔더린이 이 시를 쓸 당시 „hängen“이 가졌던 의미를 보면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hängen“은 ‚einen Abhang bilden/경사를 이루다’란 의미로도 쓰여졌다 (Ulrich Knoop, Hälfte des Lebens, Wortgeschichtliche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Gedicht, http://www.klassikerwortschatz.uni-freiburg.de/admin_storage/file/literatur/knoop_ulrich_haelfte_des_lebens.pdf 참조)

„hängen“의 이런 의미는 해당 행 소리의 흐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Mit gelben Birnen hänget
Und voll mit wilden Rosen    
Das Land in den See.

1, 2행에서는 올림음(Hebung)과 내림음(Senkung)이 잔잔하고 느릿느릿하게 잇대어 이어진다. 마치 구릉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같다. 마리 루이제 카쉬니쯔(Marie Luise Kaschnitz)가 „Hälfte des Lebens“를 처음 읽었을 때 보덴세(Bodensee) 호수 근방의 풍경을 연상했다고 했는데 (M.L.Kaschnitz: Mein Gedicht, in: Zwischen Immer und Nie, Essays 1971, http://www.zum.de/Faecher/D/BW/gym/hoelder/haelfte.htm 참조) 그 이유가 여기 있지 않나 한다. 보덴세로 이어지는 슈바벤 알프의 산세는 거칠지 않다. 잇달아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구릉지대여서  아늑하다(lieblich).
 
3행의 소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짧은 내림음 „das“에 길게 이어지는 올림음 „Land“가 따른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잠깐 쉬었다가 „in“으로 넘어간다. 마치 구릉을 힘겹게 올라 잠깐 쉬면서 멀리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보는 듯하다. „Land“에  세개의 올림음이 따른다. 근데 그 높이가 천천히 떨어진다. 정상 „Land“에서 최하 „See“로 마치 미끄러지듯이 떨어진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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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 (반쪼각난 삶)

Hälfte des Lebens

Mit gelben Birnen hänget
Und voll mit wilden Rosen
Das Land in den See,
Ihr holden Schwäne,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Ins heilignüchterne Wasser.

Weh mir, wo nehm’ ich, wenn
Es Winter ist, die Blumen, und wo
Den Sonnenschein,
Und Schatten der Erde?
Die Mauern stehn
Sprachlos und kalt, im Winde
Klirren die Fahnen.


반쪼각난 삶

누렇게 익은 배 한아름 안고  
들장미 난무하게 가득 채운체
들판은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가네
여보시오 백조님들 [날 좀] 굽어 살펴주오  
그러나 백조님들은 [뮤즈의] 키스에 만취하여
초자연의 맑은 물에
머리만 적시네.

찢어지는 아픔 안고 어디가서 구할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두런거리는] 겨울이 오면, 꽃들을 [다시 피게하는]
해의 양기를,     
그보다 땅의 음기를 어디가서 구할까?
주고받는 말소리가 사라진 벽들은  
차갑게 서있고, 지붕위로 바람만  
풍향기를 삐걱거리네.




제대로 된 번역인지 모르겠다. 이해한 만큼 번역한다면 뭘 이해했는지 먼저 제시해야겠다.

이 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출간되기 2년전인 1805년에 발간되었다. 이 시를 읽어보는 동기는 헤겔과 함께 훨더린이 뭘 추구했는지 알고 싶은데 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이 „실천“이 아니었나 한다. 헤겔이야 어찌되었던 훨더린이 말하는 실천은 „Ge-spräch“, 즉 „말 주고받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실천을 통해서 삶이 반쪽으로 남지 않고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이 시가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훨더린은 이 시에서 백조가 보여주는 (초)자연적 아름다움의 자기연관성(Selbstbezüglichkeit)에 기대지 않고 Ge-spräch를 통해서 „꽃들을 다시 피어나게 하는“ 상호관계성이란 실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의 핵심단어는 „sprachlos/주고받는 말없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면 주노변증법이 핵심이 되고. 그러면 자기의식에서 „자기/Selbst“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성을 통해서 마침내 형성되는 것이 되고 …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여기저기 다니게 된다. 근데 종종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낼“ 때가 있다. 재미있는 현상은 사랑하는 사람과 경험했던 장소를 혼자 가보면 그 장소가 썰렁하다. 남아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경험했던 것의 반쪽도 안된다.  이런 직관에 기대어 이 시를 이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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