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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5

2.4 „Weh mir“ – 속임수에서 깨어난 비명

„Hälfte des Lebens“를 엄밀하게 읽어보는 동기는 이 시를 헤겔 정신현상학의 „Die Wahrnehung –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지각 – 혹은 사물과 착각/불량거래/속임수“와 맑스의 상품분석 그리고 이에 기대는 상품미학(Warenästhetik)의 맥락으로 연결지으려는 시도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덜 읶은 시도일 뿐이다.  헤겔과 맑스의 해당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시도의 첫 실마리를 „Weh mir“라는 비명에서 찾고자 한다.

„Weh mir“를 „서러워라“ 혹은 „슬프도다“라고 번역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골수에 사무치고 동정을 거부하는 이 비명이 자기연민에 빠지는 정도의 슬픔으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중심을 뒤 흔드는 이 비명에는 당사자가 이토록 비명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는데 깊이 참여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파우스트> 그레첸의 „Weh“ 비명이 그렇다. 그러면 왜 참여했을까. 속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각/속임수에서 깨어난 반응은 분노다. 그레첸은 하인리히에게 „Heinrich! Mir graut’s vor dir.“/하인리히, 널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라고 한다.

„Weh mir“는 또 요새 쓰지 않는 말이다. 이 표현을 요새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 질문에 „나는 멍청했다.“(„Ich bin doof, blöde, ein Blödian, eine dumme Gans.“)라는 대답이 가장 많은 호응을 받는다 (http://de.answers.yahoo.com/question/index?qid=20090628110742AAZlS7Z). 이것도 „Weh mir“란 표현의 중심에 멋모르고 속았다는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Weh mir“를 뒤의 내용하고만 연결하면 이런 강렬한 비명이 될 수 있을까? 안 그럴 것 같다. 백조에 기대했던 착각에서 깨어난 시적 주체의 비명으로서만 이런 비명이 가능할 것 같다.

1연의 마지막 낱말 „Wasser“이후 연속되는 w-두음 (Wasser, Weh, wo, wenn)도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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