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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번역 독해]

90세 노장 하버마스의 작품 ...

책 제목: Auch eine Geschichte der Philosophie, 2019.11.11

 

 

 

서문

 

과연 어떤 동기가 또한 나로 하여금 노년기의 한가한 일거리로 상당 기간 동안 줄기차게 철학사를 다루게 했는지 그 하나는 밝히고 지나가고 싶다. 별다른 게 아니었다. 내가 예전에 읽지 않았던 수많은 중요한 원전들을 마침내 읽고 그 빈틈을 채우는 재미와 우리가 직면한 것을 다루는 맥락에서 내가 이미 여러 번 소비한 다수의 저서들을 이번엔 비교적 평탄한 삶을 회고할 수 있는 노년기에 접한 철학 교수의 입장에서 다시 읽는 재미였다. 원전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제야 처음으로 체계적인 관점에 유용한 소재로만 ‚사용‘하지 않고, 다수의 경우 어느 정도 그 저자를 자극하고 도전적으로 만드는 생활환경에 몰입하는 전기적인 관심으로 대하게 되었다. 이게 물론 이제 이 나이에 도서관에 차고 넘치는 참고문헌을 더 이상 다 참고할 수 없다는 게 한 장 한 장 써 내려갈 때마다 뼈저리게 느껴지는 이처럼 무모하고, 엄격히 말해서 신뢰할 수 없는 이 작업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서양 철학사를 다시 쭉 훑어보는 작업이 지향하는 건 잘해야 다음과 같은 독해를, 보다 정확히 말해서 흔히 회자되는 메타이론적인 질문에 주목하여 얻게 될 독해를 보다 타당성 있게 해주는 게 아닌가 한다. 이 질문은 철학 앞에 던져진 직무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아직 가능하다면 그게 과연 오늘날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이 책의 제목은 원래 <후기형이상학 사상의 계보학에 관하여. 믿음과 지식에 대한 담론를 지침 삼아 쓴 또 다른 철학사>로 하려고 했다. 이런 바로크적인 범람에 대하여 출판사가 문제제기를 했더라도 나의 의도를 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 원고를 마감하지 전 계획된 책 제목을 줄여서 우울하게 <또 다른 철학사>로 하기로  결정했다.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저명한 에세이 <인류의 교양을 위한 또 다른 역사 철학/Auch eine Philosophie der Geschichte zur Bildung der Menschheit>에 빗댄 제목이다. 그 이유는 <세번째 중간 고찰Zwischenbetrachtung>를 마치고 나서 내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칸트와 헤겔의 전통에서 19세기 중반을 전후로 한 후기형이상학의 초기단계를 거칠게 스케치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한편에서는 흄과 벤담의 전통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칸트, 셸링, 그리고 헤겔의 전통에서 진행된 이리저리 가지를 친 논증의 줄기들에 관한 서술이, 특히 이 두 ‚진영‘간 핵심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점화된 토론을 분석하고 다시 두루 통과하는 작업이 나로 하여금 20세기 후반의 토론에, 다시 말해서 내가 생전에 직접 참여했던 토론에 깊숙이 빠져들어가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여하는 관찰자로서의 내게 이 논쟁에서 눈에 띈 점은 접근방식의 경쟁에서 양자의 배경에 있는 가정의 차이가 그대로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진리-, 합리성-, 혹은 언어이론이든, 사회학의 논리학과 방법론이든, 윤리적인 접근방식이든 아니면 더욱 두드러지게 도덕-, 법-, 그리고 정치이론이든 그 어떤 영역을 막론하고 그런 차이가 재생산되었다. 한쪽에서는 분석하는데 있어서 개별적인 주체의 관념과 지향, 행동양식과 기질에 기반하여 접근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똑 같은 질문을 다루는데 있어서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되는 상징 및 조절 체계에서, 즉 언어들, 실천들, 생활의 형식들 및 전통들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각 영역에] 상응하는 담론의 유형에 기대어 해당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능력 취득에 필수불가결한 주관적인 조건들을 탐구한다. 이 경쟁상황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른 책 한 권이 더 필요했다. 그러기에는 이제 더 이상 힘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패러다임적인 중요성을 갖는 이 논쟁에서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논증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내가 다른 곳에서 이미 다루기도 했다.

그렇다면  20세기 언어철학내에서의 논쟁으로까지 이어진 이 패러다임경쟁의 전사(前史)가 왜 관심거리가 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양측의 이론적인 전철들의 방대한 계보학이 어떤 쓸모가 있단 말인가? 논쟁들 그 자체가 체계적인 질문의 해명에 충분하다는 게 분명하지 않는가. 짧게 대답하면 이렇다. 내겐 다른 주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련의 논쟁적인 근본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패러다임적인 전제에서 드러나는 철학에 대한 함축적인 이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직업적인 이해를 둘러싼 논쟁에서 제기되는 원인들은 철학사에 대한 특정한 ‚독해‘를 지지하는 혹은 반대하는 원인들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유의 문제 설정의 유용성에 바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된다. 철학적 사유의 고유한 직무에 대한 견해들은 수행된 철학적 탐구라는 줄기에서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가지처럼 줄기에서 다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지금의 직업적인 철학의 자기이해가 차기의 자기이해에 밀려나지 않는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종류의 논점들이 이런 류의 다툼에서 유효한지 알고 있는가? 모든 설득력 있는 철학적 접근들은 자명하지 않는가. 새로운 철학적 접근이 있을 때마다 철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취해야 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가? 이런 반론에 쿤의 과학적인 패러다임의 우발적인 기복이란 이미지가 겹진다. 그리고 중기 푸코의 견해를 따른다면 굳이 담론의 가면 뒤에서 또한 지배적인 사회권력들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이런 반론에는 철학에서의 패러다임교체 역시 학습과정으로 자극되어 일어나고 패러다임의 우발적인 기복이란 파이어아벤트의 잘못된 이미지조차 어느 정도의 지속성을 전제한다는 점이 대치된다. 어쨌든 간에 자신의 정체성이 지금까지의 철학사의 연장 속에 있다고 스스로 밝히는 이론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종전까지는 칸트가 제시한 근본문제, 즉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내게 남겨진 희망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이 4가지 질문에 답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전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철학에 아직 미래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저 문제제기의 품위(Format)만 살아남고 철학은 이제 그저 개념분석적인 숙달을 겸한 전문분야(Fach)와 자기 역사의 관리자로서만 살아남지 않게 되었나 한다. 철학은 이제 다른 모든 학과처럼 끊임없이 확대되는 전문화의 대열을 따르고 있다. 몇몇의 장소에서는 이미 인지과학에 종사하는 개념분석적인 서비스업의 역할에 전입하여 소멸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학과의 핵심이 점점 더 커지는 경제-, 생물-, 혹은 환경윤리적인 컨설팅 수요를 충족하는 유용한 공급소로 전락하여 가닥을 잡을 수 없게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관찰 그 자체에 별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마음을  진정 요동하게 하는 건 철학 역시 점점 더 심화되는 전문화를 매개로 한 모든 학문적 분업의 내적 역동성과 학문적 진보의 일반적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엄밀하게 따지자면 반론할 수 없는 바람직스러움에 있다. 왜냐하면, 전문화는 철학이라는 우리 학과에 특수한 양식의 도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에는 오직 진보만을 가져다 주는 게 알다시피 시야에서 전체를 상실해서는 안되는 철학에 있어서는 또한 지금까지 그 존재의 근거가 되었던 앞의 근본문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자신의 길을 찾으려면 <전체에 기대>야 한다면, 이런 표현은 당연히 이제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세계상에 기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른바 <학문적인> 세계상에 기댈 수도 없다.  세계상의 시대는 17세기 이후 사라졌다. 거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내 관심을 끄는 질문은 철학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자기 및 세계 이해에 대한 우리의 합리적인 해명에 기여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남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저 ‚및‘이야말로 전문화의 진행에 깔릴 위험에 처한 저 주제를 꼭 찔러 집어주고 있다.

철학 역시 과학적인 사유 방식에 속한다. 그러나 철학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점점 더 작은 것에서, 즉 보다 좁고 정밀하게 규정된 대상 영역에서 습득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축적되는 과학적인 지식(Kenntnisse)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게 뭔지 설명하려고 할 때 과학과 계몽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의 우리에게, 현대를 함께 살고있는 우리에게,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우리에게. 바로 이 국면에서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의 지도로 나아가는 실천적인 자기관계야말로und dieser praktische Selbstbezug auf unsere Lebensführung 학습의 진보와 검증을 거친 세계에 대한 지식의 증대를 소화하는 각각의 장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점점 더 조망할 수 없게 되는 지식코스모스를 망라하는 전체와 대면하는 관계를 마련하는 발판이 된다. 사태가 이럴진대 철학이 방향 정립에 대한 우리의 공공연한 욕구를 총체적으로 대면하는 관계를 포기한다면, 내 생각에, 이 요구를 감당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지라도, 철학 고유의 자산에 반역하는 게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대에 철학이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는데, 곧 대상화하는 과학의 곁에 붙어 합리적인 세계 및 자기 이해에 기여하는 자기준거적인 관계로부터 작별하는 가운데 계몽의 역할을 잘라 던져버리고 과학주의적인 자기오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철학의 실천과 견해가 그렇다. 철학이 – 칸트가 그가 마주한 시대에 그랬듯이 –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성을 자율적으로 사용하고 그들의 사회적 삶을 실천적으로 꾸려 나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기를 원한다면, 철학은 철학가의 가훈을 지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및 세계에 대한 점점 더 심화되는 전문화된 지식의 복잡성증대에 체념해서는 안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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