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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지각[1]; 더 정확히 말해서[2] 사물과 착각[3]
(§1) 대상에 찰싹 붙어있는 확신은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망태에] 담은 것을 놓고 자기가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4]왜냐하면, 그가 [망태에] 담게 되는 것은[5]항상[6]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장대 끝에 달린]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고 욕망하기[7]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현실{원칙}에 충실하여]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8] 보편적인 것으로[9] 받아들인다.
[1]여기서 <Wahrnehmung>이 영어 <sensation>과 <perception>이, 즉 <impression>으로서의 수동적인 것과 <perception>으로서의 능동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감각적 확신> 마지막 문장에서 <Wahrnehmung>이 한편으로는 <aufnehmen>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aufzeigen>으로 등장한다. <aufnehmen>은 수동적인 <impression>으로, <aufzeigen>은 능동적인 <perception>으로 이해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2]원문 <oder/혹은>을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3]원문 <Täuschung>. <착각>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아니면<기만>으로 번역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아낙사고라스 등은 지각(aesthesis)을<pseudeis>, 즉 기만적이라고 한다[철학개념사사전의Artikel <Wahrnehmung> 참조]. 그런가 하면 케네스 웨스트팔(Kenneth R. Westhphal)은 헤겔이<정신현상학>을 쓰기 전에 흄(David Hume)의<인성론>, 그 중에서 특히4권2부<Of sceptism with regard to senses>를 읽었을 것이라고 한다. [Kenneth Kenneht R. Westphal: Hegel, Hume und die Identitaet wahrnembarer Dinge, 1998 참조]. 그렇다면<Täuschung>은<illusion>의 번역이 될 텐데, <illusion>은<착각>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기만>이 능동적인 행위라면<착각>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한다.
[4]이 번역은 <정신현상학>을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린 번역이다. 정신현상학이 단지 의식이 진보하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던 것을 정말 갖다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행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호롱불이 없어서 밤이면 어두운 방에서 바느질하는 순이네 엄마 곁에 갖다 주려고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에 올라 달을 딴 아이들의 망태에 달이 들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기가 된 번역이다. 이런 동기의 연장선에서 첫 문장<Die Unmittelbare Gewissheit nimmt sich nicht das Wahre, …>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해야 할지 고민했다. <das Wahre>를 <참다운 것>, 혹은 <진리>로 번역하면 직접적 확신이 참다운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데 [임석진 번역 참조], 이건 받아들일 수 없다. 직접적 확신이 찍어 담는 것이 결국 추상적인 보편성이라 할지라고 그게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려 바로 그런 보편성이, <Das Ganze ist das Unwahre>라고 한 <부정 변증법>의 아도르노에 기대에, 참답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보편성이 참다운 것이라고 할지라고 그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날 행복하게 해주는 것, 또는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그때 그사람>, 혹은 <그때 그것>, 즉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기 때문에, 즉 직접적 확신이 지향하는 것이 참다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das Wahre>의 이해와 번역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 확신에 참답지 않는 요소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 확신의 비진리성은 수행적 자기모순과 유사하게 행위의 意圖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과 동기 때문에 <das Wahre>를 <참다운 것>으로 번역하지 않고 <bewahren/보존하다>, <das Gesicht wahren/체면을 지키다> 등에 기대어 <[망태에] 담은 것/담게 되는 것>으로 번역했다.
[5]원문 <ihre Wahrheit/진리>.
[6]여기서 사용되는 현재형 시제를 역사적인 현재형으로 이해하고 <항상>, 그리고 <언제나>로 보충했다. 문제는 이 <항상>이 시시포스적인 반복의 역사인지 아니면 <그때>로 표현되는 성취(Erfüllung)가 스며있는(eingelassen) 역사인지 판가름하는데 있다. <정신현상학>이 다루는 문제가 이 문제가 아닌가 한다. 관련 <그때>의 시간성도 문제가 된다. 이 시간성은 독어 <einst>에서 처럼 지나간 <그때>인지, 앞으로 올 <그때>인지, 아니면 역사의 밑바닥에 줄곧 깔려있는(eingelassen) <그때>인지 부동한다. <das Wahre>를 <담은 것>으로, <die Wahrheit>를 <담게 되는 것>으로 옮긴 번역에도 이런 부동(浮動/Schweben)이 반영되어 있다.
[7]원문의 <wollen>을 <욕망하다>로 옮겼다. 직접적 확신의 행위를 욕망의 범주에 놓고 보면 역주 3에서 이야기된 모순은 직접적 확신의 욕망에 내재하는 모순이 되는 것 같다. 직접적 확신이 보편성을 대리만족(Ersatzbefriedigung)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이면 정상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것인가?
[8]원문 <was ihr das Seiende ist>. 여기서 <das Seiende>는 역주 7의 연장선에서 현실원칙을 받아들인 터전에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9]<Allgemeines>는 <감각적 확신> §7에서 이렇게 정의된다. “Ein solches Einfaches, das durch Negation ist, weder Dieses noch Jenes, ein Nichtdieses, und ebenso gleichgueltig, auch Dieses wie Jenes zu sein, nennen wir ein Allgemeines. (부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이와 같은 단순한 것,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딱 찍어 잡아 들어 보여줄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여기에 개의치 않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가운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을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어 § 21에서 „ein einfaches Zusammen vieler/다수가 [한군데] 하나로 모여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알츠하이머 작가 윌리엄 워터몰렌의 자화상 - 사라지는 자아?
1967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감관은 어떤 것일까. 후각과 온 몸, 특히 손에 있는 촉각?
II. 지각Wahrnehmung1;
(§1) 대상에 찰싹 붙어있는unmittelbar 확신은 뭔가를 취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참으로 취하지 못한다.4 왜냐하면, 그가 [망태에] 담게 되는 것은 항상5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장대 끝에 달린] <이것>을das Diese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6 보편적인 것으로Allgemeines7 받아들인다. [감각적 확신과 달리] 지각은 [이렇게] 온통8 보편성의 지배를9 받는 터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지각 안에서 바로unmittelbar 구별되는 두 갈래의 축도Momente 역시 항상 보편적인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자아이며 <나>가 마주하는 대상 역시 항상 보편자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보편성이 지각의 존재근거가 된다]라는 원리는 [헤겔/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관조하는 가운데] 생성되어 헤겔/우리 앞에10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각에 대한 헤겔/우리의 태도는 더 이상 [갓 등장하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지 않다. 거기서는 헤겔/우리 역시 갓 등장하였는바, [감각적 확신과 눈높이를 같이하고 애 달래듯] 그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ein erscheinendes Aufnehmen. 그러나 이젠 그런 수용이 아니라 [지각을 관통하는 엄연한] 필연성에 따른 수용이ein notwendiges [Aufnehmen] 되었다. 이런 [필연성으로서의] 원리의 발생과 동시에 [위에서 이야기한] 두 갈래의 축이die beiden Momente 감각적 확신의 등장에서는an ihrer Erscheinung11 단지 헤겔/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쿡쿡 찔러서 밖으로 떨어져 나오게 한 것이지만 [지각에 와서는] 생성된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두 갈래 축의 하나는 뭔가를 들어올려 보여주는 [이리저리 갈라지는] 운동의die Bewegung des Aufzeigens [결과로] 생성된 것이고, 다른 하나 역시 똑 같은 운동의 [결과로] 생성된 것인데, 단지12 [<이것> <저것>을 들여올려 보여주고 보여주는 가운데에도 이리저리 갈라지지 않는] 단일체로Einfaches 생성된 것이다. 전자가 지각함이고das Wahrnehmen 후자가 지각함이 마주하는 대상이다Gegenstand.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각하는] 운동[의 속성]과was die Bewegung ist 동일한 것이다.13 지각하는 운동은 [통시적인 그때그때마다의, 아니면 공시적인 가지갖가지의??] Momente를14 전개하고 구별하는 것이고 대상은 이런Momente들이 함께 묶여있는Zusammengefaßtsein 것이다. 우리만 알고 지각은 모르지만für uns oder an sich 지각의 존재근거가Prinzip 되는 보편성[만]이 [모든 것을 두루 관통하는] 본질/바탕이Wesen 된다. 이런 [존재근거로서의 원칙이라는] 추상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지각에서 구별되는 양대 축, 즉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이에 비해 부수적인 것에Unwesentliche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다 [보편성을 집행하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보편적인 것, 즉 본질이므로 둘 다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지각 안에서는] 양대 축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둘 중 하나만이 꼰대/본질적인 것일das Wesentliche 수밖에 없고, 꼰대das Wesentliche와 들러리das Unwesentliche라는 차이가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다. 이중 단일체로das Einfache15 규정되는 쪽, 즉 대상이 꼰대가das Wesen 되고, 이런 대상은 지각되든 안되든 지각함에 구애 받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지각함은 운동으로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내구성이 없는 들러리가das Unwesentliche 된다.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1 (다시 읽은 것을 다시 읽기 - 첫번째 두 ... |
후각과 촉각의 확신 |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다시 읽기) §7 |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 §11 상부 |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10 하부 |
{헤겔의 볍증법을 폼내다 <지각>을 엉망으로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칼로 곪은 것을 좀 찢어야 겠다. 우선 §7부터 교정해 나갈 생각이다.}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은/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이 전개되는 과정과 또 그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에서 이미 의식이 하는 경험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의식이 어떤 모순에 빠지고 어떻게 허우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지] 의식의 태도[경험도정]에 널려있는 모순의 전개과정만 살펴보면 된다. — 지각으로서의 자아가 받아들이는 대상은 순수한 일개의 것으로1 제시된다. 의식은 또한 일개로 제시되는 대상에서 보편적인 성질을2 지각한다. 그런데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개성Einzelheit안에 있지 않고 그것의 밖에 있다. 그 결과 의식은 대상으로 자기 곁에 와 있는 것의3 존재양식을4 일개성의 존재양식으로 파악했는데, 그것이 대상의 참다운 존재양식이 아니었다고 하게 된다. 이어 의식은 대상이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에 어긋나는 참답지 않는 일은das Unwahre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 짖고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의식은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대상으로 자기 곁에 와 있는 것을5 [일개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종에 속하는 모든 일개성을 관통하는] 공동성으로eineGemeinschaft überhaupt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의식은 여기서 멈출 수 없고 나아가[또한] 다른 대상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는 제한된bestimmte성질을6 지각하게 된다.7 그 결과 의식은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다른 것들과의 공동성으로,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들과 이어지는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사실 잘못 파악했다고 하고, 오히려 성질의 제한성을Bestimmtheit der Eigenschaft담아내기 위해서는 연속성을 절단하고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ausschließendes Eins자리매김할 수 밖에 없게 된다.8 그런데 이렇게 절단되어 있는 <하나>에서 지각하는 의식은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수의 성질들도9 발견한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은 대상을 배타적인 <하나>로 지각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대상은 이젠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같은 종의 개물들을 관통하는] 연속성과die Kontinuität überhaupt 같은 것이 되어, [쓴맛, 크고 작음, 부드러움 등] 감각적인 보편성들로서의10 다수의 성질들이 각기 홀로 있고jede für sich, [각 감각에 따라] 규정된 것으로서 서로 다른 성질을 배척하는 가운데 공존하는 보편적인 매체가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된다. 그러나 자아가 [예지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실로 지각하는 것은[쓴맛이면 오로지 쓴맛일 뿐인] 단순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으로서11 보편적인 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따로따로für sich 있는하나하나의einzelne [감각적인] 성질일 뿐이다. 이런 [감각적인] 성질은 성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뭔가 하얀 것>과 같은 구조를 갖는] 특정한 존재가bestimmtes Sein 아니다.12 왜냐하면, [감각적인] 성질은 [tode ti와 같은] 어떤 종이로서의 <하나>에 있는 것도 아닐an einem Eins 뿐만 아니라 [to ti esti와 같은 <ousia>로서의] 다른 것과의 관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성질은 이렇게 오로지 [tode ti와 같은 어떤 종으로서의] <하나>에 달려있거나 [to ti esti와 같은 <ousia>로서의] 다른 것과의 관계 안에 있을 때만 규정되고 [존재하는] 것이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감각적] 성질은 더 이상 스스로 부정[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순수하게 자기자신과만 관계하는것으로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 머무르는, 온통 감각적 존재일sinnliches Sein 뿐이다. [이 단계에 오면] 의식은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게 되어 단지 하나의 사념이ein Meinen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예지적?]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고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사념이Meinen 스스로 지각행위로 다시 넘어간다는 데 있다. 자아는 이렇게 {시시포스가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놓은 돌이 다시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이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함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처음부터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에Kreislauf 휘말려 들어가 {시시포스가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듯이} 매 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을 맛보게 된다.
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1 (다시 읽은 것을 다시 읽기 - 첫번째 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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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다시읽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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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불량거래-§10 하부 |
(§11) [두번째] 지각행위가 이렇게 되어버린 마당에서[1] 의식은 [사물이 이런저런 규정성으로 나타나는 차이가 자기자신에 속한다는데 머무르지 않고, 달리 표현하면 갖가지 감각으로 {밖으로} 갈기갈기 찢어져나가지만 않고] 동시에 또한 자기자신을 간추려 자기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반성이라고 의식하기[2] 때문에[3] 자신을 [사물이라는 대상과 지각하는 의식이란 두 축으로 갈라져 있는] 지각행위에서 [갖가지 차이가 따로 노는] <또한>이라는 [공통매체로서의 사물에] 대립되는 축으로[4] 의식하고 있다. 이 힘은 {갈래갈래 찢어지는 감각을 하나로 묶는 힘으로써}[5] 사실[6] 사물이 {갖가지로 찢어져 짬뽕으로 녹아들지 않는 Eigenschaft들 때문에 자기정체성을 가질 수 없지만} 차이를 배제하는 {통.공시적인?} 통일을이루어 자기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자기정체성은 의식이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이란 [<또한>이라는 공통매체일 뿐이지 자기정체성을 이루지 못한] 상이하고 독립적인 다수의 Eigenschaft들이 [한 보따리 안에서 그저] 병존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7] 그래서 사물이 이렇다저렇다라고 언명된다. 예컨대 사물은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그리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 있다는 등 갖가지로 언명된다. 그러나 {이런 <또한>은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사물이 흰색인한 입체적이지 않고, 그리고 흰색이고 입체적인한 톡 쏘는 짠맛이 아니라는 등[8] 갖가지 언표행위가 보여주듯이 갈래갈래 찢어져 있다. 그래서 이런 Eigenschaften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된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오로지 의식이 떠맡아 해야 하는 일이다. 이때 의식은 이런 Eigenschaft들이 사물 그 자체에서 [사물의 자기정체성으로 통일된] 하나를 이루게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있다.]
[1]원문<nun>
[2]원문<sich in sich selbst reflektieren>.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에 이어 칸트가 말한 <Einheit der Apperzeption>?
[3]원문<und>. 결과를 나타내는<und>
[4]원문<Moment>
[5]원문<dies Moment>. Apperzeption의 힘.
[6]원문<aber>
[7]의식하는 지각만으로는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어제 보았던 그 나무가 오늘도 그 나무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Hume의 Treatise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헤겔은 여기서 공시적으로도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해가 잘 안 된다.
[8]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pros ti>?
사물들은 이렇게 Eigenschaft들을 갖고, 이런 Eigenschaft들에 의해서 다른 사물들로부터 구별된다.[1] 그리고 Eigenschaft란 사물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2] Eigenschaft이기 때문에, 달리 표현하면 사물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대자적인] 규정성이기[3] 때문에, 사물은 다수의 Eigenschaft를 갖는다.[4] 왜냐하면,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두번째 시도의} 첫 디딤돌로[5]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것으로[6] 내놓았는데, 이것은 사물이 물자체(an sich selbst)가 된다는 말이다. 이런 물자체로서의 사물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사물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물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만을 떠받치는 [꼰대]로[7]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살펴보면 [8] {위에서 이야기한} 사물과 사물을 구별하는 {공통매체가 되는 의식의} [대자적인] 규정성bestimmte Eigenschaft들은 {동/타종의??} 다른 사물을 떠받치고[9] 그리고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만[10]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물자체로서의] 사물에서도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인 물자체로서의] 사물에서 드러나는 bestimmte Eigenschaft들이 되려면 서로 [확실히] 갈라져 있는[11] 다수여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bestimmte Eigenschaft들이 이렇게 {an sich/물자체로서의??} 물성[12]안에 있음으로써 {우리/헤겔이 보기에 아니면 지각하는 의식이 보기에??} {즉자적인 것 안에서 대자적으로 규정된??} 즉자대자적인??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13] 서로 무관한 것이 된다. 그래서 [지각을 이해하려는 의식이 두번째 시도로 사물은 하나이고 Eigenschaft들은 자신의 반성(Reflexion)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는 반대로] 사물이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고, 이렇게 또한으로 이어지는 여러 Eigenschaft들을 갖는 것은 사실 사물자체가 그래서 그렇다. 달리 표현하면, [지각하는 의식이 아니라] 사물이<또한>, 혹은 공통매체가[14] 된다는 말이다. 이런 공통매체 안에서 Eigenschaft들은 서로 겹치는 일이 없어서[15][ 다른 Eigenschaft들과 함께 달달 끓어] 짬뽕으로[16] 녹아 들어가는[17] 법이 없다. 사물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그것을 참답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1]원문< Sie [die Dinge] haben Eigenschaften, wodurch sie sich von andern unterscheiden.> 뭔 말인지 불분명하다. 종차(differentia specifica)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갑돌이와 차돌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종차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알 수가 없고, 갑돌이와 차돌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Eigenschaft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것은 <von andern>을 <von andern gleicher Art/동종의 다른 사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von andern anderer Art/타종의 다른 사물>로 이해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말이다. <수적 하나>가 이야기되는 것을 미루어보아 <동종의 다른 사물>이 최소한 동시에 이야기되는 것은 분명하다. 근데 문제는 어떤 사물이 동종의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것은 <본질적인 성질>에 의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2]원문<eigene>. <Eigentum>이란 법적 개념에 기대어 번역해 보았다.
[3]원문<eine Bestimmtheit an ihm selbst>. 여기서 <an ihm>이란 표현에는 <Es liegt an dir, dies zu tun./이것을 하고 안 하는 것은 너의 몫이다.=이것은 네가 결정해서 해야 할 일이다.>란 문장에서와 같이 필연적인Moment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어떤 필연성인지는 더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갑돌이와 차돌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차원에서의 필연성이라면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엮어진 <역사적인 아프리오리/historisches Apriori>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4]뭔 말인지 모르겠다. 왜 다수의Eigenschaft를 갖지? 필연적으로??
[5]원문<vors erste>
[6]원문<das Wahre/참다운 것>
[7]원문<sein eigenes Wesen>
[8]원문<zweitens/둘째로>
[9]원문<um anderer Dinge willen>
[10]원문<fuer andere Dinge>
[11]원문<mehrere sich von einander unterschiedene>
[12]원문<Dingheit>
[13]원문<und>. 설명하는<und/그리고>로 이해하고 번역했다.
[14]원문<das allgemeine Medium>
[15]원문<auseinander bestehen>
[16]원문<berühren/만지다, 접촉하다>. <rühren>는 인도게르만 어원적으로 <휘저어 섞다>라는 의미다. <끓이다, 볶다>라는 고대인도어와 어원을 같이 한다. (Duden 어원사전 참조)
[17]원문<aufheben>
(§ 10) 이어 의식이 [자기탓으로] 돌리는 이와 같은 상이한 측면들은 공통매체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1] 간주되지만 {함께 있지 않고} 각자가 이렇게 따로따로 대자적으로[2]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흰 것은 오로지 검은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있을 뿐이다. 다른 측면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물이 [수적]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다른 것들에게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자적인 규정성을 빼고} 사물이 [수적] 하나인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하나인 사물은 다른 {하나인} 사물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적 하나로 있음>은[3] {모든 하나에게} 공통되는 {즉자적인} 자기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물이 하나가 됨으로써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하나인 사물과 똑 같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인 사물은 {오직} {대자적인} 규정성에 의해서 다른 하나인 사물을 배제한다. 이렇게 사물들은 온전히[4] 즉자대자적으로 {즉자적인 하나임과 동시에 여러 대자적인 규정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실 그렇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물이[1] 하얀 것은 오로지 우리 눈에 갖다 대서 그렇고, 우리 혀에 갖다 대면또한 톡쏘는 짠맛이 나고, 우리 손에 갖다 대면 또한 입체적이다. 사물은 이렇게 우리의 감각에 따라다양한 성질로 나타난다.[2] 사물의 측면들이 이렇게 완전한 차이로 나타나는 이유는 [사물 자체가 그런 차이를 갖고] 우리가 그런 차이를 밖으로 끄집어 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물의 측면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허물어져] 이리저리 갈라지는 일은 혀와 눈이 완전히 구별되어 있듯이 서로 완전히 구별되어 있는 다양한 감각을 갖는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감각이] 공통의 매체가[3 ]되는데, 이 매체 안에서 이런저런 감각이[4] {그때그때/통.공시적으로분비되듯}[5 ] 고립되어 나와 [다른 감각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와만 관계하는] 대자적인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앞에서는 공통의 매체가 사물에서 드러나는 즉자적인 규정이었는데} 여기서는 이 규정을 우리가 우리의 반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사물의 자기동일성과 하나라는[6] 진리를 유지한다.
[1]원문<dies Ding>
[2]원문<usf.> David Hume이<perception>을<sensations>와<reflections>로 구분한 것이 연상된다.
[3]원문<allgemeines Medium>
[4]Hume의<sensation>
[5]원문<Momente>
[6]원문<Sichselbstgleichheit> <Eins sein>. <수적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정체성>은 타자와 구별되는 <개별성/Individualit=Eins sein>임과 동시에 자기 안에 분열이 없는 <단순성/Einfachheit=Sichselbstgleichheit>이다.
(§ 9) 이제 나는 [지각을 Aufnehmen과 Reflexion으로 갈라놓고 사물을 지각하는데][1] 맨처음 내 시야에 들어온 사물을 하나로 [하나 외의 것이 아닌 것으로] 구별해 낸다[2].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시야에 이렇게 하나로 걸린 사물을[3]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다. [그리고 또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각행위의 운동 속에서 이와 모순되는 것이 발견되는 경우 그것을 나의 반성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이렇게 사물을 하나라고 해놓고 지각행위를 계속하는데] 지각 안에서는 [하나로서의 사물 외에] 사물의 성질인듯이 보이는 차별된verschiedene 성질들도 발견된다.[4] [뭔가 다른 것이 발견되든 말든] 사물은 오로지 하나일 뿐이다. 이런 차이가Verschiedenheit 사물의 것이라면 사물은 더 이상 하나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런 차이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의식한다.[5]
[1]원문<also>
[2]원문<gewahr werden>
[3]원문<in dieser wahren Bestimmung>. §3 역자주에서 언급한 <Wahr>라는 명사의 의미를 살려 번역해 보았다. <wahr/참다운>라는 형용사는 라틴어<verus>와 어원이 같다. <severus/엄격한>하면 <verus>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wahr>에는 어원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친절한, 상냥한>이란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상대를 믿는>이란 의미도 있다. (Duden 어원사전 참조)
[4]원문<vorkommen>
[5]뭔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 왜 <하나/Eins>와 <성질/Eigenschaft>간 모순이 있는지 모르겠다. 플라톤의 <오이튀데모스/Euthydemos>를 보면 소피스트들이 “하나”와 “성질”간의 “모순”을 가지고 말장난질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근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였듯이 “pros ti”, 즉 어떤 특정한 관계에서 그 하나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을 빼놓고 말장난질 하는 것이다. 이것을 헤겔이 모를 리가 없고. <Eins>와 <Eigenschaft>간의 모순을 이해 못하는 것이 그 관계를 <Hypokeimenon/바탕>과 거기에 따라 붙는 성질과의 관계로, 즉 <이것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로고스 아포판티코스/logos apophantikos>에 나타나는 관계로 이해해서 그런가?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그럼 <Eins>와 <Eigenschaft>의 관계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그리고 <Eins>와 <Eigenschaft>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Eins>를 사물의 [논리적인/존재론적인/명제적인] 것이 아니라 <Eins sein>이라는 존재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럼 <Eins sein>이란 무슨 말인가? <Eins sein>이 이런저런 <Eigenschaft>라면 <Eins sein>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때문에 <Eigenschaft>가 의식에 속한다고 하는 것인가? 그럼 <Eins sein>에 존재적으로 속하는 <Eigenschaft>란 뭐고 왜 <Eins sein>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가? 헷갈린다.
의식이 자기가 하는 지각행위란게 뭔지 경험한 것이다. 지각행위의 결과로 훤하게 드러난 것이[1]{시시포스의 애씀을 다 무효로 만든 것처럼} 지각행위를 해체하는[2]것, 달리 표현하면 의식이 {점진적으로} 훤하게 드러난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마침내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 자기자신을 마주하는 반성이란[3]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것은 의식이 자기가 말하는 지각행위란게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4]스스로 알아차리고 거기에 알맞게 행동하게 된다는 말이다. {의식은 처음에} 지각행위란 아무런 {접힘/굽힘/주름이 없는 대상을 일대일로 받아들이는} 단순하고 순수한 받아들임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근데 그게 아니란게 결과에서 드러났다. 지각행위란 뭔가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런 받아들임의 결과로} 훤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인해서[5]자기 안에서 자기를 마주하는 반성이란 것을 알게된 것이다. {meinen/사념을 넘어서 오로지 밖으로 향한 눈길이 되었던 지각행위로서의} 의식이 {다시}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결과로] 훤히드러난 것을[6]그대로 가만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젠 의식이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지각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이런 되돌아감/반성이 순수한 받아들임에 뗄 수 없게 찰싹 붙어있는 것으로[7]순수한 받아들임에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지각행위의 이 다른 면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자기 탓으로 돌리고 이렇게 {내죄 올시다} 함으로써 {지각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의식의 자기반성행위로 대상을 더럽히지 않고 순수하고 참다운 것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 이렇게 되면 일이 감각적 확신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각하는} 의식의 {눈길이 밖으로 쭉 뻗어나가지 못하고 뒤로 밀려}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면이 지각행위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지각행위에서도 의식과 대상간의 구별이 발생하는데} 근데 [이 구별의] 첫단계에서는[8] 감각적 확신과 좀 다른 점이 있다. 의식과 대상간의 구별로 {감각적 확신에서는 진리가 의식[안]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지각행위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각행위의 양면을 인식한] 의식은 [진리가 자기 안에 있다고 하지 않고] 지각행위에서 발견되는 [9]비진리란 자기 안으로 {잘못 반사되어??} 떨어진 것이라고[10]인식한다. {지각행위에서 발견되는 비진리가 이렇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의식은 동시에 그 비진리를 파기할 수있는 능력을 갖게된다. 의식은 자신의 지각행위의 비진리[성]에서 참다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구별해 내어 그 비진리를 정정한다. 이렇게 비진리가 의식의 몫이 되지만, 의식이 이런 수정을 스스로 수행하는 한에서, 지각행위의 참모습이 뭔가라는 진리로서의 진리는 의식 안에서 벌어지는일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헤겔이 이제 살펴볼 의식의 태도는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하면 더 이상 [밖으로 향하는 눈길만 되는] 몰아지경의[11]지각행위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를 마주하는 반성으로도 의식하고 이런 반성을 [접힘/구김없는] 단순한 받아들임 그자체에서 떼어 갈라낸 태도가 된다.
[1]원문<das Wahre>
[2]원문<seine Auflösung>. <해체>된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아래 <aus>란 전치사에 스며있는<Ablösung/떼어 냄>이 이루어 진다.
[3]원문<die Reflexion in sich selbst aus dem Wahren>. 전치사 <in>과 <aus>의 의미가 어렵다. <in>과 <aus>가 한 쌍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분명 방향을 나타내는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이렇다. <Ich fuhr aus dem Bett hoch./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Ich fiel ins Bett./나는 침대로 몸을 떨어 뜨렸다.> 근데 지각행위가 총체적인 과정을 이룬다는 것을 놓고 보면 여기서 <aus>는 < Aus der häßlichen Raupe ist ein hübscher Schmetterling geworden./징그러운 애벌레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애벌레가 아닌] 어여쁜 나비가 되었다.>란 문장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Harald Weinrich, Textgrammatik der deutschen Sprache, 4. Auflage, Hildesheim 2007, S. 648 f. 참조]
[4]원문<beschaffen>
[5]원문<aus dem Wahren>
[6]원문<das Wahre>
[7]원문<unmittelbar>
[8]원문<zunächst>
[9]원문<vorhanden>
[10]원문<in es fällt>
[11]원문<blo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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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문장의 이해와 번역이 좀 부족한 것 같다. 원문은 이렇다. “Die Wahrnehmung nimmt hingegen das, was ihr das Seiende ist, als Allgemeines.” 첫째 문장에서는 내동 ‘das Wahre’, ‘die Wahrheit’를 운운하다가 둘째 문장에 와서는 뜽금없이 ‘das Seiende’를 운운한다. 첫째 문장의 흐름상 다음 문장은 “Die Wahrnehmung nimmt hingegen das, was ihr das Wahre ist, als Allgemeines.” 정도로 기대되는데 말이다.둘째 문장에서 ‘das Wahre’ 대신 ‘das Seiende’를 사용한 것은 ‘das Wahre’의 번역과 관련해서 제시한 문제의 연장선에서 보면 그리 뜽금없지 않다. ‘das Wahre’의 번역과 관련해서 문제시된 것은 궁극적으로 직접적 확신의 가상(Schein)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das Seiende’는 가상(Schein)에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가상과 존재하는 것의 구별이 희랍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도 이런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 같다. 가상에 대조되는 것으로서 ‘das Seiende’는 ‘das wirklich Seiende’의 준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현실원칙을 운운했는데 이 Intuition이 그리 빗나가진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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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문장 이해 – 추가‚das, was ihr das Seiende ist, als Allgemeines’란 표현이 ‚etwas als etwas’(무엇을 무엇으로)와 그 구조가 같다. 직접적 확신은 ‚이것’(,das Diese’)과 직접관계하고 그 관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반면 지각은 거기서 헤어나와 ‚als etwas’란 새로운 지평에서 ‚이것’과 관계한다.
‘das Diese’와 ‘etwas als etwas’와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해보고자 한다.
갓난아기가 말을 배울 때 먼저 ‚엄마’란 말을 배운다. 그때 ‚엄마’를 ‚이름’으로 배울까 아니면 ‚[보편]개념’으로 배울까? 분명 이름으로 배울 것이다. 반면 ‚자동차’를 배울 때는 ‚[보편]개념’으로 배운다. „이거 뭐야?“ „자동차“. 이 대화에 ‚etwas als etwas’의 구조가 엿보인다.
직접적 확신과 지각이 말하는 존재가 상이한 것 같다. 플라톤은 ‚양자간 존재에 대한 이견 때문에 大戰’ (gigantomachia dia ten amphisthetesin peri tes ousias pros allelous, Sophistes 246a)이 있다고 한다. 직접적 확신이 말하는 존재는 Sophistes에 기대어 ,몸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tauton soma kai ousian horizomenoi, 같은 책, 246 b).
전쟁이라면 전선과 편이 문제가 된다. 직접적인 확신과 지각이 싸우고 헤겔이 지각의 편을 드는지, 직접적인 확신과 헤겔이 싸우는지 약간 불분명하다. 전선이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직접적인 확신, 지각 모두 헤겔에게 야단을 맞는다. 직접적인 확신은 „넌 그저 사념일 뿐이야“란 야단을, 지각은 „넌 기만행위를 하는 놈이야“란 야단을 맞는다. 야단치는 방법만이 좀 다른 것 같다.
지각은 헤겔의 야단에 쉽게 순응할 것 같은데, 직접적 확신은 그럴 것 같지 않다. 왜? 그냥 느낌이 그렇다. 이 느낌의 근거를 나중에 (공부를 더 하고 나서) 좀 더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 직접적 확신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스파르타 시민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와 유사할 것 같아서 그렇다. 스파르타의 아낙네들은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 아들에게 무거운 방패를 건네주면서 ‚이것과 함께 아니면 이것 위에(syn tai e epi tai)’ [방패에 찰싹 붙어 승리해서 살아 돌아오든지 아니면 전사해서 주검으로 방패 위에 실려 오든지 하지, 절대 방패를 버리고 도주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외 정신현상학의 목차를 보면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 등 직접적 확신에서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헤겔이 이 문제를 정신현상학에서 줄곧 다룬다는 느낌이기 때문에 직접적 확신이 이미 승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각의 ‚etwas als etwas’는 자본론에서 이야기는 되는 상품의 이중성과 유사성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좀더 자세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사용가치가 가치로 등장하는 지평이 교환인데, 그 구조가 ‚이것’이 ‚als etwas’란 지평에 등장하는 것과 유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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