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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식에 대한 근심걱정이 사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절대적인 것만이 진리이고, 오로지 진리만이 절대적이라는 명제에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인식에는 별다른 종류가 있다고 꼬집고 위의 결과를 거부할 수도 있겠다. 즉, 어떤 인식은 학문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것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진리일 수가 있고, 또 다른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파악할 능력은 없지만 다른 식의 진리를 파악할 수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우왕좌왕하고 종잡을 수 없게 떠벌리는 일은 꼬리가 그다지 길지 않아[1] 실상이 바로 파악되어 절대적인 진리와 그 밖의 다른 진리라는 애매모호한[2] 구별에 몸을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는 절대적인 것, 인식 등과 같은 낱말의 의미는 사실 숙고하여 획득되어야 하는 국면에 놓여 있는데, 이미 어떤 특정한 제멋대로의 의미로 전제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1] 원어
[2] 원어
(§1) 철학에 입문하는 마당에서[1] 철학이 진정 해야 하는 일[2], 즉 존재하는 것의 실상이 무엇인지[3] 실지로 알아보는[4] 길목으로 곧바로 들어서기 이전에 먼저 이런 인식작용에[5] 관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은 인식작용을 인식과 동떨어져있는 그 무엇을[6] 수중에 넣는데 꼭 필요한[7] 도구나 아니면 그런 절대자를 가려내는데[8] 꼭 필요한[9] 수단으로 보는 한 아주[10]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이런 발상아래 적절한 사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심걱정이[11] 그럴듯한데 그 근심걱정이 우려하는 것은 인식에는 어쩌면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중에는 앞서 말한 철학의 최종목적을 달성하는데 좀더 쓸모 있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있어서 애당초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선택을 제대로 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인식작용은 일정한 양식과 적용범위를 지니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 속성과 한계를 꼼꼼하게 규정하지 않고서는 진리의 천상대신 오류의 뜬구름만 붙잡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려하다 보면 근심걱정이 변질되어 끝내 인식작용의 힘을 빌려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12] 의식이 소유하도록 한다는 발상 그 자체가 애당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며, 인식과 절대적인 것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내려져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식이 절대존재를 장악하는데 쓰이는 도구라고 하다면, 도구란 적용대상을 타자에 의해서 구애 받지 않는[13] 형태로 가만히 놔두지 않고 그것의 형태를 다듬고 변화시킨다는 것이 너무나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 인식이란 철학하는 우리가 하는 일을[14] 돕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다다르는 통로 정도인 수동적인 매체라고 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리는 위와 마찬가지로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매체에 의존하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양식으로서의 진리인 것이다. 어찌 되었던 간에 우리는 두 경우 다 철학이 추구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셈인데, 문제는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 그 자체가 개념상[15] 이미 목적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이토록 수단이라는 것에 매달려 있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사태라는 것이다.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도구의 작동방식을 습득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얼른 떠오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도구의 작동방식을 알면 절대적인 것에 관하여 우리가 도구를 통해서 얻어낸 생각에서 도구에 속한 부분을 인식결과에서 거슬러 내고 참다운 것을 순수하게 획득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해본들 나아진 것은 없고, 그 결과란 오로지 우리가 인식작용을 하기 이전의 원래 상태에 다시 처하게 될 뿐이다. 다듬어진 사물에서 도구의 몫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회수하면 사물은 – 여기서는 절대적인 것은 – 다시 인식이전의 상태와 전혀 다름없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런 인식작용이란 허나마나한 짓일 뿐이다. 이에 맞서 이번에는 도구를 통해서, 마치 아교를 가지고 새를 통째로 잡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에 아무런 변화가 가해지지 않고 단지 우리 곁으로 당겨져 오는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절대자가 우리 곁에 와 있는 이유는 절대자가 애초부터[16] 우리 곁에 와 있고 또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인데[17], 절대자가 이와 같은 잔꾀에 넘어가 우리 곁으로 당겨질 수 있다고 한다면 절대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로서 비웃음을 받을 만한 일이다. 이런 식의 인식이 잔꾀에 불과한 이유는 인식이 내심으로 목적하는 바는 오로지 절대자와 직접적인[18] 관계, 다시 말해서 아무런 노고가 필요 없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인데, 겉으로는 매우 힘겹게만 달성할 수 있는 뭔가를 분주하게 추구하는 척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이젠 인식을 매체로 생각하고 인식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이런 매체 안에서 광선이 어떻게 굴절되는지 그 법칙을 알게 되어 인식결과에서 광선굴절을 삭제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광선굴절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에게 다다르는 광선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인 광선 자체를 거슬러내고 나면 남는 것은 오로지 허허한 공간에 그려진 수학적인 순수한 방향[19] 혹은 텅 빈 공간일 뿐이다.
[1] 원어 [2] 소크라테스의 첫째 고소에 대한 반증(『소크라테스의 변론), 19a-20c)을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3] 원어 [4] 원어 [5] 원어 [6] 원어 [7] 문장의 흐름상 [8] 원어 [9] 역자 주 5번 참조 [10] <아주>에 상응하는 단어는 원본에 없다. 그러나 [11] 원어 < Besorgnis>. [12] 원어 [13] 원어 [14] 역자주석 2번 참조. 특히 pragma에 스며있는 prattein(행하다)의 의미에 주목했다. [15] 원어 [16] 원어 [17] 원본에는 [18] 원어 [19] 원어 최근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 좀 꼼꼼히 읽어 내려갈 생각이다. 그리고 헤겔의 Gedankengang을 mitvollziehen한다는 차원에서 번역해 볼 생각이다. 우선 서론(Einleitung)에서 시작해서 서설(Vorwort)로 넘어갈 생각이다. 서론은 각 단락에 번호를 매겨서 매일 한 단락씩 읽어 내려갈까 한다. üb>. 뭔가에 걸려 이 낱말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파우스트 1』의 헌사에 똑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데(“Ihr naht euch wieder, schwankende Gestalten, die früh sich einst dem trüben Blick gezeigt.”) 괴테의 색채론을 언급하면서 독일 낭만주의가 üb> 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Hans Arens 주해를 언젠가 읽어 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Hans Arens, Kommentar zu Goethes Faust I, Heidelberg 1982). 여기서 걸리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 『정신현상학』당시 논쟁의 지형이 어떠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정신현상학을 읽다 보면 담화적인 구조(dialogische Struktur)가 눈에 뜨이는데, 이때 특히 발화수반적인 기능을 하는 불변화사(Partikel)를 번역하는데 당시의 논쟁지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번역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주 부딪히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애로사항은 『정신현상학』뿐만 아닌 것 같다. Helbig/Buscha는 독어가 다른 언어에 비교해서 이런 “Dialogpartikel”(Harald Weinrich, Textgrammatik der deutschen Sprache, 4. Auflage, Hildesheim 2007, 835쪽)이 아주 많다고 („partikelreich“) 지적하고 있다 (Helbig/Buscha, Deutsche Grammatik, ein Handbuch für den Ausländerunterricht, 15. durchgesehene Auflage, Gütersloh 1993, 477쪽). 아무튼, 『정신현상학』의 담화적인 구조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지형에 통달한 길잡이가 필요할 것 같다. §1의 첫 문장을 번역하면서 <꼭 필요한 도구>라는 옮긴 것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이것을 정신현상학 당시 논쟁지형과 관계하여 살펴보면 헤겔도 역시 인식을 진리를 알아내는데 유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렇지 않았던 무리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의 전선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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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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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정신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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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Hans Arens의 괴테 주석을 드려다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근데 주석 2에서 말한 내용을 전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얻은 2두가지 있다.하나는 번역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 타고 산정상에 올라가 산을 정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너무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깃발을 꽂고 찍어온 사진을 너무 믿었다. "trueb"에 대한 내용을 직접 찾아보려고 노발리스 전집을 한장한장 넘기다고 훔쳐갈 만한 좋은 것을 많이 발견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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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대학을 나니다가 우리 눈이 완전히 배려 버린 모양이다. 이것저것 비교하고 구매할 줄이나 알지 다른 것은 모르는 것 같다. 예슬님이 생각난다. 옛날 우리 어머님들이 목욕재계하고 산신령게 빌었듯이 빌 때가 아닌가 한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