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신현상학 서론 §3

(§3) 인식에 대한 근심걱정이 사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절대적인 것만이 진리이고, 오로지 진리만이 절대적이라는 명제에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인식에는 별다른 종류가 있다고 꼬집고 위의 결과를 거부할 수도 있겠다. 즉, 어떤 인식은 학문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것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진리일 수가 있고, 또 다른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파악할 능력은 없지만 다른 식의 진리를 파악할 수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우왕좌왕하고 종잡을 수 없게 떠벌리는 일은 꼬리가 그다지 길지 않아[1] 실상이 바로 파악되어 절대적인 진리와 그 밖의 다른 진리라는 애매모호한[2] 구별에 몸을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는 절대적인 것, 인식 등과 같은 낱말의 의미는 사실 숙고하여 획득되어야 하는 국면에 놓여 있는데, 이미 어떤 특정한 제멋대로의 의미로 전제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1] 원어 를 이렇게 옮겨보았다.

[2] 원어 üb>. 뭔가에 걸려 낱말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파우스트 1』의 헌사에 똑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데(Ihr naht euch wieder, schwankende Gestalten, die früh sich einst dem trüben Blick gezeigt.) 괴테의 색채론을 언급하면서 독일 낭만주의가 üb>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Hans Arens 주해를 언젠가 읽어 적이 있어서 그런 같다 (Hans Arens, Kommentar zu Goethes Faust I, Heidelberg 1982). 여기서 걸리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 정신현상학당시 논쟁의 지형이 어떠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정신현상학을 읽다 보면 담화적인 구조(dialogische Struktur)가 눈에 뜨이는데, 이때 특히 발화수반적인 기능을 하는 불변화사(Partikel)를 번역하는데 당시의 논쟁지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번역하지 못하는 상황에 자주 부딪히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애로사항은 정신현상학뿐만 아닌 것 같다. Helbig/Buscha 독어가 다른 언어에 비교해서 이런 Dialogpartikel(Harald Weinrich, Textgrammatik der deutschen Sprache, 4. Auflage, Hildesheim 2007,  835쪽) 아주 많다고 (partikelreich) 지적하고 있다 (Helbig/Buscha, Deutsche Grammatik, ein Handbuch für den Ausländerunterricht, 15. durchgesehene Auflage, Gütersloh 1993, 477쪽). 아무튼, 정신현상학의 담화적인 구조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지형에 통달한 길잡이가 필요할 것 같다. §1의 첫 문장을 번역하면서 <꼭 필요한 도구>라는 옮긴 것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이것을 정신현상학 당시 논쟁지형과 관계하여 살펴보면 헤겔도 역시 인식을 진리를 알아내는데 유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렇지 않았던 무리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의 전선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라는 bon mot (독일 화가 Martin Kippenberger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틀릴 수도 있다.)가 떠오른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