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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이때 뒷문으로, 규범[보통]적인 것(고정화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섣불리 문제시하는 반면, 이탈(Abweichung)은 (변화로서) 어떤 식으로든 항상 “좋은” 것으로 보는 시각의 뒷문으로 - 이론적으로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그리고 극도로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상태로 - 규범적인 관점이 잠입하여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포스트구조주의에] 배어있는 규범성이 널리 퍼진 한 예로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Cultural Studies에서 바로 눈에 뜨이는 경향을, 즉 미시실천들과 지역적인 투쟁들을 - 제도화된 (거시-)구조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 정치적으로 낭만화 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이에 대한 비판으로 Stäheli 2004 참조). 이런 맥락에서 빈번히 (미시-실천들이 갖는 의미의 핵심적인 참조로서의) 푸코에 기대어 푸코[의 참뜻]에 배치되는 “저기 저 위”의 동질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에 “여기 아래”의 다양한, 이쪽저쪽 다방면으로 뻗어 나가는, 풀뿌리 실천들을 대립시키는 천진난만한/단순한 이분법적인 권력구도가, 미시-실천들이 [혹시] 반동적, 반해방적이지 않나 연구실천을 통해서 [그 사실여부를 따져보지 않고] 그걸 아예 개념적으로 배제한 권력구도가 복구된다.1)
실질적인 연구에서(Forschungspraxis/연구실천) - 그러지 않다고 하지만 - 빈번히 특정한 단절(Bruch)과 전위(Verschiebung)를 [선호하고] 강조하는 게 [알게 모르게] 배어있다는 게 드러나는 마당에서 [그걸 알아차리고 그렇다고] 자인하지 않은 규범성은 이때 자칭 반-제도적인 역동성들의 긍정을 넘어서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하다. 규범성을 이렇게 이론적으로 자인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명시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모든 요구들이 다 같은-타당성을 갖는다는 이론적인 긍정이 [특정한] 사례와 연구영역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선택이 아카데미[대학]이란 정치적 환경(Umfeld)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겠지만, 네오파시즘적인 하위문화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진보적인 하위문화에 관심을 갖고, 억압적인 기구에 대항하는 반-제도적인 실천들에는 관심을 갖지만 사회적인 인프라구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등등의 연구실천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연구실천의 결과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본래 들고 일어서 대항했던 것의 재등장이다. 즉 규범적인 것의 기준들을 눈앞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좋은 것”과 “옳은 것”에 대한 기준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취할 수 있다는 [기준의] 탈문제화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규범적인 요구를 더 이상 이론적으로 다루지 않고, 단지 폼[잡기](habituell)로만 해결하려는”(Niederberger/Wagner 2004: 185) 이론이 갖는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렇게 수용하는 양식들과 그 이론들을 그렇게 이어나가나는 게 아카데미적인 생산조건들과 선별적인 읽기양식들에서 기인한 다소 우연적인 발전인가 아니면 그 문제성이 보다 깊은 곳에, 즉 앞서 참조하고 토론한 이론들 자체 차원에 이미 있는 것인가? 앞의 결론이 어쩌면 “의도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되는 질문은 사회와 주체들의 물질성(Materialität), 경제적인 구조 및 프로세스들이 갖는 의미, 그리고 나아가 사회적-개별적 행위자율 등을 파괴/해체하는데 우선적으로 집중하고, 그런 것들을 또한 정치적인 의도를 품고서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는 최소한 같은 정열(Emphase)을 투자하지 않은 [이론들의]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시스템적인 추가결과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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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포스트구조주의 수용들과 좌익아카데미 양심의 진정
내가 보기에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입장들의 대중화(Popularisierung)와 아카데미적인 정착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전위(轉位/Verschiebung)가 있었다. 이 전위는 두 번째 이해양식으로 눈을 돌리는 패러다임과 이로 인한 “포스트모던화”로 특징지어진다. [그래서] 유행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움직인다는 것 자체다.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는 건 상관이 없다.”란 슬로건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가운데, 요구들의 역동성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다들 같은-타당성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Everything we have been told is real and unchangeable will be revealed as lies, and in refusing them we will make them change. Into what? No one knows, but that is not important. What is important is the change itself.”(Jun 2011: 247). [사태를 이렇게 보는] 자세에선 구성적인 역동성과 [일시적인] 구체적인 폐쇄 간의 차이로 [따라 잡을 수 없게] 영구화된 [그래서 반복․지속적으로 채워져야 하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간극”이 비판적인 혹은 전복을 꾀하는 행위능력 가능성의 근거가 되지 않고, 오로지 바로 이런 가능성과 일치로만 여겨진다. [결과] 개념적으로 발굴된 간극이 그때마다의/개별적인 실증적-특수한 성격을, 나름대로의 성격을 혹은 해방적인 성격을 갖는지 그 여부를 조사하는 게 포기된다. 특히 포스트-들뢰즈적인 글 다수에서 이런 [그저] 흐름과 움직임을 긍정하는 [경향이] [물고가 터진 듯] 제어되지 않고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위험한 이론-클래스”로 근거지우는 한 예로 이런 말을 한다. “발명하는 힘을 협업 형식으로 [이해하면] 발명은 어디까지나 ‘발명 이전에 서로 대립했던 역량들의 연결’을 이룩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어떤 연결인가 하면] 그로 인해 새로운 흐름들이 개발되는 역량들의 연결, 담론적-사회적 기계들의 일시적인 중첩[이다]”(Lorey et al. 2011: 19)1).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생성됨(Gewordensein)의 재구성으로서의 탈자연화로만 만족해한다. 한 사태가 원리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라는 기준이 제공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이에 대한 비판으로 또한 Saar 2009 참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최종 근거의 거부와 함께 - 최소한 이론적으로 - 모든 기초다지기[=설립/제도화]시도를 포기하고, 어떤 입장을 취하고 [개입의] 간극이 [과연 얼마나 큰지] 재보는 것을 [항상] 동반하는 위험, 즉 [=취한 입장을] 다시 내버려야 하는 (일시적인) 고정화에 따르는 위험을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포스트구조주의 사유를 이런 식으로 이어나가는 일[연구]들은 이론적으로 반-근본주의로의 전환을,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버틀러와 라클라우에게 말할 수 없게 자주 부당하게 전가된 반-근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성한다. 푸코에 기대에 (푸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기댈 수도 있지만) 이런 경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다. “어느 한 진리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 어떤 진리의 놀이와도 완벽하게 다른 놀이를 노느데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진리놀이를 달리 노는데 있다.”(Foucault 1984: 8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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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넓은 의미의) 포스트구조주의 논쟁에서 [각자의] 이론구조에 따라 각양각색의 받침대로 뒷받침되는 구성적인 통제 불가능성과 역동성은 매우 차이 나는 양식으로 긍정된다. 첫째,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폐쇄와 고정화의 토대와 함께 이것의 지속적인 훼방․횡단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둘째, 특히 포스트모던적으로 다듬어진 관점아래 모든 요구와 욕망들이 다 같은-타당성(Gleich-Gültigkeit)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불안전성과 역동성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긍정으로, 셋째, 규정 저편의 [反헤겔적인] 것이 중심에 있는 (예컨대 알랑 바디우에서 두드러지는) 사건철학들과 존재론들에서처럼 예견할 수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타자가 [동일자의, 그게 비록 타자를 변증법적으로 끌어 안는 동일성이라 할지라도, 연속성 안으로 떨어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를 가로지르면서] 일어나는 발생을(ereignishafte Entstehung) [예비하는] 가능공간으로 긍정된다. 여기서 토론된 대부분의 저자들은 - 서로 다른 점을 강조하지만 - 첫째 이해양식에 속한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렇게 읽는 것은, 근본적으로 폐쇄․완성될 수 없는 운동을 출발점으로 삼는 가운데, 그때마다의 특수한 고정화들과 함께 이들의 [반복]․지속적인 불안정화(탈-고정화)에 관심을 두고, 이때 [반복]․지속되는 불안정화보다 기존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로서의 사건들에 더 관심을 두는 셋째 이해양식과 전적으로 교차․중첩된다. 이 두 이해방식의 중첩에 대해선 3장에서 다시 거론하겠다. 여기서 토론된 모든 저자들은 모든 요구들이 “같은-타당성”을 갖는다는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둘째 읽기방법과는 매우 단호하게 거리를 두고 “반-근본주의”와 (허무주의로 선언된) 상대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자신을 지켜 [보호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논증에서 핵심적인 이해방식이 되는 첫 번째 이해방식은 반면 “기체로서의 역동성과 그것의 ‘표현’간의 범주적 차이”의 전제에 기반한다(Niederberger/Wagner 2004: 185). 바로 이 차이가, 우리가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에서 정치와 경찰 간의(랑시에르) 혹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 간의 “정치적인 차이”(Marchart 2010)로 발견하는 이 차이가 사회적인 것이 교섭되는, 달리 표현하면 (끝을 맺을 수 없지만 그러나 [허공으로 부상하지 않는] 기반위에서)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둘러싼 것을 놓고 싸우는 “공간 아닌 공간”(Nicht-Ort [=ou topos])(Butler)을 표지(標識)한다. 이와 같은 이해방식이 지향하는 바에 의하면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에서] 중요한 것은 구성적인 역동성과 차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긍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특정한 헤게모니적인 경직화/고정화들을 비판적으로 횡단/훼방하는 역동성과 차연에 배어있는 잠재력이 중요하다는 걸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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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포스트구조주의에 배어있는(implizit) 규범성
포스트구주주의가 취하는 비판자의 [=비판적인] 관점은, 좁은 의미로 보자면, [전혀] 규범적이지 않다. 오히려 보편[주의]적으로(universal) 통용되는 규범카타로그를 [전면] 필히 거부하는 가운데 보편[적인 적용가능]성(Universalität), 안정성, 그리고 해방강조를 문제화하는 [자세로] 특징지어진 [反규범적인] 것이다. 규범(성)의 억압적인 성격을 들춰내 보여주는 일이야 말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사안 중 그 하나라고 표시할 수 있다. “권력 혹은 [억제할 수 있는] 힘과 [무관한] 저편의 [터전에서] [자양분을 먹고 자라나] 스스로 자리한다는 일개의 규범복합체를 구축하는 일 자체가, 권력이 풍부하고 [억제하는] 힘이 있는, 개념적인 실천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실천은 자신의 권력놀이를, 규범적인 보편성이 [이런저런 장소에서 이때저때에] 뒤집어쓰는 외피[=특수성 혹은 관계]를 거론하는 가운데(im Rückgriff auf Tropen der normativen Universalität), 숭고한 것으로 만들고, 베일로 씌우고, 동시에 확장한다.” (Butler 1993: 36f.) 계보학적-포스트구조주의적인 윤곽으로 다듬어진 비판프로그램이 말하는 것은 “나는 옳고 다른 사람들은 그르다.”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단지 “다른 사람들이 부당하게 그들이 옳다고 주장한다.”(Veyne 1991: 214)란 것이다. 이건 그렇다 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구조주의가, Andreas Reckwitz가 꼬집어 지적하듯이, 다 이야기 된 건 아니다: “이와 같이 규범을 멀리하지만 (...)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화적인 코드들의 통제 불가능성이란 전제가 긍정적인 규범적인 함의(Konnotation)를 갖고 있다는 점이 간접적으로 분명해진다. 즉, 문화적인 시스템들이, 그들의 요구와는 배치되게, 분명 고정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통제가 불가능한 것으로 머문다는 점 [자체가] 바람직한 경향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Reckwitz 2008: 295, 강조는 SvD). 선택에 의한 가족관계를 맺어주는, 차이이론-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제스처를 출발점으로 삼아, 바람직한 경향으로 {떠올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aufscheinen} 통제 불가능성과 구성적인[=의미이해에 따라 잡을 수 없게 이미 삼투되어 있는] 의미차연(Sinnverschiebung)은 별별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 의해서 각양각색으로 다듬어졌다. 이게 푸코에게는 우연적인 역사적인 조건들에 대한 계보학에 근거한 분석으로서 개별성들(Singularitäten)의 형태변화를 [초래하는] 잠재력을 밝히는 분석이었고, 들뢰즈와 가타리를 보자면 탈영토화로 향하는 다층적인 운동들로 [짜여진] 미시차원이 영토화/고정화의 거시구조들을 횡단․훼방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인 읽기는 - [비슷하게] 다른 점을 강조하면서 데리다에 기대는 버틀러(아래 참조) - 의미의 구성적인 비종결성과 이에 따른 되풀이, 즉 반복을 타자성/차연과 연결하는 되풀이에 초점을 맞춘다. “되풀이는 기생적인 방식으로 [고정된 의미로] 확인하고 반복하는 바로 그것에 변화를 가하고 [이물질이] 스며들게 한다. 되풀이는 (항상 [따라 잡을 수 없게 앞서가는] 이미[란 시간성의 지배아래], 또한) 말하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싶고, 말하는 것과 말하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뭔가 다른 것을 이해하는 등등”의 결과를 초래한다(Derrida 2001: 120). 라클라우와 무페는 사회의 의미구조(Sinngefüge)안에서 파악될 수 없는 (구성적인) 외부가 있고, 그게 외부지만 사회[안]의 의미구조를 지속적으로 성가시게 하고 싸움을 건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걸 정치적으로 착용하여 이 둘은 결정불가능성(필연적인 외부에 기인한 사회적 총체성/전체성의 불가능성)과 결정(일시적인 고정화)간의 간극을 [정치적인] 행위능력의 공간으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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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정착과 비판 잠재력의 침식
아카데미에서의 정착 과정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 특히 미국에서 그랬지만 미국으로 제한되지 않고 - [인문]과학의 몇몇 영역에서 교전이 되었다. 이걸 두고 일련의 비판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가 초창기에 연결되어 있었던 많은 정치적인 함축들을 상실했다고 책망한다(참조. 예컨대 Lichtblau (2002년)의 비판). John Sanbonmatsu(2011: 230)는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던적인 영역에 대한 거친 비판에서 “이론[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점점 더 “섹시”한 형식을 장려하는 인센티브”와 “이런 형식을 발에 치이도록 북적거리는 아카데미 영역에서 [이른바]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입지․자리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향상시키는데 [용이한] 수단으로 사용한다.”(“incentives for increasingly “sexy” forms of theorizing as a way for ‘sympathetic’ or left intellectuals to maintain or advance their position in a crowded academic field”)고 진단한다. 어떤 아카데미 이론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사용가치, 즉 사회비판에 [용이한] 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교환가치만이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곳: 231). 이건 “외부”의 비판일 뿐이라고 [왜소화 할 수 있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이론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영역에서 자라나 분명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가장 요란한 비판자로 [부상한] 슬라보이 지젝은 “착취되는 소수집단들의 편에서는 진정한 사회개입”과 “다문화적인/포스트식민주의적인, 아무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는, 아카데미 미국의 ‘급진적인’ 무리들이 자화자찬하는 유유자적한 반항들”(지젝 2002: 20)을 구별한다.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Cultural Studies 의 탈-정치화를 비판한다. Cultural Studies가 정치적[이어야 하는] 투쟁을 “미미한(marginal) 정체성들의 인정과 차이들에 대한 관대를 둘러싼” 문화투쟁으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지젝 2001: 302). 여기다 Robert Misik은 독어권의 토론에서 “소수의 [자기]삶 꾸려나가기들(Lebenspraxen/삶의 실천들)을 우쭐하는(exaltiert) 이론들과 딱 들어맞게 하려고 노력하는” 제멋을 찾는 위대한 인물들(unorthodoxe Geister)을 발견하고 [비꼰다](Misik 2006: 190). 지배, 착취,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정녕 문제가 된다면, 탈-정치화로 이어진 문화주의[화](Kulturalisierung), [격양된 목소리로] 우쭐하는 복잡성의 강조와 추상, 그리고 [양자대립적인] 모순들을 끝없는 차이들의 짜임새로 해체한 것에 대한 반복되는 책망은 뭘 보고/뭘 얻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가? 이런 책망이 포스트구조주의를 싸잡아서 신용을 떨어뜨리는데 기여하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유가 제시한 [짚고 넘어서야 할] 과제들을 아예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게 드물지 않다 할지라도, 개별적인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들은 분명 [아니라고] 털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먼저] 형식적인 면에 주목하면 실지로 극단적으로 붕 뜬, 용어가 [애매모호해서 바깥사람이 접근하기 어렵게] 밀폐되어 이해하기가 어려운 텍스트들로의 경향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에 의한, 비판적인 쟁론과 수용(Rezeption)을 현저하게 어렵게 한다. 이와 같은 만연한, 전적으로 엘리트적이고 아카데미란 [지식]공장(Betrieb)에서 기능을 [발휘하는데] 전혀 위험하지 않는 추상으로의 도주는, 내가 아래서 논증하겠지만, 유동성, 편차, 풀뿌리적인 조직들 및 가동성 등으로의 내용적인 도주와 일치한다. 문제는 이런 운동 속에 배어있는 - 그때마다의 특수한 조건들 아래 실현되어야 하는 가능성이란 의미로서의 - 비판 잠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놀라운 일은 이렇게 도주하는 가운데 슬며시 전혀 “포스트구조주의지 않는” 손놀림으로 그들 자신이 적대적인 주류로부터 탄압받는 Underdog이란 자화상을 만들어 [그게 깨질까봐] 싸고돌고, 그런 식으로 [바로] 그들 스스로가 아카데미로의 편입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못 보게 한다. “[지식인들의 이런] 무식, 접수[하여 굴레 씌우기](Vereinnahmung), 그리고 아카데미로의 편입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효과들은 ‘위험한 이론-클래스’의 방종을 최대한 [제어하여] 무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일반적․담론적 ‘봉기토벌’의 구성요소들이다.” (Lorey et al. 2011: 18). 이 이론클래스가 근래에 와서도 (아직) 얼마나 위험한지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고찰되지 않고 있다. 내 테제의 핵심은 대학 좌파와 좌파 이론가들로 하여금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패러다임에 열광하게 한 것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내포하는 - 보통 그렇다고 스스로 시인하지 않지만 - 규범성에 있고, 바로 이런 [애매모호한] 규범성이 비판적인 (이론-)입장을 꼭 끝까지 다듬어 내놓지 않아도, 아니 그런 입장을 취하려고 [아예] 감행하지 않아도, 비판적인 제스처에 대한 욕구는 채워주는데 기여했다/한다는 점이다. [이런 행위의] 문제되는 결과는 단지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분석들의 탈정치화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좌파 일부가 [진정제를 먹은 듯이] 이론적으로 잠잠하다는 점이다. 이 비판이 겨냥하는 건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 [아직] 규범성이 잔재한다는 [자가당착 지적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좌파 양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규범성의 잔재를 이론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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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1.3 정치적인 것 사유하기
사회적인 것을 [문화의 문제로 돌리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문화주의[화](Kulturalisierung)와 는 좀 빗나가게 몇몇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적인 것의] 부분적인 지배체제들로의 응집들에 주목하면서 사회적인 것의 정치적인 차원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들은 우연성폐쇄를 목적하는 제도화된 정치(존재적 영역에 자리한 [=죽은 껍데기인] “정치적인 시스템”)에 정치의 질서를 끊임없는 운동으로 훼방․횡단하고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살아 움직이는]) 뭔가를 새로 세우는 에너지․힘을 대립시킨다. 여기에 좁은 의미에서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정치이론들 외에 (이런 좁은 의미에서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샨탈 무페) 앞에서 이미 언급한 자크 랑시에르뿐만 아니라 클로드 르포르, 알랑 바디우 또는 쟝-뤼크 낭시 등의 이름과 연계되어 있는, 전적으로 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정치철학 맥락에서 진행된 연구들로 보충되어야 한다. 앞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제도화와 폐쇄의 프로세스가 항상 필연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투쟁을 동반하고 [그 결과가] 우연적인바, 최종근거 및 기초의 부재가 정치적인 것이 작동하는 필드/영역을 구성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의 점, 기체(基體)적인 공유물,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된 [절대적인] 가치 등을 차용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가 속해 있는 제도가 번번이 [포기하고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Aufgabe:포기, 과제] 과제로 등장한다.”(Marchart 2010: 17).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포스트구조주의가 反근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포스트-근본주의적인 바탕색을 갖는다는 점이다. 하나로 [사유되는] 최종근거와 토대의 자리에 포스트구조주의의 비판자들이 개탄하는 “anything goes”가, 혹은 이와 비슷하게 자주 예언된 상대주의적인 허무주의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기초다지기 시도들을 둘러싼 분쟁, 지나가는 안정화 및 제도화, 그리고 [이어서] 불안정화가 들어서는 것이다. “[동일철학적으로 스스로 자명한 근거로서의] 본연의 본질주의적인 보편주의의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생성 배경이 되는 우연적인 근거들(다수)과 그것을 구성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들에 주목하게 하였다.”(Laclau 1994: 2). Andreas Reckwitz는 푸코, 데리다, 그리고 버틀러의 관점을 아우르면서, 방금 이야기된 것을 더욱 날카롭게 표현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세 가지 “방법론적인 훈령들”을 다듬었다. 이에 따르면 포스트구조의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이 되는 훈령들은 “1) 언뜻 보기에 해방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강요하고 규제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2) 언뜻 보기에 필연적이고 대안부재적인 것을 문화적으로 우연한 것으로 보기, 3) 이렇게 문화적으로 확립된 것에서 언뜻 보기에 고정된 것, 폐쇄된 것을 통제 불가능한 것, 문화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지각하기”(Reckwitz 2008: 294) 등이다. 이로써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질적인 이론프로그램은 - 이제 분명해졌을 것인데 - 지배적인 질서와 함께 자칭 진리들 또는 사태(事態)[내재]적 불가피성(Sachzwänge)을 퍼뜨리는 짓을 비판하는 길로 들어서는데 [용이한] 교량(橋梁)들(Anschlüsse)을 제공하고 동시에 균열들과 삐딱들(Abweichungen [= 루크레티우스의 clinamen/미세한 편차, 이탈] 그리고 배제와 타자의 가시화를 위한 장비, 나아가 [궁극적으로] 헤게모니를 지향하지 않는 것(Nicht-Hegenoniale)1)을 위한 장비가 된다는 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핵심적으로 문제화하는 세 가지 것, 즉 진리의 문제화, 구조의 문제화, 그리고 독자/독립적인(souverän) 주체에 대한 긍정의 문제화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결국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의] 바탕에 깔린 반권위주의적인, [배제가 사회의 구성적인 요소인바] (전체 혹은 “大총체”로서의) 사회의 구성적인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동기다. [그러나] 일시적인 폐쇄화프로세스들이란 의미로서의 역관계들의 응집들이 이론구조상 이미 고려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그리고 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접근들이 연구실천에서는 (제도화된, 지배의 [한] 형태로 호명된) 거시구조(예컨대 국가, 자본주의적 경제)보다는 (권력으로 두로 점철된) 미시정치들에, 反제도적인 지역운동들에, 그리고 일상생활실천에서의 혁명화에, 나아가 (힘을 실어줌[임파워먼트]과 동시에 억압하는) 주체성의 구성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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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불안정한(prekär) 폐쇄프로세스들
[앞의 지적은 그렇다 치고 여기서 살펴 볼 점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과 이들이 취하는 진리 및 명증의 생성에 관한 관점에서 결정적인 점은 앞에서 언급된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가운데 조작된 안정화가 항상 불안한(prekär), 깨지지 쉬운, 그리고 소요(騷擾)들로 속속들이 [점철된] 상태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런 분석의] 특징은, 모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에게 같은 비중으로 핵심적이지 않다 할지라도, 권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분산된, 다원적인, 생산적인, 그리고 필연적으로 편재(遍在)하는 역들관계로 파악하는데 (“권력의 존재론”) 있으며, 이런 역들관계는 단지 일시적으로만 항상 불안정한 지배국면들로 응집된다는데 있다. 현대의 자유주의적인 자기서술은 현대화프로세스의 결과로서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있다는] 우연성개방을 강조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이와 대조적으로 권력집중에 기반한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우연성폐쇄에, 그게 헤게모니(라클라우 & 무페)를 통해서든, 디스포지티브들(푸코)을 통해서든, 재영토화들(들뢰즈 & 가타리)을 통해서든, 아니면 경찰(랑시에르)을 통해서든 - 아무튼 이런 우연성폐쇄와 나아가 이것이 [다시] 불안정하게 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안정화된 것을] 규범과 실천사이의, [기도/염불과 같은] 호소와 [플라톤이 동굴비유에서 사용한 ‘뒤집어지기’(periagoge/Umwendung)를 다시 뒤집어 눈길을 피안에서 현실로 돌리는, 호소만 일삼케하는 억압적인 사슬을 누가 채웠는지 보게 하는] 현실직시(Umwendung)사이의, 규율과 적용사이의, 그리고 텍스트와 읽기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함으로써 다시 불안정하게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는 일이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의 심장부이며, 이때 행위능력의 가능성을, 주체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그 어느 때도 간과하지 않으면서, 긍정한다.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은 시종일관 구체적인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독자/독립적인 주체성(souveräne Subjektivität)과 개별적인 행위자율(individuelle Handlungsautonomie)을 주어진 상수로 전제하는 모든 접근들에 대한 근본적인(radikal) 비판을 개발한다. 그리고 주체의 해방이라는 현대화이론의 합창단에 화창하지 않고 역으로 주체화프로세스를 주체구성과 주체예속이란 동시성에 주목하면서 주제화한다.1)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인간의 주체되기에 억압이 어떻게 그 안에서 작동하는지 감지하게 하고 “주체들이 생산되고 차별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잔인성들을 폭로한다”(Butler 1992: 131). 이와 함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눈길은 [특정집단을 배제하는] 우연성폐쇄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사회질서에서 배제된 주체성들과 실존양식들로, “인간-남성-백인-도시인-표준어사용자”(Deleuze 1980: 27)란 다수 규범의 저편으로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내팽개쳐진 것들로 향한다. 여기서 Bude가 비판적인 사회학을 염두하고 요구한 “사회적 관계에서의 이득자와 손질자”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이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그런 지위를 매기는 “놀이” 자체가 주제화된다는 면에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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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선택적인 가족관계를 이루는 이론적인 제스처
모든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게서는 Stäheli가 “선택적인 가족관계를 이루는 이론적인 제스처”(Stäheli 2000:7)라고 명했던 [통일적인] 것을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 아래서 보게 되겠지만 -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유의 보다 가장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일련의 정치이론들도 포함된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적인 제스처는 차이이론적인 사유, 즉 사회현실의 그 어떤 요소도 동일논리에 따라 그 자체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그것이 아닌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비로소 규정된다는 사유에 있다.1)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요점은 다수를 이루는 개별적인 차이들이 [그저 다수에 머물지] 일정한 근거 혹은 [그것들을 하나의 총체로] 조직하는 원리(예컨대 생산관계, 현대, 혹은 가부장제)로 귀속되거나 그런 근거․원리에 의해서 안정화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유동적으로 - 그럼으로써 우연으로 - 머문다는 사정에 있다. 이와 같은 최종근거를 포기한 대목에 주목하면 대부분의 포스트구주주의적인 접근들은 “포스트-근본주의(post-foundationalist)”(Stäheli 2000: 9)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런 포스트근본주의적인 관점은 [예컨대 어떤 형식적인 가치의 실현과 관련된 자원/재원분배, 법규, 기구 등 총체적인 사회현실로서의] 구체성(Materialität)과 제도화의 저편에서 [놀아나는] 담론이상주의 혹은 언어놀이와 동등한 의미가 아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제도화된 형태들, 신체들, 그리고 실천들의 구체적인 실존(materiale Existenz)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있다. 현실이 담론으로 구성된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담론 저편의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의 경험불가능성에 주목하고 문제화할 뿐이다. “사유 밖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대상으로 부상(浮上)하는데 있어서 그 어떠한 담론적인 조건과도 무관하게 대상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Laclau/Mouffe 1991: 158; 담론이상주의와 거리를 두는 것과 관련해서는 또한 Butler 1997: 30f. 참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기독교적-서유럽 서양의 역사에서 그 중심의 중심을 차지했던 관념들, 즉 “진리” 혹은 “이성”이 객관적으로 주어진, 인식주체와 구별된, 역사 혹은 자연에 의해서 증명된 것이라는 관념들의 이론적으로 뒷받침된 탈정당화를 제공한다. 철학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대질서”와 목적론이 차지한 자리에 중심을 해체하는 (dezentrisch),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를 부정하는(anarchisch) 세계관과 함께 “유기체론적인 사회개념”(Moebius 2010: 269)과 선을 긋는 단념이 들어선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밀착하여 애쓰는/Anliegen] 핵심사안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성이 자신의 필연성으로 경험하는 것은, 보다 더 엄밀하게 표현해서 이성이 합리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자신의 필연적인 현존[양식](“étant”)으로 내놓는 것은 역사를 갖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 특수한 형태의 이성이 출현한 조건들로서의] 역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열하고 [그 특수한 이성형태로서의] 역사를 그런 우연성들의 [재]조직(Geflecht)으로 다시 획득[재현]할 수 있다.”(Foucault 1996: 179). 이런 - 단지 푸코로만 제한되지 않는 - 계보학적으로 다듬어진 관점은 보편개념들을 판독(判讀)하고 익숙해진 사유도식들을 의문시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자명함들을 배출한 역관계들의 특수한 짜임새를 파헤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Heinz Bude가 시대에 적합한 사회학을 요구하면서 사회학이 해야 할 일은 “어디서 좌우명들이 발신되고, 어디서 규율들이 정립되는지”를(Bude 2011: 13) 알아내는 일이라고 한 간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제공하는 관점보다 더 적합한 이론적인 관점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허위적인 대안부재[론]이 조작되는지 질문하는 일이2) 포스트구조주의의 다른 핵심 사안이다. 다만, [푸코의] 권력과 주체 그리고 권력과 주체화를 함께 다루는 분석기법이 [바로] 그런 복잡한 프로세스를 [사회적으로 분배된] 역량에 기반하여 [그 범위 내에서] 자율적(souverän)으로 움직이는 개별 주체들이 서로 속이고 기만하는 일로 파악하는 걸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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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스트구조주의 재방문. 없는 것이 있게 된 경위
그들의 이름들은 다 잘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는 이론 슈퍼스타가 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봉자의 수는 아마 마르크스만을 별로 놀라게 하지 않을 정도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때그때의 표어를 제공하는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자크 데리다의 영향은 2004년 그의 [때] 이른 별세가 문예란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대대적인] 사건으로 다루어진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무대에 등장하면 수천 명이 환호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뿌리를 둔 경계인이며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슬라보이 지젝이야 더 말할 나위없다. “포스트구조주의”란 본래적인 의미가 없고 [단지] 외부로부터 부여된, 아무런 사상체계가 그 바탕에 있지 않는 에티켓[일 뿐]이라고 근거 있게 지적된다(참조: 예컨대 Lorey et al. 2011: 11). 그러나 이런 주장의 저편에서는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 - [위기를 직면한] 바로 근래에 들어서 - 비통일적인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들을 [하나의] 이론영역으로 측정하려는 시도가 상당 수 이루어지고 있다(참조: 예컨대 Moebius/Reckwitz 2008; Stäheli 2000; Angermüller 2007). 60년대와 70년대 프랑스의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고,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미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은1) 사회인문과학에서 이루어진 문화적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그 맥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런 문화적 전환이 관철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것들의 문화적, 그리고 상징적인 구조화에 [연구의] 눈길이 미치게 되었다. 68년 5월의 파리가 포스트구조주의에 있어서 갖는 의미는 [역으로] 많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이 60년대 및 70년대의 운동에 미친 영향과 마찬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68년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국가론과 이데올로기비판이 제시한 전략적 전제들과 억압에 기초한 권력모델로 방향이 잡혀진 좌파 정치와의 즉각적이고 근본적인(radikal) 절단을 알리는 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점은 (경향적․점차적으로) 미시정치로 바탕이 색칠된 주체화와 욕망의 문제들로 이전되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학생운동은 [물대포장갑차가 쏘는 물에 쓸려] 거리에서 세척되어 담론이란 지하로 밀려 내려갔다.”(Eagleton 1994: 127)고 논박한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 이런 논박은 이글턴뿐만이 아니었지만 -, 일반적인 탈정치화와 동등한 의미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된 거의 모든 이론가들의 정치적인 개입과 운동근접성은, 프랑스 감옥운동에서의 푸코의 역할, 인종주의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들뢰즈의 개입,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태리 자율주의와의 긴밀한 관계, 또는 주디스 버틀러의 퀴어 활동에서의 역할 등과 함께 다면적으로 검증되었다.2) 이와 같은 이론과 정치의 긴밀한 연계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이, 특히 (물론 여기에 제한되지 않고) 퀴어 운동들의 발생[과정]에서 수행했던 지대한 역할들을 두고 볼 때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서 오로지 상아탑에 올라간, 고도로 추상적인 아카데미주의만을 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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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Prokla 2호에 실린 질케 판 다이크(Silke van Dyk)의 논문 "Poststrukturalismus. Gesellschaft. Kritik - Über Potenziale, Probleme und Perspektiven"을 번역하여 올린다.
'Prokla'는 '계급투쟁의 문제들'(Probleme des Klassenkampfes')의 두자어.
1971년 창간되었다.
[번역]
포스트구조주의. 사회. 비판
잠재력들, 문제들, 그리고 관점들에 관하여
최근 위기들의 뒤를 이어 비판[이론]을 강조하는 새로운 바람이 거의 폭풍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다. 독일 일간지들의 문예란은 금융시장위기의 전모를 다시 한 번 짚어가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급진적인 말하기를 동원한 자본주의 비판을 그들이 당면한 [과제]로 발견한 모습이다. 점거활동가들은, 보통의 경우 운동을 꺼리는 (또 앞으로도 그럴) 시민들의 [이상적인] 다른 자아와 초자아가 되었다. 스테판 에쎌의 얇은 소책자 <분노하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서점의 계산대 바로 옆에 놓여 있다. 동시에 잘 나가는 과목들의 주변으로 밀려나갔던 비판(사회)과학자들은, 그들의 집단따돌림표징으로 보였던 것이 이제 중심부에서 (비록 새로운 징후아래 그렇다 할지라도) 입맛을 돋우는 식거리가 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8년 가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후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비판하는 일이 이제 다시 해도 되는 일이 되었다. 이런 배경아래 마르크스적으로 다듬어진 분석들에게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의 영향력이 꼭 더해졌다곤 할 순 없지만, 뜻밖에 새로운 반향공간이 열린 반면, 지난 몇 년 동안 대유행(hype)하고 대학 안팎의 좌파가 이론적으로 애지중지했던 아이들은 한방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과 문화연구들의1) 중심에 놓여 있는 주체, 진리, 그리고 大질서의 문제화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미시정치들, 복잡한 역관계들, 그리고 해석을 둘러싼 투쟁들을 선호하는 일이 (새로 등장하는) 여러 사회비판가들에 사이에서는 대위기에 직면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케케묵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퀴어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들이 일궈낸 배척된 존재양식들의 가시화 등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비판의 영역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다시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하는 시대가 도래되었다는 목소리에 눌려 왜소한 놀이터로 퇴색되었다2).
2011년 12월 베를린에 있는 ‘세계 문화의 집’에서 저명한 지식인들 한 무리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유럽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모였을 때, 그들이 [이해하는] 세상은 마르크스 절망했을 만큼 단순했다. 이 점에서는 푸코도 아마 예외적으로 마르크스와 통했을 것이다. 이 행사를 창안했던 사회심리학자 하랄드 벨쩌(Harald Welzer)는 15살 땐 세상이 자본의 과두정치로 지배된다고 믿었다가 나이가 들어선 다년간 푸코와 다른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을 읽고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 않고 아주 정말 복잡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내가 15살 때 생각했던 것과 똑 같다.”고. 이렇게 벨쩌와 같이 그다지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청년기의 냄비근성에 못 이겨 참수한 마르크스를 [참수된 모습으로=정치경제학비판 이전의 마르크스로 제한하여] 다시 꺼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위기들을 직면한 상황에서,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통적인”사회학이 다시 돌아올 시간이 도래했다고 자신한다. 뭐가 진리이고. 뭐가 옳은지 아직 헷갈리지 않았던 문화적, 그리고 담론적 전환 이전의 평온했던 시대로 시간의 수레바퀴를 30년 뒤돌리는 가운데, 위기에 알맞은 사회학의 과제가 뭔지 새롭게 측정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하인쯔 부데(Heinz Bude)는 “불평등, 지배,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Bude 2011: 13)3) “사회 분열에 관한 진리, 인간들의 억압, 그리고 공공청중[을 모델링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그들에게 가해지는] 응징”(같은 곳)을 말하는 사회학을 지지하는 편에 서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회학(들)의 의미상실을 [진단하고]․확언하였다. 이렇게 전통적인 두루마리를 걸친 새로운 사회학의 과제는 복잡한 역관계들과 지식질서들을 [직면하지 않고] 문화[차이]의 문제로 돌려 분석하는 쪽으로 빠져나가는 대신에 “사태 자체로” (같은 곳: 14) 돌아가는데 있다고 한다. 중단하라,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영역이라고 문화에 반하는 짓 그만둬라. 중단하라, 지역적인 전술들을 선호하는 짓 그만둬라. 사회로 귀환하여 사회를 분석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라. 이것은 부데만의 단언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의 분석력과 작용범위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비판 잠재력에 관해서도 구구절절 표현된 불편한 심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패러다임을 비판과 진리, 불평등과 지배, 그리고 사회를 “대전체”로 분석하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질문들과 대결시키는데 있다. 나는 [포스트구조주의를] 비판하는 근거 있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반듯이 곧바로 이론역사의 수레바퀴를 몇 십 년 뒤로 돌려야 하는 것과 동등한 의미가 아니라, 그러지 않고도 그런 관점들을 흘리지 않고 어떻게 포착하고 가공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나의 테제는 포스트구조주의가 현재 안고 있는 사회이론적인 면과 이에 따른 사회비판적인 면에서의 부족함은 [포스트구조주의] 패러다임의 사유유형 자체에 의해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포스트구조주의가 대학[과 대학물을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나 떠드는 속물이 되는 과정에서 관찰된 포스트구조주의 사유의 부분적인 “자기파괴”와 탈정치화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4)
4) 이런 발전에 대한 둘로 나뉜 심기불편과 관련해서 스테파니 그래페(Stefanie Graefe)와의 시사하는 바가 많은(instruktiv) 대화에 감사한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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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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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문 보셨나요? 이집트에서 시시가 테레비에 나와서 이집트인들에게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내전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시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Do you want to either rule the country or destroy it? Do you want to either have the military on your side or destroy it? Some are trying to take country into a dark tunnel. We are at a crossroad,”
더욱 놀라운 것은 타마루드의 성명입니다.
“We call on the great Egyptian people to rally in Egypt’s public squares this Friday to demand the trial of Mohamed Morsi and to support the Egyptian military forces in its upcoming war against terrorism and to cleanse Egypt’s land from agents (traitors).”
cleans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놈들입니다. 한달만에 2천만명한테 서명을 받아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이집트는 요지경이 됐습니다.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니고 학살은 학살이 아닙니다. 51명이나 죽였는데도. 게다가 군인 한 명이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들에게 발포를 거부해서 죽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럴 때는 진실을 말하는건 외신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http://www.guardian.co.uk/world/interactive/2013/jul/18/cairo-republican-guard-shooting-full-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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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루드는 어떤 백만장자가 은밀히 지원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그는 나깁 사위리스에요.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Billionaire businessman Naguib Sawiris, who left Egypt shortly after Mursi's election, told Reuters he threw his full support behind the youth movement.
"The Free Egyptians party, the party that I founded, used all its branches across Egypt to (gather) signatures for Tamarud," Sawiris said in a telephone interview from his yacht off the Greek island of Mykonos. "Also the TV station that I own and the newspaper, Al-Masry Al-Youm, were supporting the Tamarud movement with their media ... It is fair to say that I encouraged all the affiliations I have to support the movement. But there was no financing, because there was no need."
그는 이집트 최고의 재벌이라고 해요. 포브스에 따르면,
The Sawiris family controls the Orascom Group, Egypt’s largest conglomerate, which owns interests in construction, telecom, hotels and technology and employs over 100,000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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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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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으로 쓰는거니까 말투가 이상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지금 여러가지 문제로 아랍이 시끄럽지만 사실 이 지역의 핵심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하마스는 2007년에 봉쇄를 당했는데 그때 이란, 시리아가 도와주었음. 지금은 관계 악화됨. 이집트 군부는 국경봉쇄하고 가자로 통하는 터널 파괴하겠다고함. 이 터널을 통해서 생필품을 밀반입하는데 비인도주의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않음. 그냥죽으라는 소리. 이 와중에 가자에서도 타마루드 결성.이것은 시대의 공기와 같은것. 이란 녹색운동에서부터 지금까지드 보았던건 중동의 청년세대는 세속혁명을 원해요.
ㄹ
사우디같은 반동이 설쳐대는 이유.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들이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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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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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기사 너무 실망스럽네요. 이집트 군부 무슬림형제단에 최후통첩? 51명이나 죽여놓고서 무슨 최후통첩? 이명박이 용산에서 사람죽이고서 철거민들한테 최후통첩하면 그대로 받아쓸건가? 외신도 협박이라는 단어 사용해요. 이건 온건한거야. 이건 사실상 살인면허를 달라는것.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지는 뭔데 인용해. 다함께가 맨날 얘내 성명서 번역하니까 의미있는 존재같죠? 이집트의 대다수인 빈민들은 타마루드도 몰라. 그냥 우리로 치면 사회진보연대같은 운동조직. 그러나 사진연이 성명냈다고 해외언론에서 소개하는 경우는 없음.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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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수정이 안되네요. 내 옛날 진보넷 이이디인데 이렇게 셋팅이 되어있어서.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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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유유상종이라고 이집트 민중의 마음보다는 저런 아무 영향력없는 조직이 쓴 성명서 한장이 더 소중하겠지. 그걸로 지금까지 우릴 얼마나 속여왔는데. 나 열받았음. 금요일엔 드라마도 안합답니다. 이집트 신문들 시시 얼굴로 도배하고 난리났음. 쿠데타는 쿠데타일뿐.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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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하면 언론부터 장악하는데 사람들이 쿠데타가 뭔지 잊었다니 영삼이 넌 영웅이야.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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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SWS는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미국의 허락을 받은 군부의 쿠데타를 지지했다고 하고, 타마로드는 "애당초부터 지배권세격의 일부였던 부르주아 야권의 플랫폼"이었다고 진단하고 정치경제적인 문제때문에 무슬림형제단에 적대적으로 관계하고, 처음부터 군부를 지지하여 무르시를 축축하고 옛 엘리트들이 다시 집권하기를 원하는 세력이라고 규정하네요. http://www.wsws.org/de/articles/2013/07/20/egyp-j20.html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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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정통보수' FAZ (7.25)군부 더 이상 눈치 볼 필요 없음.
1. IMF로 대변되는 국제사회 눈치 볼 필요없음. 사우디, 쿠웨이트, 아랍 에미레이트가 120억 불 재정지원 약속, 일부 이미 제공.
2. Sawiris의 언론미디어매체를 통해서 대대적인 언론공세 및 지원세력 동원
3. 옛 집권정당 국가안전부(al Amn al daula)의 아직 견고한 조직 사용
4. 이런 토대에서 대 무슬림형제단 몰이사냥 개시
(http://www.faz.net/aktuell/politik/ausland/naher-osten/aegypten-ende-der-zurueckhaltung-123052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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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 참 엉터리다.파이낸셜뉴스는 INF가 48억불 대출관련 협상을 유보하고 있다고 하면서 사우디 등이 12억불을 약속했다고 보도하는데 (http://www.fnnews.com/view?ra=Sent1101m_View&corp=fnnews&arcid=13072609314157&cDateYear=2013&cDateMonth=07&cDateDay=26), 이건 은근히 국제사회가 (=서구 시민사회가)가 아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보도. 쿠데타를 수행했다는 상으로 이미 50억 불을 받았고, 120억불이 약속된 상태!!! IMF 아무런 영향력 없음. 이집트 군부, "나 돈 있어, 니들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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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을 하려면 다 하든지 중요한 점을 해 줘야 하는데, 참세상은 님이 지적하신 "cleanse"란 단어는 싹 빼버렸네요. 독일 언론도 여기서는 함의가 더 강력한(예컨대 히틀러 나치) "säubern"(cleanse)을 언급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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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보수언론이 차라리 나을 것 같네요. 세상을 알아보려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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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어를 사용한건 타마루드인데 참세상에선 구국전선과 혁사 성명만 인용했음. 세계사회주의자웹사이트는 혁사를 맨날 까댐. 그러니까 역으로 이 조직이 중요한 세력인것같아보이지만 아니야. 믿어주세요ㅠㅠ 이집트인 40프로는 만수르가 누군지 몰라. 90프로는 과도정부 총리가 누군지몰라. 저 지금 휴대폰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거 하는거임. 나 열받았음. 나 오늘 마실거야. 내일 쉬는 날이야. 휴대폰문체를 용서해주삼. 시나이반도 무장세력이랑 형제단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역었는지 참세상이 이집트군부 해외 기관지야? 미쳤나봐.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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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에 몸조심하시면서 한잔하시길..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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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가 당선된 일년전 알카에다 지도자 자르콰이는 그들은 모르시가 성공하게 결코 놔두지않을것이라고 경고. 그의 예언이 일년만에 적중. 축출된뒤 소말리아 알카에다 지도자는 트위터로 이렇게 말함. 이제 환상을 버려. 세상을 바꾸는건 투표가 아니라 총이야.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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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스는 모르시, 터키, 카타르를 믿었던거임. 원래 하마스는 이란-시리아-헤즈볼라 동맹 사이에서도 찬밥이었어요. 낙동강 오리알됐어요. 거긴 더 부술때도 없다구. 이스라엘이 설마 하마스를 무서워하겠어요. 이란, 시리아가 공급하는 헤즈볼라 미사일이 무섭지.이젠 무서울것도 없어. 오직 세계인의 저주밖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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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란이 하마스를 도울 것 같아요. 지난 가자 전쟁에서 하마스를 정말 (물질적으로=무기, 이데올로기적으로) 도운 국가는 이란. 하마스가 이스라엘 심장부 텔아비브를 향해 발사한 미사일은 다 이란제.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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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에 아랍권이 자신을 뒤돌아 볼 때 2013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상상해 보네요. 아랍권의 대전쟁이 불거진 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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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은 이란의 녹색운동이었어요. 이집트활동가들은 이란활동가들에게 고무되었고 2011년에 다음엔 이란 네 차례야라는 피켓을 든 사진을 들고 환호했던 것처럼 사이가 돈독했어요. 그런데 왜 이란은 조용 할까. 한가지 추측은 이란이 지난 십년동안 완만한 세속혁명을 경험했다고해요. 그리고 이란활동가들은 오랜세월 봉쇄를 경험해서 쉽게 매수되지않는다고해요. 아마 이집트에서부터 리비아, 시리아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보고 낙담한듯.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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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상황은 모르지만...“이란달리보기”(irananders.de)란 독일 웹 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SWP 연구원 포쉬박사는 이란이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고 있다고 진단. 예전에는 특히 해외거주 이란사람들이 이슬람이란에 등을 돌리는 경향이었으나 최근 선거에서는 대대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란의 안정적인 이슬람민주주의국가로의 발전을 진단. 예전엔 정치적인 운동은 전혀 안하고 단지 문화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하였으나 이젠 정치활동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이슬람공화국이 헌법상 보장하는 걸 요구한다고 지적. 이런 물결을 타고 좌파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포착.
이란의 경제와 관련해서 친이스라엘 “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 policy"의 Clawson은 이란의 경제를 매우 좋게 평가. 대외의존의 대명사인 석유수출이 없어도 자족족인 경제에 기반한 넉넉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분석. 이유는 경제제재아래 자족경제를 구축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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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를 보세요. Patrick Clawson: Is Iran Moving Beyond Oil? (http://www.realclearworld.com/articles/2013/04/07/is_iran_moving_beyond_oil_105059-2.html)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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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러가야돼요. 지금 타흐리르에 세 그룹이 있어요. 모르시를 지지하는 사람들, 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 둘 다 반대하는 사람들. 정치적으로는 세번째가 옳은거같죠? 이 세번째는 이집트인들하고 아무 상관없어!!!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걸 안다고 기쁠거 하나도 없음. 바보가 아닌 이상. 이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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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무슬림형제들의 실수 (몇 가지 생각)1. 경제엘리트 및 대기업의 정치적 영향력 단절 실패
0 이집트 경제엘리트는 무바락의 장기정권아래 부를 축척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
0 2011년 초 무바락 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점유한 권력포지션(언론, 대기업)을 유지하는데 성공
- 과도기의 정권을 장악한 군부의 보호아래 기존경제체제 유지
- 무르시 정권 군부 및 전 무바락 정권의 對경제엘리트 및 대기업 정책 그대로 유지
- 이렇게 함으로써 경제엘리트를 끌어들이려 함. 그러나 실패
0 동시에 무슬림형제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경제세력 육성에 별다른 성과가 없었음
- 대부분 세속적인 대기업의 다수가 무슬림형제들을 근본적으로 불신
- 反무슬림형제들 세력 및 인물들을 금전과 그들이 소유하는 언론으로 지원
0 결과 무슬림형제들 선거로 달성한 권력을 다지는데 실패. 앞으로 경제엘리트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됨
(SWP, Stephan Poll, Ägyptens Unternehmerelite nach Mubarak (무바락 이후 이집트의 기업엘리트/http://www.swp-berlin.org/fileadmin/contents/products/studien/2013_S14_rll.pdf)
2. 이란혁명에서의 “혁명수비대”와 같은 조직 부재
0 무장문제
0 선거에 의한 정권창출 정책의 한계 (혁명이라면)
(더 살펴봐야 할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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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번째 그룹이 어떻게 하고있는지 알았어요. 대부분 둘 다 역겨워서 집에 있대요. 시위때마다 성폭력이 발생하니까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타흐리르 보디가드라는 그룹이 결성됬는데 트위터로 시위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서 여자들이 무사하길 기원했어요. 드물게 나가는 그룹은 두 라이벌 조직이 있는곳을 피해서 따로 시위한대요. 모르시하고 시시 사진에 빨간줄로 찍 그어놓고. 이 와중에 군부는 오바마가 은밀히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고있다는 음모설로 대응하고있음. 그 덕분에 타흐리리엔 푸틴사진이 등장함. 그밑엔 굿바이 미국! 이렇게 써있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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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위의 내막에 대해 약간 알았어요. 이스라엘 때문임. 원래 미국은 이집트와 튜니지에서 이슬람정당을 지지했음. 시리아에서 플랜A는 무슬림형제단 정권을 세우는것 플랜B는 최소한 리비아 정도로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것. 둘다 실패함. 최근 미국은 러시아와 협상시도. 시리아 지하디스트들이 통제불가는상태. 터키도 위험함. 지하디스트들이 시나이반도와 사우디로 떠남. 이스라엘과 사우디 겁에 질림. 미국은 국경지역에서 지하디스트들이 밖으로 못나오게 막고있는중.이 모든것이 누구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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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지지자들은 시위가 끝나고 집에 돌아갔는데 모르시 지지자들은 최소한 70명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어요. 그들 대부분은 총에 맞았어요. 그런데도 모든 언론이 충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있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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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내전'이 일종의 리트머스테스가 되는 것 같네요. 그걸 어떻게 보도하는가가...님이 화를 터뜨리고, 이곳 예술인생님니 진보통합당(통합진보당? 헷갈리네요_)관련 지적한바 있는데, '참세상'이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네요. 아니 문제라기 보다는 이런 아주 조그만 일을 통해서 한국 (좌파)의 현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이집트 보도관련, 우선 보수(언론)의 자기 일을 하는 '부지런함'과 자기 일을 방기하는 좌파의 '게으름'이 보입니다.
이런 '게으름'이 '줄서기'와 관련이 있지 않나 합니다. 한국 정치판은 늘 '줄서기'라는 생각이 드는데, 좌파도 문제가 발생하면 '줄서기'로 해결했지 않나 합니다. 아주 게으른 문제 해결 방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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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즐겨 사용하던 ‘aside’ 용법을 빌려 한마디 하자면, facebook에 파쇼적인 요소가 다분하지 않나 합니다. 페북의 setting이 그렇다는 거죠. 그저 느낌뿐인데, 연구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해요. 작년 ‘이집트 봉기’에 ‘페북혁명’이란 딱지를 붙이고 좋아라할 때, 과연 좋아할 일인지 물음표를 붙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페북’이 이집트 상황이 파쇼로 흘러가도록 돕지 않으면, 최소한 그렇게 되게 보고만 있지 않나 합니다. ‘flashmob'이란 운동양식의 파쇼성도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고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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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휴대폰도 고장이 나서 하루종일 인터넷을 못했어요.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었는데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학출>이라는 책이었어요. 이 책에 따르면 한국에서 학생출신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형성된 계기가 80년 광주입니다. 당시 학생운동지도자가 일단 학교로 돌아가서 점거농성을 하자며 서울역에 모여있던 10만명을 해산시키고 난 뒤 바로 5.17 쿠데타와 5.18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갖고 있는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반성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학생은 지식인을 의미했다고 해요.제가 누굴 비난할 처지는 아니지만, 안타깝습니다. 저는 사실 6월 30일 이전에는 이집트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6월 30일 이후 7월 3일 쿠데타, 7월 8일 학살로 이어지는 최근의 흐름을 보면 낙관적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집트가 무바라크 시대로 돌아갔다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두환의 집권이 박정희 시대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중동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MB를 증오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 전체가 혼란이 올 수가 있습니다. 중동 전문가 중에는 에르도안이 오래 못갈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출을 읽으면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부평의 대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가투를 하는데 그땐 정말 혁명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해방은 금방 올 것 같았다. 그럼 나는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해야지 그러면서 혼자 상상하고 그랬는데.. 이집트도 우리처럼, 필리핀처럼 걸어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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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4월 6일 운동은 스핑크스 광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세번째 광장이라고 합니다.http://youtu.be/ZCmrCQvD9Ow
그들은 라바 학살을 규탄하지만, 라바에는 가지 않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거기 가서 같이 싸우다 죽으라고 하는 건 황당한 일이겠죠. 하지만 이런 행동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어떨까요?
이집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아마 시시가 대통령이 된다면 중동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슬람주의 군사정권이 될 겁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그들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들이 아니라 학살자를 처벌하라는 말입니다. 아마 그들도 자신들이 죽어갈 때는 "시간이 없다, 빨리 행동해"라는 urgent action appeal을 전세계에 발송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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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싸움은 무슬림형제들('무슬림형제단'이 아닌 것 같습니다)이 진 싸움이 아닌가 합니다. 무슬림형제들이 과거 지하운동을 하면서 분명 무장의 문제를 이야기했을텐데, 어떻게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무슬림형제들이 어떻게 변하여 재생할까 궁금합니다. 무슬림형제들 창립자 하산 알 바나의 회고에 따르면 "무슬림형제들"이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일반적인 조직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단, 무슨연합 등이라고 이름짖지 않고 그냥 무슬림형제들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무슬림이면 다 형제가 되는 범이슬람적인 사상일까?) 암튼, 무슬림형제들은 원천적으로 '성전기사단'(pauperes commilitones)과 같은 전투조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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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형제단에 대해서 아는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아랍에서는 Ikhwan이라고 합니다. 아랍에서는 이흐완이라고 읽고 영미권에서는 이콴이라고 읽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흐완은 베두인족으로 구성된 민병대였습니다.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75835
무슬림 형제단의 공식 명칭은 al-Ikhwan al-Muslimun입니다. 사실 그들은 양복을 입은 전사들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도 분파투쟁을 하고 있고 그 속에는 쿠틉노선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20년간 이집트 무슬림 형제들을 연구한 교수가 모르시가 당선되었을 때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실용주의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실용적입니다. 주변국과의 마찰을 피하는 편입니다. 아사드 역시 이스라엘과 충돌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시간이 지나면서 계산을 해보니까 아사드보다 무슬림 형제들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제 모르시가 물러나야할 때라고 결정한 것이 분명합니다.
시시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당신들에게 한 번이라도 뭘 부탁한 적이 있느냐고 묻더니 이번에는 부탁하겠다 폭력과 테러리즘과 싸울 수 있는 권한을 달라. 여기서 폭력과 테러리즘은 무슬림 형제들과 동의어입니다.
이번에 언론은 라바에서 모르시 지지자들이 내무부 보안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내무부 보안군은 무바라크 때부터 악명이 높았고 이집트인들이 아주 싫어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군대를 좋아합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지금 시시는 인기 절정입니다.
이집트 상황은 유동적입니다. 시나이 반도는 원래 이집트에서 가장 억압당해왔던 곳이고 이런 곳에서는 극단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도 모르시를 지지하지만 그들은 연좌농성보다는 무장투쟁을 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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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실 저는 이 싸움이 무슬림 형제단(전 이 표현이 더 편하네요 ^^;이 진 싸움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무슬림 형제단은 보통 정치적 이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최소한 당분간은 정치적 이슬람의 퇴조와 이슬람 무장조직의 부상이라고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 대선을 실시하게 되면 또 무슬림 형제단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인데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학살은 아예 정치권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몰아내기 위한 시도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당연히 이 학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여론도 전혀 동정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 국내 언론도 조용한 편인데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바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다른 곳까지 합하면 지난 주에 130명이 살해당했습니다. 게다가 의사들 증언에 의하면 사망자들은 매우 정밀한 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머리와 가슴. 부상자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도 머리에 총을 맞았을 경우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하나요.이슬람 무장세력은 그들이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하느냐와는 상관없이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장에 군부를 응징하러 옵니다. 그리고 이 학살은 무슬림들에게 분명하게 말해주는거죠. 정당 민주주의를 통한 이슬람 프로젝트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무장세력에게 동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자기들에게는 크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알카에다의 활동무대는 거의 중동 이 지역, 이를테면 카다피나 아사드 같은 불신자 응징 이런 거입니다. 하지만 유럽은 달라요. 유럽에서 알카에다 조직원이 되면 당장 자국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리비아나 시리아 같은 곳으로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잠재적으로 유럽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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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또 흥분하려고 하는데.. 세번째 광장 이건 또 뭐냐구요? 처음에 6월 30일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을 때 외신에서는 세속주의하고 이슬람주의의 갈등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서 뭐라고 했냐면 이집트는 Moment Of Truth 진실의 순간을 맞고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진실의 순간은 2011년이었어요. 그 때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 기도하는걸 보호하고 무슬림들은 교회를 보호했어요. 그 때 그들은 하나라는 일체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지난 1년동안 세속주의 세력은 정말 잘못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입니다. 그들 역시 무능하고 부패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에 능합니다. 이를테면 모르시 지지자들을 테러리스트로 표현해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어요.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왠만한 이집트인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어요. 모르시가 집권하자마자 경찰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파업했어요. 파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태업으로 맞섰어요. 경찰에 범죄 신고하면 인샬라 그러고 뚝 전화 끊고. 그 다음에 6월에 일종의 부르주아 파업이 있었어요. 주유소 사장들. 이것은 중대한 위기였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전력공사같은데서도 파업했어요. 이 모든 것을 열거한다고 해서 모르시가 아옌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집트의 세속주의-자유주의 세력은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4월 6일 운동 이런 사람들은 아무 영향력이 없다가 이럴 때만 이용당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입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정치적인 무뇌아들입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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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스핑스 "제 3의 광장"에 약 100명이 모였다 하네요. (http://www.zenithonline.de/deutsch/politik//artikel/der-dritte-platz-003741/)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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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휴대폰. 열악한 상황임. 지금 제3의 광장은 잘안될거에요. 주목받기 힘든 상황. 둘다 반대한다니. 지금 누가 관심갖겠어요? 심지어 타마루드는 그들이 형제단지지세력이라고 모함중. 말이되요? 엊그저께까지 같이 해놓고. 기자가 제3의 광장에 우연히 지나가던 노점상에게 의견을 묻자 부잣집 애들인것같다고. 옷입은거보면 알지. 이집트에도 대학생연합이 있지만 그들은 무슬림형제단 지지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모르시가 축출되자 성명을 발표했어요. 모르시는 공화국의 대통령 이다! 그러나 외신은 관심없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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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건 모르시 집권 이후 이집트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포린 어페어스라든가 여러가지 외신을 찾아보면 다 나와있어요. 제가 극비문서를 읽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이집트인들인 4월 6일 운동 같은 사람들이 저보다도 이집트 사정을 모를 수 있으며 그러고서도 어떻게 타마루드를 조직했으며 여태 가만있다가 왜 이제 와서 세번째 광장을 조직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몰랐다고 하면 멍청한 거고 알았다고 하면 비열한건데 이제 더 이상 이런 사람들에게 기대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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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각이 겹칩니다. 머리가 아프네요.1. 불편한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무슬림형제들’을 애써 사용하고자 합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 하나인 fraternité가 얼마나 구현되었는지 묻는 질문과 연계해서 무슬림형제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 fraternité를 ‘박애’ 혹은 ‘형제애’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박애’에는 정말 형/누나 동생을 대한다는 절실함이 빠져있고 ‘형제애’에는 일반성이 빠져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fraternité는 ‘애’(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인 것 같아서. 사랑(에로스=타자로 향하는 힘)과 윤리의 문제를 플라톤의 향연에서와 같이 함께 이야기하는 건 제켜놓고.) 무슬림형제들을 살아 움직이는 이념의 구현이 아니었나합니다. 6명의 노동자란 보잘 것 없는 시작이 곧 바로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걸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회운동’(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을 분리하여 사유할 수 있다면)으로 시작한 게 이념의 구현이라는 생각을 더욱 굳혀줍니다.
하마스의 변화에서 무슬림형제들의 변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하마스가 ‘사회운동’[만]하다가 이스라엘의 총칼 앞에 아무것도 못했다고 반성하고 무장정치조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무슬림형제들이 지금 맞서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인가 약간 보여주지 않나 합니다.
2. 이번 싸움은 무슬림형제들이 진 싸움이다.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길 거라고, 혹은 승리로 가는 변증법적인 과정을 운운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피 흘리는 사람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는 없겠지요. 변증법적인 시각이 역겨운 때죠. 처참한 것을 대수롭게 여기고 과감하게 시야를 돌리는 변증법적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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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시리아가 위험한 상황이라고해요. 미국이 개입할수도 있기때문이죠. 아사드가 홈즈를 탈환했다고해요. 홈즈는 반군의 거점. 상황은 아사드에게 유리해지고있어요. 터키 쿠르드족이 알카에다와 싸우고있고 헤즈볼라도 싸우고있고 이스라엘도 국경지대에서 마구 공격. 잘 기억은 나지않지만 리비아에서도 카다피가 벵가지를 탈환했을때 개입했을거에요.이렇게되면 정말 오랜만에 미국과 러시아가 붙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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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어에 "ungeschützt"(보호없이)란 표현이 있는데, '증명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란 의미도 있습니다. 이렇게 떠듭니다.1. 아사드의 지지층이 생각보다 견고. 작년 카타르 재단의 인터넷 설문조사에 의하면 시리아의 55%가 최소한 아사드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BBC는 방법적인 면에서 이 조사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http://www.bbc.co.uk/news/magazine-17155349)
2. 아사드의 전략이 먹힘. 수니지역만을 집중 공격하고, 다른 소수인종들은 보호함으로써 시리아 내전을 아랍화. 사우디 아랍 대 이란 (수니 대 시아).
3. 사우디 아랍의 역내 강권정책
사우디 아랍 이라크전 후 증대한 시아 영향력 제한 및 밀어내기에 관심. 이란-시리아-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시리아에서 아사드 축출이 관건. 미국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짐.
4. 시리아 반군 "오합지졸"
- 핵심세력이 없음. (참세상의 한 기사에서는(http://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71069&page=1&category1=38) 무슬림형제들이 시리아 반군의 핵심세력이라고 하는데 이건 근거가 없는 것 같음. 우선 시리아에서 무슬림형제들은 처음엔 "잘 나갔으나" 대대적인 탄압정책에 씨가 말림 (예: 무슬림형제들에 속하면 무조건 사형하는 볍령 49, 하마 폭격 등, 시리아 무슬림형제들 다 망명, 최근 망명중인 시리아무슬림형제들 지도자 리아드 샤크파가 시리아에서 조직을 재건하겠다고 말함(http://www.ft.com/cms/s/0/00a7865a-ad86-11e2-a2c7-00144feabdc0.html#axzz2ahSxW6CK). 대한민국정부가 공산당의 씨를 말린 것보다 더 무슬림형제들의 씨를 말렸는데 그들이 반군의 핵심세력이라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됨.)
- 지도적 이념이 없음. 처음에 클레임할 수 있었던 당위성까지 상실
4. R2P
- 작동 안 될 거로 예상. 리비아와 달리 러시아와 중국이 거부.
- 미국이 그어논 마지노선 아사드 준수. 화학무기 사용관련 유엔 조사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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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사태가 발생했을때 우리는 정보가 별로 없었어요. 봉기는 농촌에서 발생했어요. 몇년전에 가뭄이 발생했고 농촌은 피폐해졌어요. 하지만 도시에서는 큰 어려움이 닥치지않았어요. 하지만 봉기가 발생한 지역은 수니 거주지역들이었고 종파갈등의 성격도 갖고있었어요. 그리고 서방은 맨처음부터 개입했어요. 이것이 문제였어요. 이 사태가 누구의 승리도 돌아가든 농촌문제를 해결하지못하는 국가는 이런 일을 당할거에요. 중국은 농민을 도시로 이주시키고 멕시코는 인구의 5분의 1을 미국으로 이민보냄.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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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지만 우리는 해외에서 신부를 수입하죠. 가부장제 국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않아요. 우리는 가부장제가 곳곳에서 무너지고있고 그 유제와 싸우고있는중. 가부장제는 체계적으로 남성의 특권을 보호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와 맞지않음. 자본주의-가부장제라는 말은 자본주의도 가부장제도 이해하지 못하는것.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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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은 그 유제와 싸우기위해선 여전히 가부장제라는 말을 동원할것. 새로운 형태의 남성적 지배를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 모르기때문. 일베가 여자들을 비난하는 이유 잘들어봐요. 돈에 환장했다는거야. 외모만 따지는 남자들을 재수없어하는 이치와 똑같음. 그러나 문제는 공격성을 통한 집단적 남성성의 구축. 이것은 이행기라는 징후일뿐.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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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봉기의 사회경제적 원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이야기 되네요,1. (SWP, Muriel Asseburg, www.swp-berlin.org/fileadmin/contents/products/fachpublikationen/APuZ_2013-08_ASS_Syrien.pdf)
0 청년들의 절망, 상당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높은 청년 실업
0 신자유주의적 경제전환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심화
- 공공부문 감소로 사회적 빈부격차 심화
- 특히 농촌지역의 빈곤이 현저하게 증가
- 가뭄과 열악한 사회적 환경 때문에 탈농현상 및 도시 빈민촌으로의 이주 심화
- 지배계급의 자기 호주머니 채우기 부정부패 평배. 항쟁초기, 특히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부분 라이센스 독점화 과정에서 몽땅 챙긴 아사드의 외사촌 라미 마크루프가 분노/저주의 대상이 됨.
2. GIGA (German Institute for Global and Area Studies), André Bankhttp://www.znf.uni-hamburg.de/frieden-und-sicherheit_/Bank_IFSH_Hamburg_Jan_2013_Syrische%20Revolte.pdf)
0 보안기관에 준거한 권위적인 지배,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ts),
0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야당 및 쿠르드족 야당 탄압
0 중간층과 노동자계층의 삶을 더 열악하게 한 경제 자유화(정부지원 및 지출 감소)
0 농촌지역과 도시(다마스쿠스, 알레포)지역 간의 현저한 차이
0 사회의 이슬람화, 특히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이슬람이 정권의 정당화 도구로 사용
0 2006-2010 가뭄, 이농(특히 북동지역에서), 다마스쿠스 및 남부지역에 천막촌 위성도시가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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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이 승리하지못하는 이유는 시리아군의 이탈이 없기때문이에요. 지금까지 십만명이 죽었어요. 반군과 민간인들만 죽은게 아녜요. 시리아 정규군과 민병대도 엄청나게 죽었어요. 이것은 서방의 프락치인 시리아 인권위원회 조사에도 나와있어요. 그들은 모두 알라위에요. 그들은 아사드가 무너지면 자기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있어요. 그들은 자기 가족을 지키기위해서 죽은거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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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군부의 이탈이 어쩡쩡해서 더욱 유혈사태로 발전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이집트의 군부는 이탈이 전혀 없음. 그래서 이집트의 상황은 어쩜내전으로 치닫지 않을 것임. 시리아의 경우 군사 일부가 탈영하여 FSA 결성. 비폭력시위대를 보호한다는 게 취지였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아 사회의 분열이 유혈 내전으로 치닫게 된 중요한 요소가 됨.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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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게 링크를 걸 수가 없어서 갑갑한데 FSA는 페이크일 가능성이 큰거라.. 그게 처음에 만들어진게 터키 정보부 작전인데 군의 이탈자 모두 상징적인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이게 서방의 조작인거라.. 지금 거기 사람없어요. 무기줘도 소용없어요. FSA는 일종의 마스크인거에요. 시리아 반군은 세속주의가 없어요. 전부 지하디스트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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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의 행위주체들 (정체성들과 이익집단)1. 개관
0 시리아는 인종 및 종파의 구성상 극적으로 이질적인 사회, 게다가 농촌과 도시 간의 차이 현저. 이에 따라 정치적인 입장들이 매우 현저하게 다름.
0 결과, 시리아 내전의 행위주체들의 연합전선 부재
- 항쟁세력들의 유동적인 정치적 입장, 국내, 국외파로 분열, 인종 및 종파간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도용, 외세간섭을 거부하는 ‘자주세력’과 외세지원을 요구하는 ‘괴뢰세력’, 40년 독재가 항쟁세력들에게도 체내화되어
- 결과 연합전선 구축을 어렵게 하고 항쟁이 파편화됨
2. ‘아랍의 봄’ 이전의 야권
□ 하페즈 알 아사드 집권
0 정치활동 자유 부재
- 유일정당으로 바트당 존재 (바트당은 사회세력과 상호작용하지 않은 폐쇄 정당)- 노조, 여성조직, 종교조직 등 사회조직은 정부의 조정을 받는 기득권세력의 이익 이행기관으로 전락- 바트당 외 바트당이 이끄는 공산당, 민족주의적인 당 등을 망라한 ‘민족진보전선’ 존재,
□ 바샤르 알 아사드 집권
0 2000-2001 이른바 다마스쿠스의 봄
- 새로 집권한 바샤르 알 아사드 약간의 정치적 자유 허용.
- 새로 정치적 자유공간에서 클럽 및 살롱의 형태로 정치활동 부상 (예컨대 리아드 사이프 포럼, 자말 알 아타지 민족대화 포럼 등)
- 지식인 및 경제인 주도로 정치적 개혁이 토론됨
- 주요요구: 다당제 및 비상상태 해제 (집회 및 언론의 자유, 정치범 석방, 시민의 경제 [자율]권리 보장, 바트당의 특수위상 폐지(이른바 “99인의 선언”)
- 그러나 ‘정치적인 봄’의 움직임은 새로운 탄압국면으로 좌절
0 2005년의 다마스쿠스 선언
- 국제사회에서의 시리아의 입지가 열악하게 되는 국면을 맞아 (레바논 대통령 살해 사주, 레바논에서 철수) 상이한 야권이 (세속주의자, 쿠르드 활동가, 이슬람주의 온건파, 금지되고 런던으로 망명한 무슬림형제들 등) 연합에 합의하고
- 2005.10.16 비상상태 해제, 평등권, 정종분리 국가, 제헌의회 소집 등 민주주의 개혁 요구하는 ‘다마스쿠스 선언’ 채택
3. 현재의 야권 행위주체들
0 금지되어 지하운동을 했던 전통 야권에 현재진행중인 항쟁과 함께 새로 생긴 그룹, 운동, 정당 등 다양한 정체성들이 있음.
0 분쟁의 동기, 출발점, 그리고 아젠다가 다를 뿐만 아니라, 활동자금원천/지원, 외세개입 찬반 등 균열을 야기하는 요소 산재
0 그 외에 국내파와 해외파 간의 차이와 분쟁의 골이 깊음.
□ 시리아 민족위원회(SNC/Syria National Council)
0 2011.8.23 이스탄불에서 창립. 무슬림형제들, 자유주의자, 좌파 등 주로 망명시리아인들 구성된 연합체. 무슬림형제들의 영향력이 큼.
0 아젠다
- 야권의 무장과 국제사회의 무력개입 지지 (2011.12 ‘시민민주주의’로의 이행기시 국제사회의 무력개입을 거부하는 문건에 합의했다가 무슬림형제들 및 해외 활동가들의 압력으로 1일 후에 앞의 입장을 번복하고 해외개입지지로 돌변함)
- 아사드 정권과의 협상 배제
0 발전과정
- 2012.2.24 창립된 이른바 “시리아 친구”그룹에 의해 시리아 인민의 정당한 대표기구로 인정되었으나, 야권 내에서의 지도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음 (특히 미국과 카다르)
- 이후 [이슬람주의자들이 주류라는 비판에 맞서기 위해서] 前시리아 공산당원 Georges Sabra가 의장이 되는 등 조직개편을 했으나
- 집행위원 및 41명으로 구성된 사무처장에 무슬림형제들이 31명 선출되는 등 이슬람주의자의 주도 존립.
0 비판
- 조직개편에도 불구하고 SNC가 다른 시리아 야권과 연합전선을 구축할 능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음.
- 특히 전투현장의 요구와 괴리되어 있어서 시리아자유군과의 조율/조정이 없고
- 외세의 조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항쟁세력의 상이한 입장을 통일할 수 있는 단계적 정치아젠다가 부재하고 나아가 불투명하고 제멋대로의 권위주의적인 지도체제를 고집한다는 많은 시리라인들의 비판의 대상이 됨.
0 대표의 문제
-시리아 인민 전체를 대표한다는 자기상은 허구
-“유명야권인사가 함께 하는 것만 중요시 할뿐 그들이 시리아의 인민들을 진정 대표하는지는에는 관심이 없다. [SNC] 조직원 다수가 30-40년 동안 시리아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고, 시리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나이보다 더 많게 [단지] 해외에서만 생활했다.”(Rafif Jouejati, 시리아 조정위원회 대변인)
□ 민주개혁을 위한 전국조정위원회(NCC/National Coordination Committee )
0 2011.9 다마스쿠스에서 창립된 시리아 내에서 활동하는 야권세력들로만 구성된 연합체 (민족주의자, 좌파성향세력, 사회주의자, 쿠르드족, 그리고 자율주의 활동가 등)
0 아젠다
- 정종분리, 외세개입 반대, 무장혁명 반대
- 시민운동 및 비폭력 항쟁에 준거한 협상해결 지향, 독재에서 민주로 평화적인 이행 지향.
0 지지 및 비판
- SNC와 달리 외교, 자금지원, 언론지원상의 지지 부재
- 온건주의 정책으로 개혁과 혁명 간을 설왕설래한다는 비판을 받음.
- 중산층과 개혁세력의 눈치를 보는 온건한 말하기로 혁명적인 축을 구축하는데 기여하지 못하고 돌변하는 저항운동에 유연하게 발맞추기를 못한다는 비판을 받음.
0 기본입장 수정
- 이런 비판에 2012년 협상해결이 유일한 해결책이란 정책을 포기하고
- 2012.7.2/3 카이로에서 SNC와 다른 야권 그룹들과 아사드 정권 퇴진, 시민보호, 자유시리아군의 지지에 현재 상황의 해결책이 있다는 걸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발표에 참여
0 대표문제
- 이런 정책수정과 참여에도 불구하고 SNC와 마찬가지로 시리아 저항세력의 이익대표기구로 거의 인정되지 않음
- [진정한 대표기구의] 부재를 틈타 다양한 정치조직 및 그룹들이 상위조직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을 보이고
- 그 결과 국제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들의 개입이 촉진됨.
□ 시리아 혁명 및 야권세력을 위한 전국연합(National Coalition for Syrian Revolutionary and Opposition Forces/이하 전국연합)0
0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국제 활동가의 지도아래 2012.11.2 도하에서 결성
- SNC의 무슬림형제들의 영향을 감소하려는 의도아래 다른 그룹들을 영입하면서 과도정부 설립한다는 목적으로 창립.
- 2012.12 국제사회가 시리아의 정당한 대표기구로 인정
0 대표 문제
- 60명으로(22석 SNC, 2석 여성) 구성된 이 조직과 과도정부가 얼마나 시리아를 대표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 존립.
- NCC등 상당수의 야권세력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음.
- “우리는 해외에서 만들어진 어떠한 과도정부도 인정하지 않고, 그런 행위 [자체를] 자신들의 지배체계와 숙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시리아인의 권리에 대한 직접적, 그리고 실질적인 공격으로 간주한다.”(Luay Hussein, 국가재건운동의 한 활동가)
□ 지역 조정위원회(LCC/Local Coordination Committee)
0 주체
- 300개 이상의 LCC 존재
- 거의 모든 도시에 결성되어 있으며, 저항의 조직적 기반이 됨.
- 다양한 사회적, 인종적, 종파적 성향의 청년들이 조직의 기반. 특히 여성들이 매우 활동적으로 참여
0 아젠다
- 무장투쟁이전에는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흐름에 정체성을 두지 않음.
- 그러나 무장투쟁개시 후 일부 해외 지원에 의존하게 되고, 따라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됨.
- 비폭력 저항시 주로 시위 조직을 위해서 결성되었는데, 현재는 식량, 의료공급 등 半정부적 공적 기능역할을 행. 현지에서 필요한 것을 조직/동원.
- 거의 다 웹 사이트를 운영하고 시리아 항쟁을 다큐하고 토론함으로써 시리아의 가장 중요한 “인민주권의 원천”(Heiko Wimmen)이 됨.
□ 이밖에 국내외에 다양한 그룹들이 산재함.
4. 무장활동
□ 자유시리아군(FSA)
0 결성배경
- 초창기 탈영한 군인들로 구성. 점진적으로 시리아 민간인이 동참. 그리고 저조한 수준에서 해외 무장조직원들이 참여.
- 2011년 여름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결성된 후 점차 빨치산 전투조직으로 발전
0 성향
- 조직원들은 아주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가짐
- 경향적으로 온건한 FSA,
□ 이슬람주의적 무장그룹
0 매우 다양함
- 알 누스라-전선, 카탭 아라 알 샴, 리와 알 타위드, 다르 알 움마, 수쿠르 알 샴, 리와 알 누스르 등-[다들 뭐지??]
0 그러나 비교적 서로 잘 연결되어 있고 좋은 장비로 무장됨.
0 시리아인들의 입장
- 아사드의 폭력에 대항하는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시리아인들은 절망가운데 이슬람급진주의 그룹들과,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입장일지라도, 함께 투쟁하는 걸 마다하지 않음.
0 문제점
- 이런 [해외요소는] 안 그래도 극도로 파편화된 시리아 사회를 더욱 요지경으로 몰고 갈 위험을 안고 있음.
- 많은 시리아인들 사이에 해외 이슬람전투조직들에 의해서 시리아의 항쟁이 이슬람주의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
- 그러나 아사드 정권의 폭력에 맞서는 투쟁을 그 어떤 상위조직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외이슬람전투조직들이 그 틈을 그들이 채우고 있는 상황.
- 급진적인 이슬람 부대들은 전투경험 및 능력, 무기, 그리고 빨치산 전에 익숙하고 미국과 다른 서방국가의 묵인아래 걸프국가들의 지원을 받음.
- 아사드 정권과 해외 스폰서에 의해서 시리아 내전이 점점 더 종교전쟁으로 지각됨. 걸프국가 및 터키가 지원하는 수니 대 이란, 헤즈볼라, 하마스 등 시아가 지원하는 알아위 아사들 정권간의 강권정책 분쟁이라는 것.
□ 무장세력 통일화 노력
0 야권의 무장조직을 통일하려는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일사불란한 군사지휘체계 구축 실패.
- 우선 공동 전략이 없음. 그래서 활동조율이 일개 도시를 넘어서지 못함
- 결과 아사드 정권에 의한 전투조직의 고립과 집중폭격/공격이 가능.
0 2012.3 FSA 수장 Riad Asaad와 다른 부대의 군사위원장 Mustafa al-Sheikh과 전투를 조율/조정하여 아사드 정권 축출 후 우려되는 혼란을 막자고 합의.
0 2012.12 군사위원회 결성/ 및 동시에 결성된 전국연합의 부속기구로
- 미국, 사우디 아랍, 카타르 등이 추가 무기 공급과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것임
- 군사위원회를 새로 결성될 전국연합아래 둔다는 것임.
0 그러나 동시에 이슬람주의 전투조직들이 ‘시리아 이슬람 전선’을 결성
- 아사드를 몰아내고, “이슬람을 종교, 생활양식, 그리고 태도/행위의 기준으로 수용”하는 수니 이슬람사회 구축을 목적으로 하여 결서
- 해외의 돈과 거점에 의거한 그룹들의 자기정당성 부여 경향
(Huda Zein의 글 “Identitäten und Interessen der syrischen Oppositionellen" 요약, http://www.bpb.de/apuz/155112/identitaeten-und-interessen-der-syrischen-oppositione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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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2013.2.14 발표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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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 '자주파' 지역위원회(LCC)에 관한 글로는 SWP의 "Losing the Syrian Grassroots" 글 참조.(http://www.swp-berlin.org/fileadmin/contents/products/comments/2013C09_kou.pdf)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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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독일은 이런거할 때가 아녜요. 유럽은 지금 난리났어요. 시리아갔던 자국민이 돌아올까봐 비행기 탑승자 확인하고. 자기들은 테러가 실으면서 남의 나라에서는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고 옹호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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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에른 주 기사연합의 기관지라 할 만한 "Bayern Kurier"의 2013.7.25일 보도에(http://www.swp-berlin.org/fileadmin/contents/products/medienbeitraege/130725_sbg_ueberwachg_dschihadisten_bayernkur.pdf) 따르면 독일인 약 60여 명이 시리아 내전에 참여함. 이들이 돌아오면 독일에서 '향상된' military skill로 테러를 조직할 수 있다는 걱정 팽배. 9.11 독일잔류 테러조직은 독일에 입국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로서 독일사회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는데, 2007년 이른바 "Sauerland 그룹"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젠 상황이 바뀌어 독일에서 자란 이슬람주의자들이 아프간전 등의 참전으로 과격화되고 독일에서 테러를 조직하는 경향. 독일 시리아 난민 선별적으로 입국허용. 주로 대졸 자 등 '문제가 없는' 사람들로 제한.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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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가.. 60명밖에 안갔다니. 한 5천명갔었어야지 정신을 차릴텐데. 국적별로는 영국이 가장 많다는군요. 영국인들은 각오하라!!!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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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슈피겔 온라인에 따르면 시리아로 가는 지하디스트가 증가하는 상황. 현재 약 120으로 추정. 돌아 온 사람도 있음.이들은 주로 독일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나이에 독일로 온 아랍권 사람들. 독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행위의 길'로 들어섰다가 이슬람으로 '새사람'이 된 청/장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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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아랍권내 여야권을 막론하고 비교적 좋은 관계. 독일 외무상 기도 베스터벨레의 이집트 방문이 시사하는 점. 무르시 집권당시 무슬림형제들이 독일 외무부와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고 함.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기도 베스터벨레 일정한 영향력 이집트군부뿐만 아니라 무슬림형제들에게도 '발휘'. 타마로드의 '무르시 = 히틀러'라는 공식을 베스터벨레 엄격하게 배척.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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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시 정권을 '옹호'하는 글들이 주로 독일 경제계 제일 일간 한델스블라트에 실린 걸 미루어 보아 (이걸 과대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독일 경제계는 군부가 장악한 이집트의 경제시스템을 옹호하지 안는 것 같음.시리아내전 '해결'관련 미.러란 지붕아래 제네바 II에 이란의 참여을 지지하지 않나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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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 서구의 잘못이다.독일 정통보수 FAZ 문예란에 오늘 실린 기사을 소개합니다. (우선 일부)
시리아[내전], 서구의 잘못이다
글쓴이: Reinhard Merkel
민주혁명의 대가가 이렇게 커도 되는가? 시리아에서 유럽과 미국이 재앙에 불질했다. 시리아 내전에 어떤 정당성,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서구, 이런 싸잡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서구는 시리아에서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아사드에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지원하는데 엉거주춤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항쟁을 아무런 정당성이 없는 내전으로 치닫게 가능하게 하고 촉진하고, 그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 10만 명 이상이, 수만의 시민이 허구적인 도덕을 빙장한 편들기로 인해서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이 죽음의 춤이 끝날 때까지 사망자는 더욱 불어날 것이다.
[서구의] 이런 전략은 10년 전 “민주적 개입”을 빙자한 이라크 침공의 한 변형이다. 민주정권 확립이란 목적아래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정권교체를 추진하는 것. 이라크에서는 저들이 자기 손을 더럽히면서 그 일을 수행했다. 전쟁사유는, 우리가 알게 되었다시피,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었고 자유자재로 바꿔치기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무기를 사용하건 말건, 억압된 인민을 해방한다는 목적이 침공을 정당화했다.
사악한 놀이유형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권의 축출을 자국 야권에 맡기고 밖에서 무장만 해주는, 그리고 거침없이 말하자면 사주하는, 겉으로 보기엔 온화한 형식의 침공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침공은 가장 사악한 침공의 놀이유형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과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맡겨서가 그러기 보다는, 전쟁의 가장 참담하고, 가장 혐오스러운 형태인 내전에 부채질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개입하는 자들은 자칭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허무맹랑한 역할을 자기 것으로 한다. 이건 세계의 눈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의 문턱을 암시적으로 낮추는 행위다. 이런 것이다. 시리아에서 사람 죽이는 일을 하는 건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억압된 인민을 도울 뿐이다. 이렇게 하여 도덕적인 아우라(aura)를 사취하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것은 이런 일이 별다른 ‘그건 아니다’란 저항 없이 달성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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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내가 보는 한도 내에서, 근본적인 질문은 제기되기는커녕, 답하지도 않았다. 바로 시리아에서의 무장저항의 정당성이다. 억압이 어떤 정도가 되어야 그런 지배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 까놓은 내전으로 이행할 수 있는가? 시리아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과연 상황이 이 문턱 앞에 와 있었던가?
죽음과 고통의 대가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면, 밖에서 봉기에 불질한 것은 [무력을 사용한] 봉기 그 자체보다 더 사악한 것이다. 아사드와 같은 독재자에 대항하는 인민의 정당한 내부저항은 항상 폭력사용허용을 포함한다고 전제하고 이걸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이건 옳지 않다. 여기서 토론의 가치가 있는 것은 잘해봐야 저항하는 사람들과 억압자 및 그의 권력기구와의 관계만이 문제시 된다고 가정했을 때다. 이런 가정아래선 단지 공동의 정당방위(긴급방어)가 문제되고, 이런 정당방위의 정당화는 독재의 유형에 따라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법철학은 폭군살해를 토론했다. 그러나 내전에서 법과 불법의 문제가 단지 분쟁에 참여하는 당사자와 관련해서만 제기되는 문제라는 가정은 진정한 정당화문제에서 빗나가는 것이다. 전면전으로 불질된 폭력은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무관한 [동지]시민(Mitbürger=fellow citizen)들 앞에서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들은 독재자의 편에 서지 않으면서 봉기를 거부할 수 있다. 어쩜 그들은 생명을 걱정해야 하는 처자식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들이 보호해야 하는 생명을 위협하는 봉기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걸 무조건 사악한 것으로 물리쳐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가 있다. 수만의 여성과 아이들이 시리아 내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과연, 무엇이 내전에 앞장 선 자들로 하여금 죽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이와 같은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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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가기 맨발로 보르도에 갔다가 오는 길에 프랑스 혁명의 처참함을 보고 미쳐버린 횔더린이 생각나네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