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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포스트구조주의 수용들과 좌익아카데미 양심의 진정
내가 보기에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입장들의 대중화(Popularisierung)와 아카데미적인 정착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전위(轉位/Verschiebung)가 있었다. 이 전위는 두 번째 이해양식으로 눈을 돌리는 패러다임과 이로 인한 “포스트모던화”로 특징지어진다. [그래서] 유행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움직인다는 것 자체다.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는 건 상관이 없다.”란 슬로건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가운데, 요구들의 역동성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다들 같은-타당성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Everything we have been told is real and unchangeable will be revealed as lies, and in refusing them we will make them change. Into what? No one knows, but that is not important. What is important is the change itself.”(Jun 2011: 247). [사태를 이렇게 보는] 자세에선 구성적인 역동성과 [일시적인] 구체적인 폐쇄 간의 차이로 [따라 잡을 수 없게] 영구화된 [그래서 반복․지속적으로 채워져야 하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간극”이 비판적인 혹은 전복을 꾀하는 행위능력 가능성의 근거가 되지 않고, 오로지 바로 이런 가능성과 일치로만 여겨진다. [결과] 개념적으로 발굴된 간극이 그때마다의/개별적인 실증적-특수한 성격을, 나름대로의 성격을 혹은 해방적인 성격을 갖는지 그 여부를 조사하는 게 포기된다. 특히 포스트-들뢰즈적인 글 다수에서 이런 [그저] 흐름과 움직임을 긍정하는 [경향이] [물고가 터진 듯] 제어되지 않고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위험한 이론-클래스”로 근거지우는 한 예로 이런 말을 한다. “발명하는 힘을 협업 형식으로 [이해하면] 발명은 어디까지나 ‘발명 이전에 서로 대립했던 역량들의 연결’을 이룩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어떤 연결인가 하면] 그로 인해 새로운 흐름들이 개발되는 역량들의 연결, 담론적-사회적 기계들의 일시적인 중첩[이다]”(Lorey et al. 2011: 19)1).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생성됨(Gewordensein)의 재구성으로서의 탈자연화로만 만족해한다. 한 사태가 원리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라는 기준이 제공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이에 대한 비판으로 또한 Saar 2009 참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최종 근거의 거부와 함께 - 최소한 이론적으로 - 모든 기초다지기[=설립/제도화]시도를 포기하고, 어떤 입장을 취하고 [개입의] 간극이 [과연 얼마나 큰지] 재보는 것을 [항상] 동반하는 위험, 즉 [=취한 입장을] 다시 내버려야 하는 (일시적인) 고정화에 따르는 위험을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포스트구조주의 사유를 이런 식으로 이어나가는 일[연구]들은 이론적으로 반-근본주의로의 전환을,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버틀러와 라클라우에게 말할 수 없게 자주 부당하게 전가된 반-근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성한다. 푸코에 기대에 (푸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기댈 수도 있지만) 이런 경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다. “어느 한 진리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 어떤 진리의 놀이와도 완벽하게 다른 놀이를 노느데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진리놀이를 달리 노는데 있다.”(Foucault 1984: 8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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