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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5)

1.3 정치적인 것 사유하기

 

사회적인 것을  [문화의 문제로 돌리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문화주의[화](Kulturalisierung)와 는 좀 빗나가게 몇몇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은 [사회적인 것의] 부분적인 지배체제들로의 응집들에 주목하면서 사회적인 것의 정치적인 차원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들은 우연성폐쇄를 목적하는 제도화된 정치(존재적 영역에 자리한 [=죽은 껍데기인] “정치적인 시스템”)에 정치의 질서를 끊임없는 운동으로 훼방․횡단하고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살아 움직이는]) 뭔가를 새로 세우는 에너지․힘을  대립시킨다. 여기에 좁은 의미에서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정치이론들 외에 (이런 좁은 의미에서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샨탈 무페) 앞에서 이미 언급한 자크 랑시에르뿐만 아니라 클로드 르포르, 알랑 바디우 또는 쟝-뤼크 낭시 등의 이름과 연계되어 있는, 전적으로 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정치철학 맥락에서 진행된 연구들로 보충되어야 한다. 앞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제도화와 폐쇄의 프로세스가 항상 필연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투쟁을 동반하고 [그 결과가] 우연적인바, 최종근거 및 기초의 부재가 정치적인 것이 작동하는 필드/영역을 구성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의 점, 기체(基體)적인 공유물,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된 [절대적인] 가치 등을 차용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가 속해 있는 제도가 번번이 [포기하고 새롭게 고민해야 하는/Aufgabe:포기, 과제] 과제로 등장한다.”(Marchart 2010: 17).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포스트구조주의가 反근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포스트-근본주의적인 바탕색을 갖는다는 점이다. 하나로 [사유되는] 최종근거와 토대의 자리에 포스트구조주의의 비판자들이 개탄하는 “anything goes”가, 혹은 이와 비슷하게 자주 예언된 상대주의적인 허무주의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기초다지기 시도들을 둘러싼 분쟁, 지나가는 안정화 및 제도화, 그리고 [이어서] 불안정화가 들어서는 것이다. “[동일철학적으로 스스로 자명한 근거로서의] 본연의 본질주의적인 보편주의의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생성 배경이 되는 우연적인 근거들(다수)과 그것을 구성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들에 주목하게 하였다.”(Laclau 1994: 2). Andreas Reckwitz는 푸코, 데리다, 그리고 버틀러의 관점을 아우르면서, 방금 이야기된 것을 더욱 날카롭게 표현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세 가지 “방법론적인 훈령들”을 다듬었다. 이에 따르면 포스트구조의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이 되는 훈령들은 “1) 언뜻 보기에 해방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강요하고 규제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2) 언뜻 보기에 필연적이고 대안부재적인 것을 문화적으로 우연한 것으로 보기, 3) 이렇게 문화적으로 확립된 것에서 언뜻 보기에 고정된 것, 폐쇄된 것을 통제 불가능한 것, 문화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지각하기”(Reckwitz 2008: 294) 등이다. 이로써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질적인 이론프로그램은 - 이제 분명해졌을 것인데 - 지배적인 질서와 함께 자칭 진리들 또는 사태(事態)[내재]적 불가피성(Sachzwänge)을 퍼뜨리는 짓을 비판하는 길로 들어서는데 [용이한] 교량(橋梁)들(Anschlüsse)을 제공하고 동시에 균열들과 삐딱들(Abweichungen [= 루크레티우스의 clinamen/미세한 편차, 이탈] 그리고 배제와 타자의 가시화를 위한 장비, 나아가 [궁극적으로] 헤게모니를 지향하지 않는 것(Nicht-Hegenoniale)1)을 위한 장비가 된다는 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핵심적으로 문제화하는 세 가지 것, 즉 진리의 문제화, 구조의 문제화, 그리고 독자/독립적인(souverän) 주체에 대한 긍정의 문제화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결국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의] 바탕에 깔린 반권위주의적인, [배제가 사회의 구성적인 요소인바] (전체 혹은 “大총체”로서의) 사회의 구성적인 불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동기다. [그러나] 일시적인 폐쇄화프로세스들이란 의미로서의 역관계들의 응집들이 이론구조상 이미 고려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그리고 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접근들이 연구실천에서는 (제도화된, 지배의 [한] 형태로 호명된) 거시구조(예컨대 국가, 자본주의적 경제)보다는 (권력으로 두로 점철된) 미시정치들에, 反제도적인 지역운동들에, 그리고 일상생활실천에서의 혁명화에, 나아가 (힘을 실어줌[임파워먼트]과 동시에 억압하는) 주체성의 구성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얼마 전부터 이와 같은 관점이 갖는 비판적인 잠재력이, 소수적인 실존양식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차이 없이 다 자본주의적 기계(Gefüge)의 윤활유가 되었다는 걸 내세우면서, 다 소모되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유행한다. 잘 알려진 사례로는 흑인 동성애자, 장애자 세르비아인, 혹은 결혼한 신부 등 수많은 소수 사례들을 [들러리로 즐비하게] 치장하고 페워웰파티를 벌인다는 비난이 있다 (예컨대 Badiou 2002: 11). Katja Diefenbach는  이런 비판가들에 맞서 “[새로운 역능의 원천을 찾아 가동하게 하는] 자본의 방출역동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가족적, 종교적 가치의 신보수주의적인 고착은 밑을 나도는 수준으로 밖에 주제화되지 않는다.”고 한다(Diefenbach 200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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