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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뭔가 아니다.
재능교육 투쟁을 둘러싼 논쟁에 아는 것이 없어서 끼어 들 수 없지만, 저건 분명 아니다.
딱 두 가지.
하나.
‘우리 사회’는 맥락상 ‘좌파’를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럼 ‘우리 안의 파시즘’은 ‘좌파 안의 파시즘’이 되겠다. ‘좌파파시즘’관련 복잡한 이야기는 잘 모르니까 차치하고.
“우리 사회 안의 파시즘”은 뭔가에 호소한다. 뭐 이런 거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무릎 꿇고 ‘내 죄 입니다’해야 하나?
하나.
‘파시즘’이란 말은 지도와 같은 것이다. 서울 가서 헤매지 않으려면 지도가 있어야 하듯이, 역사적인 사실에 헷갈리지 않으려면 ‘파시즘’이란 말을 지도와 같이 사용해야 한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아이가 와서 “아빠, 파시즘이 뭐야?”라고 물으면, “응, 그건 재능투쟁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야.”하면 될까? 이런 대답이면 아마 그 아이는 역사적으로 영원히 ‘망친 사람’이 될 거다. 물로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응, 그건 20세기 유럽에서 아주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따랐던 아주 나쁜 생각이야. 특히 독일에서 그랬는데 ... ”
갖다 붙일 것이 있고 갖다 붙일 수 없는 것이 있다. 후손을 생각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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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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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파시즘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내부의 적'을 찾아내는건데, 좀 씁쓸하네요. 음모가 판치는 세상이라.. 6월 30일 이집트 시위는 언론에서 3천만명이 거리로 나왔다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라고 선전했는데.. 이집트 출신의 구글 어스 전문가가 계산을 해봤더니 타흐리르 광장에는 50만명밖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네요...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들은 51명이나 죽었다는데 그들의 피는 더 싼가요?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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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관하여 첨언하자면, 유럽이 세상을 정복 -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토화' - 하는데 앞서 한 일은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한 지형그리기였는데... 지금 재능투쟁에서 진행되는 것도 이런 지형그리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파시즘'이란 심급을 동원한 건 파행적인 행보가 아닌가 합니다.소통할 때 '평균적인 의미'에서 현저하게 벗어나게 말을 사용하면 소통이 안되는데... 물론, 말의 '평균적인 의미'가 그 말이 갖는 '평균적인 이미지'라면, 언론 등 이미지 생산수단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지요. 파시즘은 (최소한 독일에서) '아우슈비츠-이미지'와 연계되어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묽게하는데 기여한 사람이 공교롭게도 꼴통보수우파언론(예컨대 스프링어 언론그룹)이 아니라 독일 학생운동 초기, 그니까 1967년 이란 샤의 독일방문에 항의데모하는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의 총살 후 학생운동의 전략을 이야기한 두치케를 두고 '좌익파시즘'('Linksfaschismuns')라고 한 당시 프랑크푸르트 학파 소장학자 하버마스였죠. 우파는 팔장끼고 있다게 먹거리를 찾은 양 학생운동을 싸잡아서 파시즘과 동일시했죠. 하버마스는 나중에 이 표현을 사용한 걸 후회했지만, 물은 이미 엎지러졌고, 아직도 이 표현이 사용되고 있죠.
예, 타흐리르 광장을 누가 어떻게 그리는가도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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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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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댓글을 빙자해서 본문과는 상관없는 얘길 해온 저이지만, 오늘은 본문과는 상관있는 얘길 해보려고 해요. 재능투쟁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주변에서 들은 얘기도 없고 또 제가 관심가질 문제도 아니지만, 님의 글을 보는 순간 참 할 말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에도 이런 일들은 종종 있었던 것 같아요. 현실을 설명하는게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역사적 사건을 비유로 든다든지, 상대방을 무슨 주의자로 딱지를 붙인다든지, 그러면 논쟁이 삼천포로 가요. 지금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파시즘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그토록 상대방이 두려운 존재일까. 전 의문이 듭니다.개인적인 얘기지만 전 제가 체험한 것만을 얘기할 수밖에 없네요. 내부의 적을 찾아내는 일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걸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저도 그걸 경험했어요. 전 그 일을 1년을 해왔는데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다는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주위에서도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서 불신하는 입장과 이해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었고 저도 이해하는 입장이었고 그럼에도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적인 용어로 우릴 공격했을 때 저도 결국엔 그들을 증오했고 욕하고 다니고 사람들한테 네가 뭘 아냐고 소리지르고 별짓 다했지만 그래도 가장 참을 수 없었던 모욕은 운동조직에서 우릴 비난하는거였어요. 참 폭력적이라고 느꼈어요. 물론 제가 할 말은 아니라는건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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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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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좀 더 해도 되나? ^^ 주제넘은 얘기지만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순 있으니까, 시청과 종탑 어느 쪽에 정당성이 있는지는 제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니까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어느 한 쪽은 떠나야겠죠. 재능에 목숨 걸 일은 없잖아요.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니까. 그리고 누가 더 잘하는지는 실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전 그랬어요. 너와 나 누가 더 오래 운동하나 보자. 누가 더 질긴가 보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좋아했던 사람들이었고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치 않았고 하지만 서로 아는 사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도 있어요. 그들이라고 해서 왜 증오심이 없었을까 그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 느끼는 증오심을 너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면 피차 이해 못할 것도 없어요. 하지만 단지 옳고 그름 때문에 남을 짓밟는건 정말 무서워요. 그건 바그다드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고 가는 것과 같아요. 재능을 빙자해서 제 얘기 했어요.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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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짝지가 형님하고, 그니까 제 형수하고, 한참 시댁, 그니까 제 어머님 흉을 보더니 좋아 죽을라해요. 예전에 아직 혼자 살 때 어떤 분이 그랬대요. 젤 재밌는 게 뭔지 아냐고. 시댁에 대사가 있을 때 형님들과, 그니까 그 집 며느리들과 시댁 흉보는 게 젤 재밌다고 했대요. 그 땐 뭔 말인가했는데 이제 안대요...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고. 뭔 책을 한권 읽고 와서 무섭게 비판하는데, 참 힘들었어요. 근데, 가만 두고 보면 저도 상당히 예민했던 것 같아요. 그냥 '며느리들의 흉보기'정도로 넘어갔으면 좋았을텐데... 며느리들이 시댁을 흉본다고 시댁에 등을 돌리자는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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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에도 '며느리 시댁 흉보기'와 같은 뒤풀이 문화가 있을텐데, '재능투쟁'에서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고요.보다 유물론적으로 현재 진행중인 '노동'의 행태 변화가 혹시 '재능투쟁'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제기해 보고 싶네요. 조합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공장 형태의 협업이라면, 그런 형태를 벗어나는 노동에서의 투쟁은 어떤 형태일까라는 질문입니다. 생산수단(공장, 기계 등)에 직접 붙어 있는 직접노동을 상품분석을 통해서 얻은 결과로서의 '추상노동'이 이젠 '지식더미'의 형태로 생산수단에 직접 붙어있지 않고 (비교적) 독립적인/독자적인 존재형태를 갖고 있지 않나합니다. 학원교사가 그런 형태가 아닌가 하고요.
하이데거가 실존 자체를 존재론적인 것으로 만든 것과 유사한 게 아닌가합니다. 철학의 존재론->인식론->의미론으로의 도식화에 공통분모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말하기(존재론/인식론/인식 매체인 언어의 의미론) 인데, 그게 뭐가 됐든 반성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반성은 존재적인 게 아니죠. 하이데거가 실존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만든 건 '반성' 자체가 두다리를 가지고 걸어다니게 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죠. 그래서 움직이는 것 자체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운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운동에 푹빠져 파시즘에 참여하구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도 이런 면이 있구요.
'노동'형태의 변화와 관련해서는 일반지성, 일반노동 등에 대하여 더 숙고해봐야 겠네요.
'노동' 형태의 변함이 (착실히 분석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선 성급하게 진단하고) 사실이라면, 투쟁의 형태도 공장의 협업에 기반한 조합주의를 넘어서 변해야 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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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구조주의와 관련해서 하나 더 첨언하자면, 포스트구조주의가 말하는 '차이'는 하이데거식으로 존재와 존재론 간의 '차이'를 원천적으로 말살(einebnen)한 터전에서 '차이'의 형식만을 존재적인 차원에서 재현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제는, 반성에서 드러나는 존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 간 차이의 핵심적인 계기인 '비판'이 침식된다는데 있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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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미즈넷이라고 있는데 거기 보면 며느리가 시댁 흉보는거 많이 있어요. 읽으면 되게 리얼해요. 근데 읽는 사람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인지 알 수 없죠. 그리고 당연히 상대방 입장에서는 사태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오래전에 기자 한 분에게 사석에서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기자로서 취재를 하거나 기사를 쓸 때 가장 힘든 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이 하는 말이 "저는 제3자라는거죠"였어요. 취재원이 사실을 말하는지 판단하려면 굉장히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취재를 해야 하는데 여건상 힘들 때가 더 많고 이게 사실인지 확신이 없어도 기사는 나와야 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제3자일 뿐이라는 마음가짐은 중요한 것 같아요.
유감스럽게도 한국에 살고 있는 제가 독일에 살고 있는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외국에서 오래 생활했던 어떤 사람의 말이에요. ...만 해도 그렇지 않은데 한국의 운동은 너무 폭력적이라고 했어요. 저는 그 사회에서 생활해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의 정확한 의미가 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어떤 운동조직이 두 번이나 다른 운동에 개입하는 과정을 보면서 느꼈던 건 굉장히 폭력적으로 운동을 한다는 거였어요. 그것은 인터넷에서 흔히 보게되는 폭력과는 좀 다른 종류의 폭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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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신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이 글을 먼저 봤어요. 그리고 나중에 속보게시판에 있는 글을 봤는데 영상을 보진 못했고 그 밑에 강연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구도를 그려놨더라구요.Ⅲ. 재능교육투쟁의 교훈
1. 재능투쟁의 성격 : 노동조합중심 vs. 정치조직중심
2. 이념적 대치 : 조합주의 vs. 국가주의
3. 정당(정치조직)간 대치 : 서울좌파 vs. 비없세 vs. 노혁추
4. 결론 : 좌파투쟁과의 결합
저는 재능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도 못하지만 알면 또 어쩔거냐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기륭이라든가 재능이라든가 이런 곳에서의 싸움은 사실상 노동조합이 중심이었던게 아니라 활동가 중심의 싸움이었어요. 제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게 아니라 소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드려고 하면 노조 사무실에 연락을 해요. 외부에서 도움을 받는거죠. 그러면 이 투쟁의 주체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이 투쟁에 결합했던 모두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구도를 가만 보면 이 투쟁의 진정한 주체인 노동자들과 외부의 정치세력의 개입 이런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저는 의문이에요. 왜냐면 소사업장에서 진정한 주체가 그 사업장 노동자들로 한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거든요.
문제는 왜 이런 구도를 그리는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이 경우에는 굉장히 좀 약해보여요. 누가 봐도 허술한거죠. 재능투쟁에 조합주의라는 것도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게다가 국가주의라니.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구도를 만들어요. 국가에 대항하는 투사들과 국가에 붙어먹는 관변개량시민단체들 이런 식으로. 대개 그 운동과 아무 상관 없던 사람들이 이런 허구적 문제설정을 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응하지 않아요. 지방 장터에 어쩌다 나타나는 약장사들처럼 지금 시끄러운 단계만 지나가면 그들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에 개입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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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속보란에서 프로그램/요약 정리를 봤어요. 강연내용이 유트브에 떠 있네요. 시간나면 들어봐야 겠네요.혹자는 들어보지도 않고 떠든다고 하겠지만, 어떤 걸 이해하려고 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전이해를 투명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생각에서 몇 마디 할께요.
저 앞 프로그램에서 조합주의 vs. 국가주의란 구도가 이해가 안됩니다. 왜 vs. 인지. 제가 아마 '조합주의'를 corporatism으로 이해해서 그럴겁니다. 그리고 이런 조합주의는 국가주의(etatism)의 한 형태이고요. 예컨대 노사정의 짝짝꿍이 잘 맞는 독일과 같이. vs.가 성립안되죠.
'조합주의'를 그냥 '노동조합이 우선되는'이라고 이해하면, 이게 왜 '국가주의하고 vs. 인지 아리달쏭하고요.
'조합주의'를 '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로 읽으면, 이건 국가주의에 vs,하지 않고 '부르주아 사회'에 대립되는데(공산당 선언 참조)...
암튼, 이해하기 힘든 구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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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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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모르는 사람 둘이서 얘기하는데 남들 보기에 한심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네요. 저도 지금 이해가 안 가요. 저는 맹세코 재능에 대해서 한 개도 얘기 들은게 없어요. 근데 그래도 이상하단 말이죠. 학습지 교사는 굉장히 열악해요. 맨날 사람 뽑는데는 이유가 있는거에요. 제가 지금까지 일했던 사업장 중 세 군데가 대자본에서 하는거에요. 그래도 조직화하기 굉장히 힘들거에요. 왜냐하면 시급이 일정하게 딱 맞춰져 있기 때문에 어딜 가든 처우는 비슷해요. 다만 그 사업장이 일하기 편한 곳이냐 아니냐 이 차이인데 다들 힘들어서 석달을 못버텨요. 그러니까 오래 다니면 잘해줘요. 그런데 이런 사업장일수록 노동자들이 애착이 없어요. 쉽게 포기하고 그만두고 또 비슷한 곳에 가고 계속 이런 식이에요. 재능도 아마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해요. 활동가들이 거기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는게 제 생각이에요. 그러면 만약에 활동가 다섯명이 조직화를 목적으로 회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다섯명을 조직해서 열명이 싸우다가 해고당했다. 복직투쟁을 했는데 조직한 다섯명은 생활고로 떠나가고 결국 애초에 다섯명만 계속 싸웠다. 이거는 사실 이 사업장이 문제가 많다는 걸 사회적으로 알리는 효과만 있을 뿐 그 사업장 노동자들과는 무관한 싸움일 수도 있거든요. 이런 형태의 싸움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건 애초에 이런 식의 투쟁 자체가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이런 투쟁도 안 해본, 또는 못 해본 사람들이 나서서 비난하고 자기들은 한 게 없으니 패배가 뭔지도 모르죠.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사람들은 한심해요. 그러면 싸우는 자들도 맥빠져요. 한심하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싸우자니 한심하고. 그 사람들은 재능과 아무 상관없어요. 엊그제까지 아마 상관 없었을거에요. 하지만 이건 한심한 사람들 얘기고 한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건 정말 무서워요. 왜냐면 지지자들이 많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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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아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네요. 님과 쿵더쿵 수다나 좀 떨까?단기간 여기저기 공장노동에서 (공장노동자가 아니었음. 이 차이는 중요함) 얻은 교훈이랄까, 뭐 그런 게 있다면 ‘이론’하는 사람이, 즉 뭔가를 관조하는 사람이 취해야 할 최소한의 도덕이랄까 뭐 그런 걸 얻었는데,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자본의 채찍아래 공장노동자들이 손에 익힌 엄밀성.정확성을 따라가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걸 지향해야 한다는 거 뭐 그런 거죠. 뭔가 좀 거창 하네.
자기인식과 관련해서는 내가 잘 해봐야 ‘시댁 며느리’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거. 노동운동 ‘시댁’에도 시댁에 이런저런 사람이 있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집 ‘며느리’라고 생각하고 시댁 흉보기 좀 하려고요.
노동운동하는 시댁 양반들이 참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폭력적이고 막무가내고. 자본론을 읽었다 하는데, 녹이 퇵퇵 슨 식칼로 수술을 한다고 덤벼들지 않나, 여기다 한술 더 떠서 우리가 신석기도 아니고 구석기시대에 살고 있는 양, 돌 하나를 탁 때려 갈지도 않고 그냥 그걸로 뭔가를 도려낸다고 덤벼들면 ... 무서워요. “이게 자연본연의 모습이야”라고 자랑삼지를 않나. 그런가 하면 자본론의 섬세한 도구들은 가지고 있는데, 수술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솜씨로 마구잡이 칼질을 하지를 않나. 참 대단한 양반들이 많아요. 젤 힘들게 하는 사람은 시어머님인데, 본인도 며느리로 들어 온게 분명한데 텃주대감 행세를 하면... 나도 나중에 그렇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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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 떠오르네요. 아주 부분적인 관련만 있고, 논거있는 분석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가설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화'로 인한 계급관계의 변화를 사회성격의 차원으로 끌어 올려 개념화한 것은 현실의 변화에 기반한 정확한 판단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변화를 해석할 지적 자원을 모종의 '보편적 좌익'에서 찾았다는 것은 매우 '비주체적'이다. 그것이 구체적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식'이 아니거나, 정치/운동에 종속된 이론이다. 그러한 이론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현실로부터 벗어난 이상주의적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이 아니면 아주 급진주의적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대중을 내려다 볼 수 밖에 없다. 이 모두는 지식인의 자기 만족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그후 출현한 '주체사상'이 '비주체적'이라는 비판은 사실 '북조선'에 대한 보편주의적 판단이 선행된 이후에 제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진정한 '냉전'의 후과이다. 즉, 먼저 지식적 차원에서의 '보편주의화'가 진행된 후에, '북조선'이라는 '외부'로부터 수용된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것은 비주체적이라고 제기된 것이다. 이론적 '비주체'가 그 보편적 기준으로 실천적 '주체'의 역사적 부분('북조선')의 사상적 실천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80년대 상황을 만들어낸 '냉전'의 단절을 복원하는 노력 없이,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나아가 '북조선'을 역사적으로 다시 내재화하는 작업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관계의 변화에 주목했던 수많은 학생출신 노동자들이나 그 운동가들은 '정치'적으로는 옳았으나, '이론' 내지 '지식'적으로는 옳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 운동가들은 자기 몫을 했지만, 그에 사실상 종속되었던 '이론가'들은 사실 지식인의 몫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식민/내전/냉전의 과정 속에서 조선반도가 겪어온 역사의 무게를 충분히 받아 안고 차분히 미래를 만들어갈 선배들을 갖지 못한 젊은 청년 지식인들의 선천적 제약을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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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려면 거처가 있어야 하는데 지식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유럽’의 지식인은 상황이 이리변하고 저리변해도 어딘가에 꼭 빌붙어 빌어먹지 않아도 되는 그들만의 집을 세우는데 성공했다고 할까요. 바로 'ou topos'란 집이죠. 굳이 번역하자면 ‘집이 아닌 집’.근데 20세기 한반도 지식인들은 아무런 집이 없었다는 게, 이들에겐 어떤 집도, ‘집이 아닌 집’도 허용되지 않았다는데서 그들의 비극이 시작한 게 아닌가 하고요.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던 송두율교수의 ‘비극’도 여기에 있지 않나 하고요. 그 모든 지식인들을 ‘한반도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자체에 비극이 스며있고요.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을 20세기 한반도 지식인들의 ‘집이 아닌 집’도 없음을 그리는 소설로 이해하고 몇 군데 그냥 나열합니다.
“주석으로 이상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 하지만 양파를 까듯이 아무리 파헤쳐봐도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같은 책, 2009, 40쪽)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제 식민지 조선 역시 미쳐 날뛰는 군국주의의 거센 물결에 타의적으로 합류하지 않으면 안 됐다. (...) 임화의 말을 빌리자면 ‘재래에 통용되어오던 현실이해의 방법이나 행위의 기준, 내지는 공상(미래에 대한)의 구도가 일체로 통용이 정지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로써 역사는 종말을 맞이했다.”(같은 책, 69쪽)
“그리고 그는 그해 9월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 아직까지는 신진이었기 때문에 친일 행각을 벌일 겨를이 없었고 친일 행각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좌익단체에 가입했고 좌익단체에 가입한 전력 때문에 이승만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고 이승만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에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다. 이 연쇄고리의 어디에도 그가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친일경력자는 한 명도 처형하지 못한 남한 정권은 공사주의자와 그 부역자만은 단호하게 처단했다. 해방 뒤 인민공화국 문교부장을 역임한 국문학자 김태준은 최후 법정 진술에서 ‘지금 조선에는 고전을 수집, 정리하고 고증하는 것이 중대한 일이다. 앞으로 용인된다면 상아탑에서 그런 일을 하면서 여생을 살겠다’고 말했으나 한 달 뒤 처형됐다. (...) 한편 북으로 간 월북예술다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71 쪽 이하)
이들 모두가 “좀 흐르다 사라지는 구름처럼 별 뜻 없는 소문”(71쪽)이 되었다는 김연수의 진단. 김태준의 진술에 눈시울이 붉어질 뿐.
예술인생님의 글에서 20세기 한반도 지식인들이 살았던, ‘집이 아닌 집’도 아닌 집을 그리려는 노력을 엿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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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려면 거처가 있어야하는데 일몽이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이 블로그 같이 써도 된다고 분명히 말했죠? 님은 윗칸 난 아랫칸.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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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실수 닉이 잘못되었어요. 휴대폰이라. 컴퓨터 모니터 꺼짐..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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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에 이런 구절이 있네요.철학이 예술의 집에서 논의되는 구도가 재밌고요. 이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장 아가톤이 이리 말하네요. 좀 자유롭게 번역합니다.
“제가 드시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알아서 드십시오. 초대해놓고 이래라저래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 의해서 이 집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고, 서로가 서로를 주인삼아 손님 대접했으면 합니다.”
당연히 일몽님이 윗칸, 난 아랫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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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사해요. 확실히 페이스북에서 블로그로 돌아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 은근한 지속성 속에서 계발적인 아이디어들이 공유되는 것 같습니다. 응원도 되구요.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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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꼭 만드세야 해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