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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18
    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1)(2)
    ou_topia

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1)

2012년 Prokla 2호에 실린 질케 판 다이크(Silke van Dyk)의 논문 "Poststrukturalismus. Gesellschaft. Kritik - Über Potenziale, Probleme und Perspektiven"을 번역하여 올린다.

'Prokla'는 '계급투쟁의 문제들'(Probleme des Klassenkampfes')의 두자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71년 창간되었다.

 

원문은 여기

 

[번역]

 

 

포스트구조주의. 사회. 비판

 

잠재력들, 문제들, 그리고 관점들에 관하여

 

최근 위기들의 뒤를 이어 비판[이론]을 강조하는 새로운 바람이 거의 폭풍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다. 독일 일간지들의 문예란은 금융시장위기의 전모를 다시 한 번 짚어가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급진적인 말하기를 동원한 자본주의 비판을 그들이 당면한 [과제]로 발견한 모습이다. 점거활동가들은, 보통의 경우 운동을 꺼리는 (또 앞으로도 그럴) 시민들의 [이상적인] 다른 자아와 초자아가 되었다. 스테판 에쎌의 얇은 소책자 <분노하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서점의 계산대 바로 옆에 놓여 있다. 동시에 잘 나가는 과목들의 주변으로 밀려나갔던 비판(사회)과학자들은, 그들의 집단따돌림표징으로 보였던 것이 이제 중심부에서 (비록 새로운 징후아래 그렇다 할지라도) 입맛을 돋우는 식거리가 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8년 가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후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비판하는 일이 이제 다시 해도 되는 일이 되었다. 이런 배경아래 마르크스적으로 다듬어진 분석들에게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의 영향력이 꼭 더해졌다곤 할 순 없지만, 뜻밖에 새로운 반향공간이 열린 반면, 지난 몇 년 동안 대유행(hype)하고 대학 안팎의 좌파가 이론적으로 애지중지했던 아이들은 한방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과 문화연구들의1) 중심에 놓여 있는 주체, 진리, 그리고 大질서의 문제화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미시정치들, 복잡한 역관계들, 그리고 해석을 둘러싼 투쟁들을 선호하는 일이 (새로 등장하는) 여러 사회비판가들에 사이에서는 대위기에 직면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케케묵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퀴어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들이 일궈낸 배척된 존재양식들의 가시화 등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비판의 영역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다시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하는 시대가 도래되었다는 목소리에 눌려 왜소한 놀이터로 퇴색되었다2).

 

2011년 12월 베를린에 있는 ‘세계 문화의 집’에서 저명한 지식인들 한 무리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유럽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모였을 때, 그들이 [이해하는] 세상은 마르크스 절망했을 만큼 단순했다. 이 점에서는 푸코도 아마 예외적으로 마르크스와 통했을 것이다. 이 행사를 창안했던 사회심리학자 하랄드 벨쩌(Harald Welzer)는 15살 땐 세상이 자본의 과두정치로 지배된다고 믿었다가 나이가 들어선 다년간 푸코와 다른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을 읽고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 않고 아주 정말 복잡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내가 15살 때 생각했던 것과 똑 같다.”고. 이렇게 벨쩌와 같이 그다지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청년기의 냄비근성에 못 이겨 참수한 마르크스를 [참수된 모습으로=정치경제학비판 이전의 마르크스로 제한하여] 다시 꺼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위기들을 직면한 상황에서,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통적인”사회학이 다시 돌아올 시간이 도래했다고 자신한다. 뭐가 진리이고. 뭐가 옳은지 아직 헷갈리지 않았던 문화적, 그리고 담론적 전환 이전의 평온했던 시대로 시간의 수레바퀴를 30년 뒤돌리는 가운데, 위기에 알맞은 사회학의 과제가 뭔지 새롭게 측정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하인쯔 부데(Heinz Bude)는 “불평등, 지배,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Bude 2011: 13)3) “사회 분열에 관한 진리, 인간들의 억압, 그리고 공공청중[을 모델링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그들에게 가해지는] 응징”(같은 곳)을 말하는 사회학을 지지하는 편에 서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회학(들)의 의미상실을 [진단하고]․확언하였다. 이렇게 전통적인 두루마리를 걸친 새로운 사회학의 과제는 복잡한 역관계들과 지식질서들을 [직면하지 않고] 문화[차이]의 문제로 돌려 분석하는 쪽으로 빠져나가는 대신에 “사태 자체로” (같은 곳: 14) 돌아가는데 있다고 한다. 중단하라,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영역이라고 문화에 반하는 짓 그만둬라. 중단하라, 지역적인 전술들을 선호하는 짓 그만둬라. 사회로 귀환하여 사회를 분석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라. 이것은 부데만의  단언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의 분석력과 작용범위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비판 잠재력에 관해서도 구구절절 표현된 불편한 심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패러다임을 비판과 진리, 불평등과 지배, 그리고 사회를 “대전체”로 분석하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질문들과 대결시키는데 있다. 나는 [포스트구조주의를] 비판하는 근거 있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반듯이 곧바로 이론역사의 수레바퀴를 몇 십 년 뒤로 돌려야 하는 것과 동등한 의미가 아니라, 그러지 않고도 그런 관점들을 흘리지 않고 어떻게 포착하고 가공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나의 테제는 포스트구조주의가 현재 안고 있는 사회이론적인 면과 이에 따른 사회비판적인 면에서의 부족함은 [포스트구조주의] 패러다임의 사유유형 자체에 의해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포스트구조주의가 대학[과 대학물을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나 떠드는 속물이 되는 과정에서 관찰된 포스트구조주의 사유의 부분적인 “자기파괴”와 탈정치화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4)

 

 

1) 1950년대 말 대영제국에서 신좌파(New Left)란 정치적이고 문화비판적인 운동의 맥락에서 생성된 [다층적인=그래서 study가 아니라 studies] 문화연구들(Cultural Studies)은 초기 경제적 환원주의와 선을 긋고 안토니오 그람시와 루이 알튀세르와 연계하여 사회 생산에서 독자적인 영역이 되는 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문화연구들은 점점 더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고 결과 특히 창조적이고 저항적인 행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하 문화연구들은 포스트구조주의 패러다임 영항아래의 것으로서 파악된 것이다.


2) 2000년대 중반에 이미 Terry Eagleton은 이렇게 논박했다: “In some cultural circles, the politics of masturbation exert far more fascination than the politics of the Middle east. Socialism has lost out to sado-masochism.” (Eagleton 2004: 3)


3) 이 부분에서 부데가 하필이면 [자유주의자인] 랄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와 에르빈 쇼이히(Erwin K. Scheuch)를 보증인으로 불러 세우는 것은 [코멘트하지 않고] 지나가겠다.


4) 이런 발전에 대한 둘로 나뉜 심기불편과 관련해서 스테파니 그래페(Stefanie Graefe)와의 시사하는 바가 많은(instruktiv) 대화에 감사한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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