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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4
    정신현상학 서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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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4/20
    정신현상학 서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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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4/15
    정신현상학 서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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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4/14
    정신현상학 서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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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0/04/12
    정신현상학 서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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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0/04/12
    정신현상학 서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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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4/10
    정신현상학 서론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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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4/09
    정신현상학 서론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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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4/08
    정신현상학 서론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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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4/07
    정신현상학 서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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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5

(§5) 이렇게 진리가 현존하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의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진리의 학문적 체계만[1] 있을 뿐이다. 내가[2] 목표로 세우고 달려나가는 것은 철학이 바로 이런 학문의 형태에 가까워지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기여하는 것이다[3]. 즉 철학이 겉옷으로 두르고 있는 <지에 대한 사랑>[4]이라는 이름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여 실재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5] 지로 존재하게 하는데 있다. 지가 학문이라는 내적필연성은 지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 내적필연성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으로는 오직 철학[이 해야 하는 일] 그 자체를 서술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없다. 반면, 각 시대의 철학들간의 관계에서는 외적필연성이 작용하는데, 이때 해당 철학자의 우연성과 동기를 사상하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면 외적필연성은 내적필연성과 똑같은 것, 즉 각 시대가 [내적 필연성으로 완성된] 철학[체계] 계기들의 현존형태에[6] 대한 표상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7] 이렇기 때문에 철학이 학문으로 뛰어 올라가려고 하는 발돋움과 욕구가 이 시대에 들어와 만연하고 또 그럴 찰나에 와있다는 점을[8]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철학을 학문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시도를 참으로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런 정당화가 우리 목적의 필연성을 제시하고, 동시에 그 목적을 틀림없이 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원문 . 시스템은 귀가 닳도록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만 우선 <순수이성비판> A832/B860 시작부분에서 칸트가 시스템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고 넘어가자. 여기서 칸트는 시스템을 건축술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단지 인식작용 결과물의 집합에 불과한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 학문의 방법이고, 하나의 [정부와 같이 규범/규제적 역할을 하는] 이념아래 이리저리 갈라지는 지식의 통일(Einheit der mannigfaltigen Kenntnisse unter einer Idee)이라고 한다. 이 이념은 전체의 형식에 관한 이성개념(der Vernunftbegriff von der Form eines Ganzen)으로서 그 이성개념을 통해서 이러 저리 갈라지는 것들의 범위(der Umfang des Mannigfaltigen)각 부분이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 갖는 자리(die Stelle der Teile unter einander)가 선험적으로 규정된다. 이성개념을 통해서 범위가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뭔가를 추가할 수 없고(keine zufällige Hinzusetzung), 완전성에 있어서도 완전성이 애매모호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규정된 한계를 갖는 양으로 나타나고, 또 이성개념을 통해서 부분이 갖는 자리가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은 알려져 있는데 한 부분이 빠져있으면 뭔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다. 그래서 전체는 신체가 마디마디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마디마디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articulatio)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이 아니다(coacervatio). 그래서 전체는 내적 출산(per intussusceptionem)을 통해서 성장하지 외적 추가(per appositum)를 통해서 성장하지 않는다.

[2] 이렇게 헤겔이 스스로 등장하는 것을 보기 힘든 데, 그걸 깨고 여기서 <>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설정한 목적을 끝내 이루겠다는 혈서와 같은 다짐이 엿보인다. 사실 미치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었고. 이 대목을 바울 사도가 필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기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3.12)라고 한 것과 함께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3] 겸손해 보이지만 헤겔이 자기가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스며있다.

[4] 원문 . 의 원어적 의미는 <지에 대한 사랑>이다. 지를 갈망하는 것뿐이지 지에 다다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로스 신을 찬양하는 대회인 플라톤의 <연석술자리>(Symposion) (말이 연석이지 나중엔 사실 난장판이 된 술자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앞 찬양자들과는 달리 에로스 신이 가난의 신(Penia)과 길잡이 신(Poros)의 아들로 지의 경지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철학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한다.

[5] 원문 . 머리 아픈 개념이다. 헤르더(Herder) (Macht) Wirklichkeit und Wirksamkeit(실재적인 영향)라고 하는데, 역자는 여기에 근거하고 철학이 동시대 상황, 특히 정치적인 상황과의 관계에서 어떤 Wirklichkeit를 갖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6] 원문

[7] 원문 헤겔의 내적필연성을 칸트가 이야기 하는 모든 주관적 철학을 평가하는데 사용될 법한 원형과 함께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순이성비판, B866이하 참조).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철학의 학교개념(Schulbegriff)세계개념(Weltbegriff)을 구분한다. 철학의 학교개념은 인식의 논리적인 완전성만 추구하고 목적하는 반면 세계개념모든 인식을 인간이성의 본질적인 목적과 관계하여 탐구하는 학문 (die  Wissenschaft von der Beziehung aller Erkenntnis auf die wesentlichen Zwecke der menschlichen Vernunft (teleologia rationis humanae)이라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이성을 갖고 노는 사람이(Vernunftkünstler) 아니라 인간이성에 고삐를 채워 그가 할일 을 하게 만드는 인간이성의 입법자(Gesetzgeber der menschlichen Vernunft)라고 한다.   

[8] 원문 . 누구의 몫이라는 의미도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하고 안하고는 너에게 달려있다/너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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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4

(§4) 일어나서 먹고 자고 이러기를 반복하는 삶의[1] 모습은 마치 동식물이 자기속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묶여 사는[2] 그런 모습과 같은데[3] 이런 자연[시간]의 흐름 속에 가둬진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4] [한 개인이] 교양을 쌓아나가는 첫 디딤은[5] 언제나 보편적인 원칙과 관점을 사용하는 능력을[6] 훈련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7]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무튼 [보편적 원칙과 관점이 드리우는 빛 속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사상의 수준으로 [8], 즉 대상에 대한 사유행위의 결과로서 사유행위 안에 내재하는 사상의 수준으로 뛰어 올라가야 하고 이에 못지않게 근거를 제시하여 그런 보편적 원칙과 관점에 대한 지식을 뒷받침하거나 논박하고, 구체적이고 넘쳐 나는 대상의 내용을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고[9] , 그리고 이렇게 사유된 것들을 따로따로 잘 정리함으로써 대상에 통달하여 진지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양의 초기 단계는[10]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이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고  성장하는 소년이 철이 들어 어른이 되면 교양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충만한 삶을 향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회생활에[11] 자리를 비켜주게 된다. 이런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인은 사태를 몸소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세상살이를 하는 가운데 지식과 판단능력에 개념이 갖는 진지한 운동이 일어나 [12] 사태의 심층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이 추가된다면, 이런 것은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사는, 마치 마르틴 루터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탁상담화에 잘 어울리는 지식과 판단능력이 될 것이다.[13]



[1] 원문

[2] 원문 . <덜 떨어진 놈>이란 문구에서 <덜 떨어진>이 갖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3] 서론 §8 내용을 여기에 삼입함

[4] 원문 우선 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양자를 시간의 진행에 따라 나열한 것인지 아니면 앞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역자는 우선 <교양> <무의식적인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의 본래 의미가 <붙들어 쥐어 어떤 일에 착수하다>라는 점에서 은 교양은 어떤 기회를 포착하여 시작된다는 의미가 스며있다. 덧붙이자면, 왜 우리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먹고 살다가 죽는 그런 반복에서 헤어나와 교양을 쌓는가라는 질문에 인간에게는 이미 그런 기회가 주어진 상태에서, 즉 교양을 쌓아갈 수 있는 학교, 선생 등 교육제도가 있고, 학교를 보내지 않으면 처벌을 주는 법규 등 제도(Institution) 안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이 갖는 의미에서 유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해석의 연장선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동식물상태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사회적인 인간으로 볼 때 이미 그런 교양 안에서, 즉 제도 안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겠다. 이것이 <문화>를 인간의 제2 <자연>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는 것 같다.

[5] 원문. 개념은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이다. <교양>이전의 상태에서 <교양>이 시작되는 상황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직관은 아마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역자의 경우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는 날 이후의 일부터, 그것도 학교정문을 딱 들어서고 난 이후에 일어난 사건에만 자아의식이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전에 일어났던 일,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문에 들어서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자아가 섞인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 일들은 단지 꿈속에서나 종종 나타나는데 햇빛, 따스함, 소리 등 아주 원초적인 감각의 대상으로만 되살아 날 뿐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로 만든 학교정문, 그리고 운동장으로 가는 길 양쪽에 일렬로 심겨진 키 높은 포플라나무 등이 주는 위엄이 산과 들에서 그저 뛰놀기만 한 어린이의 뇌와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겨 둔 모양이다. 과 그 시작을 개념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우선 이렇게 직관에 기대어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6] 원문 ätze und Gesichtspunkte>. 여기서 소유격은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카테고리와 같은 것을 먼저 습득하는 것이라고 수가 있겠다. 아이들이 말을 시작하면 우리는 <이사람 누구야> <이건 무엇이야> <이건 무슨 색이야> 등 카테고리를 습득하는 연습을 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이 사과는 둥글다>라는 사상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발전한다. 그래서 여기서 Kenntnisse <지식>보다 <습득>으로 번역해야겠다. 대장장이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날이 쉽게 문드러지지 않는 낫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지식은 에 가깝다. <몸에 베인 기술/능력>이라고 하자. 임석진 교수는 이것을 <지식 획득> <훈련>으로 번역하고 있다. (정신현상학 1, 38) 

[7] 원문 .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지목했다. 

[8] 원문 . 사실 무슨 말인지 어렵다. 살펴보자. 로서의 <사상>은 오성행위를 이야기하는데 데가르트는 <사상>을 사유행위 일반으로 확장한다 (cogitatio interdum pro actione ... sumitur/사유는 어쩔 때는  사유행위 대신 쓰여진다). <사상>은 또한 , 즉 영미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과 같은 것으로서 사유의 내재적 결과를 의미하고 문장으로 표현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상>은 사유된 것으로서 사유 안에 내재하는 와 같은 것이 된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3, 53쪽 참조.) 아무튼 여기서 사용되는 소유격을 동시에 주격적 소유격과 [사상에 내재하는 사태]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사태에 대한 사상] 이해해야만 하겠다.

[9] 원문 . 무슨 말인지 또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다. Tugenthat (etwas von etwas)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하이데거 식으로 etwas als etwas, 즉 존재론적인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로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형이상학을 가서 다시 한번 봐야겠다. 보다 정확해지면 위에서 지껄인 것들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이겠다.

[10] 원문 . 교양은 한번의 시작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11] 원문 üllten Lebens>. <철이 들어 ... 사회생활로>로 옮겨 보았다.

[12] 원문 . 또 소유격이 문제다. <개념>이 갖는 <진지>인지 아니면  <개념>에 대한 <진지>, <개념>을 획득하려는 <진지>인지 뭐가 뭔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뭔가 <개념>이 갖는 <진지>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럼 <개념>이 갖는 <진지>란 뭐란 말인가. 우선 주관적인 오성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시작하고, 뭔가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운동이 진짜 그러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진지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자. 이 문제를 또 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3] 헤겔은 이런 지식을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를 번역문에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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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

(§3) 이와 같이 판가름에 용이한 설명을 요구하고 또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이젠 잡화상에서나 볼 수 있는 동전으로 쉽게 사고팔기하는 것이 되었는데[1] 이런 것이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지금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런 자세는 철학 저술의 숭고한 내면이[2] 목적과 결론이 아니면 어디에서 더 밝혀질 수 있으며, 또 동시대가 같은 영역에서 산출한 것과의 차이가 아니면 어떻게 그 목적과 결론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그들은 자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인식의 출발점 그 이상의 것으로, 즉 현실을 안고 거기에 몰두하여 싸우는 실재적인 인식으로[3] 간주된다면 이것은 사실 진정해야 할 일은 옆으로 비껴나가면서 이와 같은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 착안한 잔꾀라고 해야만 할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면 겉으론[4] 마치 사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열정과[5] 사태 자체와 씨름 하는 척하는 노력은 [6] 보란 듯이 내놓지만 막상 그런 열정과 노력은 멀리하고 실지로 면해보려는 짓이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철학이 안고 해야 하는 일은[7] 그가 붙들어 안은 사태의 목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전개과정을[8] 통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속속들이 다룸으로서 완성되고, 또한 결론이 아니라 결론과 그의 생성과정을 합쳐놓은 것이 참다운[9]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목적 그 자체는, 즉 뭔가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상(捨象)되어 있는 한[10] 아무런 생명이 없는 것이고, 경향이란 것은 현실에 발 돋음 하지 않는 한낱 요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앙상한 결론이란 경향이 떠나버린 요동 없는 시체일 뿐이다. — 차이를[11]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은 시체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데[12] 차이는 사태의 외피일[13] 뿐이다. 차이는 사태가 끝난 곳에서 나타난다. 달리 표현하면 차이가 아닌 것이 사태다. 그래서 이런저런 철학체계의 목적과 결론, 차이와 판정을 빌미로[14] 한 이와 같은 노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쩜 굉장히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행위는 사태를 붙들고 고심하기 보다는 사태는 아예[15] 뒤로 제쳐 놓거나 그 위에 붕 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지는 사태 안에 머물면서[16] 사태에 푹 빠져 들어가 자신을 망각하기보다는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계속해서[17] 남의 것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자기 것보다 좀 나은 다른 무언가가[18] 있으면 움켜쥐려고 팔을 뻗기 일쑤다[19]. 그래서 이러 지는 사태와 함께 하고 거기에 몰입하기 보다는 자가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아집일 뿐이다. 아무튼[20], 내용이 충실하고 건실한 것을 평가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고,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평가와 파악을 통일하는 서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 본문에 등장하는 , , 그리고 이란 낱말이 역자에게 잡화상주인이 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2] 원문 . 낭만주의적인 내면을 엄청 까 내리는 말투다. 

[3] 원문 <현실을 안고 실재적인 인식>이라고 옮겨 보았다. 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숙고의 대상이다. 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잠깐 언급하였다.

[4] 원문

[5] 원문 이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미하엘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의 철학을 다 읽어봐야 할 것이다. 우선 중세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사를 놓고 일대일 대결에 임하는 그런 정신자세라고 하고 넘어가자. 그냥 <진지한>이라고 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정신현상학 서설 §4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6] 원문 [Bemühen um die Sache]. 이란 전치사가 갖는 <둘러싸다>라는 의미에 주목했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영향을 받은 번역이기도 하다.

[7] 원문 . 여기서부터 철학이 해야 하는 일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 같다. 즉 철학이 하는 서술운동(Darstellung)이 사물자체의 운동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는 것 같다. 이 착안되는 대목이다.

[8] 원문 ührung>

[9] 원문 . 번역하기 힘들다. <현실>로 번역하면 <참다운>이란 의미가 결여되는데. 법철학에서와 같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라고 해버리기엔 현실과 참다운 것간에는, 적어도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과 참다운 것 간의 긴장과 모순이 헤겔이 프랑크푸르트에 있을 때 거의 획 돌아버릴 지경까지 몰고 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횔더린은 확 돌아버렸지만 그러나 그렇게 확 돌아버린 상태에서 솟아오르는 횔더린의 말보다 더 깨끗하고 자기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말은 보지 못했다.

[10] 원문 ür sich>를 이렇게 옮겼다.

[11] 원문 . 원문은 이탤릭체로 강조되었다. 이 낱말에 <죽었다>(Er ist verschieden.)라는 소리가 들린다.

[12] 원문 . §2에서 역자주에서 언급한 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거기서는 사유에서 존재의 장으로, 여기서는 존재의 장에서 사유로 전환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13] 원문 . 이런 인식이 껍데기만 보는 천박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14] 원문 . 보통 함께 쓰이는 이 여기에선 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 갖는 수단적이라는 의미를 이렇게 <빌미>로 옮겨보았다.

[15] 원문 <immer>. 여기엔 <항상>이라는 의미보다 on> (아예 처음부터)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있다.

[16] 원문 . 이 갖는 의미의 폭(Bedeutungshof)을 보자면, 우선 동작을 멈춰 산만한 마음을 가다듬고, 부동자세로 눈을 대상에 맞춰 거기에 고정시키고 바라보는 것이다. (클레멘스 브렌타노, 고드비) 그리고 이렇게 하염없이 머물면서 대상에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접하는 사물에 대한 애착이다. (괴테, 파우스트 1).    

[17] 원문 . 여기서도 위와 비슷하게 라는 의미가 강하다.

[18] 원문 einem Anderen>. 여기서다른 것이란  사태와 다른 것보다는 할 줄 모르는 지의 행위를 이해하는 연장선에서 그리고 부정관사와 함께 쓰여졌다는 점에서 어린 아기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매번 지금 자기 손에 쥔 것을 내팽개치고 이 새 것을 향해 팔을 내 뻗치는 행위와 비교해서 이해한 것이다.

[19] 원문 . 시제는 현재인데 버릇이 굳어져 습성이 되어버린 상태를 표현하는 현재형이다.

[20] <아무튼>으로 본문의 삽입구와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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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2

(§2)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철학작품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것이 동일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다른 연구결과와[1]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가운데 이렇다라고 확신하는 것도[2] 철학 외적인 관심을 끌고 들어와 진리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어둡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참다운 것과 그릇된 것은 서로 대립한다는 천박한 생각에 젖어있는데[3], 이와 같은 대립이 사람들의 생각에 뿌리를 내려 견고해지면 철학에 대한 기대는 이원논리로 전락하여 기존의 철학체계를 놓고 찬반으로 갈라지고 기존 철학체계에 관한 설명에서도 찬이냐 반이야 둘 중에 한쪽만을 보려는 자세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차이를 단지 모순으로 생각하는 한  다양한 철학 체계간의 차이를 결코 진리의 점진적인 발전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꽃이 피어남으로써 꽃봉오리는 사라진다. 이것을 보고 위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꽃봉오리가 꽃에 의해서 반증되었다고[4]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5] 열매는 꽃을 식물의 거짓된 존재로[6] 선언하고 스스로 꽃이 차지하던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나열된 형태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간에는 결코 어떠한 타협과 화해가 있을 수 없으므로 공존하지 못하고 완전한 상호배척을 이룬다. 그러나 자연의 흐름을 속성으로 하는 식물은 위의 형태들 간의 상호배척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을 다 유기적인 통일로 이끌어 내어 거기서 한자리[7] 하게 만든다. 이런 통일 안에서는 각 형태들이 서로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모든 형태가 똑 같이 누리는 필연성이 완성되어야 비로서 삶이 완성되고 전체가 숨쉬고 살아있는 것이[8] 된다. 그러나 어떤 철학체계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체계를 제시하는 철학자 자신이 모순을 위에서 이야기된 것과 같이 이해하지 않는 자세로 굳어져 있는가 하면 뭔가를 좀 안다고 하면서 그런 철학작품을 읽는 사람조차[9] 천박하게 사유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10] 그들 역시 모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순을 자신의 편협성에 구속시켜 이해하지 절대 모순을 자기의 편협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유롭게 [운동하는 것으로] 보존할 줄 모르고, 결국 갈등과 대립의 구도로 나타나는 외형에서[11] 서로가 서로에게 필연적인 계기가[12]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 자기[]의 생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 평균적인 생각.

[4] 원문 . <부정>은 존재자의 운동이 갖는 특성을 이야기 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반증>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헤겔이 지적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존재자의 운동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반증>이란 범주에 묶여있다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의 사유에 존재자의 특정인 부정[운동]을 적용하는 것은 뭔가를 헷갈리게 만든다.

[5] 원문 . 여기서는 논쟁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 즉 상대방의 생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헤겔의 사유방식과 관련해서 내다볼 수 있는 것은 생각을 존재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오는 것이다. 본문의 예를 보면 꽃을 통해서 꽃봉오리가 반증되었다는 사유를 존재차원으로 끌고 내려와 사유의 대상, 즉 현존재[Dasein]가 사유의 운동을 실지로 하는 것으로 만든다. 사유의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운동에도 논리가 있다는 점을 엿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내용이 에 들어있다. 이런 시각전환은 본문이 세미콜론으로 [끝나지 않고] 시작하는(!) 점이 이미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헤겔은 여기서 사유에서 존재 차원으로 좀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 같다. 수사학에서나 사용되는 반증방법에 기대어. 일단 그냥 넘어가지만 헤겔한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냐고 엄밀히 따져봐야 할 문제다.

[6] 원문

[7] 원문 .이놈의 는 그림자같이 계속 따라 다닌다. 혹시 자체가 그림자 같은 것은 아닌지...  

[8] 원문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또 소유격인데, 역자는 이 소유격을 동시에 주격적 및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옮겼다. 이와 관련 을 동시에 살아있는 생명과 결과로서의 삶이라는 의미로 옮겼다. 

[9] 원문 . 누군가를 까는 말투인데, 누군지 모르겠다.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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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1

(§1) 글쟁이들은 글을 쓸 때 몸에 베인 버릇처럼[1] 먼저 자기가 의도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글을 쓰게 된 동기와 더불어 그 글이 동일한 대상을 다룬 전시대나 동시대의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가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일을 설명이라고 따로 이름 지어 서설의 말머리에 내놓기 일쑤인데, 그 따위 행위를 철학 하는 데까지 와서 한다면 이것은 부질없는 행위로 보는 걸로 마무리 짓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밀하게 철학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붙들고 그 안에 푹 빠져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놓고 볼 때[2], 위와 같은 행위는 진정[3] 철학의 목적에서 빗나가는 아니 그 목적에 반하는 행위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행위에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는 철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진부하고 천박한] 생각이 아주 우아한 생각으로[4]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천박한 생각이 서설이란 곳에서 등장하여 철학 서술에 알맞다는 내용과 방식을 철학 밖의 관점에서[5] 내놓고 진리에 대하여 우왕좌왕하는 주장과 단언들을 엮어 짜 맞추기 식으로 시대의 경향과 각자의 입장, 즉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과 결론들을 나열하곤[6] 하는데 그 따위 식이 철학적 진리를 서술하는 방법으로 통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몸에 베어 굳어진 생각만이 이런 천박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한몫 하는 것은 다른 학문에서보다 유난히 철학에서 일어나는 사람을 확 사로잡는 광채와 같은 확증인데[7], 무슨 말인가 하면 철학은 본질적으로 특수한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이란 터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목적이나 최종 결과만 손에 쥐고 있으면 쓸데없는 껍데기는 다 제거하고[8] 나아가 사물의 완전무결한 본질만이 고스란히[9] 표현되고, 그에 반해 사물을 전개하는 과정은 여기에 비춰 따져보면[10] 있으나 마나 [11]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철학 외 다른 학문은 이와 대조적이다. 해부학의 경우 관념적인 정의로만[12], 예컨대 <해부학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신체의 각 부분을 생명 없는 물체로 다루어서 얻어낸 지식>이라고 정의하는 것만으로 사태 자체, 즉 해부학의 내용을 완전정복 했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해부학의 내용을 실지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체를 정말[13] 해부해 봐야 한다는 것에 딴말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지적하고 넘어가자면 이와 같이 잡다한 지식을 단지 한곳에 모은 것이지 학문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없는 해부학과 같은 취합물의 경우에도 목적 등과 같은 일반성을 운운하는데, 이때 이런 논의는 보통 눈에 보이는 이 신경, 저 신경, 이 근육, 저 근육 등을 내용 자체로 삼아 그저 나열하는[14] 몰개념적인 방식과 전혀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런데, 해부학의 이런 기술방식을 도입하여 철학을 이러쿵저러쿵하는 식으로 짜맞추고 또 그 목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사태를 전개하는 것이 껍데기일 뿐이라고 주장한 자기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되고 자기가 말하는 목적이 해부학에 대한 정의와 같은 것이 되어 스스로 자기가 사용하는 방식이 진리를 포착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고만다.



[1] 원문

[2] 원문 . 서설 §1 §2 참조

[3] 원문 . 여기서는 ßer Schein>이 아니다. 정반대다. 그래서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4] 원문 . <적절하다> <어울리다>란 의미인데,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 왔으니까> 라는 의미가 스며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의 바른>이란 의미도 된다. 란 낱말의 몸체를 보면 거기엔 (보내다)란 뜻이 스며있다. 외부로부터 어디 안으로 보내다 란 뜻이다. 그래서 <우아하다> <철학 밖의 관점>으로 옮겼다.  

[5] 역자주 4 참조

[6] 원어 . 헤겔은 Historie, historisch 등을 고대 그리스어 가 갖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이야기식으로 나열하는 지식’(Kenntnis, Kunde)이란 의미다.

[7] 원문 . 예수가 승천하면서 내뿜은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광채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 여기서는 <어떤 것을 관념적으로 정의하는 생각>. 이부분 번역이 꼬일 수 있다. 원문의 문장체가 비틀려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überzeugt> 종속절로 보지 않는 오류를 쉽게 범할 있다.

[13] 원문

[14] 원문 역자주 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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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읽기

정신현상학 서설도 서론과 같이 매일 1 문단씩 읽어 내려갈 생각이다. 동시에 서론에서 의문점으로 남았던 것들을 꾸준히 살펴볼 예정이다.

 

서론과 서설의 관계, 정신현상학 전체의 구조 등에 관한 예비적이지만 결론적인 생각들은 지양하고 정신현상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 즉 서론에 대한 이해에 기대어 서설을 읽어 내려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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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6/17

(§16) 의식은 이와 같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두루 거치면서[1]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학문으로 향하는 이 도정 자체가 이미 [학문의 형식을 취하는] 학문이며 그 내용에 푹 빠져 들어가[2] 이름 짖는다면 의식이 하는 경험 속에 스며있는 학문이다[3].

(§17) 의식이 자기를 뛰어넘는 행위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4] 그 개념상 의식이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담아내는 완성된 체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멈출 수가 없고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완성된 체계가 바로 진리가 다스리는 온전한 정신 제국이다[5]. 이 제국은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이렇게 의식이 행하는 모든 경험을 담은 제국이기 때문에 거기서 진리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다. 정신제국을 다스리는 진리의 몸체에는 마디마디마다[6] [의식이 도정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고비마다 의식의 몸체에 새겨지고 또 거기에 매듭지어진] 독특한 형태가[7]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진리의 몸체 마디마디에 새겨진 매듭들은[8] [의식의 구체적인 경험과정을 잘라내 버린 논리학에서 그러듯이] 추상적이고 투명한 [변증법적 운동의] 계기로[9] 나타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의식이 그것과 관계하는 가운데 스스로 등장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정신제국을 온전한 총체로 만드는 대목에는[10] 의식이 고비마다 취한 형태가 [반드시] 있다. 의식은 참다운 모습으로 실존할 때까지 자신에게 거듭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마침내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게 되고 거기에 도달하면 의식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에서[11] 그 옷이 자기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얻어온 낯설은 것이고 아무리 두르고 있어도 그에게는 남의 것으로만 남아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진정 입어야 할 옷은 다른 것인데 하는 부끄러움,  허위의식, 기세 등 먼지 같은 모든 생각을] 털어내 버리고 [자기의 이런 찢긴 모습을 모두 품고서 아무런 허위의식이 없는] 본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12] 의식이 이런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면 의식에 대한 서술 역시 완성되고 드디어 정신이 군림하는 본래적인 학문의 장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의식은 자기의 본질을 두르고, 그리고 이 옷은 절대지가 정말 어떤 것이지 그 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옷이 될 것이다.



[1] 원문 . 여기서 라는 문장에서 쓰여진 와 같은 의미로 번역해야 하겠다. <우리는 시내를 돌아 다녔다.> 그래서 <두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 원문 . 에 스며있는 의미와 관련하여 ou-topia의 블로그에서 <헤겔묘소에서 유럽유태인학살추모공원으로 간 이유> 참조

[3] 원문 .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소유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즉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인지 그 답에 따라서 본문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번역될 수 있겠다. 그 중 <의식이 하는 경험에 대한 학문> <의식이 하는 경험 속에 스며있는 학문>이 대치되고 헤겔이 논하는 내용인 것 같다 (§15의 결론 참조)

[4] 원문 über sich macht>. 여기서 사용된 전치사 <über>가 어렵다. 과는 달리 여기서는 의식이 자신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점이 조명 되었다.

[5] 원문 . 단락은 §5에서 잠깐 내보인 것(Exposition)을 재개하여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과 그에 상응하는 학문이 시작하는 점, 관점을 달리 해서 말하면 의식이 자기 도정을 마치고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에 들어가는 지점을 설명하고 있다. §5에서는 의식의 도정을 서술하는 학문이 ümlichen Gestalt sich bewegende Wissenschaft>인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문과 함께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은 자기 특유의 형태 안에서 온갖 요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제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제국)의 어원은 (풍요로움) (올바름)이란 낱말과 같다. 아무튼, 마르크스의 <자본론>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필연성이 다스리는 제국>(„Reich der Notwendigkeit“) <자유가 다스리는 제국>(„Reich der Freiheit“)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리고 의식 경험의 완전한 체계와 진리가 다스리는 정신제국과의 관계가 <필연성이 다스리는 제국> <자유가 다스리는 제국>간의 그것과 유사하다. 틀린 점이 있다면 자유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려면 <노동시간 단축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6] 원문 . 헤겔의 사용하는 terminus technicus 중에서 알듯하면서도 가장 애매모호한 개념이 다. 변증법적이진 않지만 따로 한번 정리해 보겠다.

[7] 원문 ümliche Bestimmtheit

[8] 원문

[9] 원문

[10] 원문 . 역자는 여기서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파악한다.

[11] 원문 . 서설을 번역할 때 을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다. 그때 가서 자세히 보자. 본문에서 을 <벗다>(ablegen)해서 을 <옷>으로 옮겨 보았다.

[12] 원문 . 이 문단은 좀 고무된 분위기다. 이 분위기를 옮기는데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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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5

(§15) 경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관한 이와 같은 서술의 표면에는 언뜻 보기에 경험에 관한 통례적인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요소가[1] 스며있다. 이 요소는 첫번째 대상과 그에 대한 지에서 두 번째 대상으로 넘어가고 과도에[2] 있다. 사람들은 보통 두 번째 대상을 놓고 경험을 논하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과도란 첫번째 대상에 관한 지, 달리 표현하면 첫번째 Ansich가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필히 두 번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3]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대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은 위에서 서술된 경험과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4].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첫 개념의 비진리성을 경험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가 첫번째 대상과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이 우연히 접하는 전혀 다른, 뜻밖의 대상을 접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런 식의 경험에서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상의 운동에 직시하는 것과 반대로] 뭔가 아예 처음부터 불변의 완결무결한 상태로 있는 것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갖추면 되는 것처럼[5] 보인다. 이와 달리 앞에서 서술된 견해에 따르면 새로운 대상은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식이 전복[6]됨으로써 생성된 과거를 갖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7]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의식이 하는 일련의 경험이 학문적인 발걸음으로 추대될 수 있는데, 사태를 이렇게 고찰하는 것은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첨부하는[8] 것이지 우리가 관조하는 의식이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9] 이런 상황은[10] 사실 위에서 의식에 대한 [학문의] 이 서술과 회의주의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언급한 상황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11] 그때 한말을 상기하자면 참답지 않는 지에서 매번 얻어지는 결과가 모두 공허한 무가 되어서 흔적이 없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무엇의 결과로서의 무로서 그 무엇의 무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를 이렇게 결과로 파악하면 그 결과에는 이전에 행해졌던 지에 스며있는 참다운 것이 보존된다. 의식의 운동에 대한 이런 사연이 여기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처음엔 대상으로 나타나던 것이 대상에 관한 의식의 지로 침강하고,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고[12] 바로 이것이 새로운 대상이 된다는 것이며 이와 함께 또한 새로운 의식 형태가 등장하고 이렇게 새로 등장한 의식에게는 이전 의식에게 본질이 되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의식의 운동을 둘러싼 이런 궤도(軌道)가[13]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의식형태를 빠짐없이, 그리고 각자가 갖는 필연성에 따라서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다[14]. 여기에 회의주의를 서술하면서 이야기 한 것과 다름 점이 딱 하나 있는데[15], 그것은 이와 같은 필연성이[16],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는 것이 의식에게는 전혀 인지되지 않고 그저 숙명적인 우연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필연성은 마치 의식의 등뒤에서만[17] 벌어지는 사건인양 의식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운동에는 자신의 운동을 전혀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 운동을 숙명적으로 이행하는,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18] 알고 있는 면이[19] 스며들어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의식의 운동에는 경험의 와중에 있는 의식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우리만 꿰뚫어 보고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숙명적인[20] 면이 스며들어 있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21]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의 내용은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이며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단지 그 생성운동의 양식,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생성일 뿐이다. 생성된 것이 의식에 대해서는 단지 [그때 그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우리에 대해서는 동시에 운동과 깨쳐나감으로 [22] 존재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Übergang>

[3] 원문

[4] 원문

[5] 원문 ür sich ist>

[6] 원문 . 표현이 좀 불분명하다. 이 의식의 인지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도장을 찍듯이 의식에게 둘러 씌우는 것인지 좀 불분명하다.

[7] 원문 . 발생한 것으로 다시 거꾸로 어쩔 수가 없는 것. 와 유사한 것 같다.

[8] 원문

[9] 그러면 의식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데

[10] 원문 . 가 의식과 의식작용만 포함하는지 아니면 서술하는 학문도 포함하는지 이것이 문제다.

[11] 필자가 보기엔 이것은 단지 헤겔의 주장인 같다. 앞 문단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것이 없다는 주장이 최소한 명쾌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2] §13에서는 war>, §14에서는 ist>에서 이 문단에서는 wird>로 변한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시간성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존재양식은 회의주의에 단계에 빠져있는 의식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학문(헤겔) 스스로 기술하고 있다. 이 미래형을 쓰게 하려고 헤겔은 다방면으로 노력하는데 회의주의가 스스로 수긍할 만은 것이 되는지 모르겠다. 회의주의가 이 미래형을 쓰지 않는 한, 변증법적 운동이 자력으로 전개된다는 주장에 문제제기를 할 수가 있겠다.

[13] 원문 . 이 문단의 논점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그리고 르네상스 비극과 그 이후 비극의 발전형태에 관한 토론과 유사하다. 관련 내용은 Peter Szondi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서 를 어쩔 수 없이 딛고 나아가야 하는 의미가 있는 <궤도>로 옮겨 보았다. 

[14] 문제는 누가 이끌고 가느냐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력으로 아니면 학문이, 아니면 학문과 의식이 합심하여?

[15] 원문

[16] 원문 . 여기서 필연성이란 그리스 비극의 ananke와 유사한 것 같다. 오이디푸스의 전말을 아는 관람자와 합창단만 그가 숙명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을 꿰뚫어 보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알고 피해가려고 해도 숙명이 제시한 길에서 이탈할 수 없다.

[17] §8 상응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불교적인 아니면 관념적인 <피안> 아니라 의식을 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의식을 온전히 알아보려면 그것을 <뒤집어 까야> 한다는 것이다.

[18] 원문 ürunsseins>. 역자는 여기서 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 맞춰 <숙명적인 것>으로 번역하였다. ürunssein>이란 자기의 본성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라나가기만 하는 식물에 있어서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꿰뚫어 보는 우리만 그 숙명적인 본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19] 원문

[20] 원문 ürunssein>

[21] 원문

[22] 원문 . 괴테의 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여기서 은 조동사의 동명사가 아니라 완전동사의 동명사다. 그래서 <무엇이 되어라>라는 의미보다는 방해하는 뭔가를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죽음으로 모든 것을 깨부수고 앞으로 나가라>로 번역될 수가 있겠다. 생명력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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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4

(§14) 이런 운동을 놓고 우리는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  의식이 자기 안에서 운동하는 가운데[2], 지의 운동뿐만 아니라 대상이 하는 운동 안에서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운동이[3], 이런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고 그 대상이 다시 참다운 대상이 되는 정황에 한해서[4], [우리가] 사용하는 경험이라는 낱말이 뜻하는 것의 핵심이다. 의식이 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이렇게 이해되는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바로 앞에서 [§13] 언급한 의식의 과정에서 드러나는[5] 한 면을[6] 끄집어내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면을 아래와 같이 새롭게 조명해 보는 일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가 하는 일인데, 이렇게 조명해 보면 [의식이 하는 운동을 서술하는] 학문이 취하는 입장이 훤해지지 않을까 한다.[7] 조명해 보자.[8] 의식은 뭔가를 안다. 이렇게 의식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이렇게 지에 대해서 불변하는 그 무엇이 다가 아니다[9]. 이 무엇은 또한 의식에 대한 불변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의식이 의미하는] 참다운 것이란 원래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는 의미였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10] 진리가 엇갈리는 것이 된다.[11] 우리가 보기에 이제 의식은 두개의 대상을 갖고 있다. 하나는 [원래적인 의미로서의] 맨 처음의  불변하는 그 무엇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에 대한 그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후자는 회의주의가 서슴없이 말하듯이[12]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분명[13] 보인다. 뭔가를 다시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14] 첫번째 대상이 되었던 불변하는 그 무엇에 관한 지를 자기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인데, 이때 불변하는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던 지의 행위만이 반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렇지 않다. 회의주의가 관념적으로 그러듯이 이때 첫번째 대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15] 변화하여 다가간다. 그래서 이 대상은 더 이상 홀로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된다.[16]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로 귀착된다. 즉,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참다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살펴보면[17] 참다운 것이 본질이 되기 때문에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이제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대상이 바로 첫번째 대상의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바 첫번째 대상을 딛고 올라서면서 얻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1] 원문 .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하고 난 다음 잠깐 멈추고 에 액센트를 주고 계속 읽어나가게 된다. 우리말에서도 말을 하는 도중에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하고 잠깐 멈춰 눈길을 내면으로 돌리고(innehalten),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하여 [의식의] 눈앞에 갖다 놓고(vorstellen) 그 Vorstellung에 부합하는 개념이 떠오르면 말을 계속 이어간다. 그래서 원문은 <그.변증법적인 운동> 정도로 옮겨지겠는데, 이런 <목소리>가 복제될 수 있는가,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질 수 있는가/번역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데리다가 붙들고 싸웠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는 지금까지 살펴본 의식의 운동을 종합해서 표현하는 terminus technicus이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설명하면 대려 설명하는 사람의 엉뚱한 생각이 될 수가 있겠다.

[2] 원문 §12 첫 문장에 등장하는 표현인데, 거기서 살펴보았다. 거기서 했던 추측, 즉 의식이 어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움직인다는, 자기소외운동을 한다는, 그리고 다시 자기로 돌아오는 운동을 한다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런 운동을 문법상 틀린, 그러나 사태에 맞는, 그래서 결국 다시 문법에 맞는 란 표현으로 표현했다고 추측해 보았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있어서 문장을 시작할 때의 <주어>가 문장을 다 끝내고 나면 다른 <주어>가 되어있는 이런 사변적인(spekulativ) 운동이 독어가 지니는 특성이며 또 독일이상주의 특성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주어가 움직이는 운동을 담아내는 논리는 대체 어떤 논리인지 궁금하다.

[3] 지의 운동과 대상의 운동을 통합해서 의식의 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inheit der Einheit und Differenz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4]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에서는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13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an sich> 가 단지 ür es an sich>였다는 과거로 떨어지는 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 있을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완료형이 되어 지나간 것이지만 현재에 결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 이것을 담보하고 있지만 그 <제한적 부정>의 힘이 정말 회의주의 힘을 꺾는 힘이 되는지  헤겔은 보여줘야 한다. <정신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길목길목에 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헤겔이 여기서 이 문제는 보류한다는 느낌을 주는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개연성도 참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때 가서 실지로(ernsthaft) 따져보자.

[5] 원문 . 이 갖는 <표면적>이라는 의미를 <드러나는>으로 옮겼다.

[6] 원문 .

[7] 이 문장은 헤겔이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였는데, 한가지만 집고 넘어가자면 에서 이 주격적 소유격인지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확실하게 해주지 않았다. 헤겔의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을 <아래 서술이 갖는 학문적인 면>으로 번역하면 이 문단과 다음 문단이 아리달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서술을 하는 학문의 입장>으로 옮겼다.

[8] <정신현상학>의 담론적 성격을 살렸다.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이런 담론적 성격 외 독어의 특성이 애로사항이 된다고 역자가 지적한 적이 있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정신현상학>에 무수히 쓰이는 문장기호다.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 damit tritt die Zweitdeutigkeit dieses Wahren ein.> <이중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에 가깝게 <헷갈리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이유는 여기서 사용되는 세미콜론은 본문이 앞의 내용과 물론 관련이 있다고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 뒤에 나오는 내용과 더욱 밀착되어 있고,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앞의 내용과는 거의 단절되는 있는 상태에 가까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의 내용을 따르면 <두개>란 의미가 강하겠지만 뒤에 오는 내용을 따르면 의식의 진리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의 진리가 엇갈린다는 것이 핵심내용이 아닌가 한다.

[12] 원문 <zunächst>. 여기서 줄곧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회의주의이기 때문에 이렇게 옮겨 보았다.

[13] 원문 . §13 에 관한 역자주 참조.

[14] 원문

[15] 의식에게

[16] 원문 ört auf [,] das Ansich zu sein, und wird ihm zu einem solchen, der nur für es das Ansich ist; somit aber ist dann dies: das Für-es-sein dieses Ansich, das Wahre, das heißt aber, dies ist das Wesen, oder sein Gegenstand.>(강조는 역자). 우선 문장체(Textkörper)에 주목하자. 이 문장은 §13에 등장하는 문장 Ansich war, nicht an sich ist, oder dass es nur fuer es an sich war.> [의식을 관조하는] 학문의 입장에서 반복한 것이다. §13의 문장은 물론 의식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문장체에 나타나는 차이는 라는 과거형이 라는 현재형으로 대치된 점이다. <정신현상학>의 문제는 이 차이를 설명하는데, 이 차이를 납득이 가게 전개하는데 있다고 본다. 독어에서 현재형(Präsens)과 과거형(Präteritum)은 현재/과거완료형이나 미래형과는 달리 과거를 상기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그런 시간의식(Tempus-Perspektive)이 없는 시제다. 이런 면에서 양자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는 자기가 속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현재는 접하고 있는 세계를 논의하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Harald Weinrich, 213, 219쪽 참조). 그래서 구체적인 대화나 담론상황을 보면 과거는 이렇게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화자에게 그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에 대한 연기(Aufschub)를 허용하는 반면, 현재는 화자와 피화자가 처해있는 세계를 논하기 때문에 화자건 피화자건 논의된 내용에 자기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의식이 이야기하는 세계와 학문이 논의하는 세계간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서로 평행하게 존속하는데 헤겔은 양문장에서 란 시간의식을 표현하는 동사를 사용해서 두 세계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역자가 지적하고 물고 늘어지는 점은 이것이 억지라는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서론에서 명쾌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겔은 의식이 사용하는 과거형을 고대그리스어의 적인 시제로 이해하는 것 같다. 아오리스트라는 시제는 어떤 사태가 존속하거나 발전하는 최종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하면 <나는 과거 왕이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현재완료적인 의미를 갖고 자기반성과 함께 자지실체와 실재가 눈에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의식은 자기이해에서 반복의 의미를 갖는 <과거형>을 사용하는 것 같다. 이런 과거형을 적용해서 하면 <나는 [이런 저런 시도를 했으나 다른 것이 되지 못하고] 매번 왕으로 머물렀다.>라는 의미가 있다.

[1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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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3

(§13) 의식을 가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1] 개념과 대상, 척도와 잣대질의 대상이 모두 의식 내에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더욱 유의해야 할 점은[2] 양자를 비교하는 본격적인[3] 조사 또한  우리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4]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기자신을 스스로 가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일이란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5] 것뿐이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에 대한 의식임과 동시에 이렇게 참다운 것을 알고 있다는 의식, 즉 이와 같은 [대상에 대한] 지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자가 다 의식의 행위이기[6] 때문에 의식이 하는 이런 행위 자체가 진리와 지를 비교하는 것이 되고 대상에 대한 지와 대상과의 일치여부 역시 의식의 행위 안에서 의식에게 벌어지는[7] 사건이 된다.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고 또 그런 사건만으로 제한한다면[8] 대상은[9] 의식에 대한 대상으로서 단지 의식이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 밖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추궁이 그럴 듯 하다[10]. 왜냐하면, 의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상을 마치 꿰뚫어 보듯이 하여 그 뒷면에 의식행위와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는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아는 대상에는 이렇게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은 무엇을 무엇에 갖다 대보는 식으로,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을 [즉자적인] 대상에[11] 갖다 대보는 식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지의 진위여부를 가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지 않다. 의식이 대상을 안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서 의식에게는 [막연하지만] 뭔가가 [의식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다른 뭔가는 지,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의 존재라는 구별이 주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주어진 구별에 기반하여 비교조사가 진행된다. 이런 비교에서 양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의식은 지를 변경하여 대상에 부합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의 변화는 사실 지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의 변화까지 몰고 온다. 왜냐하면, 주어진 지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관한 지이기 때문이다. 지가 변하면 동시에 대상도 다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면 의식은 자기가 이전에 das Ansich라고 했던 것이 이제 와서 보니 사실 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의식에 대해서 [한때] 불변하는 것으로 있었던 것이었다고 의식하는 새로운 의식이 된다.[12]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의식이 자기의 대상에 자기의 지를 가름해보고 지가 여기에 일치하지 않게 되면 대상 그 자체도 의식의 이런 운동에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조사의 잣대도, 그 잣대를 가지고 조사한 것이 그 조사에서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란 단지 지의 조사에 머무르지 않고 지를 조사하는 잣대의 조사가 되는 것이다.



[1] 원문 를 이렇게 장황하게 옮겼다. 여기서 는 <다되었다>라고 안심하는 마음에 더 유의해야 할 점을 지적하고 다짐하는 대화체 불편화사로 사용되고 있다. 아주 강조된 다.

[2] 역자주 107 참조. 강조된 가 갖는 의미를 <더욱>으로 옮겼다.

[3] 원문

[4] 원문 <überhoben>. (직무에서 물러나다>라는 의미로 옮겼다. <überheben> 의미는 여기서 같은 의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면 <überheben> <überheblich>, 즉 팔장 끼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교만>에 좀 있다.

[5] 원문

[6] 원문 ür dasselbe>. 왜 그냥 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머리 아픈 표현을 계속 쓰는지. ür dasselbe>§8에서 §10 <für sich>와 연계하여 살펴본 적이 있다. 한번 더 엄밀하게 고찰해야 할 문제로 남아있지만 잠정적인 결과로 얻는 <의식의 행위>라는 의미를 그대로 사용해 본다. 

[7] 원문 ür dasselbe>. 여기서 에 주목하자. 미래형이다. 의식이 앞으로 나가고 있다. 정신현상학 서론을 읽고 나서 꼭 따져봐야 할 문제는 의식이 정말 자력으로 앞으로 나아가 정신까지 가느냐의 문제다. 달리 표현하면 정말 정신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 즉 정신의 도움이나 강제가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다. 이점과 관련해서 역자는 지금까지 좀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을 번역할 때마다 강제성이 부여된 <끌려나아감>을 사용하였다. 아니면 이런 것인가.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내 희망의 바탕이 되는 나의 주인이여, 나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지옥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내가 천국을 찾아갈/올 수 있게 여기저기] 당신의 흔적을 남겨둔 주인이여 (O donna in cui la mia speranza vige,/e che soffristi per la mia salute/in Inferno lasciar le tue vestige... 단테, 신곡, 천국편 31)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정신의 도움으로 정신의 경지에 다 올라간 뒤에 마지막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인가. 단테의 신곡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당신의 흔적>이란 표현과 관련해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아내고 따라 갔다는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단테가 베아트리체가 웃는 모습을 단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은 애타는 마음이었고 이런 마음을 죽 간직하고 있었지만 죽어버린 베아트리체의 웃음을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신곡>을 지어서 베아트리체의 웃음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하였다는 재미있는 견해를 내 논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연이 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철학이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8] 원문 를 이렇게 장황하게 옮겼다.

[9] [우리가 학문의 입장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지의 대상과 진리로 구분되지 않고]

[10] 원문 . 은 따로 살펴봐야 할 개념이다. 우선 크게 <근거가 있는 schein>하고 <전혀 근거가 없는 schein>으로 구별하고 지나가겠다. 전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 것이고, 후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겉치레>(bloßer Schein)가 되겠다.

[11] 원문

[12] 원문 nur fuer es an sich war.>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Skeptizismus), 또는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s Bewusstsein)과 관련하여 중요한 대목이다. 지가 이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 외부로부터 첨가되는 것이 없이, 필연적으로 학문이 되는 과정에서 또는 의식이 정신이 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의주의다. 이 문제를 <제한된 부정>을 통해서 해소했다. 학문이 수수방관하는 의식이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가 보여주듯이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역자는 이것을 따지기에 충분한 근거가 여기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für es an sich 였던(war)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an sich 가 für es an sich가 됨과 동시에 다시 an sich가 되어서 새로운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an sich이 아무것도 아닌 오로지 für es an sich밖에 아닌 것으로서 과거로 떨어지는, 즉 공허한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완전한 의식이 갖는 회의주의였고, 불행한 의식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이 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변증법적인 운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식이 되었다는 것을 담보해 주는 이란 동사의 사용의 실재를 역자는 보지 못한다. 아니면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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