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신현상학 서설 §5

(§5) 이렇게 진리가 현존하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의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진리의 학문적 체계만[1] 있을 뿐이다. 내가[2] 목표로 세우고 달려나가는 것은 철학이 바로 이런 학문의 형태에 가까워지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기여하는 것이다[3]. 즉 철학이 겉옷으로 두르고 있는 <지에 대한 사랑>[4]이라는 이름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여 실재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5] 지로 존재하게 하는데 있다. 지가 학문이라는 내적필연성은 지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 내적필연성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으로는 오직 철학[이 해야 하는 일] 그 자체를 서술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없다. 반면, 각 시대의 철학들간의 관계에서는 외적필연성이 작용하는데, 이때 해당 철학자의 우연성과 동기를 사상하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면 외적필연성은 내적필연성과 똑같은 것, 즉 각 시대가 [내적 필연성으로 완성된] 철학[체계] 계기들의 현존형태에[6] 대한 표상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7] 이렇기 때문에 철학이 학문으로 뛰어 올라가려고 하는 발돋움과 욕구가 이 시대에 들어와 만연하고 또 그럴 찰나에 와있다는 점을[8]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철학을 학문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시도를 참으로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런 정당화가 우리 목적의 필연성을 제시하고, 동시에 그 목적을 틀림없이 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원문 . 시스템은 귀가 닳도록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만 우선 <순수이성비판> A832/B860 시작부분에서 칸트가 시스템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고 넘어가자. 여기서 칸트는 시스템을 건축술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단지 인식작용 결과물의 집합에 불과한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 학문의 방법이고, 하나의 [정부와 같이 규범/규제적 역할을 하는] 이념아래 이리저리 갈라지는 지식의 통일(Einheit der mannigfaltigen Kenntnisse unter einer Idee)이라고 한다. 이 이념은 전체의 형식에 관한 이성개념(der Vernunftbegriff von der Form eines Ganzen)으로서 그 이성개념을 통해서 이러 저리 갈라지는 것들의 범위(der Umfang des Mannigfaltigen)각 부분이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 갖는 자리(die Stelle der Teile unter einander)가 선험적으로 규정된다. 이성개념을 통해서 범위가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뭔가를 추가할 수 없고(keine zufällige Hinzusetzung), 완전성에 있어서도 완전성이 애매모호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규정된 한계를 갖는 양으로 나타나고, 또 이성개념을 통해서 부분이 갖는 자리가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은 알려져 있는데 한 부분이 빠져있으면 뭔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가 있다. 그래서 전체는 신체가 마디마디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마디마디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articulatio)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이 아니다(coacervatio). 그래서 전체는 내적 출산(per intussusceptionem)을 통해서 성장하지 외적 추가(per appositum)를 통해서 성장하지 않는다.

[2] 이렇게 헤겔이 스스로 등장하는 것을 보기 힘든 데, 그걸 깨고 여기서 <>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설정한 목적을 끝내 이루겠다는 혈서와 같은 다짐이 엿보인다. 사실 미치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었고. 이 대목을 바울 사도가 필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기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3.12)라고 한 것과 함께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3] 겸손해 보이지만 헤겔이 자기가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스며있다.

[4] 원문 . 의 원어적 의미는 <지에 대한 사랑>이다. 지를 갈망하는 것뿐이지 지에 다다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로스 신을 찬양하는 대회인 플라톤의 <연석술자리>(Symposion) (말이 연석이지 나중엔 사실 난장판이 된 술자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앞 찬양자들과는 달리 에로스 신이 가난의 신(Penia)과 길잡이 신(Poros)의 아들로 지의 경지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철학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한다.

[5] 원문 . 머리 아픈 개념이다. 헤르더(Herder) (Macht) Wirklichkeit und Wirksamkeit(실재적인 영향)라고 하는데, 역자는 여기에 근거하고 철학이 동시대 상황, 특히 정치적인 상황과의 관계에서 어떤 Wirklichkeit를 갖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6] 원문

[7] 원문 헤겔의 내적필연성을 칸트가 이야기 하는 모든 주관적 철학을 평가하는데 사용될 법한 원형과 함께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순이성비판, B866이하 참조).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철학의 학교개념(Schulbegriff)세계개념(Weltbegriff)을 구분한다. 철학의 학교개념은 인식의 논리적인 완전성만 추구하고 목적하는 반면 세계개념모든 인식을 인간이성의 본질적인 목적과 관계하여 탐구하는 학문 (die  Wissenschaft von der Beziehung aller Erkenntnis auf die wesentlichen Zwecke der menschlichen Vernunft (teleologia rationis humanae)이라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이성을 갖고 노는 사람이(Vernunftkünstler) 아니라 인간이성에 고삐를 채워 그가 할일 을 하게 만드는 인간이성의 입법자(Gesetzgeber der menschlichen Vernunft)라고 한다.   

[8] 원문 . 누구의 몫이라는 의미도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하고 안하고는 너에게 달려있다/너의 몫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