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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덧붙이자면 이와 같은 서술이 [즉 정신현상학이] 학문의 제1부를 이루는데, 그 이유는 정신이 현존하는데 있어서 그가 최초에 취하는 모습은 시작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구별이 없는 뭉쳐있는 것으로서[1] 아직 [자신을 전개하고 나서 다시] 자체 내로 복귀한 그런 시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직접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터전은[2] 그래서 [아직 무엇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부정, 다시 말해서 부정된 것을 찾아 나서는 운동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정이 제한으로 나타나는] 규정성[3]이다. 이 점이 학문의 제1부인 <정신현상학>과 다른 곳에서 학문의 제1부라고 하는 것들과 구별되게 하는 점이다. [구별된다고 주장만 할 수 없고] 왜 구별되는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한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몇 가지 고정관념을 논의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34) 이와 같이 본질이 순수한 정신인 것들의 운동이[1] 학문성의 속성을 규정하는 절대적인[2] 것이다. 학문성이란 것을 [어떤 학문 안에서 이야기되는 모든] 내용간의 연관성으로 이해하면, 이 운동은 내용이 유기적인 전체로 필연적으로 확대되어 나아가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에 의해서 지의 개념이 획득되기 때문에 그 도정 역시 필연적이고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3] 생성이다. 그래서 [지금 <정신현상학>이란 이름아래 절대정신으로 나아가지 위하여 취해지는] 이 예비적인 일은 [흔히 이야기되는 철학이 그런 것처럼] 우연성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철학을[4] 방기한 것이다. 이런 철학은 불완전한 의식이 우연히 마주치는 이러저러한 대상, 상황, 또는 사상에 기대거나[5]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우연한 것들과 부딪치는 현실을 피해 관전(觀戰)하는 자세를 취하고] 우왕좌왕하는 논변, 미루어 판단하고 결론 짖기 등의 행위를 하는 가운데 언제나[6] 어떤 특정한 사상을 쥐어짜 얻은 것이[7] 참다운 것의 근거라고 [보란 듯] 제시하려는 짓이다. 그러나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이 도정은, 개념의 운동에 의하여, 세계와 마주하는 의식이[8] 취하는 [앞서 이야기된 우연한 철학이 취하는 의식형태도 차치하지 않고] 모든 형태를 그 필연성에 따라 포괄할 것이다.
(§33) 표상된 것이 이와 같이 순수한 자기의식이 차지하는 재산이[1] 되게 하는 것, 즉 일단 이렇게 보편성이란 것의 경지로 향해 올라가는 것은 교양의 일면일 뿐이지 아직 완성된 교양은 아니다.[2] 무슨 말인지 살펴보자.[3] 고대와 근대의 학문하기에는 근본적인[4] 차이가 있는데 자연적인 의식이 두루 교양을 쌓는[5] 것은 사실 고대에서만 이루어지고 [근대에 들어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대에서는 자연의식이 자신이 처해있는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오지 않고 대려] 그 생활현장을[6] 붙들어 안고 애쓰는 가운데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철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내용을 속속들이 갖춘 충만한[7] 보편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는 추상적인 형식이 이미 마련되어 있어서 개인이 하는 일이란 위와 대조적으로 고작 그것을 찍어 올리는 일일 뿐이다. 추상적인 형식을 쫓아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8] 노력은 이젠 내면에 있는 뭔가를 밑도 끝도 없이 불쑥 꺼내어 놓는 것과 [실재]와 괴리된 보편적인 것을 얼토당토않게 찍어 올려놓는 것이 되었다. 예전에는 보편성이 일상생활의[9] 구체성과 다양성에서 발현되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해야 하는 일은 개인을 그가 헤어나오지 못하는[10] 감각적인 생활양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그를 동시에 사유대상과 사유실체로[11]만들어 [반성하는 주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말라 비틀어진] 고정된 특정 사상에 정신의 힘을 불어넣어 보편적인 것을 실현하는데 있다.[12] 그런데 이와 같은 말라비틀어진[13] 사상에 [정신의] 물이 차게 하는 일이 [경직된] 감각적인 일상생활에 정신이 깃들이게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사상을 규정하는 것은[14] 자아, 즉 부정의 힘, 달리 표현하면 절대적인 현실을[15] 실체로 하고 그것을 터전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로 감각에 따른 규정은[16] 단지 추상적인 직접성, 달리 표현하면 거기 있다는 것 자체 외 다른 것이 없는, 즉 [어쩌다 생긴 자기 나름대로의 힘만 있지 다른] 힘이 없는 직접성을 터전으로 삼는다. [말라 비틀어진] 사상에 [정신의] 물이 차려면 순수한 사유가, 누차 이야기된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직접성이[17], 자기를 [축으로 인식하는데 있어서 어떤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매개운동의] 힘으로[18] 인식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에 대한 절대적인[19] 확신이 자기를 털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털어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20] 이것은 자기를 제거하거나 제쳐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정립의[21] 양극을 이루는 고착관념을[22] 버리는 것이다. 즉, 내용과 분리되고 대립한다는 구체성 외 다른 구체성이 없는 순수한 자아라는 고착관념과 순수사유의 터전에 자리 매김됨으로써 자아의 절대성을[23] 뒷받침하는데 한몫 하는, 내용과 자아가 분리되어 있다는 고착관념을 모두 다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에 의해서 순수한 사상은 비로소 자신의 참다운 모습인 개념이 된다. 개념이란 [한방에 끝나는 운동이 아니라] 거듭하는 자기운동의 [결과이며][24], [한방에 끝나는 원이 아니라] [그때그때 완성을 이루어나가는] 원에 또다시 원을 그리는[25] 운동이다. 이렇게 개념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될 때 순수한 사상은 그의 실체가 본래 그랬듯이 정신적인 본질이 되는 것이다.
[1] 원문
[2]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이야기한 이념을 향해 올라가는 운동(anabasis)과 다시 동굴을 향해 내려가는 운동(katabasis)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3] 원문 <-> 파렌테시즈.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은 <먼저 것을 나중에 이야기하는/hysteron proteron> 수사학적 표현이다.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재체다. 그래서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 파렌테지스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24] 원문
[25] 원문
(§32)[1] 표상을[2] 분석하는 일은 [인식론의 시초자 데카르트가][3] 본격적으로 했던[4] 일인데, 그가 그런 분석을 통하여 지향했던 것은 이미 그때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표상의 형식, 즉 [뭔가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형식을 걷어치워 없애버리는[5] 일이었다[6]. 어떤 표상을 그 근원적인[7] 요소로[8] 분해하는 일이란 표상 안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 그 표상을 지탱하는 축을[9]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최소한 갖춰야만 했던 것은 어디에서인가 주워온[10] 것들과 같이 표상된 것의 내용에 속하고[11] 표상의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축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근성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형식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12] 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런 자기가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고, 이 축은 또 자기가 소유하는 재산의 전반이 되었다.[13]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분석은 [아쉽게도] 다시 단지 알려져 있고, 고정되어 있고, 자족하는[14] 규정뿐인 사상으로 [15]이어졌지만, 하지만 이 분석이 [인식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는데][16] 그 핵심은 이와 같이 [현실계의 다른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 거기서 분리되어 나와[17] [존재의 자기근거를 갖는] 저승세계에서 그림자로 존재하는 혼과 같은 자기라는 것이다.[18] 왜냐하면, 구체적인 <나>는[19]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찢어내어 자신에서 벗어난[20] 현실 저편의 것이 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찢어내는 일을 하는 것이 오성이 발휘하는 힘이고[21] [끊임없이] 진행하는 작업이다. 오성은 이렇게 경이롭기 그지없고 더없이 위대한, 아니 절대적인 강제력이다[22]. 실체로서 모든 요소들을 끌어안아 그 요소들이 그 실체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없고 모든 요소들이 결집된 상태로 자존하는 원은 이런 경이로운 관계를 자아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원은 그를 벗어나려고 하는 [둘레의] 점 하나하나를 다[23] 유지하는 실체로서 바로 알아볼[24]수 있는 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원의 둘레에서 벗어난 일개의 점이 홀로 존재하는 것 마냥, 어쩌다 뚝 떨어진 것이[25], 다시 말해서 [사유 주체로서의 자기가 반듯이 사유에 묶여있듯이] 다른 것에 꽉 묶여있고 다른 것에 기생하여야만[26] 비로서 실재성을 갖는 것이[27] 독자적인 존재와[28] 아무런 구속이 없는[29] 자유를 획득하게 해준다는 데에 부정의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사유, 즉 순수자아의[30] 에너지다. 앞에서 말한 현실 저편의 것을 죽음이라고 하면,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고, 이렇게 두려운 것을 확실히 부둥켜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힘을 요구하는 것인바 부정의 힘보다 더 위대한 힘은 없다. 힘없는 아름다움은 오성을 미워한다. 그 이유는 오성이 힘없는 아름다움이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이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모든 폐허와 겁탈로부터 자신을 지켜 자신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고 죽음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삶이다. 정신이란 어찌해도 다시는 본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까지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 즉 절대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자기를 찾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31] 차지하게 된다. 부정된 것에서는 눈길을 떼는 긍정으로서의 정신이 이 같은 강제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대할 때 흔히 그러하듯,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틀렸다고 함으로써 모든 것을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거기를 떠나 다른 무언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부정된 것에[32] 눈길을 고정하고 들여다볼 때, 다시 말해서 그 곁에 하염없이 머물러[33] 있을 때 정신은 비로소 위와 같은 강제력이 된다. 이와 같은 하염없는 머무름이[34] 사지로 부정된 것을 다시 존재의 터전으로 돌아오게 하는 마력이다.[35] 이 마력이 앞서 [그림자 같은] 주체라고 일컬었던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주체는 이렇게 자기의 터전에서 [부정된 것들이] 규정성을 갖는 내용으로[36] 존재하게 하는 가운데 자기의 추상적인 직접성, 다시 말해서 자기란 것을 찍어 올려 보여 줄 수 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덜 떨어진 직접성을[37] 지양하고 참다운 실체가 된다. 바로 이런 실체가 존재의 터전이 되는데, 이때 존재는 매개운동을 외부에 두는 직접성이 아니라 위에서 이야기된 매개운동을 스스로 하는 직접성이다.
[1] 이 문단은 진보넷 블로거 행인님의 <다시, 당을 희망하며>라는 글과 토론(blog.jinbo.net/hi/?pid=1293)에서 받은 영감에 기초하여 번역한 것이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데카르트가 한 이 일은 단지 <성찰>뿐이었다. 진보는 이런 <걷어치워 없애버리는 작업>을 실천적으로 한다.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12] 원문
[13] 데카르트의
[14] 원문
[15]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이 분석한 3대 요소, 즉 cogito(사유 주체의 행위), res cogitans(사유 주체의 실체), 그리고 res extensa(사유 대상)를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사유 주체인 cogito가 [변증법적] 운동이 없는 자족하는 행위가 되었다.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24] 원문
[25] 원문
[26] 원문
[27] 원문
[28] 원문
[29] 원문
[30] 사유행위 주체인
[31] 원문
[32] 원문
[33] 원문
[34] 원문
[35] 벤야민이 말한 <햇빛을 향하는> 만물의 성질도 생각나는 대목이다.
[36] 원문
[37] 원문
(§31)[1] [대상을 찍어 올려 박제하는 식으로] 확인한 것은[2] 바로 그렇게 겉으로만 접해본 것이기[3] 때문에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4] 아니다. 인식하는데 있어서 무언가를 이미 접해보고 알려진 것으로[5] 전제하거나 또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자신을 속일 뿐만 아니라 남을 기만하는 아주 천박한 행위다. 이러한 지는[6] [앞으로 나아가려고 무지 노력하고] 우왕좌왕하는 온갖 논설을 갖다 대지만 웬일인지 발전은 하나도 없고 제자리걸음만 한다. [이런 지가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모든 것을]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식으로 갈라놓고, 그리고 [이런 구분 안에서] 신이니, 자연이니, 오성이니, 감성이니 하는 것들을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라고 텁석 물어[7] 바탕으로 삼고, 그렇게 갈라놓은 것을 확고한 출발점과 귀착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운동은 고정되어 있는 두 점 사이를 왔다갔다하는데 그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만 뭔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갖게 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파악이나 조사란 각자가 따로따로 하는 일로서 고작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의 표상에서[8] 찾아볼 수 있는지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지 또는 접해본 일이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는지 따져보는 일일 뿐이다.
[1]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헤겔은 항상 누군가를 겨냥하여 말을 이끌어 나가기 때문에 그 대상이 누군가 정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만 정확히 잡히면 이해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단에서는 §30에서 이야기 된 두 가지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30에서 자신을 <보편적인 지>로 알아보지 못하는, <덜 떨어진/unmittelbar>
[7] 원문
[8] 원문
{서설 §30 번역에 앞서서: 서설 §29에서 이야기 된
문제는
정신과
(§30) 이와 같이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이 <자기의식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여기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3]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많지만] 다할 필요는 없다. [특히 힘든 일인] 실존자를 지양하는[4] 운동에는 우리의 노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5] 그러나 [우리가 올라와 있는 경지에서 볼 때] 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뜯어고쳐야[6] 하는 나머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실체로서의 정신이 [자기의식의] 형식을 접해보고 나서 그에 대한 표상을 갖고, 그럼으로써 [자기의식의] 형식을 모두 다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정신의 실체로 환원한 실존자는[7] 위와 같은 최초의 부정을 통해서[8] [자기의식을 모두 다 아는 경지에 올라왔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그가 올라온 경지는] 이제 겨우 <자기>라는 [정신의] 터전에 옮겨졌다는 것 외 아무것도 내 놀 수가 없는[9] 상태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란 터전에 이전함으로써 스스로 취득한] 그의 재산이 되는 것은 실존자에서와 같이 [아직] 그것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직접성과[10] [가치가 살아있는 노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과 같은 식으로] 어디에나 갖다 될 수 있는 부동의 [절대적인] [11] 성질을 갖는다. 위와 같은 식이라면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는 겨우 [Fürsichsein의] 표상으로[12] 이전된 것일 뿐이다. —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가 겨우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확인된[13] 것으로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이[14] 더 이상 취급할 건덕지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은 그것을 더 이상 다루지도 않고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실존자를 이렇게 처분하는 활동이 단지 [덜 떨어진] 특별한, 자신 스스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Fürsichsein으로서의] 정신이 하는 운동이라면, 지는 이와 반대로 특별한 정신의 표상에 대립하는 가운데 생성되는 표상으로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접해본 것이라고[15] 장담하는 [덜 떨어진] [Fürsichsein]에 대립하는 것이다. 지는 이렇게 보편자로서의 자기가 활동하는 것으로서, [이런 보편성이] 바로 사유가 애써[16] 지향하는 것이다.
[1] Paul Celan의 시집
[2] Hans-Dieter Bahr, Die Sprache des Gastes, Eine Metaethik, 1994, 19쪽 참조.
[3] 원문
[4] 원문
[5]
[6] 원문
[7] 원문
[8]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29) 학문이란 이렇게 학문을 형성해 나가는 [의식의] 운동을[1]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속속들이 두루[2] [살펴보고] [각각] 필연성에 따라서 서술하는 가운데 또한[3] 이미 정신의 계기와[4] 재산으로 굳어진 것들이 각기 어떻게 고유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지 서술하는 것이다. 이런 서술이 목적하는 바는 [등장하는 의식으로서의] 정신이 [지에 푹 빠져들어서] 지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지[5] 통찰하는 것이다. 조급한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기위해서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중간단계를[6] 건너 뛰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절대] 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모든 계기가 하나같이 다 필연적이기 때문에 [의식으로서의 정신은] 장구한 도정을, 그 도정이 [끝없이] 길다 하더라도, 인내하며 통과해 나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계기에 접할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운동을 중지하고 그 계기에 [특정한 시간을 할당하지 않고, 거기에 영원히 머무르겠다는 심정으로, 마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자/대상에 푹 빠져들어가 영원히 거기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데는 영원을 투자하겠다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곁에 있으면 끝이 없는, 끝이 안 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루함도 느끼지 않고, 알찬 순간순간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하염없이 머물러야[7] 한다. 왜냐하면, [전체 안에서] 한 계기를 이루는 것을 뚝 떼어내어 따로 놓고 보면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개별적으로 완성된[8]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별적인 형태들을 절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란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영원의 관점아래” 관찰하는 것으로서][9] 이런 관찰이란 계기의 규정성을[10]완성된 형태로, 혹은 [그때그때의 현실에서 완성된 전체를 실현하는] 구체성으로 관찰하는, 달리 표현하면 이와 같은 개별적인 규정이[11] 갖는 특성 안에서 [궁극적인] 전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 이렇게 인내하는 가운데 세계정신은 기나긴 시간 속에서 모든 형식을 하나하나 통과해나가고 세계사의 각 단계에 처할 때마다 거기서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한 자기의 형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속속들이 취하는 엄청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걸머졌다. 이런 노고가 없었다면, 아니 이런 노고에 미달했다면 세계정신은 자신에 대한 의식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올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실체가 정신인 이상, 그리고 세계정신이 위와 같은 노고를 해야만 했다는 사태를 놓고 보면 개인도 세계정신보다 더 작은 노고로는 자신의 실체를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한 시대를 타고나는[12] 개인은 세계정신보다 더 작은 노력만 기울여도 된다. 왜냐하면, 실체로서의 정신이, 개인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념으로[13]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고의 대상이 되는] [개념의] 내용은 [한때의] 실재성이 다시 가능성으로 완전히 침강하고 응집되어[14] [그 한때의] 직접성을 극복한 상태로 나타나 있으며, [개념의] 형태를 보자면 [손 쓸 필요 없이][15] 간소화된 상태인[16] 단순한 사상의 규정으로 이미 보편화되어[17]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타고난 개인에게] 내용이란 이미 사유된 것으로서 [한 시대가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실체의[18] 재산에 속한다. [그래서 개인은] 이제 더 이상 [사유의 내용을 갖추려고] 실존하는 것을[19] 개념의 단순성으로[20],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eidos와 같은] 애당초의 본체가 되든 아니면 실존자[21] 속에 스며들어 있는 [to-ti-en-einai로서의 ousia와 같은] 본질이 되든, 아무튼 [과거의] 실존을 애써 개념의 단순성인 형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없다. [시대를 타고나는 개인이 해야 하는 일은 이제]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을[22] 상기하여 의식의 형태를[23]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뭐 한다는 말인지[24]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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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원문
[9]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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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원문
[24] 원문
(§28) 지금까지는[1] 개인이 교육을 통한 교양을 쌓지않은[2] 상태와 입장에서 벗어나 지를 향하도록 하는 과제가 보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는데, 이것은[3] 보편적인 개인, 즉 자아의식 수준에 와 있는 정신의 형성을[4]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젠[5] [교양을 갖추지 않은] 개인과 보편적인 개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보편적인 개인 안에서는 모든 계기가[6]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온갖 요소들이 [보편적인] 형식을[7] 구체적으로[8] 취하기, 즉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지기[9] 때문이다. [반면] 특수한 개인은[10] 일개의 형태만을 붙잡고 있는 구체성으로서 모자란/부족한 정신이다[11]. 이러한 정신이 현존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눈가리개가 채워진 말처럼 뜻하는 바가 하나밖에 아닌] 일개의 규정성이[12] 삶 전체를 지배하여 [인상에서와 같이 움푹 페인 선명함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규정성들은 오직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일그러진 흔적으로만[13] 남아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고, 이러 저리 흩트려진 상태로[14]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교양을 쌓아가는 정신은 여러 단계를 거쳐 위로 올라가는데] 정신이 올라와 있는 지금단계와 그전 단계를 보면 정신이 낮은 단계에서 향유했던 구체적인 삶이[15] 지금단계에선 [잠재적 기억과 같이] 잠잠한[16] 품위(品位)로[17] 침강되어있는 상태다. 예전엔 모든 정성과 힘을 들여 붙들었던 일이[18] 이젠 겨우 흔적으로 남아있고, 뚜렷했던 그 형태의 이모저모는 [마치 어렴풋한 느낌에 쌓여있듯이] [아무런 식별이 없는] 단순한 그림자가[19] 되어버린 상태다. [특정한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높은 정신의 단계로 계속 올라가는 개인에게는] 바로 그 높은 단계의 정신이 [그런 개인 안에서 태동하는] 실체가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개인에게는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위와 같은 [삶의 진행 속에서 누적된] 과거가 되고, 그는 이런 과거를 더듬어 나아가면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인식하는데], 이는 보다 높은 학문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오래 전에 터득한 예비지식을 다시 한번 더듬어보면서 그 내용을 되살리는 것과 같은 양상을 띤다. 그러나 기억 속으로 침강한 예비지식을 되살린다고 해서 다시 한번 그 예비지식 자체에 푹 빠져들어가[20] 그것을 움켜 안으려고[21]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은 또한 내용면에서도 보편정신이 거쳐간 모든 형성단계를[22] 거슬러 올라가 스스로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이 통과해야 하는 도정은 보편정신이 이미 그때그때 취하고 벗어놓은 단계적인 형태로서 평탄하게 닦아놓은 도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수준을 놓고 보자면 예전 시대엔 성숙한 정신수준에 오른 성인이나 고민했던 것들이 이제 와선 어린아이들에나 어울리는 지식으로, 그들을 훈련시키는 연습용으로, 아니 그들의 심심풀이용으로 침강한 것을 볼 수가 있고, 그리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교육의 진학단계에서[23] 세계 교양의 역사를 그림자의 윤곽을 도려낸 것과 같이 뚜렷하게 알아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신이 과거에 영위했던] 삶을[24] 자신의 소유물로 이미 획득한 보편정신이 [더 높은 정신의 단계로 올라가려는] 개인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실체는 개인에게 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외적인 실체로서 정신은] 개인에게 [사람이 무기적 자연과 유기적 관계, 즉 자연의 산물을 먹고 싸는 관계와 유사한] 무기적 자연과 같은 것이 된다. — 이처럼 내용적인 면에서 교양을 쌓으라고 교육이 다그치는 것은[25] 개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와 같이 널려있는 것을[26] 애써 획득하라는[27] 것이다. 즉 [자신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무기적인 자연을 다 섭취하고 소화하여[28]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부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29] 이런 [개인이 교육을 통해서 교양을 쌓아가는 운동을] 실체로서의 보편정신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실체가 스스로 자아의식을 발동시켜 자신의 [이리저리 갈라지는 외화로서의] 생성과 [이런 외화에서 다시 단순성으로 침강하는] 자기 안으로의 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에 사용되는
[4] 원문
[5] 원문에 사용되는 <->가 시각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이렇게 번역하였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어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23] 원문
[24] 원문
[25] 원문
[26] 원문
[27] 원문
[28] 원문
[29] 원문
(§27) [의식이] 이렇게 학문의 [추상적인] 바탕인 보편성의 경지로 올라오는[1], 달리 표현하면 지의 생성을 서술하는 것이 <정신현상학>이다. 지가 취하는 첫 모습, 달리 표현하면 덜 떨어진[2] 정신이 취하는 모습은 감각적인 의식으로서 정신과 완전히 단절되어[3] 있는 모습이다. [사태가 이렇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이 본래적인 지가 되기 위해서는, 달리 표현하면 의식이 학문이 향유하는 터전인 순수한 개념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위해서는 머나먼 길을 떠나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과 함께] 자신을 챙기고 또 챙기는 노고를[4]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이와 같은 [의식이 스스로 하는 운동인] 생성[을 서술하는 것]은 의식이 취하는 내용과 [이와 함께] 의식 안에서 드러나는 [의식의] 여러 형태를 진행순서에 맞춰 차례차례 정리해놓은 것이 될 터인데, 영리하고 잽싼[5] 혹자는 이것을 비학문적인 의식에 고삐를 채워 학문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쯤으로[6] 생각할 수야 있겠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또 혹자는 [이 서술을] 학문의 초석을 다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학문에게는 [이 서술이][7] 뭔가 좀 다른 것이다. 더구나 학문의 초석을 다진다는 것을[8] 잘못 이해한 나머지 절대적인 지의 출발점을 알아차려 학문에 바로 탑승했다는 신바람에 총알 날리듯 선언을 펑펑 날리면서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조차 없고 이런 총알 같은 선언으로 그런 것들은 이미 다 처리됐다는 식의 신바람은 더욱 아니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일자리에서 직접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가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접두어
[7] 원문
[8] 원문
{인터메쪼 – §26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멈춰 서서 <왜 정신현상학>(Warum der Phaenomenologie)이란 질문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25까지는 정신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이 하는 운동을 마치 엑스레이사진처럼 투영하여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앙상한 뼈만 있고 살과 피, 즉 <생명>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요점은 의식이 스스로 운동하는 <자기운동>을 통해서 <정신>, 즉 <학문>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긴데, 역자에게는 이것이 아직 설득력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정신현상학> 서론 번역에서 지적하였듯이 <관조하는 우리의> 억지가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왜 정신현상학>이란 질문은 사실 <의식이 자기운동을 하는 힘은 어디서>라는 질문이다. 역자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가 § 26이하 [관조하는 우리의] <정신>과 <자아의식>간의 다툼으로 다시 불거진다.-역자}
(§26) 자기와 완전히 다른 타자존재에서 자기를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은 [1] [모든 사물이 에테르[2] 안에서 존재하듯이] 지가 보편자 안에서 존재하는 모습이며, 바로 이것이 학문을 지탱하는 바탕 [3] 및 학문이 자라나는 토지를[4] 이룬다. 철학을 시작하는 마당에서는 자아의식이 이러한 터전에 자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터전은 바로 자기 모습을 갖춘 상태로 나타나지 않고[5] 오로지 그가 생성되어가는 운동을 통해서만 완성되고 자기 투명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시작단계에서의] 보편적인 터전은 아무런 매개작용이 없는[6] 순수한 정신일 뿐이다. — [보편적인 것의 실존 양식인] 이와 같은 단순성이 바로 오직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유의 토지가 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7] 정신이 실존하는 터전이 정신의 실체 전반이 됨으로 정신의 직접성이란 무아경에 빠진 실체와[8] 같은 것이 된다. 이때 반성이라는 것도 역시 단순한 반성일 뿐인데, 이것은 [an sich 와 für sich가 구별되지 않는] 직접성이 [이렇게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홀로 우쭐하는[9] 것이다. 정신의 이런 존재양식은 [아무런 타성이 없는] 자기 안으로만 반성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아무런 타성이 없는 자아의식이 학문의 터전이 된다면] 학문이 자기 곁에 있는 자기의식에게서 바라는 것은 자아의식이 스스로 이와 같은 에테르로 올라온 이유가 학문과 함께 그리고 학문 안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며 사실 그렇기를 바랬다는 것을 깨달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자아의식의 경지에 오른 개인이 학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학문이 서 있는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그의 [자아의식]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들춰 보여달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식이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자아의식의 절대적인 자립성에 기반한다. 자아의식이 소유하는 지의 모든 형태는 이와 같은 절대적 자립성을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학문에 의해서 그 지가 인정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지는 절대적인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직접적인 자기확신, 이런 표현이 선호된다면, [자아의식 안에 있는] 지의 무조건적인 존재양식이다. 이렇게 대상적 사물이 자기와 대립하고 자기는 대상적 사물과 대립한다는 것이 지의 바탕이 된다는 의식이 취하는 입장은 학문이 보기에는 학문과는 전혀 다른 것[10], 즉 의식이 자기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을 상실하는 것이 되는 반면, 의식에게는 학문의 터전이 의식과는 동 떨어져 있는 피안으로써 의식은 학문의 터전에 들어가면 더 이상 [절대존재인] 자아를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의식과 학문 양쪽 모두는 상대방을 진리의 전도된 모습이라고 우길[11]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적인 의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당기는 것이 있어서, 밑도 끝도 없이[12] 자신을 한번 학문에 내던져보리라는 것은 의식이 돌연 머리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선 자세로 걷는 시도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학문에 입문하려면 이런 익숙치 않는 자세를 취하고 그 상태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구속은 아무런 준비가 없는 홀연한 의식에게는 아주 불필요한 폭력으로, 한발 짝 나아가 그것도 부족해 그 폭력을 자행하라는 부당한 요구로 다가온다. — 학문이 자기야 무엇이라고 말하든 혼자서 그러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그러나 학문이 덜 떨어진[13] 자기의식과 관계할 때에는 그것에 상반(相反)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달리 표현하면, 자아의식은 자신에 대한 확신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 원리를 갖기 때문에[14] 학문 밖에 있는 자아의식이 보기에 학문은 비실재성 형태를 갖는다. 이런 까닭에 학문은 학문의 터전을 자기확신으로 나타나는 자아의식과 통일시켜야 한다. 아니 이런 학문의 터전이 자아의식 자체에 속해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떻게 그러한지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학문의 터전과 통일된] 실재성을 갖추지 못한 자기확신으로서의 자아의식은 단지
[1] 원문
헤겔이 이야기하는 <정신>에 대하여 한가지만 살펴보고 지나가자. <철학 개념사 사전/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에서 <정신>에 대한 논문 일부를 맡은 풀다(Fulda)는 헤겔이 1797년까지 칸트주의자였고 그때까지 <정신>을 몽테스키외와 헤르더식으로 이해했다고 지적하고,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게 된 계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횔더린(Hölderlin)과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였다고 한다 (같은 책, 3권 191 f. 참조).
„하나님 나라“(„Reich Gottes“)라는 구호를 다짐하고 헤어진 세 친구 횔더린, 헤겔, 쉘링 사이에는 편지와 만남을 통한 교재가 계속 이루어진다. 그러나 헤겔과 횔더린이 프랑크푸르트에서와 같이 장기간 심도 있게 교재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스위스 베른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말(철학)동무 없이 외롭게 철학 외 경제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법학 등 다방면으로 학문을 쌓아가던 헤겔은 횔더린의 알선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포도주유통업으로 부자가 된 고겔(Gogel)의 가정교사가 되어 1797년 1월 프랑크푸르트로 오게 된다. 당시 횔더린은 1796.1.10 이후 곤타르드(Gondard)란 은행가의 집에서 가정교사(Hofmeister)로 일하고 있었고, „가정교사병“(Hofmeisterkrankheit)에 걸려 집안주인 주제트(Susette)에게 홀딱 반하고, 그런 상태에서 <휘페리온>을 집필하고 있었다.
헤겔이 훨더린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했는가는 그가 횔더린이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권고에 답하는 시 형식의 1796.8 답장에서 엿볼 수가 있다. 횔더린에게 헌사한
주제트와의 연인관계가 소문거리가 되어 횔더린은 결국 곤타르트의 집에서 쫓겨난다. 그 이후 횔더린의 광기는 심해지고 친구들, 특히 신클레어(Sinclair)의 보살핌으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남독 지하혁명세력에 간여하지만, 프랑스 보르도에 가정교사자리가 생겨서 거기까지 걸어갔다 온 이후로는 거의 완전히 미쳐버린다. 역자는 횔더린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횔더린은 자아의식(Selbstbewusstsein)을 <자유의 감옥>으로 이해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아무튼 위에서 언급한 <철학 개념사 사전>에서 풀다는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 Hegel und Hölderlin, in: Hegel im Kontext (1971) 22ff.)와 하넬로레 헤겔(Hannelore Hegel: Isaak von Sinclair zwischen Fichte, Hölerlin und Hegel (1971) 68ff.)을 참조하여 헤겔이 횔더린을 만남으로써 [자아의식의] 자유개념을 모든 현실의식의 바탕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칸트식으로 자기관계(Selbstbeziehung)로만 파악해서는 충분하지 않고 자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Hingabe/헌신“으로 보충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지적한다. 즉, 대립을 빗는 자유의 행위가 (entgegensetzende Tätigkeit) 통일(Vereinigung)이라는 상위원칙으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원문 <Äther>. <파란 하늘>이란 의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cogito ergo sum”과 비교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18] <사랑>의 운동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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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번역해 놓고 보니 여기서 헤겔이 결론을 전제로 삼는 “petitio principii”의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 이것이 오류가 되지 않으려면 “삶”(Leben)이라는 범주가 빠져서는 안될 것 같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지렁이라도 꿈틀거리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conatus”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스피노자의 “conatus”도 한번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