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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30 번역에 앞서서: 서설 §29에서 이야기 된
문제는
정신과
(§30) 이와 같이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이 <자기의식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여기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3]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많지만] 다할 필요는 없다. [특히 힘든 일인] 실존자를 지양하는[4] 운동에는 우리의 노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5] 그러나 [우리가 올라와 있는 경지에서 볼 때] 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뜯어고쳐야[6] 하는 나머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실체로서의 정신이 [자기의식의] 형식을 접해보고 나서 그에 대한 표상을 갖고, 그럼으로써 [자기의식의] 형식을 모두 다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정신의 실체로 환원한 실존자는[7] 위와 같은 최초의 부정을 통해서[8] [자기의식을 모두 다 아는 경지에 올라왔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그가 올라온 경지는] 이제 겨우 <자기>라는 [정신의] 터전에 옮겨졌다는 것 외 아무것도 내 놀 수가 없는[9] 상태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란 터전에 이전함으로써 스스로 취득한] 그의 재산이 되는 것은 실존자에서와 같이 [아직] 그것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직접성과[10] [가치가 살아있는 노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과 같은 식으로] 어디에나 갖다 될 수 있는 부동의 [절대적인] [11] 성질을 갖는다. 위와 같은 식이라면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는 겨우 [Fürsichsein의] 표상으로[12] 이전된 것일 뿐이다. —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가 겨우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확인된[13] 것으로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이[14] 더 이상 취급할 건덕지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은 그것을 더 이상 다루지도 않고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실존자를 이렇게 처분하는 활동이 단지 [덜 떨어진] 특별한, 자신 스스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Fürsichsein으로서의] 정신이 하는 운동이라면, 지는 이와 반대로 특별한 정신의 표상에 대립하는 가운데 생성되는 표상으로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접해본 것이라고[15] 장담하는 [덜 떨어진] [Fürsichsein]에 대립하는 것이다. 지는 이렇게 보편자로서의 자기가 활동하는 것으로서, [이런 보편성이] 바로 사유가 애써[16] 지향하는 것이다.
[1] Paul Celan의 시집
[2] Hans-Dieter Bahr, Die Sprache des Gastes, Eine Metaethik, 1994, 19쪽 참조.
[3] 원문
[4] 원문
[5]
[6] 원문
[7] 원문
[8]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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