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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2

 

(§32)[1] 표상을[2] 분석하는 일은 [인식론의 시초자 데카르트가][3] 본격적으로 했던[4] 일인데, 그가 그런 분석을 통하여 지향했던 것은 이미 그때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표상의 형식, [뭔가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형식을 걷어치워 없애버리는[5] 일이었다[6]. 어떤 표상을 그 근원적인[7] 요소로[8] 분해하는 일이란 표상 안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 그 표상을 지탱하는 축을[9]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최소한 갖춰야만 했던 것은 어디에서인가 주워온[10] 것들과 같이 표상된 것의 내용에 속하고[11] 표상의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축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근성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형식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12] 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런 자기가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고, 이 축은 또 자기가 소유하는 재산의 전반이 되었다.[13]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분석은 [아쉽게도] 다시 단지 알려져 있고, 고정되어 있고, 자족하는[14] 규정뿐인 사상으로 [15]이어졌지만, 하지만 이 분석이 [인식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는데][16] 그 핵심은 이와 같이 [현실계의 다른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 거기서 분리되어 나와[17] [존재의 자기근거를 갖는] 저승세계에서 그림자로 존재하는 혼과 같은 자기라는 것이다.[18] 왜냐하면, 구체적인 <>[19]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찢어내어 자신에서 벗어난[20] 현실 저편의 것이 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찢어내는 일을 하는 것이 오성이 발휘하는 힘이고[21] [끊임없이] 진행하는 작업이다. 오성은 이렇게 경이롭기 그지없고 더없이 위대한, 아니 절대적인 강제력이다[22]. 실체로서 모든 요소들을 끌어안아 그 요소들이 그 실체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없고 모든 요소들이 결집된 상태로 자존하는 원은 이런 경이로운 관계를 자아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원은 그를 벗어나려고 하는 [둘레의] 점 하나하나를 다[23] 유지하는 실체로서 바로 알아볼[24]수 있는 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원의 둘레에서 벗어난 일개의 점이 홀로 존재하는 것 마냥, 어쩌다 뚝 떨어진 것이[25], 다시 말해서 [사유 주체로서의 자기가 반듯이 사유에 묶여있듯이] 다른 것에 꽉 묶여있고 다른 것에 기생하여야만[26] 비로서 실재성을 갖는 것이[27] 독자적인 존재와[28] 아무런 구속이 없는[29] 자유를 획득하게 해준다는 데에 부정의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사유, 즉 순수자아의[30] 에너지다. 앞에서 말한 현실 저편의 것을 죽음이라고 하면,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고, 이렇게 두려운 것을 확실히 부둥켜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힘을 요구하는 것인바 부정의 힘보다 더 위대한 힘은 없다. 힘없는 아름다움은 오성을 미워한다. 그 이유는 오성이 힘없는 아름다움이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이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모든 폐허와 겁탈로부터 자신을 지켜 자신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고 죽음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삶이다. 정신이란 어찌해도 다시는 본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까지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 즉 절대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자기를 찾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31] 차지하게 된다. 부정된 것에서는 눈길을 떼는 긍정으로서의 정신이 이 같은 강제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대할 때 흔히 그러하듯,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틀렸다고 함으로써 모든 것을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거기를 떠나 다른 무언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부정된 것에[32] 눈길을 고정하고 들여다볼 때, 다시 말해서 그 곁에 하염없이 머물러[33] 있을 때 정신은 비로소 위와 같은 강제력이 된다. 이와 같은 하염없는 머무름이[34] 사지로 부정된 것을 다시 존재의 터전으로 돌아오게 하는 마력이다.[35] 이 마력이 앞서 [그림자 같은] 주체라고 일컬었던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주체는 이렇게 자기의 터전에서 [부정된 것들이] 규정성을 갖는 내용으로[36] 존재하게 하는 가운데 자기의 추상적인 직접성, 다시 말해서 자기란 것을 찍어 올려 보여 줄 수 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덜 떨어진 직접성을[37] 지양하고 참다운 실체가 된다. 바로 이런 실체가 존재의 터전이 되는데, 이때 존재는 매개운동을 외부에 두는 직접성이 아니라 위에서 이야기된 매개운동을 스스로 하는 직접성이다.



[1] 이 문단은 진보넷 블로거 행인님의 <다시, 당을 희망하며>라는 글과 토론(blog.jinbo.net/hi/?pid=1293)에서 받은 영감에 기초하여 번역한 것이다.

[2] 원문 . 이 개념을 한번 쭉 훑어 보았으면 한다.

[3] 원문 . <예전에>. 물론 데카르트의 <첫째 철학(=형이상학)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4] 원문

[5] 원문 . 걷어치워 보관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6] 데카르트가 한 이 일은 단지 <성찰>뿐이었다. 진보는 이런 <걷어치워 없애버리는 작업>을 실천적으로 한다.

[7] 원문 ünglich>

[8] 원문

[9] 원문 . 역자가 이해한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의 내용에 기대어 흔히 <계기>로 번역되는 를 여기선 <지탱하는 축>으로 번역해 보았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지탱은 축은 였다.

[10] 원문

[11] 을 사용할 때 보통 <표상된 내용> <표상 자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12] 원문

[13]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된 것을 생각하면서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생각 주체가 하는 행위와 생각을 구분하는 것이다.

[14] 원문 . <움직이지 않는>

[15]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이 분석한 3대 요소, cogito(사유 주체의 행위), res cogitans(사유 주체의 실체), 그리고 res extensa(사유 대상)를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사유 주체인 cogito [변증법적] 운동이 없는 자족하는 행위가 되었다.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 한번 쭉 훑어봐야 할 개념인데 우선 을 라틴어로 번역한 을 다시 독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질과 형식이 혼합된>이란 의미로 쓰여진다고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20] 원문 . 보편자가 되려면 자신의 터전[고향]을 떠나는 것과 함께 자기자신과 작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마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 아닌가 한다.

[21] 원문

[22] 원문 . 베버

[23] 원문 . 여기서는 원의 역학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24] 원문

[25] 원문 . <우연적인 것>인데 라틴 원어 를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어디에 불현듯 자빠져 떨어지다>라는 기본의미에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26] 원문

[27] 원문 Wirkliche>

[28] 원문

[29] 원문

[30] 사유행위 주체인 . 달리 표현하면 사유행위를> 동반하는 그 무엇(conscientia). 사유행위를 동반하는 그 무엇으로 <양심>이란 의미를 갖기도 한다.

[31] 원문

[32] 원문 . 아도르노의 가 울리는 개념이다. <동일>, 즉 논리의 올가미에 묶이지 않는 것으로서 서양철학이 배제한 것. §19 역자주 1, 2 참조.

[33] 원문

[34] 원문

[35] 벤야민이 말한 <햇빛을 향하는> 만물의 성질도 생각나는 대목이다.

[36] 원문

[37] 원문 überhaupt seiende Unmittelbar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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