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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메쪼 – §26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멈춰 서서 <왜 정신현상학>(Warum der Phaenomenologie)이란 질문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25까지는 정신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이 하는 운동을 마치 엑스레이사진처럼 투영하여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앙상한 뼈만 있고 살과 피, 즉 <생명>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요점은 의식이 스스로 운동하는 <자기운동>을 통해서 <정신>, 즉 <학문>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긴데, 역자에게는 이것이 아직 설득력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정신현상학> 서론 번역에서 지적하였듯이 <관조하는 우리의> 억지가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왜 정신현상학>이란 질문은 사실 <의식이 자기운동을 하는 힘은 어디서>라는 질문이다. 역자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가 § 26이하 [관조하는 우리의] <정신>과 <자아의식>간의 다툼으로 다시 불거진다.-역자}
(§26) 자기와 완전히 다른 타자존재에서 자기를 순수하게 인식하는 것은 [1] [모든 사물이 에테르[2] 안에서 존재하듯이] 지가 보편자 안에서 존재하는 모습이며, 바로 이것이 학문을 지탱하는 바탕 [3] 및 학문이 자라나는 토지를[4] 이룬다. 철학을 시작하는 마당에서는 자아의식이 이러한 터전에 자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터전은 바로 자기 모습을 갖춘 상태로 나타나지 않고[5] 오로지 그가 생성되어가는 운동을 통해서만 완성되고 자기 투명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시작단계에서의] 보편적인 터전은 아무런 매개작용이 없는[6] 순수한 정신일 뿐이다. — [보편적인 것의 실존 양식인] 이와 같은 단순성이 바로 오직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유의 토지가 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7] 정신이 실존하는 터전이 정신의 실체 전반이 됨으로 정신의 직접성이란 무아경에 빠진 실체와[8] 같은 것이 된다. 이때 반성이라는 것도 역시 단순한 반성일 뿐인데, 이것은 [an sich 와 für sich가 구별되지 않는] 직접성이 [이렇게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홀로 우쭐하는[9] 것이다. 정신의 이런 존재양식은 [아무런 타성이 없는] 자기 안으로만 반성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아무런 타성이 없는 자아의식이 학문의 터전이 된다면] 학문이 자기 곁에 있는 자기의식에게서 바라는 것은 자아의식이 스스로 이와 같은 에테르로 올라온 이유가 학문과 함께 그리고 학문 안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며 사실 그렇기를 바랬다는 것을 깨달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자아의식의 경지에 오른 개인이 학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학문이 서 있는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그의 [자아의식]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들춰 보여달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식이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자아의식의 절대적인 자립성에 기반한다. 자아의식이 소유하는 지의 모든 형태는 이와 같은 절대적 자립성을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학문에 의해서 그 지가 인정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지는 절대적인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직접적인 자기확신, 이런 표현이 선호된다면, [자아의식 안에 있는] 지의 무조건적인 존재양식이다. 이렇게 대상적 사물이 자기와 대립하고 자기는 대상적 사물과 대립한다는 것이 지의 바탕이 된다는 의식이 취하는 입장은 학문이 보기에는 학문과는 전혀 다른 것[10], 즉 의식이 자기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을 상실하는 것이 되는 반면, 의식에게는 학문의 터전이 의식과는 동 떨어져 있는 피안으로써 의식은 학문의 터전에 들어가면 더 이상 [절대존재인] 자아를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의식과 학문 양쪽 모두는 상대방을 진리의 전도된 모습이라고 우길[11]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적인 의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당기는 것이 있어서, 밑도 끝도 없이[12] 자신을 한번 학문에 내던져보리라는 것은 의식이 돌연 머리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선 자세로 걷는 시도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학문에 입문하려면 이런 익숙치 않는 자세를 취하고 그 상태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구속은 아무런 준비가 없는 홀연한 의식에게는 아주 불필요한 폭력으로, 한발 짝 나아가 그것도 부족해 그 폭력을 자행하라는 부당한 요구로 다가온다. — 학문이 자기야 무엇이라고 말하든 혼자서 그러면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그러나 학문이 덜 떨어진[13] 자기의식과 관계할 때에는 그것에 상반(相反)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달리 표현하면, 자아의식은 자신에 대한 확신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 원리를 갖기 때문에[14] 학문 밖에 있는 자아의식이 보기에 학문은 비실재성 형태를 갖는다. 이런 까닭에 학문은 학문의 터전을 자기확신으로 나타나는 자아의식과 통일시켜야 한다. 아니 이런 학문의 터전이 자아의식 자체에 속해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떻게 그러한지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학문의 터전과 통일된] 실재성을 갖추지 못한 자기확신으로서의 자아의식은 단지
[1] 원문
헤겔이 이야기하는 <정신>에 대하여 한가지만 살펴보고 지나가자. <철학 개념사 사전/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에서 <정신>에 대한 논문 일부를 맡은 풀다(Fulda)는 헤겔이 1797년까지 칸트주의자였고 그때까지 <정신>을 몽테스키외와 헤르더식으로 이해했다고 지적하고,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게 된 계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횔더린(Hölderlin)과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였다고 한다 (같은 책, 3권 191 f. 참조).
„하나님 나라“(„Reich Gottes“)라는 구호를 다짐하고 헤어진 세 친구 횔더린, 헤겔, 쉘링 사이에는 편지와 만남을 통한 교재가 계속 이루어진다. 그러나 헤겔과 횔더린이 프랑크푸르트에서와 같이 장기간 심도 있게 교재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스위스 베른에서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말(철학)동무 없이 외롭게 철학 외 경제학, 정치경제학, 사회학, 법학 등 다방면으로 학문을 쌓아가던 헤겔은 횔더린의 알선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포도주유통업으로 부자가 된 고겔(Gogel)의 가정교사가 되어 1797년 1월 프랑크푸르트로 오게 된다. 당시 횔더린은 1796.1.10 이후 곤타르드(Gondard)란 은행가의 집에서 가정교사(Hofmeister)로 일하고 있었고, „가정교사병“(Hofmeisterkrankheit)에 걸려 집안주인 주제트(Susette)에게 홀딱 반하고, 그런 상태에서 <휘페리온>을 집필하고 있었다.
헤겔이 훨더린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랑했는가는 그가 횔더린이 프랑크푸르트로 오라는 권고에 답하는 시 형식의 1796.8 답장에서 엿볼 수가 있다. 횔더린에게 헌사한
주제트와의 연인관계가 소문거리가 되어 횔더린은 결국 곤타르트의 집에서 쫓겨난다. 그 이후 횔더린의 광기는 심해지고 친구들, 특히 신클레어(Sinclair)의 보살핌으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남독 지하혁명세력에 간여하지만, 프랑스 보르도에 가정교사자리가 생겨서 거기까지 걸어갔다 온 이후로는 거의 완전히 미쳐버린다. 역자는 횔더린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횔더린은 자아의식(Selbstbewusstsein)을 <자유의 감옥>으로 이해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아무튼 위에서 언급한 <철학 개념사 사전>에서 풀다는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 Hegel und Hölderlin, in: Hegel im Kontext (1971) 22ff.)와 하넬로레 헤겔(Hannelore Hegel: Isaak von Sinclair zwischen Fichte, Hölerlin und Hegel (1971) 68ff.)을 참조하여 헤겔이 횔더린을 만남으로써 [자아의식의] 자유개념을 모든 현실의식의 바탕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칸트식으로 자기관계(Selbstbeziehung)로만 파악해서는 충분하지 않고 자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Hingabe/헌신“으로 보충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지적한다. 즉, 대립을 빗는 자유의 행위가 (entgegensetzende Tätigkeit) 통일(Vereinigung)이라는 상위원칙으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원문 <Äther>. <파란 하늘>이란 의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cogito ergo sum”과 비교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18] <사랑>의 운동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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